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준비요?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고 세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는데 무슨 은퇴 준비가 있겠어요?”
정종혁(가명·53·서울 동작구 사당동) 씨는 은행에서 22년간 근무하다 2004년 부지점장으로 퇴직했다.
외환위기 때 중간정산하고 남은 퇴직금 1억2000만 원과 시가 6억 원짜리 아파트 한 채, 퇴직 무렵 1500만 원을 주고 사 둔 농지 1000평이 자산의 전부였다.
씀씀이를 줄였지만 아파트담보 대출금(1억 원) 이자를 포함해 다섯 식구 한 달 생활비로 평균 300만 원을 쓰고 대학생인 두 딸과 고등학생인 아들 학비로 연간 1000여만 원이 나갔다. 퇴직금 1억2000만 원이 3년여 만에 3000만 원으로 줄었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애써 봤지만 ‘나이가 많고 기술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예상하지 못한 조기 퇴직, 은퇴 이후에도 생활비와 자녀교육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 정 씨가 처한 상황은 은퇴를 했어도 은퇴한 것이 아닌, 그래서 ‘은퇴자 관리’는커녕 ‘은퇴 준비’조차 쉽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은퇴자 관리? 사실상 무방비 상태’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가 본보 취재팀의 의뢰로 은퇴자 5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은퇴자들의 자산 관리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수년 내 자산 고갈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우선 조사 대상자의 평균 은퇴 연령은 54.46세로 대체로 60∼65세에 현역에서 은퇴하는 선진국에 비해 5년 이상 빨랐다.
또 권고사직이나 명예퇴직, 해고 등 ‘비자발적 퇴직’이 21.9%로 정년퇴직으로 인한 은퇴(24.5%) 못지않게 많았다. 준비되지 않은 은퇴가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50대들의 비자발적 은퇴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육체적으로 노인도 아니고 대부분 자식들이 결혼하지 않아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낄 나이인 탓이다. 국민연금은 60세 이후에나 받을 수 있어 돈 나올 데가 딱히 없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최현자 교수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자신이 물러날 준비가 됐을 때 그만두는 ‘자발적 은퇴’가 많지만 국내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은퇴자산 11년 지나면 고갈 우려’
“제가 경제적 여건이 안 되니까 사람들 만나기가 가장 부담스러워요. 소주도 안주 몇 개 시키면 10만 원이 훌쩍 넘잖아요.”
개인사업을 하다 은퇴한 정모(62) 씨는 은퇴 이후 가장 힘든 게 친구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정 씨처럼 갑자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때 가장 먼저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돈 문제’다.
서울대의 은퇴자 조사 결과 은퇴 당시 금융자산이 전혀 없는 사람이 전체의 11.5%에 이르렀다.
퇴직금을 제외하고 은퇴 당시 보유한 금융자산은 평균 6548만 원이었고 조사 대상자의 48%는 5000만 원을 밑돌았다. 또 자가(自家)를 뺀 보유 부동산 시세는 은퇴 당시 평균 1억4267만 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은퇴자들은 현재 보유 자산으로 앞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을 고작 평균 11.72년이라고 추정해 퇴직자산의 고갈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보유 자산으로 11.72년밖에 생활하지 못한다면 그 이후부터 자식에게 손을 벌리는 것 외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다니던 회사가 연봉제를 실시해 은퇴할 때 퇴직금조차 없었다는 조모(55) 씨는 “저녁에 술 마시고 싶으면 혼자 캔맥주 사들고 PC방에 가서 새벽까지 앉아 있는다”고 말했다. 술집에선 안주를 시켜야 하지만 PC방은 한 시간에 1000원만 내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퇴직 자산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채 은퇴하면 은퇴 이후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조사에서도 은퇴 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월 200만∼250만 원이란 답변이 29.4%로 가장 많았지만 은퇴자들의 월수입은 평균 191만 원, 월 생활비는 평균 162만 원에 그쳤다. 월수입이 100만 원 이하인 은퇴자들도 27.2%나 됐다.
대부분 기대치에 턱없이 못 미치는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절반가량이 “재무상담 관심없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은퇴자들은 국가연금(국민연금) 기업연금(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체계적인 연금시스템에 힘입어 대체로 ‘노후생활’이 보장되는 편이다.
반면 한국에서 연금 혜택을 보는 은퇴자는 많지 않다.
1988년 시행된 국민연금제의 혜택을 보고 있는 수급자는 올해 2월 말 현재 201만 명으로 60세 이상 인구의 24.5%에 그친다. 평균 가입 기간이 7년 8개월밖에 되지 않아 1인당 평균 수급액도 월 19만4000원에 불과하다.
지난해 도입된 퇴직연금제는 올해 2월 말 현재 퇴직연금제 전환 사업장이 1만7137개사로 5인 이상 사업장의 3.6%에 불과할 정도로 실적이 지지부진하다.
부족한 은퇴자금도 문제지만 은퇴 이후 효율적인 자산관리의 부재 등 은퇴자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문제로 지적된다. 서울대의 은퇴자 조사에서 “재무상담을 받아 봤느냐”는 질문에 은퇴자의 90.1%는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절반가량(43.5%)이 ‘관심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한국투자자교육재단 박병우 사무국장은 “은퇴자들이 현재 보유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 및 운용하기 위해선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투자자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생활비-자녀 뒷바라지로 여력이 없어” 79%
주부 성모(44·서울 서초구 서초동) 씨는 남편 수입의 절반가량을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아들의 사교육비로 쓴다.
성 씨는 “영어 수학 과학 예체능 등 꼭 필요한 것 위주로 시키는데도 이 정도 든다”며 “최선을 다해 아이들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축이나 노후준비는 꿈도 못 꾸고 있다”고 털어놨다.
‘교육비 부담’은 한국의 중장년층이 은퇴 준비를 하지 못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의 은퇴자(503명) 심층조사에서도 은퇴 준비를 하지 못한 이유로 ‘자녀교육비와 결혼자금 때문에 여력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36%를 차지했다. ‘생활비 부담’(42.6%)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이다.
교육비 중에서도 특히 사교육비 부담이 크다.
최근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07년판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한국의 사교육비 지출액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9%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공교육과 사교육을 합친 교육비 전체 지출액은 7.5%를 차지해 2위였다.
이에 반해 은퇴자 관리가 잘되는 나라로 꼽히는 네덜란드에서는 ‘사교육’이 없다. 대학은 지원만 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학교에 갈지, 대학에 진학할지만 본인이 선택하면 된다.
암스테르담에서 재즈 공부를 하고 있는 서현수 씨는 “네덜란드에는 학원이 없기 때문에 사교육비 부담도 없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8세가 되면 대부분 독립하는데, 이들의 집세 학비는 물론 용돈까지 국가에서 주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돈 쓸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인이 여유롭게 은퇴 준비를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은퇴후 11년…‘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렘브란트 풍차 공원. 이 나라 출신 화가 렘브란트의 동상과 풍차가 어우러져 네덜란드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서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온 얀 스토커(69) 씨는 전기 엔지니어로 일하다 10년 전 은퇴해 지금은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아내와 저는 각각 월 2000유로(약 240만 원) 정도 연금을 받아요. 둘이 합쳐 4000유로죠. 연금의 3분의 1은 국가에서, 나머지는 기업연금을 통해 받습니다. 1주일에 3, 4번 골프치고 여행도 자주 갑니다. ”》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은퇴자 도시’ 선시티. 이곳에서는 부부가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만 부담하면 골프 수영 운동 영화 등을 모두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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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에 은퇴한 뒤 선시티로 이주했다는 플로이드 하이든(77) 씨는 “1년에 6개월씩 이곳과 미시간 집을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선시티 생활비가 미시간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고 귀띔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는 은퇴 이후에도 비교적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내는 노년층이 많다.
전문가들은 연금 사회복지 시스템 등의 제도와 함께 미국과 유럽 사회에 뿌리내린 ‘은퇴자 관리(Retirement Management)’가 안락한 노후생활에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은퇴자 관리는 ‘현역 시절에 열심히 모은 퇴직자산으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말한다. 자산을 불리기보다 퇴직자산의 고갈을 최대한 늦추면서 잘 쓰고 지내는 게 은퇴자 관리의 핵심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은 2026년에는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체계적인 연금시스템과 은퇴자 관리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 자금의 주요 기반이 되는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정부와 정치권의 의견 차가 커 갈수록 재정 부담이 커질 것이 확실시되는 국민연금제도 개편이 진통을 겪고 있다.
본보는 은퇴자 관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현실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 일본 등 선진국들의 은퇴자 관리 시스템을 현장 취재하고 국내 실태도 점검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번 시리즈에 맞춰 본보 취재팀은 한국의 은퇴자 관리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에 은퇴자 503명의 일대일 면접조사를 의뢰했다. 50∼71세의 은퇴자를 대상으로 은퇴 전후의 생활을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 결과 은퇴자의 66.8%(336명)는 ‘은퇴 전에 은퇴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또 전체 조사 대상자의 73.6%(370명)는 ‘현재 보유 자산과 연금으로 은퇴 생활을 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또 현재 보유 자산(금융자산 평균 6634만 원, 부동산자산 평균 1억8037만 원)으로 앞으로 평균 11.72년을 생활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응답자의 평균연령이 59세인 점을 감안하면 약 71세에 노후자금이 고갈된다는 뜻이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손성동 실장은 “선진국들은 철저한 연금제도와 은퇴자 관리로 노후대비가 철저하다”며 “이에 반해 한국은 조기 퇴직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으면서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채 은퇴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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