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여행이라도 떠나면 이런 저런 읽을 거리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했지만, 지긋이 눈을 감을 순 없습니다. 뭐라도 반드시 읽어야 하니까요. 지하철을 탔을 때도, 행여 눈 둘 곳이 없으면 벽광고를 읽거나 노선도를 보고 있지 않나요. 병원이나 은행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순간 역시 그냥 넘기지 못합니다. 뭔지 모를 전문의료잡지라도, 금융상품안내서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죠.
이 정도 수준이면 당신은 활자중독자입니다. 더 나가 맞춤법에 아주 민감해 식당 차림 판에 찌개를 ‘찌게’라고 쓴 걸 보면 화가 버럭 납니다. 시험 전날 밤 쓸데없는 소설을 보다가 날밤을 샌 전력이 있다면 당신의 증상은 더욱 확실합니다.
책과 글을 좋아한다는 건, 좋은 일이죠. 그렇지만 위와 같은 경우는 그저 책을 좋아하는 독서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보고 생각을 곱씹으며 사고의 깊이를 넓고 깊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읽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내용보다 더 중요해진 상황입니다.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즐거움보다는 무엇이든 내 눈앞에 뭔가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절실합니다. 왜 뭔가 눈 앞에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아무런 자극도 없는 상황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극이 들어와야합니다. 볼 게 없으면 MP3로 음악이라도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자극이 너무 많은 지적 처리과정을 요해서도 안됩니다. 복잡한 내용보다는 그저 그 시간을 때울 가벼운 읽을거리가 필요할 뿐입니다. 이 시간만 지나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외부에서 자극이 없다면, 비어있는 마음속에 애써 묻어두었던 여러 가지 기억과 감정이 튀어오릅니다. 문제는 가끔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 죽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감정이 선착순 일번으로 의식표면에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고나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외부자극이 없는 공백상태가 두려워 집니다. 머릿속을 비어놓았다가는 더러운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게 될 테니까요. 역류하는 하수구처럼. 그러니 하찮은 정보라도 메워놓는 것이 낫다고 여기게 됩니다. 공공장소에서 혼자 서있을 때의 뻘쭘함과 서먹함이 주는 긴장감도 더욱더 어디든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활자중독은 마음의 풍요로움에는 솔직히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저 잠깐 눈과 귀로 들어왔다가 바로 빠져 나가는 것들이기에 실제로 마음속에 남아 영양가 있는 지식이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세요. 식당이나 화장실에서 본 읽을거리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그건 그저 당신의 괴로운 감정에 방어막을 친 것 뿐이었습니다.
아침에 운전할 때 라디오를 끄세요. 그저 운전에만 집중하세요. 그러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 것입니다. 그걸 두려워 마세요. 지하철이나 화장실에 갈 때 읽을 거리 대신 ‘쓸 거리’를 가져 가세요. 수첩과 펜을 들고 생각나는 걸 적어보세요. 뭐 그날 해야할 일을 정리해도 좋습니다. 이렇게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묻어두고 싶던 더러운 감정은 엄습해오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활자에 당신의 눈을 의탁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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