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은 땅에 뿌리를 박고 정주(定住)를 하지만 사람은 발을 가졌다. 발 달린 모든 것은 땅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산다. 걷는다는 것은 육체로 된 삶을 되돌려받는 것이다. 더 많이 자연과 접촉하며 자연과 닿은 감각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쾌락들을 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시골길을 혼자 한나절 이상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걷기는 고독한 행위다. 그 고독은 아무 쓸모없고 보상이 없다. 걷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발바닥은 열기로 화끈거리고 종아리의 근육은 뭉치고 관절들은 쉽게 피로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걷고 난 뒤 피로 속에서도 알 수 없는 몸의 아늑한 느낌과 충만감, 관능적인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걷는 자는 세계를 제 관능 속에서 향유하는 자다. 걷기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려면 혼자 걸어야 한다. 혼자 걸으며 세계의 침묵을 음미해보아야 한다. 대기의 금(琴)을 울리는 바람과 그 소리에 화답하는 풀과 나뭇잎 들의 서걱임 소리. 혼자 걸을 때 자연은 우리에게 말하기보다 듣기의 자질을 더 키우게 한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겸손한 경청자로 다시 태어난다. 물소리, 바람소리, 발이 지면과 닿을 때 나오는 땅의 한숨들, 덤불 속에서 낯선 인기척에 놀라 공중으로 솟구치는 작은 새의 날개짓 소리, 언덕받이에서 풀을 뜯고 있는 검은 염소들의 경망한 울음소리, 어두운 저녁 낯선 마을에 닿을 때 마을 안쪽에서 들려오는 개들이 짖는 소리, 외양간에서 소가 김나는 여물을 저작하는 소리, 간혹 울리는 목에 달린 쇠종 소리… 이 소리들은 도시의 소음과는 본질에서 다르다. 도시의 소음들은 침묵의 파괴자지만 이 소리들은 침묵의 동반자들이다. 그동안 세계는 이런 소리들로 항상 우리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도 귀도 닫은 채 청맹과니처럼 살고 있었던 탓에 이 소리들을 듣지 못한 것이다. 세계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침묵은 임산부와 같이 소리들을 낳는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달빛이 희미한 빛으로 안내하는 시골길을 걸을 때 침묵은 우리를 심오한 영감의 상태로 이끈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다비드 르 브로통)이다.
자동차가 발명된 이래로 사람은 제 다리보다 이 문명의 이기에 도움을 받아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이 속도의 향상으로 잉여의 시간과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근래 들어 사람들이 부쩍 ‘걷기’를 입에 올리고 그 실천에 부지런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도 잃어버린 것의 가치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커진 탓이리라. 제 몸을 쓰지 않고 먼 거리를 이동하는 데 길든 탓에 우리는 몸 쓰는 일에 점점 게을러진다. 그 결과 따로 운동하지 않아도 튼튼했던 다리 근육의 부피가 크게 줄고, 땅에 척추를 수직으로 세우고 사는 일을 버거워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걷기의 부수적 효과인 느림과 풍부한 사유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걷기는 “그 자신의 규모와 치수에 맞는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아울러 걷기는 “인간의 몸과 세상의 몸 사이에 확립된 일종의 공조(共助)를 확인”하는 일인데, 걷기에 태만해짐으로써 몸의 리듬과 조화, 그 모든 걸 잃었다. 둘 사이의 균형 관계 안에서 사람은 걸음으로써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세상 사이의 불균형이 제기하는 위협에 대한 액막이”를 할 수 있었는데, 그 액막이마저 잃은 것이다.
걷기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예기치 않은 만남들, 아울러 돌연한 기후 변화, 즉 돌풍, 폭풍우, 첫눈과 만남을 예비한다. 돌연한 기후 변화는 운명에 대한 예감에 민감해지게 만든다.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지나간 뒤 마차바퀴로 패인 길에는 작은 웅덩이들이 급조된다. 황소의 큼직한 발자국들, 움푹 패인 마차바퀴 자국들에는 탁한 흙물이 괸다. 손바닥만큼 작은 그 웅덩이의 탁한 수면에 파란 하늘과 구름이 떠 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그 작은 웅덩이에 떠 있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덩이를 오래 쳐다보았다.
걷기는 우연의 경험들을 선물로 준다. 어느 핸가, 경기 남단의 높지 않은 산길을 걷고 있을 때 작은 고라니 한 마리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라니를 바라봤다. 뜻밖에 나타난 누군가에 놀란 듯 고라니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찰나였다. 고라니는 본능적으로 내가 그리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천천히 길 위쪽으로 걸어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고라니가 나를 자연의 동료로 맞아준 듯해서 기분이 유쾌해졌다. 고통이 즉자적인 감각이라면 행복도 마찬가지다. 외딴 산길에서 만난 구절초의 꽃잎들, 무당벌레, 맑은 시냇물에 날렵한 몸짓으로 달아나는 물고기들,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들, 누군가 방금 웃자란 풀들을 베어낸 듯 주변에 진동하는 풀냄새… 이런 모든 것은 즉자적인 감각으로 환원한다. 걷기에 태만해짐으로써 우리는 구체적인 세계와의 감각적 교섭이 크게 줄어들었다. 자연은 우리 몸에서 멀어지고 문명의 이기(利器)들과 전자파와 같은 것들이 우리 몸을 더 가깝게 둘러싸며 영향을 미친다. 걷기를 그만둠으로써 우리는 좀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 속으로, 광고나 이미지 같은 헛것의 세계 속으로 더 깊이 밀려들어간다. 걷기의 효과는 즉각적이다. 바로 잃어버린 우리의 자리, 잃어버린 우리의 규모에 맞는 세계를 되돌려준다. 걷기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이다. “이 변환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은 다시금 우리 행성을 측량하는 것, 땅 위를 걷는 것이다. 지구 표면 위에서 몸이 수행하는 이 단순한 움직임으로, 내밀한 공모가 다시금 살아나서 걷는 사람과 자연을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인연으로 묶는다.”
걷기와 사유하기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걷는 동안 우리는 주변을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고 저절로 사유에 빠져든다. 느리게 걸을 때 ‘나’와 세상은 사용과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 속에서 감각적 교섭을 한다. ‘나’의 시선이 자연 속으로 뻗어가고, 자연은 ‘나’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상호교섭에서 사유의 씨앗들이 뿌려지고 이 씨앗들은 발아해서 싹을 내민다. 걷기는 우리를 감싸던 소음과 광란과 발작들을 떼어놓고 침묵과 느림 속에서 사유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한다. 걸을 때 숙고는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우리는 걸으며 “세상에 대한 숙고와 존중을 불러일으키는 이 우아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자연과 이런 관계를 맺을 때, 아름다움과 평온함에 대한 동경은 깊은 만족을 얻는다.”
신체의 이동을 자동차에 의존하는 동안 사람은 걷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잃고, 땅과의 본질적 유대에서도 튕겨져나왔다. 그 결과 우리는 불행에 더 민감해졌다. 육체적으로도 더 부실해져 우리는 쉽게 우울증에 감염되고, 스트레스에도 취약해져 위와 장이 자주 탈이 나곤 한다. 그러나 자동차를 버리고 걸으면 즉각적으로 땅과 사람은 하나로 엮인다. 많이 걸을수록 우리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더욱 단단해진다. 땅과의 본질적 유대 속에서 사람은 “땅의 식물”이라는 제 정체성으로 몸으로 확인받는다.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됨으로써 “누구나 격동의 급류에 빠진 느낌을 받는 이 시대에, 우리는 걷기를 통해 다시금 땅에 뿌리내릴 수 있다.”
철학적 사유는 걷기에서 시작된다. 소요학파는 걷기에서 저희의 철학을 고양시켰다. 철학자들의 시대가 지난 뒤로는 방랑자, 유목민, 장사꾼, 순례자, 걸인들이 지구 위를 줄기차게 걸었다. 걷기는 신이 사람에게 내린 선물이다. 걷기는 근육을 강화시키고 무(無)와 공허 속에서 헤매는 나약한 정신을 굳세게 세운다. 걷기는 생명의 근본됨을 깨닫게 하고, 세계를 몸의 범주 안으로 불러들인다. 걸을 때 불행과 두려움이 작아지고 기쁨과 뜻은 크고 굳세진다면 왜 굳이 걷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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