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싸고 세금도 적고 미국 은퇴자도 “지방으로”
미 캔자스 주립대 교수인 프레드 브록(62)씨는 2년 전 뉴욕에서 미 중부에 위치한 캔자스주로 이사를 했다. 뉴욕타임스 경제부장으로 일하다 정년을 맞았을 때 캔자스에 살던 친척이 이사를 오라고 권한 것이다. 마침 캔자스 주립대에서도 교수 자리를 제의해 왔다.
브록씨는 “뉴저지 집을 팔고 캔자스로 이사오자 20만 달러 이상의 현금을 손에 쥐게 됐다”면서 “캔자스는 물가가 뉴욕의 60% 수준인데다 재산세도 적게 물려 뉴욕에 살 때보다 월 소득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훨씬 편하게 노후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은퇴자들이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아직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선 30년 전부터 이런 현상이 시작돼 최근에는 확고한 사회적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 날씨가 따뜻하고 부동산 가격이 싼 남쪽 지방으로 이동하는 행렬이다. 지갑이 두꺼운 은퇴자들이 몰려오면 지역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미국의 남부 주들은 은퇴자들을 서로 많이 유치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찰스 론지노 미국 노년학회장은 “날씨가 좋고 편의시설이 많은 플로리다주, 워싱턴주, 텍사스주, 네바다주, 애리조나주가 은퇴자들의 주거지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은퇴자들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활비가 싸게 먹힌다는 점이다. 관광객이 사시사철 몰려드는 플로리다주의 경우 집값이 뉴욕과 LA 같은 대도시의 2분의 1 수준이다. 물론 마이애미 같은 유명 관광지의 집값은 뉴욕과 별 차이가 없지만 플로리다는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싼 주거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인구가 별로 없는 애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는 부동산 가격이 5분의 1 이하로까지 떨어진다.
네바다 등 일부 주에선 주민들에게 소득세와 재산세를 거의 물리지 않는다. 날씨가 좋은데다 세금을 적게 물리고 물가가 싸기까지 하다면 연금소득으로 사는 노인들이 대거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재미있는 것은 한 은퇴자 그룹이 지방으로 이사를 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면 다른 친척이나 동네사람을 끌어들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특정 지역 출신 은퇴자들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몰려 사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 정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85년부터 90년까지 5년 동안 약 11만명의 뉴욕주 출신 은퇴자들이 플로리다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찰스 론지노 노년학회장은 “미국 동부 사람들이 은퇴 장소로 플로리다주를, 서부 사람들이 네바다주와 워싱턴주를 많이 선택하는 것은 문화와 생활관습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몰려 사는 현상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일반 회사원들에겐 정년이 따로 없다. 정년까지 마친 사람이면 능력이 출중하거나 운이 좋은 사람, 둘 중 하나다. IMF 사태 이후 달라진 풍속도다.
인천시 자동차검사정비사업조합 기술부장 강기호(46) 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만 55세 정년까지는 아직 9년이 남았지만 그건 별 의미가 없다.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조합 이사장이라도 교체되면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
그의 연봉은 2600만원. 25평형 아파트와 매월 아끼고 아껴서 몇 십만원씩 붓는 적금이 그의 전 재산이다. 그는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과 중학교 3학년짜리 딸을 두고 있다. 아들이 공부를 잘해 대입 수시모집에 합격했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당장 대학 입학금이 걱정이다. 유일한 저축이던 적금을 해약해야 할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준비하는 일은 ‘사치’에 가깝다.
“후~. 단 한시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어요.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걱정인 데다, 아이들은 커가고, 그렇다고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막연히 뭔가 준비해야겠다고는 생각하고 있는데 딱히 잡히는 것이 없네요. 나이 들어서도 일할 수 있는 공인중개사나 주택관리사 같은 자격증을 따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학원을 다닐 시간이 없는데 무슨…, 그냥 답답할 뿐이죠.” 강씨의 하소연이다.
45~60세의 은퇴 전후 세대들이 무방비 상태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이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공무원처럼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서울시 38세금기동2팀 팀장 정순영(59) 씨는 1974년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만 33년을 근무하는 내년 12월31일자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그는 지난해 4월 ‘공무원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제목의 수필집에 이어 최근 정치평론서 ‘여의도 사기꾼’을 출간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인생을 살았다.
“정말 지겹도록 오래 일했다”는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은퇴 후 재정문제. 공무원연금공단으로부터 지급받는 월 200만원 남짓한 연금이 사실상 은퇴 후 수입의 전부다. 하지만 그가 책임져야 할 식구는 아내와 자녀 셋 등 네 명이나 된다.
올해 32세인 큰딸을 시집보낼 일도 걱정이지만, 현재 재수 중인 아들과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을 생각하면 한숨이 앞선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정씨의 이야기다.
“정부가 오랜 기간 별다른 문제 없이 일한 공무원에게 재취업을 위한 실질적인 교육을 시켜서 일할 기회를 다시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퇴직 후에도 국가를 위해 헌신봉사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그런 기회가 없으니까 이런저런 고민만 하고 있어요.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부동산중개업이나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김수원 연구원은 “지난 4월 만 40세 이상 직장인 2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9명 정도는 은퇴 후 준비를 전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은퇴 후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응답자 가운데 10명 중 8명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나머지는 ‘어떻게 준비할지를 몰라서’라거나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은퇴를 목전에 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아무런 은퇴 준비 없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가장 큰 걱정은 역시 경제적인 문제. 대한은퇴자협회(회장 주명룡)가 지난 5월 수도권에 거주하는 50세 이상 남녀 3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두 명 중 한 명꼴로 퇴직 후 ‘재정의 불안함’ ‘자녀의 결혼 및 결혼자금 문제’ ‘재취업 또는 창업문제’ 등 경제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다른 문제는 ‘퇴직 후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난감함’ ‘사회적 역할이 줄어드는 데 따른 불안감’ 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설문 응답자 중 36%가 이 문제를 지적했다.
실제 준비 없이 은퇴 생활을 맞게 된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김진수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진국에 비해 근로의욕이 매우 강해 준비 없이 일을 그만둘 경우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은퇴 앞둔 직장인 대부분 무계획 무대책
경찰청 경무계장을 지내다 2004년 말 정년퇴직한 김기호(63) 씨는 사전 준비 없이 은퇴한 뒤 1년 가까이 후유증에 시달렸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어서 집에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한 김씨는 매일 아침 9시 동사무소로 출근해 오후 4시까지 컴퓨터 교육을 받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강남구 수서동 37평형 아파트에서 매월 200여 만원의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어 여유로워 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의 각종 경조사 비용을 감당하기도 벅차다. 휴대전화 비용조차 버거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재취업도 쉽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지금까지 단 한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도 없는 노릇.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동부 산하 고용안정센터에서 취업교육을 받아봤지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육이라는 게 이력서 쓰는 양식을 가르치거나, 업체에서 나와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업체는 경비원이나 신문배달원 등을 제공하는 곳이 대부분. 하지만 이런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김씨는 “아직까지 활동할 능력이 충분한데 마냥 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은퇴 전에 재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는 등 미리 준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컨설팅 같은 것을 제공해주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국노동연구원 고용보험연구센터 방하남 본부장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짧은 근로생애 모델+고령화=시한폭탄
“근로생애 동안 어떻게 하면 은퇴 이후의 소득이나 생활을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그런 차원에서 개인적인 재정계획 같은 것을 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선진국은 은퇴 이전에 노후 준비를 충분히 한다. 우리 사회의 노동시장과 시스템은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개발경제 시대의 짧은 근로생애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고령화라는 문제가 닥친 것이다.”
문제는 은퇴 전후 세대들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 김진수 교수의 이야기다.
“연금지급 기간이 60세에서 65세로, 조기 연금지급 기간이 55세에서 60세로 연장돼 55세에 정년을 맞은 직장인의 경우 10년을 기다려야 비로소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린 중·고령자들의 건강상태는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아프기라도 해서 병원 비용이 발생한다면 곧바로 빈곤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방하남 본부장은 “우리 사회는 중·고령자의 재취업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지만, 이후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아 두 가지 문제점을 동시에 안고 있는 상황”이라며 좀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방 본부장의 설명에 따르면, 중·고령자들이 재취업을 한다고 해도 현재 기업들이 정한 근무연령 마지노선은 58~60세다. 평균 수명을 80세로 보면 20년 이상 생활해야 하는데 그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를 시작하는 10여 년 후부터는 중·고령층이 800만 명에 육박해 사회적 부담도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
방 본부장은 “정부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들은 자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세대간 갈등이 쌓이다 보면 좌절해서 자살하는 고령층이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라면서 “시한폭탄 같은 잠재적 사회문제”라고 말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2000년 60세 이상 노인 자살자 수가 1600여 명에서 2004년 4100여 명으로 두 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한폭탄의 초침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은퇴를 전후한 중·고령자들을 위한 정부의 대책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그동안 정부의 정책은 중·고령자들의 전직과 재취업을 지원하는 것에만 편중돼 있었다. 은퇴를 준비하거나 은퇴한 직후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시스템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것.
인생계획 도와주는 프로그램 마련 시급
노동부 관계자는 “그동안 주로 65세 이후 고령자들의 교육과 재취업 문제에 밀려 은퇴 전후 세대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은퇴 전후 세대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들이 은퇴 후를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고령화사회의 미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퇴 전후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최성재 교수는 “재취업을 원하는 층은 55~64세다. 65세가 넘어가면 재취업 희망률은 현저히 떨어져 20% 안팎에 그친다. 나머지는 건강상의 이유나 다른 이유로 일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한다. 이들에게 재취업은 물론 자원봉사나 취미, 특기 등 좀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와 함께 “국가에만 의존해서 재취업이나 노후보장을 받으려는 국민들의 의식개혁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 누구나 20~30년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노후의 삶을 위해 교육도 받고, 다양한 계획을 세워나가는 방향으로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지금의 서구사회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퇴 전후 세대에게 은퇴지원 프로그램이 시급하다는 점은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 현재 행정자치부는 정년퇴직을 앞둔 공무원 37명을 대상으로 지난 8월부터 11월까지 3개월 기간의 ‘은퇴지원 프로그램’을 시범 교육 중이다. 또 포스코와 한국전력 등 일부 공기업에서는 자체적으로 정년퇴직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최대 1년 기간의 ‘은퇴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재취업이나 창업을 결정하고 계획을 수립하기까지의 전 단계에 걸쳐 상담해주고, 퇴직 이후 일정 기간에 애프터서비스까지 제공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1인당 200만~500만원의 높은 비용이 들어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들조차 선뜻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대목이다.
인천시 자동차검사정비사업조합 강기호 씨는 요즘 노동부에서 지원하는 자동차 기능장 교육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업을 연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니는 것이다. 강씨의 첫 번째 목표는 정년까지 무사히 버티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은퇴 이후 현재의 직업과 관련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그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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