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려한 경관의 집합지, 흑산도
섬 여행은 일반 여행과는 또 다른 설레임과 두려움을 준다. 대지에 두 다리를 딛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뭍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날씨며 배편은 물론 출항시간도 챙겨야 한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데도 사람들은 섬을 찾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섬을 찾겠다는 결심만 서면 섬 여행만큼 열의를 갖는 여행도 드물다. 아마도 섬 여행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는 돌파구이자 휴식처로 새로운 세계다. 시끄러운 네온 불빛에 휩싸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어슴푸레 새어나오는 가로등 불빛이 전부인 날 저문 섬의 밤풍경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수려한 자연에 발을 딛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또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을 꼬박 달려야 닿는 흑산도를 찾았다. 1004개의 섬으로 구성된 전남 신안에서도 먼 뱃길로 꼽히는 홍도·가거도와 함께 흑산면 소속의 섬이다. 흑산면사무소가 자리한 흑산도는 이중 큰형 노릇을 하고 있다. 면적은 19.7㎢(약 593만평), 해안선 길이 42km로 제법 덩치가 크다. 이곳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828년 통일신라시대부터로 알려진다. 장보고 장군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뒤 서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 흑산도에 반월성을 쌓으면서부터라고. 상라산성이 이를 증명한다.
흑산도 항에 내리면 여객선터미널, 관광안내소, 해양경찰서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하나로 마트를 지나 수협어판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흑산도 홍어를 필두로 수산물 경매가 이뤄진다. 홍도나 가거도에서 이곳 흑산도로 장을 보러 오기도 한단다. 육지까지 적게는 3시간, 많게는 5시간 가까이 달려야 하니 그럴 만도 할 터. 흑산도 여행에 필요한 간식은 이곳에서 준비하면 된다.
다행히도 흑산도는 해안을 따라 일주도로가 있다. 25.4km, 차량으로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다. 관광버스(1인 1만5000원)나 택시(4인까지 6만원)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1984년 공사를 시작한 일주도로는 거의 30년 가까이 걸려 완공됐다. 흑산도 일주드라이브가 가능해진 것은 지난 2010년 3월부터다.
흑산도 항 근처의 자산문화원부터 출발, 반시계방향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자산문화원에는 정약전 선생의 유배생활이며 <자산어보>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흑산도의 관람 포인트로 꼽히는 상라산(227m)으로 향하는 길. 선사시대부터 흑산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리 고인돌을 지나 진리 당산에 닿는다. 조용한 돌담에 안긴 당산은 진리당과 용신당을 품고 있다. 이 공간을 ‘신들의 정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반도에서는 이곳 흑산도와 제주도에서만 자생한다는 초령목이 신령스러움을 더한다.
진리 당산을 지나면 흑산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으로 꼽히는 배낭기미 해수욕장이 나온다. 봄이면 숭어축제가 열린다. 이어 조선시대 수군진이 들어왔을 때 감옥으로 쓰던 옥섬에 닿는다. 다시 옥섬에서 상라산으로 향하는 길, 초라한 절터가 보인다. 무심사지다. 이 멀고 깊은 섬에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고민할 사이도 없이 굽이굽이 오르막 고갯길이 시작된다. 열두구비 고갯길로 유명한 상라리 고개다. 사진촬영 포인트로도 꼽힌다. 상라봉 전망대 초입에는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서 있다.
상라봉 전망대에서 5분쯤 산길을 오르면 상라봉 정상에 닿는다. 봉수대 흔적이 있어 상라봉 봉수대라고도 한다. 방금 올라온 한두령, 열두굽이 고갯길 뒤로 옥섬 횡섬 등의 섬에 안긴 흑산도 항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잠시 풍경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명소로도 유명하다. 다시 일주도로에 오른다. 흑산도 명소로 꼽히는 하늘도로와 닿는다. 교각이 없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면암 정약전 선생이 유배생활을 하던 사리마을로 향한다.
홀로 떨어진 깊은 섬
흑산도(黑山島)는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고 붙은 이름이다. 얼마나 멀고 깊은 섬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흑산도’라는 이름이 주는 깊은 무게감은 이곳에서 기나긴 유배생활을 했던 손암 정약전(1758~1816) 선생으로 이어진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둘째 형이자 천주교도였던 그는 1801년 신유사화 때 흑산도로 유배된다. 1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인근 섬, 우이도로 옮겨진 뒤 얼마 후 세상을 떠난다. 다시는 뭍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뭍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 게다가 검게 보일만큼 깊은 섬이라니, 유배지로는 이만큼 적합한 곳이 또 있었을까.
“당시 흑산도 유배는 지금으로 치자면 무기징역이나 다름없어요. 살려는 두지만 이 먼 섬으로 보내는 건 당시 사람들에게 숨만 쉬는 것이지 죽은 것이나 진배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흑산도를 얘기할 때 유배지로서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지요. 하지만 귀양 온 이곳에서 정약전 선생은 흑산도 연해의 어류 백과사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남겼습니다. 흑산의 ‘흑’ 대신 같은 뜻이나 소리는 다른 ‘자’를 써서 ‘자산(紫山)’이라고 했지요. 모두 검다는 뜻이에요. 이처럼 다양한 해양식생을 갖춘 흑산도를 단순히 유배지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세상이 좋아진 금이야 이 ‘멀고 외딴 깊은 섬’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흑산도 토박이 김기백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다. 정약전 선생은 흑산도 남쪽의 사리마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자산어보>를 남겼고 또 사촌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흑산초등학교 서분교 맞은편 돌담길을 오르면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게 복원한 유배문화공원이 나온다. 사리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그는 이곳에서 저 망망대해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유배공원에는 <흑산도 유배인 도표>가 보인다. 1693년 나인 정숙은 해괴한 짓으로, 1876년 면암 최익현(1833~1906)은 상소를 이유로 유배됐다고 적혀 있다. 신분이 궁녀이건 벼슬아치건, 죄목이 사리사욕이건 의로운 상소이건 차이 없이 모두 적혀 있다. 불과 150여 년 전만 해도 흑산도는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면암은 강화도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곳에 2년 정도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사리마을에서 시계방향으로 진행하다 나오는 소사리를 지나 자리한 천촌리에 면암 유적지가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패해 일본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적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 끝에 죽었다. 천촌리 암벽에 새겨진 ‘基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이 면암의 작품으로 알려진다.
이제 차량을 10분 정도만 더 올라가면 흑산도 항에 닿는다. 일단 한바퀴 돌아본 후 상라 전망대로 다시 돌아오자. 이곳까지 와서 붉은 섬 홍도 일몰을 놓칠 수 있겠는가. 한반도 서남단의 어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는 여전히 노래하고 흑산도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간다.
참고자료: 한국관광공사
'♣캠버스·1박~2박 여행일정 안내♣ > ♣원정·여행.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라남도 장흥 소등섬 일출 (0) | 2015.01.14 |
---|---|
[스크랩] 비금도-우이도 특선 9월12-14일 1무1박 3일 (0) | 2014.12.30 |
모래언덕이 장관인 전남 신안군 우이도 섬 (0) | 2014.12.30 |
DMZ.. (0) | 2014.08.28 |
포즈................... (0) | 2014.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