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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도심 탐구]낙원상가 뒷골목 익선동에서 무슨 일이?

여행가/허기성 2016. 1. 22. 06:33

[新도심 탐구]낙원상가 뒷골목 익선동에서 무슨 일이?

한옥 카페와 펍, 낡은 슈퍼...예술가들의 힙한 아지트로 변모

낙원상가에서 동쪽을 향해 낙후된 건물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위로는 집집이 뻗어 있는 전깃줄이 얽히고 설켜 스산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일부러라도 피해 가야 할 것 같은 이 골목 깊숙이 걸어가니,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와 펍에서 전시와 공연 등을 겸하는 복합문화공간이 지난해부터 하나 둘 들어서고 있었다.

 익선동 골목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도시형 한옥마을로 개발된 이후 80여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배정원 기자
익선동 골목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도시형 한옥마을로 개발된 이후 80여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배정원 기자

종로구 익선동에 위치한 이 한옥마을은 높이 솟은 빌딩 숲 사이에서 백 년 가까이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종묘와 인사동, 청계천,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중심지이지만, 몇십 년째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낙후됐다. 익선동은 2004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지만, 건물주의 동의를 얻지 못해 10년째 개발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곳곳에는 부서진 한옥이 자리했지만, 적극적으로 수리하는 사람도 없다.

 카페 ‘식물’에서는 대청마루를 현대식으로 재현한 나무 평상 위에 자개상과 꽃무늬 방석을 둬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카페 ‘식물’에서는 대청마루를 현대식으로 재현한 나무 평상 위에 자개상과 꽃무늬 방석을 둬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 골목은 현대인에게 도심 속 오아시스이자, 젊은 예술가의 캔버스 같은 곳

이렇게 버려진 지역에 젊은 예술가들이 ‘미니 자본’을 가지고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북촌과 서촌과 다르게 익선동은 상업지구로 지정돼 있다. 한옥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개조할 수 있고, 업종에 대한 제재도 없다.

아울러 종로3가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 떨어져 있어 접근성이 좋을 뿐 아니라 서울 주요 관광지와 근접해 관광객들이 모으는 곳이다. 2014년 말부터 카페 ‘식물’, ‘익동다방’, ‘익선동121’, ‘거북이슈퍼’ 등이 잇달이 문을 열었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교수는 앞으로 ‘숨은 골목 찾기’가 대한민국의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직 대기업의 손이 닿지 않은 골목길은 낙후된 공간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예술과 모험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실험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패션 포토그래퍼 루이스 박과 건축가 황현진이 만든 예술공간 ‘식물’

 벽면 밖을 카보네이트로 마감했지만, 기존의 창틀은 떼지 않고 그대로 살려뒀다. 카보네이트는 빛을 흡수하는 특수 소재로 밤에 조명을 따로 켜지 않아도 빛이 나서 운치가 있다.
벽면 밖을 카보네이트로 마감했지만, 기존의 창틀은 떼지 않고 그대로 살려뒀다. 카보네이트는 빛을 흡수하는 특수 소재로 밤에 조명을 따로 켜지 않아도 빛이 나서 운치가 있다.

카페 ‘식물’은 오픈한지 2년이 채 안 됐지만, 익선동의 터줏대감 같은 곳이다. 런던과 서울에서 오랜 기간 패션 포토그래퍼로 활동한 루이스 박이 공간 디렉팅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익선동으로 향했다. 그는 “모두가 아는 가로수길이나 이태원이 아니라 새로운 지역에서 공간의 미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이곳에 깃든 역사를 후세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식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미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한옥을 공사하는 도중 나온 창틀은 화장실의 거울로 자리하고 있고, 한국의 전통 자개 테이블과 미국의 가구 디자이너 찰스 임스(Charles Eames)의 테이블이 함께 들어서 있다. 인테리어에서부터 조명, 음악 등 총제적으로 공간을 디자인하는 루이스 박은 철저히 밀폐됐던 한옥 네 채를 이어 카페 겸 펍을 만들었다. 그는 “인간처럼 공간도 소통해야 한다”며 “카보네이트로 둘러싸여 자연광을 부드럽게 한옥으로 이끄는 외벽은 한옥의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빈티지 아이템부터 포토그래퍼 루이스 박의 어머니가 쓰시던 오래된 자개 테이블 등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품들이 햇살 아래 조화를 아룬다.
영국 빈티지 아이템부터 포토그래퍼 루이스 박의 어머니가 쓰시던 오래된 자개 테이블 등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품들이 햇살 아래 조화를 아룬다.

대중에게는 카페로 알려졌지만, 예술 관계자들에게는 다양한 협업전시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인디 뮤지션의 재즈 공연을 하기도 하고, 파리와 런던 출신 셰프들이 모여 디저트 브랜드 쇼케이스를 얼었다. 오는 2월 중순에는 ‘살면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사진, 그림, 영상, 설치미술 등 복합 전시를 열 계획이다.

◆ 옛날 동네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슈퍼마켓을 재현한 ‘거북이 슈퍼’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거북이 슈퍼는 식용유부터 담배까지 파는 진짜 구멍 가게다. 오로지 국내 맥주만 판다.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거북이 슈퍼는 식용유부터 담배까지 파는 진짜 구멍 가게다. 오로지 국내 맥주만 판다.

옛모습을 잘 보존한 익선동 골목의 가게 중에서도 ‘거북이 슈퍼’는 가장 복고 분위기가 진하다. 마치 ‘응답하라 1988’ 촬영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맥주, 먹태, 커피 등 메뉴를 보면 호프집이나 다방 같기도 하지만, 과자와 찐빵, 식용유까지 판다. 작은 가게지만 없는 게 없는 동네 추억의 슈퍼였다.

거북이 슈퍼의 인테리어는 시골 가겟방을 재현해 놓았다. 연탄불에 직접 먹태를 굽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제일 잘 나가는 메뉴는 ‘가맥’인데, 가맥은 ‘가게 맥주’의 준말이다. 과거에는 슈퍼마켓을 가겟방이라고 불렀고, 가게에서 먹는 맥주라는 의미다.

충정남도 공주에서 지난해 상경한 박지호 거북이 슈퍼 사장은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어느날, 시간이 멈춘듯한 익선동을 발견하고 위로받았다고 한다.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하는 박 사장은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 한복판, 그것도 종로의 중심에서 변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을 보존하는 동네를 발견했을 때 큰 위안이 됐다”며 “도시인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차를 즐기며 예술 작품도 감상할 수 있는 ‘익동 다방’과 ‘뜰안’

 익동다방에는 입구에서부터 마당 곳곳에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익동다방에는 입구에서부터 마당 곳곳에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익선동 골목에서도 또 다른 골목으로 열 걸음 정도 들어서면 ‘익동다방’이 나온다. 이곳은 설치미술, 회화 작가이자 아트디렉터인 박지현씨와 박한이 강남다방 대표가 함께 만든 공간이다. 다방이라는 이름보다는 갤러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곳곳에 다양한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작품은 두 달에 한 번씩 바뀐다고 한다.

 영화에서 바뀌는 장면을 소재로 일러스트한 작품.
영화에서 바뀌는 장면을 소재로 일러스트한 작품.

현재 벽에 걸린 작품은 정지은 일러스트레이터와 박지현 아트 티렉터가 함께 ‘바뀌는 씬(another scenes)’이라는 제목으로 작업했다. 박지현씨는 “가끔 우리의 인생도 영화의 시퀀스 쇼트처럼 바뀌는 장면으로 가득하다고 생각을 해본다”며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면 전환은 그들이 스토리 안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든 그 일들이 적어도 두어 시간 안에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리라는 자각을 준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가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반영하는 것뿐이라는 폴 버호벤 감독의 말처럼 이 일련의 영화 쇼트 작업들은 바로 그와 같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인 얼굴들을 담아내고, 시련도 기쁨도 빠르게 바뀌는 장면의 연속인 우리네 인생을 나타내기 위해 그려졌다”고 설명했다.

 한옥집의 미를 살린 뜰안에서는 전통차를 마시며 한쪽 벽면에 걸린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한옥집의 미를 살린 뜰안에서는 전통차를 마시며 한쪽 벽면에 걸린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통 찻집 ‘뜰안’에서는 2월말까지 겨울전시가 한창이다. 미술가 기와가 덕혜옹주의 어린시절 의복에서 영감받은 작품이 곳곳에 걸려 있다. 이 곳은 일본 영화 ‘까페 서울’의 촬영장소로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