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지요. 술이 물처럼 들어가는 순간. 꼴딱꼴딱 온몸 이 술에 젖어가는 줄 모르고 보 낸 밤 다음이면 어김없이 숙취가 찾아옵니다. 해장국이 숙취 해소 에 도움이 되냐고요? 짧은 질문 뒤에 숨은 뜻을 넘겨짚어봅니다. 음식 섭취만으로 부어라 마셔라 한 술의 독성을 이겨낼 수 있는 걸까, 단순히 심 리적 위안은 아닌 걸까, 정도일까요. 알코올중독 전문 다사랑중앙병원 심재종 원장(한방과)에게 물었습니다. 거침없이 "네"라는 답변을 주시네요.
"숙취의 원인은 수분 부족, 전해질의 부족, 아세트알데하이드라는 독성 물질의 잔류 때문입니다. 해장국을 먹으면 수분 성분이 자연스레 탈수 현상을 막아줍 니다. 전해질, 그러니까 미네랄이라든가 각종 물질은 음식을 통해 보충할 수 있 지요. 선지에는 철분이나 단백질이, 북어에는 간을 보호하는 아미노산이 많이 들어 있어요. 알코올의 독성 물질을 빠지게 하려면 간의 활동을 원활하게 해야 하는데, 음식을 먹음으로써 간 효소의 분비를 돕습니다. 먹다보면 땀을 흘리는 데, 이를 통해 나쁜 물질이 배출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 고 뜨끈한 해장국을 마시는 일은 수분과 영양소를 보충하고, 노폐물을 배출하 는 종합 행위인 셈입니다.
심재종 원장은 체질에 따른 숙취법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태양인은 소변 배출 이 원활하지 않으면 질병이 생길 수 있으므로 물이나 음료수로 수분을 충분히 보충하고 배출해줘야 한답니다. 태음인은 땀을 내면 좋으므로 심장이나 혈관 질 환이 없다면 가벼운 사우나를 하는 것도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네요. 사우나 에서 땀을 빼기 전 이를 닦고 머리를 감는 등 씻는 행위 또한 술을 깨는 데 도움 이 됩니다. 머리를 감으며 머리에 있는 혈자리를 자극하고, 혈액이 많이 몰린 관 절을 움직여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면 술 깨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합니다. 소 양인은 변비가 생기면 문제가 되므로 안주부터 채소나 과일을 먹는 게 도움이 되고, 소음인은 몸이 차가워지지 않게 생강차·대추차·인삼차로 수분을 보충하 라고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술 마신 다음날 마시는 해장술은 숙취에 절대 도움 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해장술은 일종의 마취 효과로 일시적으로 숙취를 못 느끼게 하지만 결국엔 불난 데 기름 붓는 격이라고 합니다.
자료를 찾다가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1969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남편을 장 수시키는 길'이라는 기사입니다. 세 번째로 연재된 주제가 '해장국'이었습니다. 일부를 옮겨봅니다. "먹으면 몸에 해롭다는 메틸알코올이 국산 술에 섞였다고 해서 말썽이 나고 있지만 그런 경고쯤 술꾼에게 음주 브레이크가 되지는 않는 듯"(그때나 지금이나…). "자칭 '사내다운' 술꾼 남편을 다른 음식으로 해독시키 는 것만이 착한 아내에게 남겨진 일이 아닐지"(응?). 그리고 해장국과 해장술의 효과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신 원장님의 설명과 조금 다르네요. "술이 일으킨 갈증을 해장국이 풀어주고 반주로 드는 해장술 한 잔은 열량을 공급해서 에너 지를 생산해준다"(보릿고개 시절엔 술이 밥?). 어쨌든 당시 기사에서도 북엇국, 김칫국, 달걀국을 먹는 것이 해장에 도움이 된다고 추천합니다.
술로 인해 쓰린 창자를 푸는 국이라는 뜻의 '해정갱'에서 유래한 해장국. 잡뼈에 우거지, 배추속대를 넣어 푹푹 끓여내고 선지를 숭덩숭덩 잘라 넣어 후루룩 밥 말아 먹는 그 맛은 쓰라린 속에 뜨듯한 온기를 불어넣으며 밤새 고생한 심신을 북돋운다. 술꾼들의 둘도 없는 단짝, 해장국 이야기.
◆ 해정갱에서 해장국으로
직장인들로 붐비는 대도시의 뒷골목은 숙취에 퍽퍽해진 얼굴을 하고 해장길에 나선 무리들로 북적인다. 흔히 해장국의 '해장'은 내장을 풀어준다는 의미의 해장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숙취로 혼미해진 정신을 풀어준다는 '해정'에 국의 옛말인 '갱'이 붙은 '해정갱'이 '해장국' 으로 말이 바뀌어 전달되면서 '해장'이라는 말이 새로 생겨났다. 그것이 '해정갱'이든 '해장국'이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술로 탁해진 정신과 속을 풀기 위한 국을 즐겨 먹었는데 조선 시대 풍속화가 신윤복의 < 주막도 > 에는 해장국이 끓고 있는 솥에서 국자로 국을 뜨는 주모와 뜨끈한 국으로 속 풀러 온 한량들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속풀이용 '해장국'의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술로 상한 속을 푸는 방법을 고심하는 것은 같았는지, 술을 깨는 민간요법이 다양하게 존재했는데 고려 말의 중국어 회화 교본 < 노걸대 > 에서는 '육즙에 정육을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넣고 천초가루와 파를 넣어 끓이는 국을 술 깰 성에 술 주 자를 넣어 술 깨는 국이라는 의미의 성주탕'이라 하였고 조선 시대에 나온 시집 < 해동죽지 > 에는 '소갈비와 해삼, 전복,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버섯' 등을 초장에 섞어 종일 푹 고는 해장국이 기록되어 있다.
◆ 나무꾼의 새벽 요기가 술꾼의 해장국으로
소의 잡뼈를 푹 고은 국물에 된장을 풀고 우거지나 콩나물, 파 등의 채소에 선지를 넣어 밥과 함께 끓인 토장국 스타일의 서울식 해장국은 근대에 와서 생겨났다. 19세기 후반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그 주위에 외국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모여 소고기의 소비가 많아졌고 안심과 등심 등을 제외한 내장, 잡고기, 뼈 등이 남게 되자 인근 식당에서 이것을 이용하여 국을 끓이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이지만 뼈를 고은 국물로 영양도 풍부하고 푸짐한 데다 맛이 좋고 후루룩 말아 빨리 먹을 수 있으니 노동자들의 기운 내는 끼니로 이만한 것이 없었다.
이 국의 인기는 곧 서울로도 퍼졌고 주로 술을 파는 집에서 밤새 솥에 고아 새벽에 팔았기에 '술국'으로 불렸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노동자나 밤을 새고 서울로 들어오는 나무장수, 채소장수의 허한 속을 든든히 채워주려 새벽부터 문을 열어 장사하던 국밥집. 그러던 것이 밤새 술을 마신 노상 술꾼들이 깔깔한 입맛에 넘어가지 않는 밥을 말아 먹으려고 오기 시작하며 술로 상한 속도 풀고 영양까지 든든하게 보해주는 '효험'을 높이 사서 해장용으로 알려지며 '해장국'이 되었다. 종로의 청진동 뒷골목은 한때 '해장국 골목'으로 불렸는데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이간난' 씨가 나무 시장이 들어선 종로구청 옆자리에 나무꾼들을 상대로 '평화관'이라는 국밥을 차린 것이 장사가 잘되었고 그 일대의 술꾼들이 모여들어 골목 여기저기에 해장국을 한 솥 가득 내걸고 파는 집이 늘어났다.
◆ 씁쓸 시큼한 서울식 해장국
서울의 해장국은 씁쓸하고 시큼한 여운의 뒷맛이 특징이다. 가난하던 시절 맛없게 담가져 쓸모없게 된 집된장을 국밥집에서 싼 가격에 사서 사용했기 때문에 쓴맛이 났다. 처음에는 잡뼈 고은 육수에 된장을 풀고 배추 우거지나 콩나물 등 싼값에 구할 수 있는 채소만을 넣어 끓이는 것이 다였지만 여기에 저렴한 가격에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선지와 내장을 넣어 팔기 시작했다. 선지에는 철분과 단백질이 풍부하고 삶으면 탱글탱글하면서도 차진 식감이 일품이라 곧 선지를 넣은 것이 서울식 해장국으로 굳어졌다. 선지를 넣은 해장국이 대중적으로 퍼지면서 도축장이 있어 신선한 선지를 구하기 좋은 마장동, 왕십리 지역도 해장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저렴한 가격에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맛과 영양도 훌륭한 해장국이 '해장' 용으로만 팔리는 것은 아니었다. 개화기의 재미있는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조풍연의 < 서울잡학사전 > 에는 술국에 관련된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해장국집에 매일처럼 드나드는 단골들에게는 그만의 특전이 있었는데 자신만 사용 가능한 뚝배기를 맡겨놓고 밥만 싸가지고 와 뚝배기에 밥을 담아 주인에게 건네면 그 자리에서 국을 더해 국말이로 내주었다. 이러한 '자가용 뚝배기'가 많은 집일수록 장사가 잘되는 유명한 집이라는 증거였다. 해장국물에 찬밥만 토렴해 파는 저렴한 버전의 해장국은 아침 일찍부터 등교하는 가난한 학생들의 고마운 아침 끼니가 되었다. 푸짐한 해장국은 술꾼들의 안주가 되기도 하였는데 해장을 하며 해장술을 마시는 것이 주당들의 관례였다. 재미있는 것은 '주불쌍배'라 하여 술은 홀수로 마셔야 하는 법도가 해장국에서는 두 잔을 법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 동지섣달 길고 추운 밤 지낸 빈창자에 술국밥 말아 먹는 맛_ 효종갱과 양골탕
어렵던 시절 소의 잡뼈를 넣어 끓인 해장국보다 조금 더 고급 버전의 해장국으로는 양지머리뼈를 고아 끓인 '양골국'이 있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은 "양골국은 양지머리의 살을 긁고 뼈만 남은 등성이를 물에 씻어 밤새도록 고아놓는다. 그 국물에 된장을 풀고 다시 우거지를 넣어서 푹 삶는다. 우거지에 양골 기름이 배고 양골에 푸성귀가 어울려서 기막힌 진미가 된다. 동지섣달 긴 추운 밤을 지내다가 새벽이 찾아와서 일을 하러 직장으로 나갈 때에 찬밥 한 덩어리를 들고 양골국 끓이는 술집으로 찾아가서 약주 술 두서너 잔에 양골로 안주를 하고 밤 지낸 빈창자에 술국밥을 말아 먹는 맛이란 천하의 행복을 독차지한 성싶다."며 그 맛을 칭송했다. 양반가에서 즐겨 먹는 호사스러운 해장국도 있었다.
개화기 때 새벽녘의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종이 울려 퍼지면 사대문 안의 대갓집으로 배달되는 국이라 해, 새벽 효에 쇠북 종, 국 갱 자를 써 '효종갱'이라 이름 붙은 그 것이다. 최영년의 < 해동죽지 > 에는 '광주 성내 사람들이 잘 끓인다.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 표고, 소갈비, 해삼, 전복에 토장을 풀어 온종일 푹 곤다. 밤에 이 국 항아리를 솜에 싸서 서울로 보내면 새벽종이 울릴 무렵에 재상의 집에 도착한다. 국 항아리가 그때까지 따뜻하고 해장에 더없이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 성내는 남한산성 일대로, 갖은 귀한 재료를 넣고 끓인 보양 국물을 남한산성에서 서울 사대문 안까지 배달했다니 실로 호사스러운 해장국이다. 차도 보온병도 없던 시절에 솜으로 고이 싸서 4시간에 걸쳐 짐꾼이 싸 들고 배달한 효종갱은 속풀이에 더 없이 좋고 그 맛도 일품이라 효종갱을 맛있게 먹기 위해 부러 밤새 술을 마시는 사대부들도 있을 정도였다.
◆ 청진동 해장국 골목의 산 역사 [청진옥]
1937년 종로구청 앞 나무시장에서 나무꾼들을 상대로 국을 팔면서 시작된 청진옥. 당시에는 해장국이 아니라 술국이나 국밥으로 불렸다. 할아버지가 시작한 것을 지금은 손자가 물려받아 운영하는데 청진동 골목과 피맛골 일대가 재개발로 헐리면서 인근의 큰 빌딩에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지금도 무쇠 가마솥에 푹푹 끓여내는 방식은 처음과 똑같지만 옛날 못 먹던 시절에는 잡뼈 위주로만 국물을 냈다면 조금 더 좋은 부위에 재료도 풍부히 더한 깊은 맛이 '지금 입맛'에도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 전에는 우거지 위주였다면 지금은 12시간 이상 뼈를 고은 국물에 배추를 통으로 넣고 1시간가량 더 끓여 국물에서 깊은 맛이 나게 하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국물을 내는 데는 잡뼈 외에 양지머리 고기도 들어가는데 3시간가량 국물을 내고 남은 양지는 따로 건져 살을 골라내 '따귀'라는 메뉴로 술꾼들의 안주로 내어진다.
청진동의 해장국 골목은 1970년대가 그 전성기로 좁은 골목길에 해장국집만 16군데에 이르렀을 정도이다.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는 지금의 사장은 할머니가 웅크리고 앉아 손님들과 말을 주고받던 가게 한쪽의 온돌을 떠올린다. "당시에는 가게랑 살림집이 붙어 있었어요. 그래서 밤새 국물을 고았고 해도 뜨기 직전에 배를 채우러 오는 손님들을 상대하곤 했지요." 지금은 아침 먹는 이들이 줄어들고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아침 먹으러 오는 이들보다 점심에 해장하러 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주말에는 3대에 걸친 가족이 외식하러 오는 경우도 많은데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똑같은 옛 추억을 가진 이들이다. "아직도 할머니는 어디 갔냐고 물어보시는 이들도 있어요." 나이 지긋한 분 중에는 최근의 자극적이고 매운 해장국이 아닌 된장으로 밑간한 슴슴한 해장국만을 고집하는 이들이 많다. 근처에서 학교를 졸업한 동기들이 항상 배고프던 학창 시절을 추억하러 오기도 하고 이곳에서 해장국을 먹으며 데이트하던 커플이 결혼해 아기를 낳으러 가는 와중에 허겁지겁 들러 싸 가는 일도 있다. 처음 문을 연 이래 세상이 변하고 그에 따라 자리도 옮겼지만 청진옥이 아직도 해장국의 절대 강자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은 쓰린 속을 뜨듯하게 감싸 안는 그 맛과 추억을 여전히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 탱글탱글한 찰선지의 참맛 [대중옥]
서울 중심부에 청진옥이 있었다면 동북쪽 왕십리에는 대중옥이 그 이름을 떨쳤다. 이 일대는 도축장이 있어 신선한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고깃집이 많았고 해장국집과 소머리국밥집도 성행했다. 특히 신선도가 생명인 선지가 들어가는 해장국이 유명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했던 곳이 60년 전통의 대중옥이다. 왕십리 일대에 많은 단골이 있던 곳이지만 이 지역에 뉴타운 개발로 건물이 헐리며 작년에 지금의 강남 자리로 이사했다.
대중옥은 특히 소의 피에 물 대신 막걸리를 넣어 굳힌 '찰선지'로 유명하다. 물 대신 막걸리를 넣으면 선지가 더 많이 부풀어 올라 공기구멍이 많이 생기고 그만큼 차진 식감이 생길 뿐더러 쉽게 으스러지지 않아 탱글탱글하고 탄탄하다. 피와 막걸리, 피와 물을 섞는 비율에 따라 선지의 농도와 부드러움이 달라지는데 예전에는 1:1로 넣던 것을 지금은 너무 진한 향을 꺼려하는 입맛을 고려해 전보다 묽게 만든다. 그 때문에 나이 지긋한 분 중에는 가끔 전에 그 맛이 안 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콩나물이나 고춧가루 없이 오로지 배춧잎 겉대와 선지만을 넣어 된장으로 맛을 내 끓이는 것은 처음과 같고 사골 잡뼈는 더 좋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청진동이 콩나물을 푸짐히 넣는 스타일이라면 왕십리는 선지의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기는 선지 중심 스타일이다. 왕십리 일대에서도 대중옥이 인기를 끈 이유는 찰선지 외에도 싸구려 된장이 아닌 직접 담근 집된장으로 맛을 내 쓴맛이 적고 국물 맛이 깊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더니 시어머님이 자꾸만 저녁 장사를 맡겨 가게를 물려받았다는 지금의 사장은 해장국과 함께 지낸 자신의 인생을 회상할 때면 눈가에 눈물이 서린다. 어린 소녀에게 해장국집의 거친 문화는 생소했다. 당시 왕십리는 서울의 중심부와 떨어진 외곽으로 그쪽에서만 사용하는 특유의 말투가 있을 정도였다. '어서 옵쇼'도 왕십리 사투리의 하나로 해장국집에서 울려 퍼지는 '어서 옵쇼'가 처음에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선지를 가지고 와 만지고 일하다보면 '해장국집 아줌마'로 꼬리표가 붙는 것이 억울하기까지 했다. 하루는 큰 부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기사를 대동하고 찾아와 맛있게 한 그릇 먹은 후 젊은 사장의 손을 붙잡고 "새댁, 젊고 예쁜데 이런 장사 한다고 속상해하거나 명분만 찾지 말아라. 명분을 찾지 말고 의무를 다해라." 하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왕십리의 가게가 헐리면서 가게를 접으려고 할 때 단골들이 뜯어말리는 것도 모자라 화내는 것을 보고 자신이 만들어 파는 해장국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것, 장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왕십리의 오랜 단골이던 나이 지긋한 한 할아버지는 강남으로 이사 온 후 "내가 죽기 전에 몇 그릇이나 더 먹을 수 있다고 몸도 성치 않아 갈 수 없는 그쪽으로 넘어가느냐"며 한탄하기도 하고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노인이 전화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어보고 싶다"며 배달을 부탁하기도 했다. 대중옥은 지금도 왕십리 해장국의 원형을 잃지 않으려 고군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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