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간 고추처럼 정열적(情熱的)인 총각(總角) 고추잠자리가 하늬바람에 살랑거리는 코스모스 공주(公主)의 가냘픈 꽃잎에 앉아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아름다운 계절(季節)입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대추알들이 가지마다 오롱조롱 달려 풍성(豊盛)함을 노래하고 있고, 그 푸르던 능금은 조금씩 가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데... 우리들이 이 땅에 살아있어 거듭난 영혼(靈魂)을 살찌우니 진정 기쁘고 감사(感謝)합니다.
향수
정지용 시
♪♪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잎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뜨거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 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고추잠자리 고향생각.
고추잠자리 머리 뒤에
또 다른 고추잠자리 꼬리 끼우고
사랑의 유희에 신바람이 났다.
차창밖에 펼쳐지는 고추잠자리
날고 노는 모습에 가을을 이고 우는
매미소리도 더위를 이긴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희뿌연 운무도
하늘과 땅에 연막을 처대던 안개서림도
이제 세월의 흐름 앞에 항복을 하는 것 같다.
쓰르라미 매리 소리가 요란한걸 보면
삼복의 고개 넘어 입추를 지나고
처서의 절기를 눈앞에 둔 것 같다.
그렇게 후덥지근하던 날도
세월 앞엔 장사가 없다.
이렇게 늦여름 더위가
살갗을 따갑게 타오르게 하는걸 보면
그 옛날 싸리나무 체반 위에 올려놓은
붉어 서름한 고추 생각이 난다.
가을 고운 햇볕에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말려가던 고추의 빛깔이 저 차창 앞에서
사랑 유희를 벌이는 고추잠자리의 색깔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몰래 고향으로 내 마음의 드라이브를 떠난다.
초가지붕위에 넝쿨째 익어가는 푸르스름한 호박이며
이제 막 흙 무덤을 터뜨리며 익어가는 고구마의 용틀임.
다 익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어머니의 호미자루는
고구마 이랑을 가로지른다.
분홍빛 짙은 고구마가 홀라당 발가벗긴다.
체반 위에 노랗게 쩌 내어온 고구마.
뜨거운 기운을 호호 불며 한입 물고 있는 내 모습에
어머니는 행복해 했었지.
이제 그 어머니가 파란 잔디타고
마구 자란 쑥 밭에 누워 계신다.
눈물로 쑥을 뽑아 분풀이 하듯 내다 버린다.
내 허기진 배 채워 주시며 기쁨의 모습으로
시원한 샘물을 누런 주전자에 사랑을 가득 담아
한 대접 내어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내 마음에 가득하다.
나는 할 말이 없는 아들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하늘만큼 안고 살아왔으면서도
어머니의 잔디 옷 위에 몇 시간도 지체하질 못하고
이별 인사를 하는걸 보면
아들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머니의 맛이
그 어머니의 힘이
오늘을 사는 힘이기도 한데
그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내 마음은 자꾸만 퇴색되어 간다.
지루한 여름 더위도 가고 이제 고추잠자리 날듯이
내 마음도 어머니의 고향으로
더 살갑게 다가가야 할 것 같다.
쑥대밭 다 뽑아내고 파란 잔디만 남겨둔 채로
어머니의 숨결을 안고 가고 싶어진다.
눈물이 자신을 때리는 아픈 채찍으로
생각하며 길을 나선다.
내가 본이 되어야 내 자식도
나를 본으로 삼지 않겠는가.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지만
그래도 위가 있어야 아래가 있질 않겠는가 말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지금 나는
아들과 딸에게 전도 하고 있다.
이게 삶이 아닐까 하는 구차한 생각을
하면서 이마에 잔뜩 흐른 땀방울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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