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수사관 접고 '타팰' 인근에 공인중개사 개업 왜?
청년실업 100만시대에 잘나가는 대기업을 때려치우는 30·40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그들도 '미친 짓'이란 주위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고 인정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학원가다. 세무사·공인회계사·공인중개사·9급 공무원 등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이철호씨(가명·당시 48세)는 사기 전과 5범 피의자와 마주 앉았다. 33.1㎡(10평) 남짓한 조사실 상단 모서리엔 폐쇄회로(CC) TV가 설치됐다. 50대 남성인 피의자는 혐의를 일체 부인했다. 경기도 용인 부지 16만5289평㎡(5만 평)을 헐값에 사들인 뒤 최대 10배 비싼 가격에 팔아 시세 차익을 챙긴 혐의였다.
검찰 수사관인 이씨는 혐의 입증을 자신했다. 남몰래 공인중개업 공부를 열심히 했던 터였다. 피의자는 해당 용인 부지가 곧 개발돼 땅값이 치솟을 것이라고 피해자들을 꾀었다.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인·허가를 승인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이씨의 판단이었다. 그는 관련 분석 자료를 담당 사건 검사에 전달했다. 피의자는 결국 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는 김에 큰 무대서 인생 2막…고객 수익발생 때 큰 보람"
그로부터 약 5년이 흘렀고 이씨는 50대 여성과 마주 앉았다. 그런데 피의자를 캐묻던 검찰 조사실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타워 60평 23억원', '양재동 건물 매매 40억'이라는 적힌 종이들이 사무소 유리문에 빼곡히 붙었다.
이씨는 올해 초 강남구 도곡동 주상복합아파트 타워팰리스 인근에 공인중개사 사무소 문을 열었다. 지난 2016년 명예퇴직금 1억3000만원을 받아 1년 이상 준비 끝에 개업했다. 피의자를 쏘아보던 수사관의 눈빛은 온데간데없다. 이씨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50대 여성 고객에게 부동산 시세를 설명하고 있었다.
"정년까진 시간이 다소 남았지만 20년 이상 근속해 명예퇴직 신청 자격이 됐어요. 미련 없이 퇴직했지요. 이왕 하는 김에 '큰 무대'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월세 1000만원을 부담하면서까지 타워팰리스 인근에 사무소를 차린 이유죠. 이 지역 고객들은 통이 큰 데다 공인중개업 관련 지식도 상당해 만만치 않네요. 하하."
이씨는 공인중개사 개업에 대해 "꿈을 이뤘다"고 표현했다. 원체 흥미가 있었다고 한다. 수사관 시절 주변에서 부동산 매매를 할 때마다 귀가 쫑긋했다. 이씨는 현재 소득 활동을 위해 실물 경제를 공부하고 조간 경제신문을 정독한다. '배움의 즐거움'이 크다고 한다. 그는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 고객에게 수익을 제공할 때 참 뿌듯하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무엇보다 '내 일'을 한다는 자아실현의 기쁨이 크다. "수사관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한 이씨는 전국 최대 검찰청 서울중앙지검에서도 근무했다. 그러나 검찰 조직의 엄격한 상명하복 체계에 회의감도 깊었다고 한다.
"검찰에선 유죄냐 무죄냐 결론을 미리 정하고 수사하는 경우가 있어요. '윗사람'들은 이런 가이드라인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뭉뚱그려 표현해요. 이런 의중을 금세 알아채는 게 사실상 '아랫사람'의 주요 능력으로 평가됐죠. 더 이상 눈치 그만 보고 저만의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 시니어 연륜·경험 '경쟁력'…"잘나갔던 시절 잊어야"
이씨 같은 50대 이상 중·장년 세대의 '제2의 인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은 공인중개사·주택관리사·회계사 등으로 눈을 돌려 인색 2막을 펼치고 있다. 성인 교육업체 에듀윌에 따르면 공인중개사 수업 수강생 중 50대·60대·70대 비율(8월 현재)은 21%다.
과거와 다른 것은 '자발적인 제2의 인생'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기업 구조조정 대상이 돼 쫓겨나듯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돼 제2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시니어(은퇴한 중·장년 세대)들은 풍부한 연륜과 경험을 갖추고 있어 경쟁력도 발휘한다. 이씨는 부동산 매매 과정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가압류 문제는 자신의 전공 분야라 한다. 실무적으로 형법을 다뤄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해 고객 반응도 좋다고 한다. 이씨는 "수사관 퇴직 직전 연봉인 7000만원보다 현재 소득이 더 높다"고 귀띔했다.
공무원 퇴직 후 주택관리사로 변신한 김학준씨(61)도 자신만의 경쟁력이 있다. 약 30년간 구청 공무원 생활을 한 그는 구로구 개봉동 한 아파트에서 주택관리사로 일하고 있다. 주택관리사란 주민 민원·분쟁 등을 해결하고 전기 설비·주차·청소 등을 감독하는 '관리소장'이다. 공무원 시절 주로 건설관리과에서 근무했던 그는 부동산 지식도 상당하다고 자신했다.
"주민들도 구청 공무원 출신의 주택관리사면 믿고 따르지 않겠어요? 입주민 '갑질' 같은 민원 해결에 더 강한 것은 사실이지요. 주민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작지만 큰' 노력을 합니다. 매일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정장 차림으로 출근합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날도 그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이씨는 "퇴직 후 집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으면 아마 우울증에 걸렸을 것"이리며 "주택관리사가 돼 출근하니 주민들에게 '잘생긴 소장님', '멋쟁이 소장님' 같은 덕담도 듣고 얼마나 좋느냐"고 말했다.
전문직 자격증이 있다고 해도,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왕년의 잘나갔던 시절'을 떠올리고 처지 한탄을 하는 시니어가 적지 않다. 이씨와 김씨가 '겸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다. 이들은 제2의 인생을 준비 중인 시니어들에게 한목소리로 조언했다.
"'잘 나갔던 시절'을 잊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동료나 직원을 과거의 '잘난' 동료와 비교하면 안 돼요. 차이가 아닌 '다름'임을 인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배우겠다는 태도로 임해야 합니다. 제2의 인생은 과거 삶의 연장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두 번째 삶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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