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그룹 부동산 관리회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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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일요신문>의 최초 보도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몇 년 전부터 전라남도 여수에 부동산을 구입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 회장은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여수시 소라면 궁항마을 인근 임야와 무인도 등을 합쳐 모두 2만 5000여 평의 땅을 매입했다. 2005년 2월 25일 본인 명의로 궁항마을 서쪽 해안과 인접한 임야 6필지 6400평을 사들인 데 이어 지난해 12월 28일에는 이 일대 임야와 무인도를 포함, 모두 8필지 1만 9000여 평을 추가로 사들였다.
이 지역은 여수시청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낚싯꾼들이 가끔씩 지나가는 경우가 있을 뿐 외지인의 발길이 거의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 회장이 구입한 부동산 중에는 마을 앞바다에 있는 9400여 평 규모의 무인도인 모개도가 포함돼 있다.
그런데 이 회장의 부동산 매입 과정에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 숨어있다. 이 회장이 땅을 산 지역에 ‘샘스’라는 낯선 이름의 회사 임원들이 먼저 들어가 토지를 매입했다는 점. 이 회장은 샘스 임원들이 먼저 땅을 사들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로부터 토지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 지역 부동산을 취득했다.
샘스는 과연 어떤 회사이기에 이건희 회장의 부동산 거래에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일까. 샘스는 전국에 산재한 빌딩들의 관리 대행을 위주로 해주는 자산관리 대행업체다. 공식적으로 샘스는 계열관계 등에 있어 현재로는 삼성과 특별한 관련은 없는 회사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이 회사의 본사는 서울 여의도 삼성생명빌딩 16층에 있다. 또 지분 19.49%를 보유한 개인 최대주주 하 아무개 씨는 삼성생명 사회봉사단 소속인 ‘현직 삼성맨’이며 대표이사인 김무현 씨는 삼성생명 상무를 지낸 ‘전직 삼성맨’. 게다가 샘스의 영문표기인 ‘SAMS’는 어딘가 눈에 익다. 바로 삼성(SAMSUNG)의 앞 네 글자를 따온 것이다.
시계를 조금 되돌려 보면 샘스와 삼성의 관계는 더욱 명확해진다. 샘스의 전신은 1988년 삼성생명이 전액 출자해 설립한 동방빌딩관리라는 회사다. 그 뒤 동방생명이 삼성생명으로 이름을 바꾸자 동방빌딩관리 역시 삼성생명서비스로 변신했다. 그러다 지난 2000년 삼성생명은 자회사였던 삼성생명서비스를 계열분리 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삼성생명서비스는 세 개 회사로 분할, 삼성에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샘스였다.
샘스는 삼성생명을 필두로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소유한 막대한 부동산을 관리하며 독립하자마자 일약 부동산서비스업계의 강자로 자리를 잡았다. 결국 샘스는 출발 때부터 삼성과 한 식구였던 셈이다.
다른 재벌들도 비슷하다. LG그룹에는 서브원, 한진그룹에는 정석기업, SK그룹의 아페론, 현대자동차그룹의 해비치 등이 샘스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LG그룹 계열사인 서브원도 흥미롭다. 회사 지분은 ㈜LG에서 100%를 갖고 있다. 대표이사의 자리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구본무 LG그룹 회장. 이 회사는 LG건설(현 GS건설)을 GS그룹 허 씨 일가에게 내준 뒤 건설계열사를 갖지 못하고 있는 LG그룹에서 사실상 유일한 ‘건설 관련’ 회사다.
서브원은 2002년 LG유통(현 GS리테일)에서 분사한 법인이다. 당시 법인명은 LGMRO였고 건물관리가 주력 사업이었다. LG유통에서 30년 남짓 해온 전기 상하수도 엘리베이터 에어컨 통풍장치 등 건물 시설의 유지 및 보수 사업을 해왔다. 언뜻 부동산과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는 듯 보이지만 건설 계열사가 없는 LG그룹에서는 사실상 부동산 관리회사 역할을 맡아오고 있다.
LG그룹은 지난 2004년 GS그룹이 분가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는 신규사업에는 진출하지 않는다’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그룹이 소유한 빌딩과 골프장 사업 등을 방치할 수는 없어 서브원이 그 역할을 맡아오고 있다. 검찰 수사로까지 비화됐던 경기도 광주 곤지암 골프장이 서브원이 관리하고 있는 LG그룹의 대표적인 부동산 목록이다.
검찰은 곤지암 리조트의 특혜 의혹과 관련해 두 차례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당시 검찰은 그룹 고위층 대신 서브원의 간부를 불러 조사를 진행했다. 사실상 곤지암 골프장은 서브원이 총괄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SK그룹에서는 SK디앤디(옛 아페론)가 부동산 관리자 역할을 맡아 오고 있다. SK건설과 최창원 부회장이 지분을 각각 44.98%, 38.76%를 갖고 있는 SK디앤디는 SK건설의 아파트 분양 등 부동산 사업의 시행과 관련된 마케팅은 물론, SK건설이 지은 주택 등의 인테리어사업도 담당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120억 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해 ‘MKS개런티 유한회사’라는 외국기업의 지분 49%를 사들여 눈길을 끌었다. 이 계약이 주목을 끈 이유는 MKS개런티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 금싸라기 땅에 위치한 나산백화점 건물의 소유주이기 때문. 나산백화점 부지 개발이 가시화되면 SK디앤디의 개발 이익과 더불어 SK건설이 일부 시공을 맡는 등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건설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경기도 이천에서 부동산을 사들여 골프장 개발사업을 하고 있는 효성그룹 계열사 두미종합개발은 조석래 회장의 세 아들이 100%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이 회사는 세 형제가 29억 원을 투자해 세웠다. 이후 은행권에서 투자금의 열 배가 넘는 돈을 프로젝트 파이낸싱(PF·사업의 경제성을 담보로 한 대출)해 이 돈으로 세 형제 명의의 땅을 다시 사들인 바 있다.
재계에서 ‘부동산 알부자’로 소문난 태광그룹에서 부동산자산을 관리하는 회사는 태광리얼코라는 곳이다. 이 회사의 경우 얼마 전 제삼자배정 방식의 유상증자를 통해 이호진 회장의 아들이 49% 지분을 확보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회사 지분 전부를 쥐고 있다. 이 회장의 아들은 태광의 또 다른 부동산사업 관련 계열사인 동림관광개발 지분도 갖고 있다.
이밖에 최근 다시 형제간 재산분배를 둘러싼 법정다툼이 일어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진그룹 계열의 정석기업 역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분 25%를 가진 최대주주에 올라있다. 자산가치가 매출 규모에 열 배가 넘는 알짜 기업이며 한진에서 대한항공으로 이어지는 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출발점이다.
또 현대차그룹 계열의 골프장 및 콘도업체인 해비치리조트는 기아차 40%를 포함해 계열사가 80%, 정몽구 그룹 회장의 부인 이정화 씨 등 친족들이 20%의 지분을 직접 갖고 있다. 이 씨는 이 회사의 대표이사를 지냈고 현재 등기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회사들은 SK디앤디가 이름을 바꾼 것과 태광리얼코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그룹 이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명칭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모기업의 후광을 등에 업으려는 다른 계열사들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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