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이 들려주는 이야기
네덜란드 사람 욘이 한국을 여행한다. 익숙지 않은 상태 그대로, 준비되지 않은 그 자체를 즐기며, 자전거 위에 몸을 싣고 바퀴가 이끄는 대로 끊임없이 이어진 길을 무작정 달린다.
*욘 스카켄라드(Jorn Schakenraad)는 스스로를 '크리에이티브 큐리어스 트래블러(Creative Curious Traveler)'라 칭하는 네덜란드 태생 디자이너다.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도전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에 정착해 느끼는 다양한 삶을 작품으로 옮기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다가오는 가을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는 여름에 대한 아련함이 뒤섞이며 어쩐지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에 무작정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강원도 방향으로 가 보자는 대강의 계획은 세웠지만 그 이상은 어떤 구체적인 것도 정하지 않은 채로 길 위에 섰다. 자전거에 달린 페니어 가방에 언제나 여행을 함께 하는 익숙한 캠핑 도구 몇 가지를 채운 채 낯설지만 익숙한 길을 따라 바퀴를 굴린다. 오늘은 가장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 싶다. 철저히 고요해 질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을 찾아 내고 싶다.
그간 한국의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동안 예상치 못했던 길 위의 만남들 덕분에 떠나온 마음이 한결 풍성해 지곤 했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뛰어 놀던 아이들, 아들처럼 반가워하며 말을 걸어주던 아주머니들, 넉살 좋게 어깨를 툭툭 쳐 주시던 아저씨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파란 눈의 이방인인 나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런 귀한 만남들 덕분에 진짜 한국을 한결 가깝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우연한 만남조차 없는 철저히 혼자인 여행을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가끔은 완벽히 혼자인 순간이 그리울 때가 있지 않은가. 작정하고 이기적이고 싶은 날, 떠돌기보다는 머물고 싶은 날, 많은 것을 보기 보다는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은 날. 오늘은 그런 날이다.
얼마 즘 페달을 밟았을까? 어쩐지 마음을 이끄는 이름 모를 산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조금씩 들어서다 보니 산이 품고 있던 푸른 물이 눈에 띈다. 다듬어지지 않아 꼬이고 엉켜 있는 수풀을 헤치며 물 가까이로 다가선다. 계곡이라 하는 것이 좋을지 작은 강이라 해야 할지 헷갈리는 그 곳에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작은 모래 사장도 펼쳐져 있다. 아무런 인적이 없는 곳, 심지어 누군가 지나쳐 간 흔적조차 없는 곳, 그 한 켠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주저 없이 물 속에 발을 담근다.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머리카락을 적셔보니 기분 좋을 정도의 차가운 감촉에 라이딩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듯하다. 바지를 접어 무릎까지 올리고 성큼성큼 더 깊은 곳을 향해 간다.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물 속을 한가롭게 노닐던 송사리들이 내 발길에 놀라 바쁘게 움직인다. 그들의 고요를 깬 것 같아 조금 미안해 진다.
물고기들에게는 불청객이겠지만 당장 고파오는 허기에 물 속으로 그물을 던져 본다. 오늘 저녁 거리로 삼을 물고기 한 마리 즘 낚을 수 있다면 더 없이 행운일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한참을 물고기들을 쫓아 헤매어 보지만 좀처럼 성과는 나지 않는다. 도시에서 온 서툰 어부에게 이 곳의 터줏대감 물고기들이 그리 쉽게 잡힐 리는 없는 모양이다. 문득 이 조차 욕심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며 살짝 머쓱해 지기도 한다. 하지만 뭐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다. 잡히지 않으면 잡히지 않은 대로, 이 또한 자연스러운 추억이 된다.
한참을 물 속에서 뛰어 놀다 주변의 장작들을 모아 작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물에 젖은 바지를 말린다. 나도 모르게 가만히 불이 타는 모양 속으로 빠져 든다. 순간순간 바뀌는 불의 모양만을 바라볼 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나를 한없이 느긋하고 평화롭게 만든다. 시계를 볼 필요는 없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몇 시까지 이 곳에 머물 것인지, 나의 움직임을 시간에 따라 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이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오랜 침묵을 가른다. 그것은 텔레비전이 익숙지 않던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부모님과 친구들, 그리고 형제들과 뛰놀던 기억이다. 그 무렵에는 어떤 전자기기 없이도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돌멩이 하나가 이야기가 되고 풀 한 포기가 놀이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의 난 수 많은 기기들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쉴 틈 없이 확인 하게 되는 스마트 폰 화면,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하는 컴퓨터 화면, 여유가 생기면 일단 틀고 보는 텔레비전 화면 등 삶의 대부분을 작고 네모난 화면 속에 가둬 두게 되고 말았다. 오늘만큼은 그런 화면 속에서 두 눈을 벗어나게 하고 싶다. 모든 기기는 잠시 꺼두고 그 곳에만 머물던 고개를 들어 주변의 모든 풍경을 바라보고 싶다. 자연 속에서는 시야의 모든 것들이 한계가 없는 커다란 화면이 된다. 시선을 멈추게 하는 높은 빌딩도, 눈부신 네온사인도 없는 무한히 펼쳐진 자연이라는 화면 앞에서 나는 필요한 만큼, 보고 싶은 만큼만 보면 된다. 정해진 화면을 빨리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모든 순간이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고 나는 그렇게 나를 둘러싸고 흘러가는 시간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멋진 음악도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다. 주변의 고요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 간혹 들려 오는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이 서걱이는 소리들이 일렁이던 내 마음을 잠재워 준다. 온갖 소음에 길들여져 진정한 고요가 무엇이었는지 조차 잊고 있었던 나의 두 귀가 비로소 평온을 찾는다. 지극히 평범한 순간이다. 이것이 평범한 것이었건만 그간 평범치 않은 온갖 소음에 길들여지며 시끄러운 것이 보통이라, 그 소음에 지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이상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철저한 고요 속에서만 비로소 들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내 안에서 들리는 나의 이야기들이 이 곳에서야 내 귀에 들려 온다. 그간 너무 돌아보지 않고 남의 이야기에만 신경 쓰며 살아 온 것은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물어 온다. 숨을 한껏 들이마신다."
자유롭게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땅에서 가끔 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꽤나 예민한 감각이 필요한 일이 되기도 했었다. 시끄러운 도시 속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 그리고 말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소리를 만들고 소리를 듣고 소리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꽤 지쳐버리기도 했었다.
이토록 철저한 고요 속에서만 비로소 들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내 안에서 들리는 나의 이야기들이 이 곳에서야 내 귀에 들려 온다. 그간 너무 돌아보지 않고 남의 이야기에만 신경 쓰며 살아 온 것은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물어 온다. 숨을 한껏 들이마신다. 물기가 차오른 청바지가 장작 불에 마르며 내는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겨온다. 그 속에 내 뱉는 나의 작은 숨소리가 조용한 산 속에 울려 다시 나에게로 돌아 온다.
저녁거리로 모닥불 위에 올려 놓았던 소시지는 기분 좋은 냄새를 풍기며 익어 가고 있다. 소시지 위에 내어 두었던 칼집은 먹음직스럽게 벌어져 있다. 필요한 만큼만 소박하게 즐기려고 했던 나의 머문 자리가 조금은 사치스러워졌다 싶어지며 풍족한 기분이 들면서도 동시에 경계하는 마음이 생긴다. 우연히 만난 산과 그 속에 푸른 물, 그리고 고요함으로 위로 하던 이 자리에 최대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고 싶다. 나에게 안식을 준 이 공간에 내가 안식을 얻고 간 흔적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것, 그저 스치듯 머물다 가는 것이 이 곳에 대한 나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모닥불이 꺼지자 작은 불빛 하나 머물지 않은 나만의 작은 천국에서 스르르 눈을 감고 잠이 든다. 주변은 한층 더 적막함에 휩싸인다. 이 잠이 깨고 나면 그간의 해묵은 기억들, 피로했던 몸과 마음이 슬그머니 이 어두움 속에 묻혀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일이 오면 아무렇지 않게 오늘이 된 내일을 살기 위해 다시 또 자전거에 몸을 싣고 길 위에 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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