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자산이라는 것이 모으기는 힘들어도 새어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직도 구형 엑센트를 타고 다니며 아이들이 자라 긴 바지가 짧아지면 그것을 칠 부로 잘라 몇 개월이라도 더 입히면서 산다.
◆ 우리는 끊임없는 선택속에 살고 있다.
“종로로 갈까요? 영등포로 갈까요? 차라리 청량리로 갈까요?” 노래처럼 인생은 끊임없이 선택을 하여야 한다.
단순히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의 선택이라면 약간 실수를 해도 상관이 없으나 투자는 다르다. 잘못 선택하면 파산을 할 수도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투자를 하면서 망할 것이라고 결심을 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두가 ‘성공하고 싶다’란 의욕과 바람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의욕만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지식과 경험 그리고 운도 따라야 하는데 이때 배우자와의 궁합이 좋다면 한결 수월해진다.
◆ 재테크에 있어 부부 궁합이 딱딱 맞아야 한다.
“난 돈 한 푼이라도 아끼려 발버둥치는데 툭하면 술을 마시고 카드 영수증을 들고 오냐구!” “내가 번 돈으로 기분 좀 내는 것도 안 되냐.” 이런 부부가 있다면 재테크고 뭐고 없다. 부부 사이가 금이 가서 말이 잘 통하지 않게 될 수도 있으며 술 값 지불로 낭비되는 비용이 다달이 들쭉날쭉해져 올바로 된 예산을 짜는 것조차 어려움이 생긴다. 그러고보면 투자 역시 자신의 몸과 가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수신제가(修身齊家)’부터 선행이 되어야만 한다.
“자기야, 요새 손이 허전한데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만 사줘.”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치는 금물이다. 부부가 같이 아끼고 절제하며 알뜰살뜰 종자돈을 모아 단기와 중장기 계획을 세우면서 투자를 해나가야 한다. 부부는 태어나고 자란 곳은 다르지만 평생의 동지이므로 같은 목표와 마인드가 필요하다.
남편과 같은 일을 종사하는 기혼 여성이 성공을 하는 경우가 많다. 부부간의 강한 공감대와 함께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처럼 투자도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나가면서 배우자와 같이 하여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부동산은 부부의 마음이 잘 맞아야 한다. 어느 대상이든 부부가 함께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중 부동산은 평균 자산의 70% 정도를 차지하는데다 거래에 수반되는 비용이 크므로 부부가 따로 놀아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서로 의견을 교류하며 함께 대상을 선별하고 선택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더 감각이 뛰어난 사람에게 맡기고 옆에서 배우자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존중주어야 한다.
나의 경험을 살펴보자. 내가 결혼을 하던 1994년에 당시 시중 금리는 11~12% 전후였다. 지금은 국민은행과 합병되어 사라진 주택은행과 남편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융자를 합쳐 금리가 평균 5 %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무리 금리가 낮아도 집값의 절반이 부채였다. 그렇기에 돈의 효율성이란 측면에서 ‘만일 이 돈을 다른 곳에 투자를 했다면’이란 가정으로 시뮬레이션을 작성하면서 다른 대상들의 움직임을 관찰해보곤 했다. 그러던 중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류가 무엇이었을까? 그래프를 살펴보면 분홍색선이 나타내는 종합주가 지수는 90년대 중반 하락하고 있으나 반면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상승하는 추세이다. 당시는 강남열풍이 아니라 용인의 수지에 중대형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 개인들에겐 최고의 재테크 수단 중 하나였기에 용인 지역은 거대한 투기장을 방불 시켰고 서울과 대도시의 아파트 가격도 서서히 상승하고 있었다.
당시 모 일간지와 계약을 맺고 독자모니터로도 활동을 했었기에 기사를 검증하기 위한 경제 지표들을 일상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부동산의 움직임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하였다.
1주택자의 양도세 비과세 기간인 3년을 채워 매입 당시의 가격보다 18%정도 상승한 가격으로 97년 7월 아파트를 매도하였다. 아파트 담보 부채를 청산한 뒤 인근의 32평짜리 전세로 옮겼다. 70~80년대를 거치며 집은 무조건 상승하는 대상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진 부모님들에게는 꾸중을 듣기도 했으나 남편이 전폭적으로 내 판단을 믿고 따라주었기에 매도를 할 수 있었다. 그해 연말에 아니나 다를까!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시중의 금리가 큰 폭으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서울의 아파트들은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공실이 났고 주택 가격이 하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90년대 중반, 왜 주가는 하락하고 있었을까?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주가는 경제 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하게 마련이다.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데 따라 초단기 금리인 콜금리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모습에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1996년 회사채 장외 수익률 평균치는 11.9%인데 반해 콜금리 익일물은 일년 평균치가 12.3%인 것을 지금도 통계청 자료에서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다. 1998년이 되어서야 단기 금리가 중장기 금리보다 높아지는 금리 역전 현상이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환율이 700~800원대라 기업들의 수출 채산성도 상당히 취약해 경상수지 적자가 나고 있던 시기였으니 주가가 좋을 리가 만무했다.
단기 금리 역전 현상은 왜 일어나는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장기 금리의 이자가 더 높아야 정상이다. 이 같은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어디선가 부도를 막기 위해 20~30%의 고금리라도 빌려서 길게 생각할 겨를 없이 우선 막고 있는 상황이거나 시중의 불안감이 증폭되어 돈이 조금이라도 불안한 곳으로는 흐르지 않아 자금을 융통하기 어려운 주체가 단기로 돈을 빌리고 있는 상황일 경우에 발생한다.
부동산 역시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경제지표들과 무관할 수 없다. 경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던 당시 용인지역의 이상 열기는 외환위기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마이너스 프리미엄까지 나타나는 상황에서 높은 이자를 감당해야 하는 고통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아 손실을 입었다. IMF 외환위기는 우리 부부에게 부부란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여야 하는 사이란 것을 절실히 느끼게 만들었다.
부부 간의 재테크 궁합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97년 연말 남편이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절친한 회사 동료의 부탁으로 제 3자에게 돈을 빌려 융통을 시켜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대문시장에서 의류상을 하던 처갓집의 사업 실패로 인해 미국으로 도망가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게 말을 했다면 아무리 절친하고 딱해도 남의 돈을 빌려 융통해주는 것은 분명히 막았을 것인데 전혀 몰랐다. 그 동료와 처가 식구들은 여기저기서 돈을 떼먹고 도망갔던지라 소송이 걸렸다. 그러나 가해자들을 잡아올 길이 없어 결국 기소 중지가 되었다.
아무리 믿는 사이라도 보증을 함부로 서면 망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해를 입고도 그 동료는 선량한데 처갓집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동정까지 하던 바보 같은 우리 부부 앞으로 난데없이 법원출두명령서가 날아왔다. oo상호신용금고 측에서 한 번의 사전 연락도 없이 보증을 섰으니 빚을 대신 갚으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 너무나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료의 아내가 처가를 믿고 동대문에서 도망가기 6개월 전부터 의류상을 시작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필요했던 자금 대출의 보증인이 남편이었다. 남편은 대출을 다 갚았다는 말만 믿고 미국으로 도망간 뒤에도 확인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억울해도 법으로 구제를 받을 길은 없었다. 두 번씩이나 나는 그 존재를 전혀 모르던 회사 동료의 빚을 대신 갚았다.
모든 것을 공유하면서 달라졌다. 타인의 부채를 모두 청산하고도 다행히 살고 있던 집의 전세금은 남아있었으니 길바닥에 나앉는 상황으로 몰리지 않는 한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가기로 했다.
그 이후 우리 부부는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공유하고 의논을 해나가면서 노력한 끝에 2000년 1월 힘겹게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두 번째 내 집을 부채 한 푼 없이 매입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볼까봐 맘껏 울지도 못하고 화가 나도 다투지도 못하면서 남의 빚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선명한지라 그 이후도 갈아타기 등을 하면서 부동산 담보 대출을 이용한 적이 없다.
돈이 들고나는 날짜를 맞추지 못할 경우는 부모님이나 친지들에게 이자를 주고 한 보름씩 돈을 융통한 적이 있을 뿐이다. 당시는 IMF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소액을 가지고도 용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투자할 대상이 많았었다. 이 시기에 경매로 성공한 사람, 주식으로 성공한 사람, 창업으로 성공한 사람과 국채 투자로 성공한 사람 등 새로운 부자들이 양산되기 했었다.
채권을 포함해 여기저기 투자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때 돈을 버는 기술만이 아닌 때로는 사람들의 인생 이면에 담긴 고통이나 애환 등을 들으며 인생을 관조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재테크란 부부가 합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주위의 인맥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의 어느 정도 자라면 안정된 환경이 중요하다. 현재는 과거처럼 다양한 대상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라 학교를 다니므로 적어도 사춘기가 끝날 때까지는 기복 없는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큰 변화 없이 안정된 상황에서 조금씩이라도 자산이 꾸준히 늘려 나가는 현재의 모습에 만족한다.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다 실패할 경우도 본의 아니게 생길 수 있으므로 지금은 잠시 한 템포 늦게 가는 것도 아이들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아이들에게 세뱃돈 등 어려서부터 저축해두었던 돈과 용돈을 아껴 투자를 하라고 한달에 10만원씩 불입하도록 가입시켰던 적립식 형태의 인덱스 펀드의 수익률이 70% 에 육박하고 있다.
자신들이 돈을 벌었다며 신기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는 눈물을 걷어내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실에 내 자신과 남편에게 감사하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자산이라는 것이 모으기는 힘들어도 새어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부부는 그간 만들어온 자산의 정도나 직장 내에서의 지위와 상관이 없이 산다. 아직도 95년도에 큰 아이를 낳자 시부모님이 사주었던 엑센트 1.5를 타고 다니며 아이들이 자라 긴 바지가 짧아지면 그것을 칠 부로 잘라 몇 개월이라도 더 입힌다.
공직자와 직업군인이셨던 부모님 밑에서 성장을 한지라 둘 다 어려서는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자랐다. 그러나 첫 번째 집을 부채를 잔뜩 안은 채 매입을 하였었고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었으나 타인에 의해 기복을 겪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들은 탓이다.
만일 배우자와 생각과 행동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이미 결혼을 했는데 배우자가 소비 성향이 높다거나 투자에는 관심조차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럴 경우는 배우자에게 재테크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여 공감대를 끌어내는 노력하여야 한다. 내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노후를 궁핍하게 맞이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재테크의 본질이다.
미래의 경제적인 불안감을 걷어내고 노후까지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고 본다.
유럽 제일의 주식 투자자였다는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한자. “자녀의 교육비와 연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고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자이다. 이것이 선행되어 있으면 부를 증식시키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주식 광만 아니면 된다. 주식 시장에서 잃어도 좋을 만큼 부를 축적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