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젖가슴 같은 오름과 소리쳐 울 때가 더 아름다운 제주 바다를 처음 만나곤 열병을 앓았다. 지독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소름 끼치는 그리움 때문에, 샛살림 하듯 오가는 것으론 갈증만 더할 뿐이어서 서울살이를 접고 아예 제주에 둥지를 틀었다….'
제주 성산에 있는 사진작가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는 시인 정희성 글귀가 걸려 있다. 30년 전 '소름 끼치는 그리움 때문에 제주에 둥지를 틀었다'던 김영갑의 마음을 대신 노래한 그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아 되뇌고 또 되뇌다 콩나물시루 같은 출근 버스 대신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기로 다짐한다. 여행이 아닌 삶으로! 그런 사람이 해마다 늘고 있다.
30~40대 이주민 最多
올겨울 제주로 이주하는 직장인 이성규(45)씨는 지난여름 가족들과 '제주에서 한 달 살기'에 도전했다. 그는 "아이 다닐 학교도 몇 곳 둘러보고, 생활 편의시설들을 살펴본 결과, 아내와 아이의 만족도가 비교적 높았던 서귀포 쪽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주부 박경란(62)씨도 전원주택 지을 만한 부지를 보기 위해 제주에 다녀왔다. 박씨는 "남편 은퇴하면 제주에서 살 계획으로 둘러봤는데 땅값이 너무 오른 데다 일부는 서울 못지않게 교통체증이 심해 망설이는 중"이라고 했다.
2010년 시작된 '제주 이주' 열풍이 사그라들 줄 모른다. 제주도 순유입 인구의 증가는 제주시가 2012년 4404명에서 2015년 8507명으로 두 배로 증가했고, 서귀포시는 2012년 472명에서 2015년 5750명으로 10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나이대는 30대가 22.9%로 가장 많고, 40대 18.6%, 20대 17.4% 순이다. 지역별로는 제주시의 경우 애월읍이 2012년 313명에서 2015년 1266명, 서귀포시는 대정읍이 2012년 40명에서 2015년 1390명으로 가장 크게 늘었다. 애월은 해변이 아름답고 도심, 제주공항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주민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됐다.
이주 후 1년이 고비
30~40대 이주민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자녀 교육 때문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에서 민박 '인디언썸머'를 운영하는 서동현(46)·엄옥란(41)씨 부부는 5년 전 딸 가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주로 왔다. 경쟁 사회에 피로를 느낀 부부는 딸만큼은 여유롭고 행복하게 키우고 싶었다.
제2의 삶을 꿈꾸며 제주에 내려왔지만 엄씨는 "이주 후 1년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여행 온 기분이라 좋았는데 조직생활에 익숙했던 남편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저는 인테리어나 DIY에 취미가 있어서 민박을 준비하며 할 일이 많았지만, 남편은 갑자기 여유 시간이 많아지니 멍한 상태로 있을 때가 많았죠. 부부가 함께 있으니 싸울 일도 많아졌고요." 일상이 바빠지니 갈등이 자연스레 해결됐다. 겨울엔 마당에서 귤농사 하고, 민박 손님 뒤치다꺼리하다 보니 어느새 5년. "무엇보다 가을이가 학교를 좋아해 이주에 후회는 없어요."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서 펜션 '벵디1967'을 운영하는 이재곤(35)·박미연(35)씨 부부는 전직 사진작가·기자 출신.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내려온 이들에게도 제주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독채 펜션 사업을 준비하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공사가 꽤 길어졌어요. 이웃과 소통하기도 어렵고 뭔가 우리만 고립됐다는 생각에 공황 장애까지 왔지요. 1년 넘게 이를 악물고 견뎌내니 아주 천천히 꿈꾸었던 삶이 다가오고 있더라고요."
교통 불편, 이웃 관계가 장벽
제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양하다. 제주여성가족연구원이 올해 1~5월에 걸쳐 제주 정착 주민 20~60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정착 동기 1순위는 '직장 및 사업체 이동'(29.8%), 다음이 '퇴직 후 새로운 일자리 선택'(28%), '제주 자연에 매력'(21.4%) 순이었다. 제주로 오기 전 직업은 사무·관리직(29.4%)이 가장 많고, 자영업(18%), 판매·서비스직(11%) 순이나 이주 후 직업은 자영업(32.8%), 판매·서비스직(13.6%), 1차 산업(12.2%) 순으로 나타났다.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이화진 연구원은 "제주의 산업구조가 1차 산업과 관광을 중심으로 한 자영업·서비스업 위주여서 이주민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일자리 찾기였다"면서, "귀농인들은 귤농사를 많이 하지만 부농이 되긴 어려우니 틈새 직업 또는 새로운 콘텐츠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테면 카페와 식당, 펜션은 늘어나 포화 상태이지만 건설 붐으로 건축사 사무소에는 전문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제주를 모티브로 한 수공예 작가들의 제품도 지역의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으니 눈여겨볼 만하다"는 게 이 연구원의 말이다.
삶의 질은 어떨까. 제주 정착 전후 삶의 질을 평가한 결과 5점 만점에 정착 이전 삶의 질은 평균 3.22, 정착 이후 삶의 질은 3.68로 다소 높아졌다. 생활 만족도는 4.5점 만점에 '자연환경'이 4.2로 가장 높았고, '여가 문화와 친환경적 교육 환경'이 3.13으로 뒤를 이었다. 반면 '경제활동 및 소득 만족도' 평균은 2.65로 낮은 만족도를 보였다. 생활 불만족 요인은 '교통 불편'(33.8%), '제주도 주민의 배타성'(12.1%)이 꼽혔다.
이웃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사례도 지나칠 수 없다. 제주시 조천읍에 사는 이주 1년 차 김경희(가명·38)씨는 이웃과의 관계로 고민 중이다. 동네 어르신이 돌아가셨는데 특별한 친분이 없어 그냥 지나친 것이 화근이 됐다. 장례 후 주민들은 김씨가 처음 이주해온 첫날처럼 싸늘하게 대했다. 김씨가 조의금을 내지 않은 것과 마을 일을 거들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화진 연구원은 "이주민과 원주민의 갈등은 제주 특유의 괸당(친족·혈족·공동체)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발생한다"며 "마을 행사 비용을 공동 부담하는 문제부터 경조사 문화까지 세심히 신경써야 원주민들과 어우러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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