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힘들다."
8년 전 친정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뒤 5년 동안 간병하시던 어머니가 손을 들어버리셨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거쳐 마침 2011년 조합원 힘으로 만들어진 안산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아래 의료사협) '꿈꾸는 집'에 모셨다.
최근 신우염으로 열이 떨어지지 않아 근처 병원에 입원했었던 친정 아버지는 퇴원하자마자 "빨리 집에 가자"고 한다. 아내와 자식들이 사는 집이 아닌 '꿈꾸는 집'으로. 어느새 아버지에게 요양원은 가족, 또 하나의 집이 된 셈이다.
부러웠던 일본의 요양시설, 우리도 할 수 있다니...
25년 전, 결혼 당시 뇌경색 후유증으로 언어장애와 거동이 불편했던 시어머니는 10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평소 천식을 앓고 계시던 시아버님은 천식이 아닌 위암으로 수술을 받고, 5개월 정도의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퇴원 후 그때의 아득함이 떠오른다. 누군가 돕는 손길, 지역의 자원 연결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우리가 국민건강보험료를 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건강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국가의 지원이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결혼 초부터 씨름했던 어르신 돌봄, 간병은 온전히 가족의 몫이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이 2008년부터 제도화되었으나, 경쟁과 시장의 논리로 운영되면서 존엄케어가 아닌 노인이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법제도를 잘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잘 운영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의료협동조합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집에서 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안심하고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하는 것이다."
1998년 당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의사인 한신의료생협 부이사장이 힘주어 한 말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1층 재활센터, 2층 재택간호, 3층 데이케어 룸으로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또 아픈 노인이 누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활동할 수 있도록 내부 시설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가져와 각자 개성 있게 배치한 방들, 획일화 되어 있지 않고 개인이 존중되는 재활 중심의 노력들이 시설 곳곳에 배어있었다.
일요일이면 지역 청소년들이 발표회도 하고, 데이케어센터는 조합원의 자원 활동으로 운영된다. 30년 동안 자신의 혈당과 혈압을 체크한 수첩을 자랑하는 당뇨와 고혈압 환자의 자조모임, 치매노인과 놀이치료를 재미나게 하고 있는 다운증후군 직원까지. 그 해맑은 직원의 웃음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있다.
눈이 번쩍 띄었다. 내 가족이 온전히 감내하던 노인 문제를 의료협동조합이란 공간에서 그것도 지역사회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한 한국사회에서 의료협동조합을 제대로 해보자 하는 열정으로 한국에 돌아왔었다. 그 당시 열정이 내 친정아버지를 가족같이 모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니, 나를 포함한 베이비부머 세대 노후 준비로 출발했었던 꿈이 그래도 빨리 이루어진 셈이다.
오물더미 속 노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의사는...
수년 전 원주의료협동조합 실무자가 독거노인 방문 진료 현장을 얘기한 적이 있다. 허름하고 낡은 집에 오물더미와 함께 누워 있는 노인들은 각종 만성질환에 심한 관절통으로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었다.
한 집 한 집 돌며 당시 우리는 이것이 참 의료라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분들 건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집에 의사가 직접 온다는 그 사실만으로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한번 번졌을 뿐, 그 외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우리가 명확하게 확인한 것은 쓰라린 현실이었다. 연료비가 없어 차가운 온돌 위에 전기장판을 깔고 그것도 전기료를 아끼려고 잠들기 전에만 잠시 사용하며 살아가는 분들에게 의사가 고작 한두 번 좋은 약을 처방하고 한의사가 직접 침술치료를 한다고 해서 건강해지지는 않는다는 현실 말이다.
이 분들이 건강하려면 우리와는 다른 의사가 필요했다. 단열공사를 해서 집을 따뜻하게 해 줄 사람 그리고 지속적으로 연료비를 지원해줄 사람, 수시로 찾아와 삶을 나눌 사람이 이분들에게는 바로 의사였던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건강하지 않다면, 가족과 함께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행복하면 건강하다는 사실은 이제 놀라운 게 아니다. 건강해야 더 행복해질 수 있고 행복하면 질병도 쉽게 극복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떤가. 건강은 개인에 대한 행복 조건으로서 조장되고, 아프지 않을 때는 항상 '남의 이야기'로 존재한다.
건강은 개인이 필요해야만 찾게 되고, 건강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건강은 개인적인 영역으로 환원시켜 출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삶으로 접근하여 보건의료에 참여하고, 제도적인 과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건강은 생로병사를 아우르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건강 문제는 고통의 감수성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대화가 일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건강할 때 예방할 수 있고, 아플 때는 서로 돌볼 수 있는 건강공동체가 필요하다. 이러한 건강 문제 해결은 개인 노력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생활 터전의 총체적인 변화가 지역사회에서 일어나야 한다. 삶의 기쁨과 애환을 나누고, 아프면 조건 없는 상호지원과 지지를 할 수 있는 일상적인 건강공동체, 건강 마을이 필요하다.
현재진행형인 서울시 참여형보건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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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보건소 건강조사 마을주민교육 |
ⓒ 박봉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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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파서 어린이집 등원을 못할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긴급 돌봄을 해주는 보건지소가 있다면 어떨까. 주민자치센터에서 민원서류를 떼면서 건강체크도 하고, 맞춤형 건강생활 관련 정보도 얻는다면 어떨까. 이러한 일이 불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서울시 박원순 시장 선출 이후 많은 변화가 이뤄져왔다. 건강과 의료에 관련한 대표적 어젠다로 2012년 5월, '건강서울 36.5'라는 서울시 건강 전략이 발표되었다.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 없는, 모두가 건강을 누리는 서울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인사말과 함께 '건강수명은 늘리고 건강격차는 줄이고'라는 핵심 슬로건이 제시되었다. 시민들과 전문가 등 1000여명이 참여해 총 100회가 넘는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
보건소와 시립병원, 보건의료 단체들과는 물론 정부 부처 내외의 협의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참여형 보건지소를 마련하고, 의료협동조합과 건강복지센터를 평가하고 지원하겠다는 내용이 서울시 건강 전략에 포함되었다. 이는 의료협동조합이 전문가 간담회에 참여해 풀뿌리단체를 비롯한 사회적경제지원체계, 시민참여 방안을 포함시키라는 요구가 반영되어 가능했다.
이러한 공약이 실제 현장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예산이 따라와야 한다. 결국 서울시 참여형 보건지소 4개 설치가 확정되어 진행중이다. 현재 중구 황학동에 있는 '참여형 보건지소' 운영을 위해 주민참여방안, 프로그램, 교육 등을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가 지원을 하고 있다.
"주 1회 점심시간 중앙시장에 들러 물건을 사면서 보건소에서 주민을 위해 어떤 사업을 할지 물어보겠다."
"만나는 주민에게 '당신의 가능성을 믿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기원하고 대화에 참여하겠다."
"건강, 혈압, 대사증후군 등 건강의 문제를 주민의 언어로 교육하고 홍보하겠다."
교육에 참가한 보건소, 주민자치센터 관계자들이 스스로 결의한 실천행동들이다. 한 번도 지역을 돌아본 적 없던 보건소 관계자들이 스마트폰으로 동네를 찍어 발표하며, 서로 놀란다. 기존의 표준형 보건지소와 참여형 보건지소의 내용이 무엇이 다른가.
동원된 참여 말고 스스로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여하다보니, 주인 노릇을 하는 진정한 참여가 이뤄진다. 내 삶의 환경을 바꾸고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참여 말이다.
지역주민이 건강조사를 통해 자신의 동네를 돌아보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찾는 중이다. 공무원들 역시 나부터 참여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한다. 처음 시도되는 참여형 보건지소 모형을 현장에서 실현해내기란 애초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이러한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범사업에 참여한 주민, 공무원, 정책제안자 당사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참여형 보건지소는 현재 진행중이다.
건강이미지로 명소가 된 영국의 슬라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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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센인들이 사는 고흥군 소록도마을 주민 400여 명의 얼굴이 새겨진 대형벽화(암각화)가 탄생했다. 재능기부 작가들로 구성된 '아름다운 동행-소록도 사람들'이 만들어졌다. |
ⓒ 박봉희 |
관련사진보기 | '알면 아끼게 되고, 아끼면 지키게 된다'는 말이 있다. 건강도, 관계도 그러하다. 내 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는 도시를 알기 위한 첫 걸음으로 우리 마을 걷기에 나서보면 어떨까.
영국 슬라우(Slough)에서는 주민들을 찍은 사진 2000장으로 미소 짓는 거대한 얼굴 벽화도 만들었다. 주민들의 활동, 지역 명소와 슬라우의 참모습을 찍은 작은 사진이 거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마을에서 행복실험을 진행했던 6명의 BBC 행복위원회 전문가 중 하나인 앤드루 모슨(Andrew Mawson)은 다른 도시와 지역사회도 각자의 사진을 만들어보라고 충고한다.
그런 사진이 도시의 브랜드를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체육 센터, 학교, 상점, 미술관 등지에서 그런 사진을 전시할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이 가이드가 되어 실제로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의 투어를 하게 되면 관광 산업을 진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하는 크고 작은 수백 가지 활동, 이러한 사회적 자본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가령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시도해보라.
-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오면 환영회를 열어주라 - 반상회에 나가라 - 합창단에 들어가거나 연주 서클에 가입하라 - 카풀(car pool)제를 시작하거나 동참하라 - 자신이 사는 지역의 역사적인 장소를 걸어서 둘러보라 - 지역 상점을 애용하라 - 친구와 댄스 강습을 들으라 -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라 - 동네 놀이터를 만들라 - TV를 끄고 이웃, 친구 그리고 가족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라
진행중인 참여형 보건지소를 슬라우 마을처럼 만들어보면 어떨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참여형 보건지소 모형이 이러한 기능을 할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 즐거워지지 않는가. 꿈을 꾸면 가능한 일이다.
바람직한 보건의료와 복지는 사회적 신분, 인종, 국적, 재산, 종교, 성별, 장애, 연령에 따른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도 '건강이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 중심의 보건의료체계는 고귀한 생명을 이윤창출의 수단으로 상품화하고 있다. 건강불평등의 문제는 지역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공공의료 부분이 하지 못하는 것을 지역주민과 함께 만들어내고, 이윤보다는 공공의 이익과 주민건강증진에 힘쓰고, 이를 위하여 주민 스스로가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시적인 주민 조직(마을 공동체)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 2012년 11월, 비판과 대안 보건연합학술대회에서의 키워드 역시 '참여'와 '민주주의'였다. 전문가 중심의 보건의료운동 진영에서 참여와 민주주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의료서비스에서 환자 참여가 왜 중요한지, 의료서비스에서 주민(환자)의 참여가 실제로 가능한지, 그것이 효과가 있는지 토론했다.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참여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제도, 문화 등)이 마련되어야 하는가. 보건의료분야에서도 주민참여가 왜 중요한지, 주민 참여를 통한 건강증진 사례가 얼마나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지 최근 정책적인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고령사회 준비, 보건의료 공공성 강화를 위한 견인의 역할, 민관 협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깨어있는 주체들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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