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해야 이룰 수 있는 승리의 길
지난달에 이어 피엘라벤 클래식 2014 트레킹 이야기를 이어간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며칠 만에 지칠 대로 지친 몸, 버거운 배낭. 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는 걸음 속에서도 어느 순간 희망이 생기고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나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PART 3. 혼자가 아니야!
한국 사람은 밥 힘이 필요해!
우리팀은 지급된 건조식을 '오렌지 백'이라고 불렀다. 건조식은 국내에서도 많이 먹는 전투식량과 비슷하다. 뜨거운 물을 붓고 숟가락으로 섞어 준 뒤 5~8분정도 기다리면 된다. 다들 처음엔 호기심 가득하게 무슨 맛을 먹을지 골랐지만 네끼가 넘어가자 다들 영혼 없는 모습으로 먹기 시작했다. 무엇이 먹을 만한 지 토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상위권은 나오지 않았지만 다들 최악으로 '시리얼'을 꼽았다.
일찌감치 첫날 저녁으로 라면 1개를 먹어버린 나는 라면 1개와 비빔밥 1개를 언제 먹을지 고민에 빠졌다. 밥이 생각보다 빨리 그리워졌다. 둘째 날 저녁, 텐트를 친 뒤 비빔밥을 먹느냐 마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낮에 만난 한국분이 나를 찾아왔다. "김치찌개 먹을 건데 저녁 아직 안 먹었으면 우리랑 먹을래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숟가락만 들고가면 되죠?"라며 뛰어갔다.
그들이 내준 김치찌개와 쌀밥, 오이지, 숭늉은 꿀맛보다 달았다. 이어 무려 드립커피까지 얻어먹었다. 박용철 씨는 "아까 낮에 봤는데 다리 절면서 걷는 거 보니까 너무 안쓰러웠어요. 밥 잘 먹는 거 보니 다행이네. 내일(3일차)도 힘들다는데 이거 먹으며 힘내서 걸어요"라며 홍삼절편을 나눠줬다. 덤으로 발포 마그네슘도 얻었다.
4일째, 배를 타고 온 만큼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배가 고픈데 아직 일행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스웨덴에 오기 전, 한국에서 한 번 봤던 신수혜 씨다. 그는 "점심 안 먹었죠? 우리 미역국이랑 비빔밥이랑 있어요. 이거 먹고 가요" 라며 손짓했다. 나는 역시 거절하지 않고 넙죽 음식부터 받았다. 정신없이 흡입했다. 역시 한국 사람은 '밥'이 중요하다. 건조식 먹고 나서의 포만감과 차원이 달랐다.
또 힘을 내 걷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 모처럼 파워워킹을 하고 있는데 쉬고 있는 일행이 눈앞으로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 오렌지 백을 먹으라고 했다. 나는 "한국인들 만나서 한국음식 얻어먹었어! 부스터 단 것 같아. 나 먼저 갈게"라며 발걸음을 힘차게 이어갔다.
내가 먼저 케론 체크포인트에 도착했고 한참 지나서야 일행이 왔다. 마크는 나를 보자 "내가 여태 본 너의 속도 중 가장 빨랐어!"라며 놀라워했다. 그 뒤로 일행들은 내가 지칠 시간이 다가오면 한국음식을 찾아야 한다고 농담을 건넸다. 행사 기간 중 만난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다음에 또 올 수 있다면 최대한 한국음식을 챙겨 올 것'이라고 입 모아 말했다. 심지어 모든 끼니를 한식으로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나왔다. 이렇듯 한국인에게 '밥'은 먼 이국땅에서도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함께했기 때문에 닿을 수 있었던 아비스코
마지막 날인 5일차. 텐트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트레킹 내내 비가 한 번도 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비를 한 번 맞게 되는 줄 알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3시. 더 잘 수 있는 시간이라 잠을 다시 청했다. 다행스럽게도 일어나니 비가 그쳤다. 덕분에 공기는 한층 더 상쾌했다. 요한나와 함께 출발했다. 역시나 나의 발을 먼저 걱정하며 "걷는데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오늘은 우리 모두 같이 피니시 라인에 들어 갈거야"라며 일정을 설명했다. 산장에서 빠져 나오자 자작나무 숲이 이어졌다. 마음이 통했는지 알아서 우린 숨을 깊게 들이키며 아비스코의 공기를 마셨다.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빨리 일행과 합류해야해 조금 서둘렀다.
마지막 구간은 아비스코 국립공원이다. 깎아진 절벽 사이로 흐르는 협곡과 숲이 아름다운 곳으로 이 국립공원만 찾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에 꼽히기도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겨울에는 오로라와 스키 등을 즐기기 위해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고 한다.
1km를 남겨두고 협곡 위 절벽에서 쉬기로 했다. 너른 바위 위에 누워 계곡물 소리를 들으니 눈이 스르륵 감겼다. 미동도 없이 잠이 들자 매즈가 이마를 톡톡 건들이며 "킴, 거의 다왔어. 여기서 죽으면 안 돼"라며 깨운다. 나는 "응. 숨 쉬고 있어"라며 일어나 다시 배낭을 멨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결승점 200m 앞에 다다랐다. 우리는 일행이 모두 있는지 확인 한 뒤 결승점을 향해 걸었다. 먼저 도착한 트레커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는데 해냈다는 감동이 밀려왔다. 마지막 체크포인트인 아비스코 투어센터에서 하이킹 패스를 건네고 드디어 완주 배지와 패치를 받았다. 우리 일행은 서로 축하와 고마움을 전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팀원들에게 "아마 나 혼자 왔으면 중간에 포기했을 거야. 너희의 격려와 응원이 있어서 완주할 수 있었던 거 같아. 정말 고마워"라며 악수를 나눴다.
키루나로 날아온 이유는 가보고 싶은데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누군가는 '뭐 하러 사서 고생이냐'고도 했다. 맞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그 고생 끝에 얻는 건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지만, 일상의 고마움도 함께 얻는다. 그러니까 나가봐야만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마 사람들은 일상의 편안함을 다시 깨닫기 위해 이따금 어려운 길로 나서는 것 같다.
PART 4. TIP
배낭의 무게는 인생의 무게다
혼자 모든 걸 챙겨야 했기 때문에 무게 부담이 조금 더 있었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음식을 많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식량은 결승점인 아비스코로 보내고 최소한으로 챙긴 한국음식은 라면 2개와 건조 비빔밥 1개. 나머지는 이곳에서 제공하는 건조식품을 먹기로 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촌스럽게(?) 한국음식 먹을 필요는 없지. 여기 스타일을 즐기자!'라고 결론 내리며. 하지만 끼니를 잘 계산해 한국음식을 챙겨가는 것을 추천한다. 건조식이 안 맞는 사람은 소화가 잘 안되거나 거북하다는 경우도 있었다.
필요한 장비와 음식, 행동식, 트레킹 폴과 의류, 구급약 등 나름대로 간추렸는데도 75ℓ 카즈카 배낭이 터질 것처럼 꽉 찼다. 각 짐은 다양한 크기의 잡주머니를 사용해 약간의 무게도 덜어냈다. 숙소에는 무게를 잴만한 것이 없어 감으로 15kg을 맞춰 꾸렸다.
출발 전, 무게를 달아보니 배낭무게는 17kg. 카메라는 뺀 무게니 약 18kg을 짊어진 셈이다. 배낭이 짓누르는 느낌이긴 했지만 허리벨트와 등판길이를 조절해 가며 몸에 맞추니 크게 무리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에 피로도가 쌓일수록 배낭을 메는 일 조차 버거웠다. 트레킹 시작 후 배낭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미리 자신이 얼마까지 짊어지고 갈 수 있는지 꼭 파악해야 조금 더 편안한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는 길
스웨덴 아웃도어 브랜드 <피엘라벤>은 매해 8월, 피엘라벤 클래식을 개최한다. 올해로 10회 째를 맞이하는 행사로 쿵스레덴에서 열리는 유일한 행사이자 가장 큰 축제다. 올해는 8월 8일부터 15일까지 열렸다. 트레킹이나 MTB, 트레일러닝 등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기 위한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이들이 찾는 건 이때가 유일하다.
쿵스레덴은 '왕의 길'이라는 뜻으로 총 440km다. 순수한 자연 그대로 모습을 갖추고 있어 세계 10대 트레일로 꼽히기도 한다. 피엘라벤 클래식은 그중 일부 구간인 110km을 걷는다. 의식주를 모두 짊어지고서 말이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 깨끗한 화장실, 따뜻한 샤워 등 도시생활의 편리함은 어느 것도 누릴 수 없다.
총 참가자는 30여국에서 모인 2000명. 스웨덴 참가자가 가장 많으며 인접한 유럽, 북미 등지에서도 이곳을 찾아온다. 한국인은 지난해 처음 참가했고 올해는 무려 150여명이 신청했다. 인접국인 일본과 중국에서도 이 길을 걷고자 날아왔다.
피엘라벤 클래식은 단일 브랜드가 여는 행사 중 가장 긴 트레킹 거리를 자랑한다. 참가한 트레커는 출발지와 결승점을 제외한 6개의 체크포인트를 거치며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다른 대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기록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 즉, 1등을 해도 성적에 따른 보상이 없다. 피엘라벤이 속한 피닉스 그룹 CEO인 마틴 악셀헤드는 경쟁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에겐 1등이 없어요. 아름다운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기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무사히 완주 했다면 모두가 승리자죠."
대회가 열리는 기간만큼은 누가 나보다 앞서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기 페이스만 유지해가며 놀멍쉬멍 완주하면 된다. 먼저 왔다고 해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 늦었다고 페널티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완주자에게는 똑같이 기념 배지와 패치를 증정한다. 이를 받기 위해선 각 매 체크포인트에서 하이킹패스에 확인 도장을 받아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도장 받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2015년 대회 접수는 오는 10월로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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