³о삶"이야기..

어묵 노점상으로 시작해 400평 매장 사장까지

여행가/허기성 2015. 11. 2. 04:40

 

어묵 노점상으로 시작해 400평 매장 사장까지

 

 

양재동에 있는 ‘조우’. 내리막길 왼편으로 난 계단을 서너 개 오른다. 발코니가 먼저 인사를 하는 꽤 분위기 있는 이자카야다. 실내를 훑어보는데 커플 손님이 많다. 단가가 만만치 않겠지! 이런 판단은 오랜 취재 경험에서 비롯된다. 남성 고객 일색이면 주류 매출이 높다. 회식 테이블이 많으면 ‘가성비’가 높다는 소리다. 반면에 커플이 많다는 건 분위기와 요리가 뛰어나다는 증거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20여종 모둠회
입이 쩍 벌어졌다. 홀 매니저의 양 손에 항공모함을 연상케 하는 ‘사시미 모리아와세(모둠 회)’가 들려 있었다. 족히 1m가 넘을 어마어마한 크기다. 바닷가재, 전복, 해삼, 성게, 참치, 연어 등 20여종의 해산물이 각기 다른 접시에 놓여 있다. 뇌가 설득 당하기 시작했다. 얼른 스마트 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으라고 지시한다. 양해를 구하고 15초짜리 동영상을 페이스북 ‘오늘 뭐 먹지’에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날이 가기 전에 70만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동영상을 시청했다. 외식업의 성패는 혀가 아니라 뇌에 있다. 고객의 오감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필패한다. 평균적으로 시각이 맛에 관여하는 비중이 7~8% 정도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체면 불구하고 제철 해산물을 탐닉했다. 성인남자 너덧이 덤벼도 남을 정도의 모둠회가 11만원이다. 손님이 몰려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왜 첫 아이템으로 이자카야를 선택하셨어요?”
호탕하게 웃은 그가 말을 받는다.
“모르셨어요? 이홍구 대표가 이야기 안 하던가요? 저 노점상 출신이에요.”

한 편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1998년 무작정 재래시장을 찾았다. 생존을 위해서였다. 우연히 만난 어묵을 납품하는 도매업체 사장에게 자극을 받았다. 발로 뛰는 건 자신 있었다. 중국집 아르바이트, 학습지 영업 등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로 거리를 누볐던 그이는 아버지에게 뭔가 보여 드리고 싶었다. 마무리가 약한 아들을 못마땅해 하던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어머니에게 200만원을 빌려 150만원짜리 ‘라보’ 트럭을 한 대 구입했다. 나머지 돈으로 반찬용 어묵을 구입했다. 나가기만 하면 팔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거리의 텃세는 무서웠다. 구청 단속반이 아니라 주위의 노점상들이 몰려와 방해를 했다. 전략을 수정했다, 아파트 단지를 공략하기로. 코스도 짰다. 어묵은 매일 사 먹는 재료가 아니니 요일을 정해 돌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첫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지만 눈을 감고 소리쳤단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는 어묵이 왔다고. 당시 20대 노점상은 많지 않았다. 어여삐 봐준 ‘어머니들’ 덕분에 9만원을 벌었다. 꺽다리 총각의 새로운 도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날 배웠다. 딱 하루만 창피하면 된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깨끗하게 보이고 싶어 옷 매무새도 신경 썼다. 어묵의 종류도 늘리고 과감히 시식 행사에 돌입했다. 어육 함량이 많은 비싼 어묵을 꺼내 놓았다. 비록 노점이지만 이미지와 평가를 높이고 싶었다. 당장은 손해지만 반드시 재구매가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고가 제품을 공짜로 내놓으니 아주머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 있으면 더 맛있어 보이는 법, 손님이 인테리어가 되어주었다. 8개월 만에 어묵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 가는 상인들 중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그의 성적이 오르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너도나도 어묵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그의 트럭 옆에도 경쟁자들이 몰려들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들 때문에 매출이 곤두박질 쳤다. 원망만 할 수는 없는 일. 두 번째 아이템을 찾기 위해 서울을 누볐다. 낙성대역 앞에서 갈치 노점을 만나고 무릎을 쳤다. 1박스에 5000원, 1만원 하는 갈치가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걸 눈앞에서 확인했다. 도매상을 가르쳐완강하게 거부하던 아주머니도 그의 집요함에 넘어갔다. 결국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렇게 아이템을 갈치로 바꾸고 원래 아지트로 돌아갔다. 울상이 되어있는 어묵 트럭들 옆에서 갈치를 팔기 시작했다. 돌아온 아주머니 팬들이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단박에 챔피언 벨트를 되찾았다. 당시 20대 월급쟁이들의 두 배 가까운 돈을 매달 챙겼다.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빠 늘 차가운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행복했다. 아니 활활 타오르는 열정과 야심이 목구멍을 타고 몸 속 곳곳으로 퍼졌다.

늘 그렇지만 남자들은 결혼 앞에서 약해진다. ‘타이틀’을 위해 과감히 갈치를 버렸다. 현재 CJ 플레시원의 모태인 킹스유통의 에이전트로 변신했다. 트럭을 모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식자재 유통업체 대표라는 명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용산 지역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식당 관찰에 들어간다. 각 업소에 필요하다 싶은 품목이 있으면 ‘샘플’이라며 제공했다. 물론 사비를 들여 구매한 물품들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며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자 오너들이 하나 둘 넘어왔다. 목돈을 만지게 되자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다. 김종필이라는 이름을 건 외식업체 론칭이었다.

6년간의 시장 조사를 마치고 외식업에 도전한다.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프랜차이즈 업종을 선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해리피아, 독도참치, 미소야를 집중 분석했다. 2000일 가까이 서울 시내를 뒤지다보니 상권은 이미 어느 정도 레이더망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보유 자금 1억2000만원과 은행 대출 1억3000만원을 더했다. 2년째 매물로 나와 있던 서울대학교 동창회관 옆 건물 2층을 계약했다. 임대료가 적은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가짜 참치 파동으로 이미지가 실추되었던 참치를 살리고 싶었다. 결국 독도참치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1만5000원이나 2만원 코스를 주문하면 무한리필이 되는 참치 집. 두 달 동안 영업을 하면서 느낀 게 많았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손님의 요구는 하나로 귀결된다.

“사장님, 좋은 부위 좀 줘 봐유.”

손님들이 선호하는 부위는 결국 원가가 높은 부위였다. 홀에서 정장을 입고 서빙을 도맡아 했다. 손님들의 목소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듣기 위해서다. 당연히 직원이라고 생각한 고객들은 서슴없이 조언과 비판을 했다. 김 대표는 이를 고스란히 영업에 반영했다. 하지만 리필 접시가 나갈 때마다 주방 직원들과 싸워야만 했다. 김종필 대표는 비싼 부위를 내줘라, 주방에서는 그러면 망한다. 하지만 그는 고객의 마인드를 이미 읽은 뒤였다. 한 단계 위의 부위를 서비스로 내면 고객들이 알아채고 고마워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당연히 지갑이 열리고 팁이 나온다. 이걸 반은 직원들에게 주고, 반은 원가에 반영했다. 결국 고객은 자기 돈 주고 사먹으면서도 대접 받는다는 호감을 가지고 돌아갔다. 달라는 그의 부탁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어묵 영업을 접고 ‘갈치 아주머니’를 쫓아다녔다.

어묵·갈치 노점상으로 이름 날려

 


- 이자카야 ‘조우’는 양재동에서 인심이 가장 좋다고 소문난 곳이다. 좋은 사람들과 가볍게 와서 맛있는 해산물 요리와 함께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아지트. 이게 ‘조우’의 콘셉트다.

손님수대로 돈 받지 않는 파격적 영업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손님이 몰려들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손님들의 취향을 뇌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머릿살을 좋아하는지 흰 살을 좋아하는지. 고객과 공감하지 않으면 감동은 없다. 재방문한 고객에게 요구하지도 않은 본인의 선호 부위를 내면 혀를 내둘렀다. 참치는 1차 요리라는 이미지를 깨기 위해 충격적 영업 방식도 도입했다. 2차로 온 손님에게는 무한리필 집이지만 인원수대로 가격을 받지 않았다. 3명이 와도 먹는 양에 따라 2인분 가격만 계산했다. 소문이 퍼지자 6명이 찾아와 3인분만 주문하는 테이블도 많아졌다.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참치는 초저녁 장사라는 편견을 깰 수 있었다. 그 덕에 12시까지 매장을 꽉꽉 채울 수 있었다. 탄력을 받은 김 대표는 양재동에 월 임대료와 관리비만 5000만원이 넘는 400평짜리 매장을 계약한다. 15억원이나 들였지만 망해나간 뷔페 레스토랑을 인수한 것이다. 독도참치 직원들에게는 6개월 동안은 오지 않을 테니 알아서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참치와 수산물에 자신이 생긴 터라 콘셉트도 ‘해산물이 가장 맛있는 뷔페’로 잡았다. 오픈 당일 20여명의 직원들을 모두 조리사 복장으로 입혔다. 50% 할인 행사 쿠폰과 함께 지하철 양재역 출구를 직원들로 도배했다.

그런데 패착이었다.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울려대던 전화기도 4~5시간씩 웨이팅 하던 고객도 행사가 끝나자 일시에 빠져나갔다. 충격은 상당했다. 두 달 반 만에 운영자금을 다 날렸다. 은행대출이 4억원이나 되는 상황에서 당장 직원들에게 줄 급여가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심기일전하고 방문 영업을 시작했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노크하고 쳐들어가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마음이 통했던 모양이다. 당장 하루 버티기가 힘들었는데 8개월 만에 처음으로 7000만원이라는 수익을 올렸다. 그때서야 알았다. 뷔페 레스토랑은 방문 주기가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라는 냉정한 현실을.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는 영광이 남는 법. 이제는 전국에서 광어를 2번째로 많이 쓰는 뷔페라는 명예도 얻었다.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고객들이 고맙고 감사해서 틈만 나면 핑계를 만들어 서비스를 낸다. 어르신을 모시고 오셨으니 참치 가맛살, 생일이니까 와인 한 병, 회사 동료들과 왔으니까 식사 할인권.

양재동에서 인심이 가장 좋다고 소문난 이자카야 ‘조우’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마린쿡에서 워낙 많은 활어를 사용하다보니 제대로 된 이자카야가 만들고 싶어졌다. 좋은 사람들과 가볍게 와서 맛있는 해산물 요리와 함께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아지트. 이게 ‘조우’의 콘셉트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세 가지가 있다. 가족, 음식 그리고 서빙. 일흔이 넘어서도 서빙이 하고 싶다는 그는 매일 가방 속에 나비넥타이를 넣고 다닌다.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