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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눈"

[스크랩] 성교숭배(중국)

여행가/허기성 2006. 4. 16. 17:15

제 1장 음양 문화와 성 숭배

1. 음양 문화와 생식 문화
 

 모든 우주 관념은 음양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고 하듯이 인간의 번영의 관건은 생식에 있다. 만일 생식이 잠시라도 멈춘다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어 사회도 우주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유가(공자를 종사로 삼는 유가는 2,0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 전통 학술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 이후 이런 유가의 출현은 갑작스런 현상이었다. 공자 이전이 상고 전적인 [상서], [시경], [역경]등에는 '유'라는 명칭이 없었으며, '유'라는 사람과 관련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한서.예문지]에서는 유가 학파의 내원을 추적하여 "대개 사도의 관직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관.사도]에서는 유라는관직을 말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유라는 이름과 내원에 관한 문제는 고대 문화사 중의 일대 의문 사항이었다.)의 근본사상은 중국 문화의 심층적 구조 중 하나인 생식 숭배 관념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남녀가 성행위를 통해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처럼 위대하고 신성한 일이다. 그래서 "만물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사람은 조상에 근본을 둔다"고 하여 천지에 제사지내는 것과 조상에게 재사지내는 것을 동일한 원칙 위에 놓은 것이다. 유가에서 숭상한 것은 조상 그 자체가 아니라 조상의 생식적 공능이므로 제사 의식과 종묘 제도에 치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식적인 공능을 중시한 유가는 혼례 제도를 중시하고, 아내의 존재를 인정하고 후사가 없는 것을 반대하였다. 유가의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은 유가의 대표적 경전인 [주역]에 잘 나타나 있다.

 

  i) 낳고 또 낳아 쉼이 없으니 이를 역이라고 한다.

  ii) 천지의 두 기가 교차하지 못하면 만물이 번식하여 흥하지 못한다.

  iii) 건과 곤 두괘는 역의 문인가? 건괘는 양이고 곤괘는 음이다. 음양의
덕이 서로 합하여 강하고 부드러움이 일정한 체가 되어 체로써 천지간의 모든 것을 만들어 영위하고 신명의 덕성에 통한다.

  이러한 문장은 음양에 대해 장엄하고 순결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음양의 교합을 찬양하고 교합 후의 화육을 강조하고 있다. [예기]에도 "천지가 합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겨나지 못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주역]은 음양 문화의 대표적인 산물로서,(중국 철학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주역]은 대부분의 내용이 주대에 이루어졌다. [주역]은 [경]과[전]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경]은 [역경] 혹은 [고경]이라고 하며, 64괘와 384효를 내용으로 하고, 쾌와 효에는 각기 설명이 있고, 점에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상고 시기 복희씨와 문왕, 주공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리고 [전]은 [역전]이라고도 하고, 전국 시기 말년에 이루어졌으며, 쾌사,효사를 해석한 일곱 가지 문사 총 10편, 즉 [십익]을 포괄한다. 그것은 주로 [역경]에서 제시한 각종 현상에 대해 해석하고 있다. [주역]의 팔괘 형식은 하늘, 땅, 우레, 발마, 물, 불, 산, 연못의 여덟 가지 현상을 대표한다. 팔괘 중 매 두괘는 모두 대립적 관계이고, '음', '양'은 팔괘의 근본이며, 이것은 음과 양이 서로 결합하여 교감함으로써 만물을 탄생시킴을 설명한다. 팔괘는 또 두 괘를 합쳐 64괘가 되었으며, 나아가 사물의 교감과 발전 변화의 이치에 대해 설명했다.) 성을 개괄한 부호 속에 상고 시대 사람들의 자연 현상과 역사적 경험에 대한 묘사와 이해를 포괄하고 있으며, 그것들에 대해 철학적으로 승화시켜 풀이하였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서로 영향을 준다. 한 사물이 발전하면, 그 세력은
반드시 다른 사물을 위축시키고, 한쪽이 전진하면 다른 한쪽은 후퇴한다.
음양가들은 '발전'.'전진'하는 사물을 주동적인 입장에 있다고 하여 '양'이라 하고,'위축'.'후퇴'하는 사물은 피동적인 입장에 있다고 하여 '음'이라고 했다. 이 음양이 교합하여 생산한 작용을 '도'라고 했다. 이 사상은 소유하고 있는 사물을 하나의 정체로 간주하고, 이 정체 속에는 정과 반 두요소가 있으므로, 사물은 이 두요소의 교합 작용으로 해서 전진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한 남성에게는 오직 한 명의 아내만이 있을 수 있다는 예법 제도 또한 음양의 원리와 부합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런 음양 문화를 꿰뚫고 있는 것은 건곤의 원리다. [주역.계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건과 곤 두쾌는 [주역]의 온축이구나! 건과 곤은 만들어진 후 상하로
분열되고. [주역]은 그 안에서 확립된다. 건과 곤이 훼손되면 [주역]을 나타낼 수 없다. [주역]을 나타낼 수 없으면 건과 곤은 거의 멈추게 될 것이다.

  여기서 건과 곤은 천지로 대표되는 우주 전체를 반영한다. 역쾌는 생식기 숭배 시대 말기의 것으로 '건', '곤' 두 쾌는 남녀 생식기의 기호이다.
[주역]의 쾌와 효는 생식기 숭배 시대의 부호이다. -은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고, --은 여성의 성기를 나타낸다.
  우리는 팔쾌의 뿌리가 고대 생식기 숭배의 잔흔에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을 그려 남근을 상징하고, 이것을 둘로 나눠 여자의 질을 상징하였다.
때문에 이로부터 남녀, 부모, 음양, 강유, 천지 관년이 나온 것이다. 고대
사람들의 숫자 관념은 삼으로 가장 많은 수를 나타냈고, 삼은 가장 신비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을 섞어 이루어진 것이 삼이 되었고, 비로소 여덟 가지 다른 형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일직선(-)과 파선(--)은 이원적인 우주의 힘을 나타낸 것이다. 일직선은 홀수로 적극적이고 남성적인 힘을 나타내고, 파선은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힘을 나타낸다. 

  건곤 음양 관념은 남녀 양성에 나타난다. "건은 하늘이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하고, 곤은 땅이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한다." 또한 "하늘은 존귀하고 땅은 비천하며 건곤의 위치는 확정되었다. 비천하고 존귀함이 진열되어 있고, 귀함고 천함의 위치가 있다." 자연 현상 가운데 달과 겨울은 음에 속하고, 태양과 여름은 양에 속한다. 인류에 있어서 여자는 음에 속하고 남자는 양에 속한다.
  이런 이론에 따라, 음양은 피차 상반되지만 상호 보완하는 두 가지 힘을
가지고 있어 상극 상생한다. 여성과 남성은 각각 음과 양의 원리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뒤섞일 수 없지만,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남녀의 성행위는 단순한 욕망의 배설이 아니라 음과 양 두 가지 우주의 힘이 인간의 몸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의 작용을 숭배하는 것은 [주역]의 근본적인 관점이며, 남녀 양성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남녀 양성의 교접을 음양과 연관지어 자연과 인간이 변화 원리를 중점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여자를 시집보내는 것은 천지의 큰 뜻이다.
 천지가 교합하지 않으면 만물은 번식하여 흥할 수 없다. 여자를 시집보내는 것은 인류의 시작이며 끝이다."라고 했듯이 천지 사이의 가장 정상적인 일은 천지가 교합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장할 수 없고, 남녀가 결혼하지 않으면 종족을 보존하고 대를 이을 수 없다는 말이다.

  [주역]에서 음양이 만물을 변화시킨다는 철학 관념을 서술할 때, 성기관과 성행위 술어는 생식 문화를 깊이 있게 반영했다.

  i) 남녀 음양이 그 정을 교합하면 만물이 화육하고 산다.

  ii) (여름에는) 구름이 떠나고 비가 내려 각종 사물이 퍼져 형체를 이룬다.

  iii) 천지가 교감하여 만물이 화육 생정한다.

  iv) 하늘의 음과 땅의 양이 서로 교합하지 않으면 만물은 번식하여 흥할 수 없다.

  v) 건은 하늘이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하고, 곤은 땅이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한다.

  여기서 음양의 교합 작용으로 만물이 변화함을 묘사하고 있다. '운우', '감', '교' 등은 모두 남녀 성교에 관한 술어이며, 특히 고대 문학 작품에 나타났던 '운우'라는 말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송옥은 [고당부]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왕이 고당이라는 곳으로 놀러갔다가, 잠시 낮잠이 들었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여인이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무산의 여인으로 잠시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왕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고 베개를 나란히 하고 싶어 왔습니다." 왕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 무산의 여신은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무산의 남쪽에 있는 어덕과 높은 구릉에 살고 있습니다. 새벽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아침 저녁으로 양대 밑을 배회할 것입니다.) '구름'은 여성의 난자 혹은 질의 분비물을 의미하고, '비'는 남자의 정액이 방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고사가 있은 이후로, 중국 문학에서는 '운우', '무산', '무양', '고당', '양대'라는 말로 성교를 나타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듯 [주역]에서는 성교를 우주 만물이 생서하는 위대함으로 찬미하였으며, 남녀간의 성행위를 천지의 성교로까지 확대시켰고, 인간의 생식 행위에 대해 찬미했다. 다시 말해서 [주역]은 대표적인 음양 문화이며 생식 문화를 계통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또 생식 문화를 새로운 단계로 승화시켰다.
그렇다면 음양 문화와 생식 문화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2. 생산 의식과 여성 숭배   

  원시 농경 사회에서 집단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생산이었다. 생산성 여하에 따라 집단의 생사가 결정되었으므로 생산을 가능케 하는 힘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종교가 생겨나고, 그에 따라 의식이 발달하여 '생산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생산 의식은 자연스럽게 여성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대의 남녀는 공동체 생활을 위해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하면서 수입의 많고 적음에 개의치 않고 서로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살았다. 이 점은 그들의 순장품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여성의 무덤에는 실, 동뮬의 뼈로 만든 바늘, 씹조개로 만든 칼 등이 있어 방직, 봉제, 농업 활동에 종사했음을 설명하고, 남성의 무덤에는 뼈로 만든 화살촉 등이 있어 주요 노동 영역이 수렵이었음을 설명한다. 그 당시 여성들이 종사했던 채집 경제와 원시 농업은 남자들의 수렵 경제보다 안정되고 보장성이 있었으므로 생활의 주체자가 될 수 있었다. 반면 남자는 일부 일처제 시대의 남자들의 상징이던 기개와 위엄이 없었으며, 일부 일처제 시대의 여자의 존재와 비슷한 장식품 내지는 부속물, 아이를 만드는 도구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여성 상위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어머니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대지도 섬기게 되었다. 물론 토지 숭배는 성 숭배가 아니라 자연물 숭배의 일종이지만, 이들에게 있어 토지는 만물을 자양하는 위대한 힘으로 인식되어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후 그들은 또 여성의 생육은 대지가 초목을 낳는 것과 같으며, 인구
번창을 희망하는 것은 대지가 초목이 울창하게 자라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지를 제사지낼 떠는 여성이 사용하던 물건이나 월경혈을 놓았고, 여성이 분만을 위해 들고 가는 것은 분만을 순조롭게 하기 위함이며, 곡물을 수확하면서 아이를 낳는 것은 토지 생산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모계 사회는 들, 강물, 대지를 여성의 상징으로 간주하였으며, 생식 숭배의 연속은 토지 숭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성이 월경기, 임신기, 출산기, 양육기는 그녀들로 하여금 강도 높은 노동력에 많은 불편을 주었다.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할수록 여성의 체질은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모계 사회의 말기에는 농업과 목축업의 발달로 수렵 경제로 하여금 보조적인 생산의 위치에 있게 했다. 모권의 시행은 인간의 평등을 의미하고, 부권의 탄생은 사유 재산과 부녀자를 압박하며 남성 위주의 성 문화를 생겨나게 했다. 남녀간의 지위의 변화를 가져온 근본적인 요소는 사회 경제의 대변동에서 기인한다.
  여성이 숭배된 다른 하나의 이유는 자녀를 생육할 수 있다는 점, 다시 말해서 인류에게 있어 중요하고도 신성한 문제인 생명의 번식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류가 생명을 직접 생산하고 양육하는 여성에게 깊은 존경을 표하며, 생명의 신비함과 위대함에 고개숙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 생식기 숭배와 성교 숭배

  원시 사회의 생식 숭배는 여성 숭배로 나타났고, 여성 숭배는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 숭배로 발전해 갔다. 원시 시대 사람들은 생식 기관의 기능에 대해 명확한 개념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결합하여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난자와 질의 분비물을 구분하지도 못했다. 단지 난자와 자궁 그리고 음문의 모든 분비물을 '음'의 기, 즉 정자가 태아가 되는데 필요한 자궁의 안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자 혹은 정액을 뜻하는 '정'은 남성의 정자를 뜻하는 말로만 사용되었고, 난자는 '기' 혹은 '혈'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원시 시기 인간들이 생식 숭배를 생식기 숭배와 결합시킨 것은 생식과 남녀 생식기의 관계를 알고 난 후의 일이다. 그들은 남성 생식기를 토기와 연결시켰기 때문에 남근 상징물을 '전조', '전주'라고 했다. 이때부터 남성이 정액이 생식에 있어 특수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물'로 정액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시경.소아.포전]에서는 상고인들은 어전조('어'는 맞이한다는 의미이고, '전조'는 농사를 처음 시작한 신농씨이다.)를 맞이하여 비와 물을 강말하고 곡물의 수확이 풍성하고 인구의 번창함을 바랐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른바 '어전조'는 주로 밭에서 파종할 때, 남녀의 성교로써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땅으로 질을 상징하고, 씨앗으로 정액을 상징한다.

남녀의 성행위를 '파종', '경누'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흔히 '음'과 '근'은 남녀의 생식기, 즉 '음'은 여성의 생식기인 음부를
가리키고, '근'은 남근을 가리킨다. 남성 생식기의 우상은 그것이 발기하여 우뚝 선 모양이며, 여성 생식기의 우상은 옆으로 늘어난 모양이다. 사람들은 생식기 우상에게 경건한 자세로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시간이 흐르고 경혐이 쌓이면서 남근이 음부와 접촉하여 임신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점차 남근(원시 시기 문화 유적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새 무늬는 남근이 상징이다. 새머리는 음경과 유사하고, 새가 알을 낳듯이 남근 또한 알(고환)을 가지고 있으며, 알의 흰자위와 정액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숭배현상이 보편화되어 갔다. 모계 사회로부터 부계 사회로의 전이가 남근 숭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남근 숭배의 부계 사회의 확립 이후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계 사회의 후기, 혹은 중기에 이미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와의 성행위를 통해서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 주의했고, 남자는 한 생명을 창조하므로 영예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태아는 아버지의 싹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며, 어머니는 단지 식물의 씨가 대지로 들어가 자라는 것처럼 그것의 발육 장소를 제공할 뿐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여신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호전적이고 용맹한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성교 숭배는 본래 생식과는 무관하며, 성충동과 성행위를 통해 느끼는 고도의 성적 쾌감 속에 신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숭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교 숭배는 원시 시기 인간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영향은 그 당시 문화 생활의 여러 방면에 나타난다. 가령 그들이 거행한 '어제', '고기제'등과 같은 제사 활동은 모두 성교 숭배의 한 표현 양식이다. 제사 활동에 참가한 남녀는 야합함으로써 신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고 자손과 곡물의 번성을 기원했다.
이들은 성행위와 생식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성교 숭배를 생식 숭배와 유사란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성행위와 생식의 인과 관계에 대해 인식의 깊이를 더해 갔다. 이 두가지 숭배는 점점 하나로 합쳐졌고, 사람들은 성교에 대해 더욱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으며, 성교 숭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성교의 목적은 집안의 대를 이어갈 아들을 얻는 것과, 성행위를 통해 남성은 여성의 음기를 흡수하여 생명력을 강화시킨다는 양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후사 있는 문제를 중시한 이유는, 난링자란 종족 번창의 의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식이 없으면 윗 조상들이 '혈식'을 먹지 못하게 되고 제사를 받지 못하므로 후사는 중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제사가 끊어지면 후손과 조상을 연결해 주는 덕이 줄어든 조상이 후손에게 재난을 안겨 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묘당에서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사내아이를 생산하는 일은 조상들뿐만 아니라 살고 있는 자신에게도 유익한 일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이 대를 이을 자식을 중시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은 생식 숭배와 밀한 관련이 있다.
  이렇듯 중국의 성 풍속은 음양 문화와 깊이 관련되며, 생식 문화와도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농경 사회의 중요한 의색 행위였던 생식 의식은 여성에 대한 찬미와 숭배로 이어졌으며, 아울러 생식기와 성교자체를 숭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원시 시대에는 성적 관행에 대한 비밀이 유난스럽게 추구되지 않았으며, 성에 대한 어떤 관용적이고 무람없는 태도가 조심스럽게 유지되고 있었다. 성 숭배는  중국의 성 문화를 개방화된 논의 방향으로 이끌려는 전주곡이었다.

 

        제 2장 성 금기의 출현과 금욕적 성 문화의 탄생

      1. 성 금기의 출현
  인류가 사냥과 채집을 통해 동굴에서 공동 생활하며 재해나 야수의 습격에 대항하며 살아가던 시절에는 내부의 단결이 필수적이었다. 만일 구성원들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면, 무리의 존망을 위협하게 되며, 또한 수렵 인구의 감소로 인해 사냥에도 막대한 손실이 된다. 그래서 구성원 사이의 충돌을 차단시키는 일이 가장 절박하고도 절실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성 본능으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은 그 집단을 해체로 이르게 할 정도의 심각한 장애를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집단에서는 각 개인의 행위에 엄격한 제약을 가했다.
중대한 생산 활동의 준비 단계나 그 과정 중에 모든 남녀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데,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돌을 던져 죽이거나 물속에 빠뜨려 죽일 정도였다.
  성 금기 동안은 성교를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교제조차도
제한하였다.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거나 만나는 일, 그리고 여자가 만든 음식도 먹을 수 없도록 하였다.
  특히 월경기(이들에게 있어 피는 생명과도 같은 것으로서 필수적인 동시에 또 생명의 본질로 보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피가 있기에 피는 활력이나 재생을 부여하는 물질로 간주되었고, 수많은 종교 의식이나 죽은 자, 신령스런 제전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시 시기 인간들은 월경에 대한 이해 또한 거의 전무한 형편이었다. 그들은 단지 월경 또한 피의 아리종이긴 하지만, 피를 흘렸다고 하여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통을 느끼지도 않으며 몸도 쇠약해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알았다. 이들의 월경에 대한 무지는 결국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월경을 표현하는 용어로는 달마다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의 '월사', 규칙적인 흐름이라는 의미의 '경수', 매달 오는 손님이라는 뜻의 '월객' 등이 있다.)에 있는 여성들은 안전한 곳으로 격리시켜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도록 했다. 만일 이를 범한다면 신령스러운 것을 범하는 것과 같았다. 
 
    (1) 성 금기에서 초월한 두집단 : 사사와 사녀
  원시 사회에서 두개의 독립된 집단, 즉 모든 성년 남자를 포괄하는 집단과 여성과 아이들만으로 구성된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다.
  사유국이라는 나라는 남녀 두 집단으로 분리하여 남자 집단을 '사사'라고 하였으며, 여자 집단을 '사녀'라고 했다.

  i) 사유국이 있다. 제준(제준은 태양신의 이름인데, 대황 동쪽 들에서 중용, 사유, 백민, 흑치 네 나라를 낳았다. 제준은 동방이 은 민족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상제이다.)이 안룡('안룡'은 야광의 용 혹은 촉룡을 말한다. 촉룡은 살마 얼굴에 뱀의 몸을 한 신으로 온몸이 붉은색으로 구음을 비출 수 있다.
여기서 어둡고 캄캄하여 해가 없는 나라가 바로 사유국인 것이다. 따라서촉룡은 북방에 있는 광명의 신 안룡임을 알 수 있다.)을 낳고, 안룡이 사유('사유'에서 '사'는 주관한다는 뜻이고, '유'는 어둠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사유'란 어둠을 주관하는 신, 즉 현명을 말한다.)를 낳았으며 사유각 사사를 낳았는데 사사는 아내를 얻지 않았고 사녀는 남편이 없었다.([산해경]은 중국 고대의 지리서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완성되었으며, 수많은 고대인들의 민속, 전설, 신화 등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신화에도 반영되었다.)  

  ii) 사사는 아내가 없었지만 성행위를 했고, 사녀는 남편이 없지만 임신을 했다. 후직은 거인의 발자국에서 태아났고, 이윤은 속이 빈 뽕나무에서 태어났다.
  제준이 살고 있는 사유국은 남녀 두 집단으로 분리되었는데, 남성 집단을 사사라고 부르며 아내를 얻지 않았고, 여성 집단은 사녀라고 하여 남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한 차례 바라만보고도 느낌을 받아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사사가 장가를 들지 않았다는 것은 아내 없는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이고, 사녀가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남편 없는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에 '감'자는 중국 문화에서 성 관계를 나타내는 은어로 사용되었는데, 때로는 '함' 혹은 '감'등으로 쓰기도 했다. 첫번째 인용문은 중춘에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관계를 가져 임신한 것을 말하고 두번째 인용문은 구체적인 예이다.
  그리고 [산해경.해외서경]에서 '여자국'과 '장부국'을 구분지어 말하고 있는 것 또한 성 금기의 한 현상이다. 여자국은 무함의 북쪽에 있는데, 두 여인이 함께 살고 있으며 물로 에워싸여 있다. 그리고 장부국은 유조의 북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다.
  그러면 여자국에서는 어떻게 생식이 지속되었을까? [후한서.동이열전]에서는 "바닷속에 여국이 있는데 남자는 없다. 그 나라에는 신정이 있어 그것을 보면 아이를 낳았다고 전한다"고 했고, 곽박은 "황지가 있는데, 부인이 계곡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임신을 했다. 만일 사내아이를 낳으면 세 살 때 갑자기 죽었다"고 부연 설명했다. 또 [회남자]에는 '여자민'과 이웃한 곳에는 '장부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여자국과 장부국은 족외혼 습속에 따라 쌍방의 형제와 자매가 성교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 금기에서 제외된 때가 춘사였고, 이 춘사 때 야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야합은 위선적인 성적 욕망을 발산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2) 야합의 제도화
  1) 춘사의 의미와 야합의 탄생
  중국 고대에는 천지가 처음 열리자, 여와가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는 신화가 있었는데, 원시 시기의 초기 백성들은 강원이라는 대지 여신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녀가 낳아 기른 아들 또한 '직'으로 이름을 지었은데, 후에 흙을 쌓아 만든 '사'는 토지신이 되고, 대지가 낳은 '직'은 곡신이 되었으며, '사'와 '직'을 연결하여 '사직'이라고 하여 사회와 국가를 상징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의 고대 문명에서 '사'는 매우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동지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교라고 하고, 하지에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을 사라고 한다. '사'는 노촌에 세워진 네모난 단으로 지붕은 없고 담과 문만 있다. 지붕이 없는 이유는 서리와 이슬, 비와 바람을 맞도록 하여 천지의 기운에 통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운 임금은 먼저 백성들에게 사를 세우도록 했다. 계손이 거나라를 치려고 생각하여 경 땅을 점거하고 포로를 바쳐 사람을 제물로 호사에 제사지냈던 것도 이런 데서 비롯된다.  특히 춘사 의식이 행해질 때는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발산시킬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됐다. 사실 이것은 남녀간의 자유로운 애정 표현을 위해 마련된 것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식을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시경.대아.생민]의 "정결히 제사지내어 자식 없는 나쁜 징조 쫓아버린다"에 대한 전에서는 "불이란 제거한다는 말이다. 아들이 없음을 제거하여 자식이 있도록 구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반드시 교매를 세웠다"고 했는데, '교매'는 고매이다.)

  이 당시는 질서가 엄격하게 잡히지 않았으므로 남녀간의 성관계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송옥의 [초혼]에서는 초나라 풍속을 "남녀가 불러서 앉으면, 난잡하여 구분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면모는 "중산의 풍속은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을 이어 남자와 여자가 일체가 되어 기대니 진실로 쉴 틈이 없다"는 식으로 확대되었다.
  제나라 풍속에도 이런 것이 있다. 마을에 모임이 있으면, 남녀가 섞여
서로 상대방에게 술을 돌리고, 장기와 투호를 벌여서 상대를 구하고, 남녀가 손을 잡고 밤을 지새워도 징벌이 없었다.
  이렇듯 성 금기가 엄격하지 않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야합 행위를 풍속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중춘의 달에는 남녀가 만날 수 있게 했다. 이 시기에 자유롭게 성교를 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 만일 이유없이 명령대로 하지 않는 자는 벌을 주었다.
남녀들 가운데 짝이 없는 자를 만날 수 있게 했다.
  여기서 '분'은 서로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의 성생활을 금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남녀 사이에 마음이 통하면 달아나서 함께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는 셈이다. '중춘'은 결혼과도 관련이 있다. 옛사람들은 2월을 '매월'로 해석하여 "아들이 관을 쓰고 아내를 얻을 때이다."라고 했다. 한대 사람들 또한 2월을 '혼월'이라 했고, 2월을 고매에게 제사지내는 달로 삼았다는 기록이 [예기([예기]눈 [의례] 등과 함께 전국 시대 후기 나타난 것으로 윤리 제도를 구체적으로 제정했다. 이러한 책들은 또 혼인 에의에 대해서도 상세히 규정을 하고 있으며, 과거의 혼인 제도에 대해서도 풀이하고 있다. 이것은 낙후된 종법제 사상이 중국의 구체적 환경에서 나타난 것이며, 중국 전통 혼인 생활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이런 책에서 규정한 제도는 후에 정부가 제정하는 혼인 법률 원칙과 전통 사회의 혼인 도덕의 핵심이 된다.).[월령]에 보인다.
  봄 2월을 결혼의 적기로 삼은 까닭은 무엇인가? "결혼은 반드시 봄에 해야 한다. 봄은 천지가 교차하고 만물이 처음 탄생하며, 음양이 교합할 때"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양이 되고, 여자는 음이 되며, 음과 양의 교접은 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남녀의 결혼 또한 봄에 해야 되는 것이다.

  2) 야합의 장소였던 태상
  유가의 대성인 우임금은 30세가 되어도 결혼하지 못했는데, 후에 길에서 우연히 도산씨의 딸을 만나 태상에서 사통하여 부부가 되었다. '상', 즉 뽕나무는 본래 태양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태양수인 부상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에 대체물로써 길렀던 것이다. 우임금은 치수에 정성을 다하여 이 세상 어느 곳이든 발길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떻게 도산 지방의 여자를 취하여 태상에게 정을 통했을까?
  선진 시기의 여러 문헌에서, 사상에 관한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성왕과 탕왕의 후예를 송에 세우고 상림에서 제사를 지냈고," "연나라에 있는 조택은 제나라의 사직, 송나라의 임상, 초나라의 운몽에 해당하는 곳으로, 남녀가 즐기고 구경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소공은 "상산에서 제사를 올렸느데, 그곳의 나무를 베어 버리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뽕나무가 있는 숲은 남녀의 야합 장소이며, 야합 행위가 이루어지는 비교적 고정된 장소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로부터 '상림', '상간', '운몽' 등은 남녀가 자유롭게 성행위를 즐기던 음란한 장소를 지칭하게 되었다. 또 '난방'이라는 곳도 마을에서 남녀가 함께 놀던 공개된 장소로, 저녁이 되면 마을의 미혼 남녀들이 이곳에 모여 자유롭게 배우자를 골랐던 곳이다.([사원]에서는 '난방'을 고대의 부인들이 거주하던 향기나는 방으로 풀이되어 있는데, '난방'은 사실상 고대 혼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분' 혹은 '야합'은 춘추 시대 '중매 없이 결혼하는' 예법과 병행되어 온
풍속으로 [시경]에 적지 않은 작품에 남녀가 야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새삼 덩굴을 뜯는다. 매의 마을에서
  그 누구를 생각하나, 아름다운 맹강이라
  나를 상중에서 기다려, 상궁까지 마중나와
  기수까지 바래다 주네
  -[용풍.상중]
  동문엔 느릅나무, 완구에 상수리 나무
  자중씨의 아들이, 그 밑을 거니네
  활짝개인 아침에, 남녘 들판 찾아서
  삼던 삼 팽겨치고, 저자거리 거니네
  -[진풍.동문지분]
  진수와 유수의 두 강물은,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네
  사내와 여인들이 모여 들어서, 난꽃들을 꺾어 들었다
  여인이 가라고 하니, 사나이는 이미 보았다 하네
  다시 가 보오, 유수를 건너면
  넓고 즐거운 곳이 있소, 남녀는 손을 잡고
  즐거움을 맘껏 누리다, 헤어질 때 작약꽃을 정표로 보낸다.
  -[정풍.진유]
  [상중] 시는 남자가 약속을 하고 뽕나무 숲의 사로 밀회 가는 것을 노래한 시이다. 여기서 '상궁'은 고매신을 제사지내가 사의 제단이며 상태이다. 그리고 [진유] 시는 강둑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청춘 남녀가 서로 구애하고 성행위를 벌이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작약꽃'은 후대 문학 작품에서 여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대 문인 서견은 "정나라에 있는 진수와 유수는 남녀가 만나는 곳으로 노래를 부르며 서로 느낀다"고 했다. 또 [모시] 소서에도 이러한 모습이 보이는데, "백성들이 전쟁으로 궁핍하여 남녀가 때를 놓치면 기약하지 않고 만날 날을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고대가 성에 대해 한층 더 억압적이었다는 막역한 가설은 분명 유보되어야 한다.
 
  3) 야합 행위와 야합혼
  성인 공자는 야합의 산물이다. "옛날 혼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의 예절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자유롭게 성교를 나누었다고 하고 야합이라고 했다... 안씨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혼인을 하였으니, 어찌 육례 중 갖추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흘은 안씨와 화합하여 이산에서 기도하며, 그를 위해 기뻐했다." "숙량흘과 안씨의 딸이 이구에서 기도하고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구에서 땅을 쓸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기도하여 마침내 공자를 낳게 되었다. 때문에 야합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공자는 예의에 어긋난 출생이지만 그로 인해 당시 사람들의 비난이나 멸시를 받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사회적으로 야합이 허용된 때와 장소, 즉 춘사중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야합 행위는 야홉혼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야합혼은 결혼 예법을 어기고 남녀간의 애정으로써 결합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부부로 인정되지 않았다.
  남성이 '음분' 혹은 '야합'할 경우를 살펴보면, 예절에 따라 아내를 얻을 수 있었으며, 이미 아내가 있어도 다시 야합의 과정을 통해 첩을 얻을지라도 남편으로서의 지위를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성이 일단 야합 행위를 하면 남자 쪽에 아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천구인에게 딸이 있는데, 맹씨의 사당에 휘장을 치고 드디어 화자와
야합하자, 동료들이 따르는 꿈을 꾸었다. 청구 사당에서 맹세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서로 버릴 수 없다' 하였다. 희자는 그녀들로 하여금 원씨의 첩이 되도록 했다.
  또 초평왕이 공자였을 때 채나라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변방을 지키는
지위가 낮은 관리의 딸과 정을 통하여 부부관계를 맺였다. 이후에 초나라의 국세가 변화하여 공자는 돌아가 국왕이 되었고, 아들도 가리고 가서 태자로 삼았지만, 태자의 어머니는 결혼할 때 혼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변방에 남아 외로운 첩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춘추 시대의 공왕이 경수 가를 유유히 거닐때, 밀땅의 강공이 동행을 하였다.
세 명의 여자가 강공과 사통을 했다. 강공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반드시
그녀들을 천자에게 바쳐라. 짐승이 셋이면 군이 되고, 사람이 세 명이면 중이 되며, 여자가 세 명이면 찬이 된다. 천자는 사냥을 하여 일망타진하지 못한다.
군주가 출행할 때는 경의 지위를 뛰어넘은 후에야 비로소 수레에 오르고, 돌아올 때는 경의 지위를 뛰어넘은 후에야 비로소 수레에 오르고, 돌아올 때는 경의 지위에 이르지 못하면 수레에서 내린다. 도중에 사람들을 만나면 몸을 굽혀 인사를 하여 예의를 행한다. 천자도 감히 아버지가 같은 세 딸을 비빈으로 삼지 못한다. '찬'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아버지가 같은 세 딸이 당신과 사사로이 분하였으니, 너는 어떤 덕으로 이것을 감당하겠느냐? 천자는 이것을 부끄러워하는데, 하물며 너는 소인배로구나. 소인배가 아버지가 같은 세 자매를 처첩으로 삼았으니, 결국에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풍속은 한대에도 여전히 남았다. 예를 들면, "이 봄날 대회는 물에서 씻고 노닐며, 마시고 연회를 마친 후에는 짝을 지어 혼인을 했다." 또한 "매월 중순에 나이어린 여자들이 생황을 불어 서로 밝은 달빛 아래로 불러서 조화를 이루며 노닌다. 그날 밤은 즐기려고 생각하고, 이경이 된 후에는 짝을 지어 둘씩 손을 자고 어머니를 따라 서로 성교한다. 새벽이 되면 흩어진다"라고 했다.
  특히 연나라 땅에서는 야합 행위가 더욱 두드려져, "빈객이 지나가면
부녀자에게 모시고 잠을 자게 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날의 저녁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했다."
  한대 유적에 남겨진 몇몇 성 문물 중에 야합도는 매우 독특한 것이며,
우리들에게 하대의 성 개방 풍조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가령 사천
성도에서 발견된 야합도가 있다. 이 그림은 한 부녀자가 옷을 뽕나무 위에 걸어놓고, 광주리는 옆에 버리고 남자와 전라의 모습으로 나무아래에서 야합하는 모습이다. 또한 어떤  야합도는 전라의 한 남자가 있는데, 자리에 앉아 거대한 남근을 드러내놓은 채 손으로 잡고 있으며, 중앙에는 한 나뭇가지가 만들어져 있고, 위에는 잎이 늘어져 있다. 나무 아래의 두 사람 중 한 명은 위에 있고, 아래쪽에 있는 사람의 어깨 위로 말을 타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데, 남자는 위에서 생식기를 잡고 있고, 여자는 아래에서 두 다리를 올리고 남자의 어깨를 감싸쥐고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전라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후대의 무덤안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2. 금욕적 성 문화의 탄생
  우리에게 선진으로 알려진 시기에는 적어도 성을 성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쑥스러운 시대였고, 성 담론의 억압의 시대를 예고했다.

    (1) 내외의 법칙
  유가는 남녀 사이를 엄격하게 구분짓고 남녀간이 무절제한 교제를 금지할 것을 주장하여 금욕적 성 문화의 탄생을 가져왔다.
  군자는 색을 멀리하는 것으로써 백성들의 규율로 삼았다. 그래서 남녀간에는 주고 받는 것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 고모, 누나, 여동생이 이미 출가하여 친정에 오면, 남자는 그녀들과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과부는 밤에 울지 못한다. 부인이 질병에 걸렸어도 안부만 물을 뿐 그 질병에 관해서는 묻지 못한다. 이로써 백성들을 막는다. 백성들이 음탕하면 다른 종족에 의해 혼란스럽게 된다.
  '남녀간에는 주고 받는 것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남녀간에
내외를 하여 손과 손으로 물건을 전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물건을 전했을가?
  공자는 남쪽 지방으로 여행을 하던 중 아곡이라는 지방의 한 물가를 지나게 되었다. 그 물가에서 한 처녀가 망령된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진이라는 귀고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공자는 물가 주변에서 잠시 쉬면서 제자 자공에게 그녀를 시험해 보도록 했다.
  공자는 우선 자공에게 술잔을 하나 꺼내 주면서 그 처녀에게 말을 건네
보도록 했다. 자공은 다가가 말했다.  "나는 북쪽 동네에 사는 사람입니다. 남쪽 초나라까지 가려는데, 지독한 더위로 물을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이 잔에 물을 떠 주시면 마음을 진정시킬 수있을 것 같습니다."
  처녀가 말했다.  "이 아곡의 냇물은 굽이져 있습니다. 이 냇물의 물은 맑은 곳도 있고 흐린 곳도 있으며 바다로 흘러갑니다. 마시고 싶으면 드십시오. 어찌 저와 같은 여자에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는 자공의 잔을 받아 물의 흐름을 거슬러 물을 떠서 엎고, 다시 흐름을 따라 물을 떠서 무릎을 꿇어 냇물의 둔덕 모래 위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직접 드리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자공이 돌아가 공자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예절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남녀수수불친'은 그 당시 남녀간에 지켜야 할 예절이었다. 맹자도 이 규율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맹자와 순우곤의 문답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순우곤이 말했다.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것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예절입니까?' 맹자는 '예절이다'라고 했다. 순우곤이 또 말하기를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끌어 잡아당기겠습니까?'라고 하자, 맹자는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끌어 잡아당기지 아니한다면 이는 승냥이와 이리 같은 짐승이다.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예절이고,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손으로 끌어 잡아당기는 것은 권도(임기웅변의 조치)이다'라고 했다.
  맹자는 남자와 여자가 직접 손을 잡지 않는 것이 예절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불가피한 경우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승냥이와 이리 같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예기.내칙]에서는 남녀간의 음란함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안과 밖이
공동으로 우물을 쓰지 않으며, 목욕을 함께 하지 않고, 잠자리를 통하지
않으며, 여가를 함께 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옷을 같이 입지 않는다.
집안이 말을 밖에서 하지 않고 바깥 일을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 밖에도 남녀가 일곱 살만 되면 동석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음란함을 막으려 했다.
 
    (2) 덕과 색은 대립적 범주인가
  초기 유가 철학에서 '덕'과 '색'은 대립적 범주가 아니었다. '색'과 '덕'의 관계는 어원학적 고찰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공광거는 전문과 갑골문의 상형에 의하면, '색'은 사람을 자기 무릎 위에 놓는 것으로, 그 본의는
'여색'이라고 하고, 마서륜은 '색'자의 모양은 사람이 사람 위에 있는 것이므로 남녀가 교접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여하튼 '색'은 주로 '여색', '여성적인 매력'을 나타낸다는점에 이의가 없다. 흥미 있는 것은 '덕'도 '성적인 매력'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색'의 동의어가 된다. 예를 들면, 주나라 천자가 오랑캐 왕의 딸을 후비로 맞이하려고 하자, 부진이 막고 나서며 "여자의 덕(성적 매력)은 한이 없고, 기혼녀의 원망은 끝이 없다"라는 말을 했는데, 여성의 매력이 끝이 없으면 이로 인해 원망도 끝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또 사마천의 [사기.진세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이가 돔아 나와
제나라에 이르자, 제환공은 종녀를 그에게 시집 보냈다. 중이는 제나라 여자를 사랑하여 그 곳에서 5년간 안주했다. 제나라 여자는 중이와 함께 도망온 신하들이 중이는 진나라로 돌아가 나라를 얻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를 꾸짖어 '한 나라의 공자가 어렵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 명의 선비들이 당시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생각하는데, 당신이 나라의 반환을 서두르지 않아 신하들을 수고롭게 하면서 여덕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저는 당신 때문에 부끄럽습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여덕'은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의 매력을 의미하고, 또 아름다운 미모를 통해서 남성을 꼼짝 못하게 하는 여자의 능력을 말한다.
  [논어] '자한'편과 '위령공'편에 "나는 덕을 좋아하는것이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음을 보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위령공'편의 이 글 앞에 '이의호'라는 감탄의 말이 있다. 이것은 '호덕'과 '호색'이 대립 관계에 있음을 제시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공자는 사람들이 덕을 좋아하는 것은 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본성에서 나올 수 없음을 감탄한 것이다.
이로부터 덕행에 대한 열애는 반드시 후천적인 교육과 자아 수양으로부터 나오지만, '호색'이 천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호색'은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초기 유가 저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견해이다.

  i) 색을 좋아함은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이다.

  ii) 먹는 것과 색은 본성이다.

  iii) 음식과 남녀는 인간이 크게 갖고자 하는 바이다.

  iv) 군자에게는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다. 젊었을 때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색에 마음을 두는 것을 경계하라.

  또 [대학]에서 "이른바 그 마음을 진실되게 하는 자는 스스로 속이는 일이 없다."라고 한 것 또한 인간의 '호색'에 대한 것은 본성에서 나옴을 비유했다.
'호색'은 인간의 본성으로 '덕'과 병행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호색은 왕과 백성이 함께 누려야 한다고 하면서 '호색'을
성욕과 유사한 개념으로 파악했다. [맹자.양혜왕하]에는 맹자가 제선왕에게 '왕도'를 실행할 것을 힘주어 말하지만, 제선왕은 그 말에 난색을 표하며, 자기는 '호용', '호화', '호색'하여 안된다고 한다. 맹자는 이 세 가지에 대해 하나하나 변론을 제기하는데, 특히 '호색'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대왕(주문왕의 할아버지)은 여색을 좋아하여 자기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시경]에서는 '고공' 단보가 아침에 말을 달려 서쪽 물가를 지나 기산의
언저리에 이르렀다. 이에 미녀와 함께 와서 궁궐 자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때 안으로는 불만을 품고 독수공방하는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홀아비가 없었습니다. 왕이 여색을 좋아하여 그것을 백성들과 함께 한다면 왕에게 있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왕여호색 여백성동지'는 왕과 백성이 똑같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 '호색'이라는 것으로, 상당히 독창적인 견해가 아닐 수 없다. 통치자 자신이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생각한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만족하도록 해야 하며, 이렇게 할 수 있으면 비록 '호색'하더라도 왕도의 실천에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는 성적 욕구는 식욕과 마찬가지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민족을 얻어야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자에게 "식욕과 색욕은 본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의 어느 통치자도 맹자의 이 말에 귀기울여 백성들과 그 즐거움을 함께 하지 않고 자신의 색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음탕한 생활을 했다.
 
    (3) '음'의 개념
  1) [시경]은 음시인가
  [시경.국풍]은 거의 대부분이 정가와 연가이다. [시경] 가운데 '국풍'은
161편으로 [시경]의 3분의 1을 차지하는데, 그 가운데 남녀 관계를 다룬 것이 79편이고, 대부분의 작품은 여성들의 희로애락과 이상향 등의 묘사를 통해 애정 생활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풍'류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정풍의 애정시이다. 순자는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은 사람의 마음을 음란하게 한다"고 했고, [예기.악기]에서는 "정성은 음란함이 넘쳐 흐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며, 허신의 [오경이의]에서는 "정나라 시 21편 중 부인을 말한 것이 19편이다. 때문에 정성은 음란하다"고 했다. 주희는 [시집전]에서 국풍의 시 가운데 '음분지사'로 생각되는 20여 수를 비판하고, 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나라의 위나라의 음악은 모두 음성이지만, 시를 살펴보면, 위나라 시는 39수 중 음란한 시가 4분의 1이고, 정나라 시는 21수 중 음란한 시가 7분의 5이다. 위나라 시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말로 이루어졌지만, 정나라 시는 모두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말로 되어 있다. 위나라 사람에게는 비판과 풍자의 의미가 있었지만, 정나라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나라 소리의 음란함은 위나라보다 심하다. 그래서 공자는 각 나라를 논하면서 유독 정성만을 경계하도록 하고 위나라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에는 국풍의 정시는 민가라는 설이 정설화되었지만, 주희는 봉건 예교의 죄악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주희가 [시경] 시대의 배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공자의 사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견해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주희 본인은 공자의 산시설을 믿었고, '방정성'은 [정풍] 속의 정가에 대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공자가 말한 '정성음'의 원의는 정성이 음탕한 말이라고 배척한 데 보이지 않으며, 주희가 말한 '음분지사'라고 할 수 없다.
이 점은 공자의 몇 가지 언행을 통해 증명될 수 있다.
  첫째, 공자가 [시경]을 산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시 삼백편은 한마디로 말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공자의 [시경]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고대 시집과 유가의 기본 관점과의 일치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만일 정나라와 위나라의 시가 음란한 말로 이루어졌다면,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가 '음분지사'도 '사무사'라고 본 것은 주희와 같은 도학가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 같다. 또 공자는 "관저는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슬프지만 상심하지는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시대서]의 "감정에서 나와 예의에서 그친다"는 말과 관련이 있으며, 모두 올바른 정욕에는 절제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견해는 또 [순자.대략] 편의 다음 글에도 보인다.
  i) '국풍'은 색을 좋아한다. [전]에서 말하기를 그 정욕을 채움에 있어
그침을 어그러지지 않게 했다. 그 경계함은 금석에 비할 수 있으며 그 소리는 종묘 안에 있을 수 있다.
  ii) '국풍'은 색을 좋아하지만 음란하지 않고, '소아'는 원망하고 비방하지만 어지럽지 않다.
  [시경]의 국풍에 대한 이런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정욕과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을 선진 유가들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이었다.
  둘째, [논어.양화]에서 "공자가 백어에게 말했다. '너는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였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는 담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주남'과 '소남'은 총 25편인데, 그 중 언정시는 15편으로 비교적 함축적이다. 몰론 이 중에도 정성처럼 열정과 대담성을 지닌 작품이 있지만, 그것을 음탕한 것으로 간주하지 아니하고 칭찬을 했다.

  그러면 공자가 말하는 '정성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고대에는 '음'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i) 음악에 지나침이 없다.

  ii) 그 색이 지나치지 않다. 소 : 음이란 지나친 것이다. 그 도량이 지나친
것을 음이라 한다.

  iii) 소 : 음이란, 색욕이 지나친 것이다.

  iv) 제나라에서는 팔정으로 음란함을 방지했다. 음이란 사치가 지나친 것을 말한다.

  위의 글로부터 보면, '음'은 단지 '과도함'이라는 뜻으로 '음란'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남녀 관계에 색욕이 지나침을 가리키는 것으로 색욕 자체를 배척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하희처럼 음탕한 여자도 '불상'하다고만 했을 뿐 비난하지는 않았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적어도 춘추 전국 시대에는 음란한 도덕을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또 '음'자는 정당하지 않은 성관계, 간통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 연애 같은 것도 음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심지어는
부부간의 합법적인 성생활에 있어 약간의 성적 기교를 강구하거나 생육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해 진행하는 성생활도 모두 음한 것으로 보여졌다. 또 부부의 성생활이 시간, 장소 등의 금기 사항을 범했을 경우도 음한 것이었다. 나아가 '음'자는 동사와 명사뿐만 아니라 형용사로도 쓰여 '음'자의 수식을 받은 사물은 똑같이 추악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색정 작품 연정 소설, 방중술 저작, 연애 희극 등은 음서로, [서상기], [목단정]과 같이 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희극을 음극이라 했다.)
  공자가 [시경]의 작품을 평하여 '정성음'이라고 했을 때의 '음'자도 이러한 뜻으로 쓰였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성'에 관해 두 곳에서 언급했다.
  안연이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묻자, 공자는 말했다. '하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고, 자나라의 예관을 쓰되, 음악은 소와 무를 쓰고, 정나라 노래는 몰아내고, 간사한 자들을 멀리한다. 정나라 노래는 음탕하고 간사한 자들은 위태롭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했다. '자줏빛이 빨간빛을 탈취하는 것을 미워하고, 정나라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예리한 입놀림이 나라를 뒹엎는 것을 미워한다.'
  공자는 여기서 음악적인 측면에서 '정성'을 말했다. 공자가 '정성'과
상대적으로 말한 '소'는 순나라 때의 음악으로 절주가 편안하고, '무'는 주나라 초기 무왕의 음악으로 소박하고 단조로우며, 아악은 묘당 음악이다. 이런 음악은 정성에 비해 상고 시대 음악이라 할 수 있고, 정나라 음악은 새로운 음악이다. 이 새로운 음악은 소리가 명쾌하고도 좡를 이루며, 끝없이 변화하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시경] 구법의 변화에서도 이러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소이나 아 종류의 시는 구식은 변화가 작고 거의 4언 격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 정풍은 구식의 변화가 매우 크며, 21수 가운데 4언식을 취한 것은 9수뿐이고, 그 나머지는 3, 4언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치의] 시에는 1, 4, 5, 6언식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구식의 변화로 인해 심한 기복이 있게 되고 감정이 끓어올라 생기가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정성'을 싫어한 것이다.
 
  2) 사회적 도덕 요구에의 부합
  중용의 가르침에 충실한 유가는 음악에 있어 중화지성을 주장하고, 오성에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왕의 음악은 이것으로 모든 일을 절제하기 때문에 오성의 절주가 있어 빠름과 더딤, 근본과 끝이 서로 미처 조화를 이룬 이후에 소리가 내려오며, 오성이 내려와 멈춘 후에는 다시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다시 타면 복잡한 수법과 시끄러운 음이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귀를 막게 할 수 있고, 평정함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군자는 듣지 않는다.
 이로부터 보면, 공자가 말한 '정성음'의 '음'은 정성의 절주가 많이 변하여 지나치게 기교를 부렸음을 지적한 것이지, 그 내용이 음란함을 질책한 것은 아니다. 공자와 동시대인인 오나라 공자계찰은 정성을 들은 후, "아름답구나!
아름답구나"를 연발하였고, 정나라의 자산이 진나라 사자 조선자를 접대하는 연회에서 다섯 명의 신하와 정성을 노래하자, 조선자는 "정나라와
가깝구나"라고 칭찬했다. 전국 시대 전기의 위문후 또한 "정나라와 위나라의 소리를 들으면 고달픔을 모른다"고 했다.
  공자는 도학이 흥성한 시대에 살지도 않았다. 공자는 남녀의 연정을
노래하면서 순정한 사상을 잃지 않음을 본 것이다. 공자는 [관저] 시를
칭찬하여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슬프지만 상심하지는 않는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분명 노골적인 애정시이다. "중매를 거치면 아내가 되고 자유롭게 성교를 나누면 첩이 된다"고 한 것도 '분'을 용인한 것이다. 또 우리는 여기서 처와 첩의 지위가 다르며, 맞이하는 방법 또한 다름을 유추할 수 있다.
  유가의 절욕 사상은 순자에게 이르러 비교적 계통적인 이론으로 형성된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 욕망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요, 감정이란 그 성의
본질이며, 욕망이란 감정의 반응이다"라고 했으며, 또 "눈은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고,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좋아하며, 입은 맛좋은 음식을 좋아하고, 마음은 이익을 좋아하고, 육체는 편안하고 유쾌한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성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바깥 사물의 자극을 받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일부러 그렇게 노력하여 생기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순자는 인류의 성정을 위반하는 '지욕', '과욕' 등을 반대했다. 순자는
노자가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거욕'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무욕'하게 하는 것은 무능한 것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의 욕구를 바른 데로 향한게 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국가를 태평스럽게) 다스리는 일을 논함에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욕망을 아주 버릴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사람의 욕망을 바른 길로 인도해 나갈 줄은 전혀 모르고, 다만 욕망이있다고 하는 여기에만 마음을 썩이고 있는 사람이다."
  순자는 사람들의 욕구를 인정하였지만, 이런 욕구를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절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중리' 표준을 제시했다. 이 '중리'는 욕구가 사회의 도덕 규범에 부합하는 것을 말한다.
  또 순자는 '거욕'도 반대하고 '죵욕'도 반대했다. 그는 인간된 도리는 응당 기본적인 것에 만족하고 예의에 부합하는 욕망을 추구해야만 명예, 지위, 금전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울 때에는 빛깔이 보통에 불과한데도 그것으로 넉넉히 눈을 즐겁게 할 수있고, 음악 또한 보통에 불과한데도 그것으로 넉넉히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으며, 거친 밥과 나물국으로도 넉넉히 입을 즐겁게 할 수 있고, 굵은 베옷과 삼신으로도 넉넉히 몸을 즐겁게 할 수 있으며, 또 좁은 집에 갈대발을 치고 거적자리를 깔고, 그 위에 자리하고 앉았어도 그것으로 넉넉히 몸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순자의 이러한 생각은 잡가 계열에 속하는 여불위에게
받아들여진다.(여불위는 [여씨춘추]에 '귀생', '정욕', '위정', '대락'등의
편을 두어 순자의 주장을 심도있게 논의하였다.)
  하늘은 사람을 낳고 그로 하여금 탐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귀가 다섯 가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눈이 다섯 가지 색깔을 보고 싶어하며, 입이 다섯 가지 맛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의 정이다. 이 세 가지는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어리석은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 똑똑한 사람과 못난 사람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를 욕심내는 것은 한결같아서, 비록 (경작 방법을 가르친) 신농, (갖가지 기술을 가르친) 황제와 같은 성인들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욕심은 걸.주와 같은 폭군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각종 욕구들이 모두 합리적은 것은 아니다. [여씨춘추.귀생]에서는 사람들의 각종 욕구는 '귀생'을 전제로 해야만 '휴생'할 수 없으며, '생'에 해롭다면 욕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양생론과 방중술의 서단
  '무욕'적인 태도로 각종 욕망을 대할 것을 주장했던 것은 도가였다. 즉
"언제나 욕심이 없게 하고," "탐날 만한 것은 보이지 말며," "욕심을 줄여라"고 했다. 노자는 '무욕'에는 많은 장점이 있으며, 욕심이 없으면 구하는 것이 없고, 구하는 것이 없으면 번뇌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자는 그의 양생론에서 성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i) 덕이 후한 사람은 갓난아이에 비교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독한 벌도
쏘지 않고, 무서운 호랑이도 발톱으로 할퀴지 않으며 사나운 독수리도 채가지 않는다.
몸의 뼈가 약하고, 힘줄이 부드러워도 손으로 잡는 힘은 세다. 아직 암컷과 수컷의 교미를 모르지만 자기가 일어나는 것은 정기가 지극한 증거이다. 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에 순응하여 화기가 지극한 증거다.
화기를 지극하게 하면 영구히 변치 않는 도에 이른다. 이 극진한 경지를 알 때에 밝은 지혜라 한다. 생만을 위하면 마침내 제 명에 죽지 못한다 하고, 마음이 기운을 심부름시킬 수 있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사물이 성장하면 노쇠하는 것을 영구불변의 도가 아니라 한다. 영구불변의 도가 아닌 것은 길이 지속 할 수 없다.
  ii) 사람이 형체의 원형이 도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연의 기를
받아 몸을 부드럽게 하여 아기와 같을 수 있겠는가?
  노자는 중국 방중술의 시조로 추존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부모의 성교로부터 산생되며, 성교의 근원은 정기에 있다. 노자는 어린아이가 생명력이 가장 강하며, 무지무욕, 무외무구하다고 하였다.(전국 시대 초기 도가로는 양주가 있다. 도가 계열의 양주는 양자거 혹은 양생이라고도 하며, 찾아볼 만한 사적은 적다. 그의 사상과 주장은 [맹자], [장자], [순자], [한비자],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 보이며, 후세 사람들은 [열자.양주] 편은 위진 사이 사람의 작품이라고 고증했지만 크게 믿을 만하지 못하다. 노자의 '무욕'과는 상반되게 종욕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이론의 핵심은 '위아'이다. 양주가 종용가을 주장하는 첫번째 이유는 '욕'은 자연적인 욕구이므로, '미후', '성색'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자연을 따르고 인성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인생이란 짧고 고통의 연속인데, 만일 즐거움을 즐길 때를 놓친다면 이후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귀한 자나 천한자, 혹은 현명한 자이건 어리석은 자이건 똑같이 태어나 죽는다는 점이다. 즉 살아 생전에는 명예상의 차이가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모두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명예를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즐기지 않는 것은 덧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 아이는 근육과 골격이 유약하지만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있으며, 또 성행위를 모르지만 작은 음경이 자주 발기하는 것은 그의 정기가 왕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때문에 노자는 무욕의 양생 방식을 제창한 것이다.
  노자의 무욕 사상은 큰 영향을 미쳐 장자에 의해 이렇게 계승된다.  천하 사람이 숭상하는 것이란 부와 귀, 장수와 명예이다. 즐기는 것이란 몸의 안락,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예쁜 여자, 황홀한 음악이고, 깔보며 싫어하는 것이란 가난과 비천, 요절과 나쁜 소문이다. 세상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이란 몸이 편안치 못함, 입이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함, 몸이 아름다운 옷을 걸치지 못함, 눈이 예쁜 여자를 보지 못함, 귀가 황홀한 음악을 듣지 못함 등이다. 만약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크게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이렇듯 그들이 육체를 위해 하는 짓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신안', '후미', '미복', '호색', '음성'을 추구하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지만, 최후에는 고통스러워하는데, 그 이유는 만족할 만큼 추구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런 욕망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뜻이다.
장자는 진정한 쾌락은 청정무위이며, 어떠한 쾌락도 추구하지 않는
'지락무락'이라고 생각했다.  장자는 죽음보다 삶을 중시하지 않았고, 신체와 관련된 양생법을 배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상 장자가 이러한 양생법을 모두 배척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적어도 호흡과 관련된 몇가지 방법만은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장자.재유] 편에서는 황제가 스승인 고아성자에게 몸을 다스리면 장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시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보려 하지도 말고 들으며 하지도 말며 정신을 안에 간직한 채 고요히 있으면 육체도 저절로 올바르게 될 거요. 반드시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하여 당신의 몸을 지치지 않게 하고 정신인 흔들리지 않게 하면 장수 할 수 있소. 눈에  비치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으며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당신의 정신을 지키게 될 것이고 육체는 곧 장수하게 될거요. 당신의 안의 것을 소중히 삼가고 밖에 대한 지식을 막으시오. 지식이 많으면 일을 망치는 법이요. 나는 당신을 위해 지극히 밝은 태양에까지 올라가 그 순수한 양기의 근원에까지 이르겠소.

  위 글에서는 절대적인 평정이 강력한 욕망으로부터 정기의 소모를 막아 수명을 증진시킨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장자는 순수한 정신적인 불사를 추구한 것이다.
  방중술의 본래 의도는 음양의 화합을 원칙으로 하여 정력의 손실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방중술은 남녀 모두 상당한 경지에 이른 도교 수행자인 경우에 한해서 양쪽 모두 이익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일부 수행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어리고 미숙한 여성을 상대로 하여 그녀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연시키려고 하기도 하여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제 3장 도덕성의 요구와 정절 관념의 확립

      1. 남존여비의 전형 : 삼종지도와 사덕지의
  유가는 건전한 가족 제도를 바탕으로 확립된 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유가에서 가정은 국가의 축소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남자는 한 가정을 인솔하는 자로서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여자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위치에 있다. [시경.사간] 중 다음 시는 남녀의 지위상의차이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아들을 낳으면 침대에 뉘어놓고
  좋은 옷을 입혀 구슬을 가지고 놀게 한다
  울음소리 쩡쩡 울리니 붉은 슬갑 고운 옷 입은
  집안의 가장이 되겠네
 
  딸을 낳으면 땅에 뉘어놓고
  포대기로 싸주고 오지 실패 가지고 놀게 한다
  잘못도 그른 짓도 않으니 오직 술과 음식 얘기하여
  부모님 걱정 끼치는 일 없겠네

  이 시에 보이는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남존여비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남성 본위의 예교가 형성됨에 따라 여성에게 유순함과 부덕을 요구하게 되었다. 요조숙녀는 여성미의 표준이다. [시경.주남.관저] 시를 보자.

  구욱구욱 물수리는
  강가 숲속에서 우는데
  아리따운 아가씨는
  사나이의 좋은 짝이라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찾노라니
  아리따운 아가씨
  자나깨나 그리네
  그리어도 얻지 못해
  자나깨나 생각하니
  그리움은 가이없어
  이리저리 뒤척인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따노라니
  아리따운 아가씨
  금실 좋게 벗하고 싶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고르노라니
  아리따운 아가씨
  풍악 울리고 줄기고 싶구나


  이 시의 주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예컨대, 후비의 덕을
칭송한 것이라든지 신혼을 축하하는 시라든지. 그러나 아리따운 아가씨를 그리는 젊은이의 애정시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첫 장에서는 한 남자가 강가에서 물수리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자기의 좋은 짝이 도리 아리따운 아가씨를 생각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 남자는 훌륭한 집안의 젊은이로 종묘에 제사지낼 때 슬 마름풀을 따러 강가로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장에서는 마름풀을 찾으면서도 여전히 아가씨 생각에 골몰한다. 세번째 장에서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행복하게 살 날을 상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경모하던 여자의 표준을 엿볼 수 있다.
여자는 '요조숙녀', 즉 외형미와 내재미를 모두 갖추어야만 하고, 남자는
'군자', 즉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덕과 재능이 있으며 온유해야
한다는 말로 주로 내재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이 이와 같은 존재로 인식된 까닭은 무엇인가? [대대예기]에서는 이렇게 보았다. '여'란 순종하는 것이고, '자'는 번식하는 것이다. 여자란 남자의 가르침을 따라 그 의리를 신장시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백호통]에도 '부'란 복종하는 것으로, 예절로써 굴복하는 것이라고 하여 여자의 지위는 비천하고 종속적인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독립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봉건 예교 사회에서 말하는 '부덕'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일이종',
'삼종사덕' 등이다. 즉 "부녀자가 사람을 따르는것은 어려서는 부형을 따르고, 결혼해서는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 특히 '부덕'에서 강조하는 것은 여자의 순종이었다. "여자가 시집갈 때에 어머니가 전송하여 문간까지 가서 신신당부하기를 '너의 시집에 가거든 공경하고 조심조심하여 지아비의 뜻에 어김이 없도록 하라'고 하는데, 순종하는 것을 올바른 길로 삼는 것은 부녀자의 도리이다."
  그리고 여자가 남편을 대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녀는 옷걸이를 함께 쓰지 않는데, 여자는 감히 남편의 옷걸이에 걸지
않으며, 감히 남편의 상자에 간수하지 않고, 또 남녀는 감히 목욕간에서 함께 목욕하지 않는다. 남편이 집에 없을 때에는 베개를 상자에 놓고 대자리와 방석은 그릇에 넣어 이것을 간직해야 한다. 연소자가 어른을 섬기고, 천한 자가 귀한 자를 섬기는 것은 모두 이와 같다.
  이러한 원칙은 유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후에 [예기]가 경전으로
굳어지면서 여성은 더욱더 구속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불평등했음을 확연히 말해 주고 있다.(이 시기 여자들은 개인 이름이 없었다. 부녀자의 호칭은 자를 성과 함께 쓰거나 , 부친의 성을 따라 위공희, 진조희 등으로 불렀고, 또 아버지의 작위를 따라 제상강, 노진희 등으로 불렀으며, 아들을 다라 진하희, 송경조 등으로 불렀다.)
  이 때문에 남녀간의 유별이 중시되었다.
  비록 부모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때라도 이것을 듣는 것같이 하고, 부모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때라도 이것을 보는 것같이 한다. 높은 곳에 오르지 않고
깊은 곳에 임하지 않는다. 밑으로 떨어져서 몸을 다칠까 두렵기 때문이다.
함부로 남을 흉보지 않는데 이는 참소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 함부로 웃지 않는데 이는 아첨에 가깝기 때문이다... 옆에서 귀를 기울려서 남의 대화를 엿듣지 말며, 소리쳐서 남에게 응답을 하지 말고, 곁눈질해서 보지 말며, 게을리하여 황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은 여자들이 바로 설 수 있는 규범이다. 이러한 것을 지킨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여자는 시집가기 저부터 시부모를 섬기는 방법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i) 시부모에 대한 며느리(본래 며느리를 뜻하는 '식부'는 합성어이다. '식'은 남편의 부모에 대한 칭호이고, '부'는 남편에 대한 호칭이다. '식'은 '부' 앞에 있고, '부'는 '식' 뒤에 있어 남자가 아내를 맞이하면 먼저 부모를 대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남편은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다.)의 예법은 남자가 부모에게 하는 예법과 같다. 첫닭이 울 때 일어나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 머리를 빗고서 사로 머리를 싸 쪽을 찌고 비녀를 꽂고 술을 단 다음 옷을 입고서 큰 띠를 띤다. 그런 다음 허리 왼쪽에 헝겊과 수건과 작은 칼과 숫돌과 소휴와 금수를 차고, 오른쪽에는 바늘과 바늘통과 실과 솜을 찬다. 또 대휴와 목수를 차는데 남자와 다른 것은 향낭을 몸에 지닌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신발을 들메끈을 달고 이것을 신는다. 남녀 모두 아침 준비를 마치면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의 방으로 가야 한다. 방에 이르러서마음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입고 계신 옷이 따뜻한지 추운지, 몸에 아픈 곳은 없는지 가려운 데는 없는지를 묻고서 아프고 가려운 데가 있다면 공손히 이를 억누르거나 긁어 주어야 한다. 또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이 출입할 때에는 앞에서 혹은 뒤에 따르면서 공손히 부축해 드리며, 세숫대야를 올릴 때에는 나이가 어린 자가 대양를 받들고 연장자가 물을 가지고 가서 대야에 따르기를 청해야 한다. 부모님이나 시부모님께서 세수를 끝마치면 수건을 올리고 다음에 원하는 음식을 묻고서 공손히 올려야 하는데 이때 안색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ii) 며느리가 시부모가 있는 곳에서 시중을 들 때에는 시부모가 사실에
가라고 명하지 않으면 감히 그 곁을 물러나지 않는다. 또 며느리는 장차 어떤 일이 있을 때에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시부모에게 물어서 처리해야 한다. 며느리는 사사로이 재화를 가질 수 없고 사사로이 저축할 수도 없으며 사사로운 기물도 없어야 한다. 또 감히 남에게서 사사롭게 물건을 빌려서도 안되고 남에게 사사로이 물건을 주어도 안된다.
  이러한 점은 먼저 공자의 여성관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공자는 비록 그 당시 여성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구체적은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다루기가 어렵다. 너무 친밀하게 대하면 방자해지고, 너무 거리를 두면 적의를 품게 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의 낮은 위치를 알게 해 준다. 공자의 제자나 주석자들은 공자의 여성관을 좀더 구체화시켜 여성이란 남성에게 뒤떨어지는 하잘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최대의 임무는 남편과 시부모를 잘 받들고 사내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이것은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만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상 허신이 쓴
[설문해자]의 '남부'에는 '남', '구', '생' 세 글자뿐인데, '여부'에는 238자나 있다. '여'는 상형자이다. 갑골문의 '여'는 무릎을 끓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앉아 있는 여자 형상이다. 이 글자의 큰 특징이라면 균형을 잃을 만큼 큰 유방이라고 할 수 있다. 금문의 자형은 몸과 머리가 연결되고 다리를 똑바로 세운 모습으로 앉은 자세가 없어졌다. '모'자 또한 상형자로 가슴 앞에 점 두개를 더해 유방을 나타냈다. 이것은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가치가 가장 중시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고대 중국 여성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이나 토총을 쌓아 만든 '거석 문화'를 보아도 여성, 즉 땅의 어머니의 유방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문의 '황천'은 남성을 말하고, 이와 상대되는 배우자 '후토'는 여성을 가리킨다. 갑골문 중 '토'자는 형체가 완벽한 유방 상징물로서, 땅의 젖을 뜻한다. 큰 돌이 위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은 지모 신의 유방을 상징한다.
  유향으로부터 100년 후, 반소(반소는 반표의 딸이고 반고의 누이동생이다.
반표와 반고는 모두 한왕조의 저명한 사학가였기 때문에 반소 가학의 연원은 저명한 여재자이다. 그녀는 14세 때 조세숙에게 시집갔지만 남편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재혼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박학과 문체로 명성을 떨쳤다. 후에 화제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여 황후, 귀인 등의 교육을 담당하여 조대가로 불렸다. 반고가 [한서]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그녀가 조서를 받아 완성시켰다.)라는 자가 있었다.
  반소는 [칠계]를 지었는데 남존여비, 부위처강, 삼종사덕 등과 같은 전형성이 있다. 유향의 [열녀전]이 몇몇 사례를 제시하여 여성의 표준으로 삼은 것이라면, 반소의 [여계]는 남성 위주의 규범과 이론을 체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여계]는 모두 7편의 1,600자로 이루어졌다. [여계]에는 '비약', '부부', '경신', '부행', '전심', '곡종', '화숙매' 등이 있다. 이 책에서는 여자의 '삼종지도'와 '사덕지의'를 제시하였으며, 이 책을 꿰ㄸ고 있는 사상은 남존여비이다.)
  그 중 "옛날 여자 아이는 태어난 사흘이 되면 침대 아래 눕혔다... 여자가 비촌하고 약하며 주인 아랫사람임을 밝힌 것이다"라고 했으며, "음양은 성질이 다르며,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행동한다. 양은 강함을 덕으로 삼지만 음은 부드러움을 쓰임으로 삼는다. 남자는 강함을 귀하게 생각하지만, 여자는 약함을 아름다움으로 여긴다"라는 말이 있다.
  '삼종' 가운데 남편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렇다.
"지아비는 다시 아내를 맞는 도의가 있지만, 부녀자는 두 번 결혼하는 법이 없으므로 지아비는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달아날 수 없듯이 지아비를 어길 수 없다. 신을 어기는 행실을 하면 하늘이 벌을 내리고, 예의에 허물이 있으면 지아비는 그녀를 가벼이 대한다. 그래서 지아비 섬기는 일을 하늘을 섬기는 것처럼 하고, 효자가 아버지를 섬기고 충신이 군주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한다." 이처럼 반소의 [여계]에서는 여자를 남자에 종속되는 존재로 보았다. 반소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교육 목적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할 일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또한 반소는 부녀자의 생활에 대해 하나의 총칙인 '사덕', 즉 부덕, 부언, 부용, 부공을 세우기도 했다.) 
  남성들은 아내든 첩이든 간에 자신만을 위해 몸치장하기를 원한다. 반면 여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치장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으려 한다. [여계]에서도 "문을 나설 때는 치장을 하지 말며, 집에서는 단장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권하였다.

 

      2. 정조 관념의 대두
  군혼제에서는 정절이라는 말이 없었고, 노예 사회 시기 및 봉건 사회 탄생 시기에도 정절관은 희박했다. [좌전]을 보면, 음란, 사통, 개가 등의 용어가 많이 등장하여 그당시 남녀간에 자유 연애가 나타나며, 이 시기는 정절 관념이 거의 없었다.
  어원학적으로 보면, '정'은 바른 것으로 그 마땅함을 잃지 않고 조화스러워야 한다. [주역]에서 "항상 덕스럽고 정숙한 것이 부인의 길상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부부 관계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야 하는데, 부인의 덕이 일정치 않아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하면 사회와 남편으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정조 관념의 시작이다.

  i) 하나부터 그와 더불어 나란히 하면서 평생토록 바꾸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죽어도 개가하지 않는다.

  ii) 부인의 정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야 한다.

  iii)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부인이 상복을 두번 입지 않는 것은 태양이
하늘에 두 개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사실상 선진 시대의 '정'은 주로 덕성 방면에 치우쳤으며, 육체적인 정절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좌전.정공 14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령공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남자라는 여인이 가장 총애를 받았다.
남자는 본래 송나라 여자로 시집오기 전 송나라 공자와 동거를 했다. 그녀는 위령공에게 시집을 온 후에도 옛 남자를 그리워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위령공은 그 남자를 위나라로 불러들였다. 이 점은 위령공이 남자의 정조에 괘념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 밖에 노나라 계공조의 아내는 음식을 관리하는 사람과 사통했고, 초나라 양공의 아들 흑요는 그의 어머니 하희와 간음하였으며, 노나라의 목강은 대부숙손교와 사통했다. 그리고 초나라 소왕은 가족과 함께 길을 가다가 뜻하지 않은 습격을 받아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소왕은 초나라의 호위대장인 종건에게 여동생 계화를 업도록 했다. 후에 소왕이 그녀를 출가시키려고 하자, 계화는 종건에게 출가해야만 한다며, 이런 이유를 들었다.
  사소한 차이로 여자로 태어나면 남자를 멀리해야 하는데, 종건은 나를
업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여자는 항상 남자를 멀리하여 접촉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심지어 "남녀의 구별은 나라의 큰 예절이다"라고까지 규정했다.
  결혼하기 전의 여성들에게 정조를 요구하던 경향은 점점 결혼한 여성에게로 확산되어 갔다. 기혼 여성들은 처녀들과는 달리 낮에도 집안을 자유롭게 거닐었고, 희생을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식사는 남자들과 떨어져 혼자 하거나 병풍을 가리고 했으며, 사냥이나 활쏘기 등과 같은 남자들의 행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계강자의 누이동생이 제도공에게 시집가기로 결정되자, 제도공은 즉시 사람을 보내 그녀를 만나 제나라로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계강자는 누이동생이 이미 숙부 계방후와 사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나라로 보내지 못했다.
혼인한 여자가 다른 사람과 사통하는 일은 이미 부도덕한 행위로 인식되었고,
또 남편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계강자는 동생을 시집 보내지 못한 것이다. 또 [국어.제어사]를 보면, 진목공이 진나라 공자 중이에게 다섯 명의 여자를 보냈는데, 그 중 회영이라는 자가 있었다. 중이는 그녀가 본래 자어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알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지 않고 잉첩의 역할만을 하게 했다. 또 [좌전.성공 11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노나라의 한 관리가 진나라의 빈객 극주의 요청으로 그의 아내 될 여자를 구했다. 그 관리는 관직이 낮은 시효숙이라는 자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아 극주에게 주려고 했다. 시효숙의 아내가 시효숙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할지 묻자, 관리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극주의 죽은 뒤, 진나라에서는 그녀를 다시 시효숙에게 돌려보내기로 했다. 시효숙은 황하까지 나와 돌아오는 아내를 맞이했다. 그러나 극주의 두 아들은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이 당시에는 처녀성이 첫째 부인이 되는 필수 조건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집안의 처녀들에게는 최소한의 자유만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 백성들의 딸들은 남자들과 자유롭게 어울려 지냈다. 따라서 '정'관념의 대두는 먼저 젊은 남녀의 왕래에서 나타났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자유로운 왕래에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귀족 여성들은 외부 출입이나 남자와 담소하는 일에 통제를 철저하게 받았으며, 별채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3. 혼외 성관계는 귀족 사회의 보편적 현상
  혼외 성관계는 상고 시대 귀족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혼외 성관계를 표현한 말은 '통'이다. '통'자를 사용하지 않고 통간을 나타낸 것은, 선공 4년, 투백비와 운자의 여자가 사통하여 낳은 자문의 일에서 불 수 있고, 위령공은 사통한 부인을 용서해 준 유명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위후는 부인 남자를 위해 송조를 불러 조에서 만났다. 태자 과외는 위나라의 읍인 우를 제나라에 주고 송나라의 들을 지나게 되었는데, 농부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이미 당신의 아들을 구하는 어미 돼지를 만족시켰으니, 어찌 나의 아름다운 돼지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태자는 부끄러워했다.
  이 인용문을 부연하자면 이렇다. 태자는 남자가 송조와 사통하여 '음행'을 저질렀음을 목격한 송나라 농부의 치욕적인 노래를 듣고 돌아와 남자를 죽이려고 하자, 위령공은 태자로부터 도망친 그녀의 손을 잡고 누대로 올라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래서 태자는 부득이 송나라로 달아나게 되었다.
위령공은 자기 아내와 다른 사람이 정을 통했지만, 그 일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당시 귀족들의 혼외 성관계에 대한 개방된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춘추 시대 또 하나의 유명한 사통 사건은 노환공 부인 문강과 문강의 형
제양공사이에서 발생했다.
  환공은 출타하면서 강씨와 함께 제나라로 갔다. 노나라 대부 신수가 말했다.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고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는 것은 사로 경시할 수 없는데, 이것을 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점을 위반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게 됩니다.'
환공은 제환공과 낙수에서 만나기로 하여 아내 문강과 나란히 갔다. 제양공과 문강이 간통을 저질렀다. 환공은 문강에게 욕을 했고, 문강은 이 일을 제양공에게 말했다. 여름 4월 병자일에 제양공은 노환공을 초대했다. 제양공은 공자 팽생으로 하여금 환공이 수레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였고, 노환공은 수레 안에서 죽었다.
  이 말을 좀더 풀어 보면, 노환공이 제나라로 갔을 때, 문강과 동행하자,
신수는 좋은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경계의 말을 했던 것이다. 환공은 문강과 제양공이 사통한 것을 안 후, 단지 그녀를 꾸짖었을 뿐인데, 그녀는 제양공에게 이 사실을 말하여 환공을 죽게 만들었다. 당시 환공은 이웃 나라의 국가 원수였다. 이후에도 문강은 거리낌없이 6년에 다섯 번은 제양공과 만났다.
  춘추 시대 가장 음란한 사건은 하희롤 들러싼 풍파이다. 하희는 정목공의 딸로 진나라 대부 하어숙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하희라고 불려졌다.
  진령공과 공녕, 의행부는 (똑같이) 하희와 사통을 했는데, 모두 하희의
속곳을 입고 조정에서 놀았다. 설야가 간언하여 말했다. '군주와 공경이
음라하면 백성들이 본받지 않겠습니까. 명성이 나쁜데 군주께서는 그녀의 속곳을 숨기십니까' 진령공이 말했다. '나는 고칠 수 있소.' 진령공이 설야의 말을 공녕과 의행부에게 하니, 두 사람은 그를 죽일 것을 요청했다. 진령공은 반대하지 않고 설야를 죽였다.
  진령공과 공녕, 의행부는 하징서와 술을 마셨다. 진령공이 의행부에게
'징서는 너와 비슷하구나'라고 하자, 의행부는 '또 군왕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징서는 그들을 원망했다. 진령공이 밖으로 나가자, 하징서는 마굿간에서 화살을 쏘아 그를 죽였다. 공녕과 의행부 두 사람은 초나라로
달아났다.

  이렇듯 군주와 신하가 모두 음란하였으며, 끔찍스런 일이 발생했다. 초장왕은 하징서가 군주를 죽이는 무도함을 빌미로 다음해 봄 제후를 따라 진나라로 진군하여 하징서를 거열형에 처하고 공녕과 의행부를 맞이했다. 정벌을 한 후, 초장왕은 하희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자 초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다시 하회를 두고 다투게 되었다.
  초장왕이 하희를 맞이하려고 하자, 신공 무신이 말했다. '맞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군왕께서 제후를 소집하는 것은 죄가 있는 자를 토벌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하희를 맞이하는 것은 그녀의 미색을 탐하는 것이며, 미색을 탐하면 음란하다고 하고, 음란해지면 큰 벌을 받게 됩니다... 만일 인솔한 제후 군대가 큰 벌을 받는다면 신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주께서는 이 점을 헤아리십시오.'
왕은 하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반이 그녀를 취하려고 하자, 무신이 말했다. '이 여자는 상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만으로 하여금 요절하도록 하고 어숙을 죽게 하고, 영후를 죽도록 하였으며, 하남을 죽게 했고, 공의를 내쫓고, 진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어떤 사람이 상처롭지 못함이 이와 같겠습니까! 인생은 실로 어려운 것이어서 (그녀를 취한다면) 좋은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천하에는 미녀들이 많은데, 하필 그녀입니까?' 자반은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초장왕은 자반은 모두 하희를 맞이하려고 하였지만, 정론을 내세우는 무신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장왕은 하희를 윤양로의 아내로 주었는데, 양로는 오래지 않고 죽고, 그의 아들이 하희에게 마음을 두려고 했다. 이때 무신은 하희를 정나라로 돌려보내자고 하면서 자신이 취했다.
  남자, 문강, 하희 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춘추 시대 귀족 사회의 혼외
성관계를 매우 공개적이고도 낭만적이었다.
  [전국책.제책삼]에 이론 기록이 있다.
  맹상군의 사인이 맹상군의 부인과 서로 사랑을 하자, 어떤 이가 맹상군에게 "그대의 사인은 안으로 부인과 서로 사랑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대는 그를 죽이시오"라고하자, 맹상군은 "모습을 보고 서로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니 그만두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또 제책이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진선 태후는 위축부를 사랑했다. 태후가 병으로 장차 죽게 되자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나를 장사지낼 때, 반드시 위축부를 순장하도록 하시오." 위축부가 이를 근심하자, 용예는 그를 위해 태후에게 말했다.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습니까?" 태후가 말했다. "지각이 없소." "만일 태후께서는 신령스러워 죽은 자에게는 지각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면, 어찌 사랑하는 산 사람이 지각이 없는 죽은 사람에게 순장을 하겠습니까? 만일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선왕의 축적된 노여움은 오래갈 것이고, 태후께서는 넉넉하지 못함을 구하고, 어느 틈에 위축부와 사통하겠습니까!" 태후는 "옳소. 순장시키지 마시오"라고 했다. 태후와 위축부의 사통은 조정 대신들까지도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두들 이 문제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 시대도 귀족 사회의 혼외 성관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그 당시
성 규범이 엄격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4. 첫 자식을 죽였던 이유
  여성들에게 정조를 요구한 것은 군혼과 잡교의 상실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군혼과 잡교를 부끄러운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처음 낳은 아이, 즉 첫자식을 죽이는 일까지 나타났다.
  (강원은) 달을 다 채워 아들[직]을 낳았는데 불길하게 생각되어 비좁은
골목에 버렸으나 말이나 소가 지나가면서 모두 피하고 밟지 않았다. 다시
아이를 수풀 속에 옮겨 놓으니, 마침 산속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또다시
장소를 옮겨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날짐승들이 날개로 아이를 덮고 깃을
깔아 주었다. 그러자 강원은 신기하게 여겨 아이를 데려다 잘 키웠다. 처음에
아이를 버리려고 생각하였으므로 '기'라고 불렀다.
  직이 버려진 것은 아버지의 혈통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초나라 영윤 자문의 출생에 관한 것이 있다. 자문은 춘추시대 한 명사인데, 사생아다. 즉 "약오는 운나라에서 아내를 얻어 투백비를 낳았다.
약오가 죽자, 투백비는 그의 어머니를 따라가 운나라에서 양육되었고, 운나라 군주의 딸과 사통하여 자문을 낳았다." 후직과 자문의 탄생은 모두 혼인의 산물이 아니다.
  첫 아들을 죽이는 현상이 존재하게 된 이유로는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혼전 성관계의 자유

둘째, 처녀의 정조 관념의 미확립

셋째, 출산 날짜를 예측하지 못함

넷째, 부계의 확립 시작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첫째와 둘째 이유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각국에 중춘지회가 있어 남녀의 성관계가 자유로웠던 상황에서 처녀의 육체적 정조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출산 시기에 있어서는 먼저 임신 여부를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임신 기간이 열 달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전국 시기 말에 이르러서야 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사기.여불위열전]의 다음 내용은 이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여불위는 한단의 여러 미희들 중에서 뛰어나게 예쁘고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서 살고 있었는데,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자초는 여불위와 술을 마시다가 미희를 보고 좋아하였다... 이에 그 미희를 자초에게 바쳤다. 미희는 스스로 자기가 임신하고 있는 것을 숨기고 있다가 만삭이 되어 아들 정을 낳았다.

  여기서 자초는 진의 장양왕이며, 이 아이가 진시황이다.
  물론 첫 아들을 죽인다고 해서 장자를 죽인다는 말은 아니다. 일부 다처제의 경우 어떤 여자가 낳은 첫 아들이 반드시 장자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첫 아들을 죽이는 것은 단지 풍습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 반드시 지켜야 할 엄격한 규율은 아니었다.

 

      5. 정절 관념의 법제화와 정절 편향의 여성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이후인 진한 시기(진한 시기는 기원전 221년부터 22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진한 시기는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다. 사회 생산이 발전하고, 철기가 농업 생산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일부 노예주로 하여금 '공전' 이외에도 대량의 황무지를 '사전'으로 개발하여 세금을 내지 않게 했다. 이런 '사문' 세력이 확대되면서 '왕실'이나 '공실'의 노예 제도에 충격을 주었다. 노나라 선공 15년에 실시한 '초세묘'는 '공전'과 '사전'의 사유제를 인정하여 일률적으로 세금을 거둔 것이다.)에 비로소 정절 관념이 법념이 법령 형식으로 실천되었다. 이때는 중앙 집권을 실행함에 따라 봉건 황제의 권력은 무한대로 확대되었다. 진시황은 봉건 질서를 공고히 하고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각 방면의 봉건 규범, 성규범을 엄격하게 하고, 여성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아울러 정치, 경제, 문화 등이 발전하자, 성 풍속도 발전하고, 도가의 방중술도 그 세력을 더해 갔다. 진시황이 이와 같이 한 이유는 이렇다.

  그의 어머니는 탕부로 일찍이 여불위의 첩이 되었고, 후에는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에게 보내졌다. 진시황은 13세에 왕위에 올랐고, 여불위는 상국의 신분으로 정치를 보좌하여 '중보'라고 불렸으며, 진시황의 어머니와 계속적으로 사통했다. 진시황이 성장한 이후에도 그 어머니는 끊임없이 환락을 구했다. 여불위는 나이도 많고, 진시황에게 발각되었을 때 닥칠 재앙이 두려운 나머지 노독을 찾아 환관으로 분장시켜 태후에게 추천했다. 태후는 그와 정을 통해 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사기.여불위열전]) 한번은 노독이 술에 취해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하다 진시황의 '가부'로써 고발하겠노라고 했다. 당시 20세였던 진시황은 이 추문을 듣고 사건이 진상을 조사한 후, 노독의 삼족을 멸하고, 태후가 낳은 두아이를 죽였으며, 여불위에게는 죽음을 내리고, 그의 어머니는 황궁에서 내쫓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진시황은 음란한 풍속을 제거하고 바른 기풍을 세우려고 결심을 하게 된다.
  진왕조가 통일 제국을 이룬 후에도 많은 지역에는 원시적인 풍속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진시황은 풍속을 하나로 통일시켜 완전한 통일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귀함과 천함은 분명히 구분되고, 남자와 여자는 예절에 순종하며, 직업에 신중히 종사하며, 안과 밖의 거리를 밝혀 깨끗하게 정화함으로써 후세에까지 이어지게 하라.

 

  진시황은 정절을 중시함에 있어 법령으로 음란함을 엄격히 금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 정절을 지킨 과부를 세워 장려했다. [사기.화식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파촉 땅에 청이라는 이름의 과부가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혼자 되어 정절을 지키며 살았다. 진시황이 주장한 정절의 중요성은 일부 일처제를 공고히 하는 작용을 했다.
  봉건 예교가 형성된 한대에는 정절관이 보다 강화되었으며, 특히 한무제가 유가학설만을 중시함에 따라 유가에서 주장한 '남존여비', '불사이부' 등의 사상은 정통적인 정치 사상이 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한대는 법률로 정절을 장려하고, 정조 있는 부인과 순종의 미덕이 있는 여자에게 비단을 하사했는데, 이것은 중국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여자의 정순을 포상한 것이다. 기원전 119년 정절을 나타내는 깃발이 있었음이 발견되었다.(서양에서는 아내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정조대라는 것을 사용했다. 이 정조대는 여성의 사타구니를 앞에서 뒤로 막아 둔부에서 금속틀의 열쇠를 채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배설은
가능하지만 성교는 불가능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 정조대는 십자군 전쟁 때 남편이 아내의 정조를 지켜 주는 수단으로 알려졌지만, 푹스는 남성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옹호하려는 변명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제시했다.) 한대는 조정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예법을 만들어 여자의 생활 표준을 정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유향의 [열녀전](이 책은 한나라 성제의 후궁들의 음란함을 보고 경계할 만한 것을 만든 것으로, '모의', '현명', '인지', '정순', '절의',
'변통', '얼폐'의 일곱 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편마다 15전이 있다.)에는
수록된 여성의 정절과 관련 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자.
  우선 제나라 대부 기식의 아내는 정절을 지킨 열부의 전형이 되었다. 그녀는 교외에서 기식의 부음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는데, 그 곡소리가 성의 담을 무너뜨렸으며,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
  또 채나라 사람의 아내는 송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출가를 했는데 그 남편 되는 사람이 고약한 병에 걸렸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키려고 했다. 이때 딸이 말하기를, "남편의 불행은 곧 저의 불행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를 버리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여자가 남에게 출가하는 도리는 한번 초례를 치렀으면 죽을 때까지 바꾸는 일이 없는 법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도영이란 자는 노나라 도씨 집안의 딸이다. 젊어서 과부가 되어 아비 없는 어린 자식을 기르고 있었는데, 의지할 만한 형제가 없었으므로 길쌈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노나라의 어떤 사람이 그가 훌륭한 여자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고자 했다. 영은 그것을 알고는 거절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노래를 지어 자신은 개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노래는 이렇다.

  황곡은 일찍이 홀로 되었지만
  7년 동안 짝을 구하지 않았네
  목을 굽혀 홀로 자면서
  다른 새들과 함께 하지 않고
  밤에 슬피 울며
  죽은 수컷을 생각한다
  일찍 홀로 된 것은 하늘의 뜻이건만
  혼자 자는 것이 어찌 슬프랴
  과부는 그것을 생각하고
  몇 줄기 눈물 흘리네
  아아, 슬프구나
  죽은 이를 잊을 수 없는 것이
  나는 새도 그렇거늘,
  하물에 정량에 있어서야
  훌륭한 상대 있어도
  나는 끝내 재혼하지 않으리

 

  노나라 사람은 이 노래를 듣고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없음을 알았다고 한다.
  유향은 [열녀전]에서 정절에 치우친 여성관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모범적인 어머니는 행실은 여러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그 말은 도의에
적중하며, 자손을 양육함에 있어서는 점차적으로 교화하고 그의 자손들은 덕으로 성장하여 뒤에 큰 공업을 이루도록 한다.(이러한 표준에 맞는
여성으로는 유우씨의 두 부인인 아황과 여영, 기의 어머니 강원, 설의 어머니 간적, 계의 어머니 도산, 탕임금의 비 유신, 추나라 왕실의 세 어머니 태강, 태임, 태사, 위나라 정공의 부인 정강, 제나라 제후 딸의 부모, 추 고을 맹가의 어머니, 노나라 계손씨 가문의 경강, 초나라 자발의 어머니, 노나라의 모사, 위나라 망묘의 자모, 제나라 전직의 어머니이다.)
  현명한 여성은 염치와 바른 도리를 생활 신조로 삼았고, 동작에 절도가 있고, 언어와 문장을 이루어 모든 사리에 밝고 세상의 법도를 알았다.(이러한 여성으로는 주나라 선왕의 강후, 진나라 문공의 제강, 초나라 장왕의 번희, 진나라 목공의 부인, 제나라 환공의 위희, 주남의 아내, 송나라 포소의 아내 여종, 진나라 조쇠의 처, 도땅의 답자의 아내, 유하혜의 아내, 노나라 검루의 아내, 제나라 재상의 마부의 아내, 초나라 접여의 아내, 초나라 노래자의 아내, 초나라 어릉자의 아내가 있다.)
  자애롭고 지혜로운 여인은 미리 어려운 일과 쉬운 일을 알며 하늘의 도인 재앙과 복이 이를 것을 헤아렸다.(이런 지혜로운 여인으로는 밀나라 강공의 어머니, 초나라 무왕의 부인 등만, 허나라 목공의 부인, 조나라 희부기의 아내, 손숙오의 어머니, 진나라 백종의 아내, 위나라 영공의 부인, 제나라 영광의 중자, 노나라 장손의 어머니, 진나라 양설자의 아내 숙희, 진나라 범씨의 어머니, 노나라 공승의 누이 사, 노나라 칠실고을의 여인, 위나라 곡옥의 늙은 어머니, 조나라 장수 괄의 어머니가 있다.)
  정순한 여인의 표준은 끝까지 개가하지 아니하고 정의에 힘썼으며 행실을 깨끗하게 가져 몸을 삼가하였다.(이러한 여인으로는 소남의 신나라 사람의 딸, 송나라 공공의 백희, 위나라 과부가 된 여인, 채나라 사람의 아내, 여나라 장공의 부인, 제나라 효공의 부인 맹희, 식나라 군주의 부인, 제나라 기양의 아내, 초나라 평왕의 부인 백영 정희, 위나라 종실의 두 여인, 노나라의 과부 도영, 양나라 과부 고행, 진나라의 효부가 된 과부 등이 있다.)  의로운 여인은 절개와 의를 위해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성실하고 믿음이 있으며 용감하여 그 어떤 사특한 행동도 없고 의로운 일이라면 의심하는 일이 없다.(이런 의로운 여인으로는 노나라 효부 의보, 초나라 성왕의 부인 정무, 진나라 태자의 부인 희영, 초나라 소왕의 월희, 갑 고을 장수의 아내, 노나라의 의고자, 대나라의 조부인, 제나라의 의로운 계모, 노나라 추호자의 결부, 주나라 주보의 충성스런 첩, 위나라의 절의 있는 유모, 양나라의 절의를 지킨 고자, 주애 고을의 의리 있는 두 여자, 합양 고을의 우애 있는 누이동생, 경사의 절의 있는 여자가 있다.)
  이렇듯 제시한 것은 그 당시 유향이 여자의 행실에 대한 요구이며
준칙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여자들이 이것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는 보지 않고, 그 가운데 하나 혹은 두가지만 할 수 있으면 칭찬 받을 만하다고 했다. 후세의 역사서나 개인이 지은 '열녀전'의 대부분이 정절에 치우쳐 있는 것은 유향의 견해와 유사한 것이다.(유향이 [열녀전] 뒤에 둔 두편 가운데 '변통'은 여자는 사리에 통하여 예측하지 못한 재앙을 막아야 된다는 것이고, '얼폐'는 음, 질, 고혹, 배절, 기의 다섯 가지를 여자들이 경계할 것으로 삼았다.)

 

      6. 정절에 대한 사회의 요구 사항
  불교의 유입, 도교의 흥기로 인해 정통 유가 사상이 흔들렸던 위진
남북조(황건군의 봉기로 진한 시대가 막을 내린 220년부터 581년간의 기간은 대분열의 시기였는데, 이때가 위진 남북조 시대이다. 분열된 남북 왕조의 흥망성쇠를 연결하고, 삼국의 오, 동진과 남조의 송, 제, 양, 진은 모두 건간을 수도로 하였기 때문에 육조라는 호칭이 있다. 이 시기,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전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유학 예교의 사회 작용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었다. 도가 사상은 흥성하고, 불교가 전래되었다. 위진 남북조 시기는 서진이 잠깐 통일한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기가 전란의 연속이었다. 이 시기 문화의 특징은 중국이 남북 대치 시기에 놓이면서 전쟁, 인구 유동, 무역 왕래가 정도상의 차이는 있지만 민족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는 점이다.
동시에 전란은 동한 시기에 이미 정식으로 확립된 '삼강오상'을 흔들었고, 봉건적인 사상 통치가 쇠약해졌다. 그래서 어떤 이는 속세를 버리고 떠났고, 어떤 이는 종교를 신봉하여 불교와 도교가 성행하였으며, 어떤 이는 양생을 중시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 조건 하에서 방중술을 중점으로 하는 성학 이론이 끊임없이 발전했다.) 시기는 수백 년간 끊임없이 전쟁으로 인해 사회가 불안했고, 게다가 북방의 소수민족들이 게속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이질적인 풍속을 가져 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절에 대한 요구는 오히려 강화되어 '정렬'이란 말도 생겼는데,([북사.열녀전] 서에서 "여자의 덕은 비록 온유함에 있지만 절개를 세워 이름을 남기는 것을 정렬에 근거한다"고 했다.) 사회적 분위기는 이러했다.
  기름은 신선함을 싫어하지 않고, 여자는 맑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옥은
깨끗함을 싫어하지 않고, 난초는 향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너의 형체가 곧으면 그림자 또한 굽지 않는다. 너의 소리가 맑으면 울림 또한 탁하지 않다. 녹색 옷은 비록 많지만 귀한 색이 아니다. 구불구불한 길은 비록 이로울지라도 곧음에서는 숭상받지 못한다. 봄꽃은 비록 아름답지만 가을 열매를 기다린다.
옥은 비록 연못에 있지만 해를 만날 날을 기대한다. 몸을 씻은 자는 옷을 털고, 머리를 감은 자는 관을 턴다. 사람이 정식 예복을 모르면 행실의 끝을 모른다.
옷이 아름다우면 사람들의 눈을 감동시키지만, 행실이 아름다우면 신을
감동시킨다. 하늘의 이치에 순종하면 항상 사람에게 길하다.
  이 시기는 정숙한 여자를 표창하는 기풍이 나날이 성행했다. [남사]에는 양패임의 마을을 여표라고 부르고, 노원례의 처가 정숙하고 효성스러웠음을 칭찬하여 그 곳을 효덕리로 개명한 것이 보인다. [위서]의 기록을 보면, 시선씨가 팽선생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문을 지나지도 않았을 때 팽씨가 성관계를 맺으려고 하자, 거절하고 따르지 않다가 결국 살해되었는데, '정녀'라고 불렸다.
  북제에 양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독서를 좋아하고 명리를 말할 수
있었으며, 현학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양씨 가문의 여자들은 지아비가 죽은 후에 재혼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또 비구니 절을 만들어 지아비가 죽고 아들이 없는 여자를 모두 출가시켰다. 그 당시 양열은 학문이 있고 정리에 달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그의 이러한 행동은 정절관이 사회 기풍의 하나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16국의 하나인 전량왕 장천석이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두 첩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가? 내가 죽은 후 두 사람은 어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는가!"
  두 첩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만일 죽음을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면, 첩은 순사하기를
청합니다. 지하를 쓸며 다른 마음이 없음을 맹세합니다."
  장천석이 위급해졌을 때, 두 첩은 혀를 물고 자살했다. 그러나 이후 장천석의 병은 오히려 나았다.
  또 남조 양 나라 때 두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미모의 젊은 첩을 얻었다. 어느 날 이 여자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 읽고 있는데, 두억이 들어오자 집안일을 알리는 것이 부끄러워 편지를 삼켜 버렸다. 두억은 그것이 연애 편지라고 의심하고 배를 갈라 편지를 꺼내도록 명령했다. 두억은 편지를 읽은 후, 첩에게 허물이 없음을 알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뒤였다.
  이 시기 여자들의 정절에 대한 사회적 요구 사항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여자들의 재혼이 적지 않게 발생하기
시작했다.(채문희라는 여자는 위중도에게 출가하였으나, 그가 죽자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한나라 말 혼란 속에 동탁 부장의 포로가 되어 남흉노 좌현왕에게 보내져 12년간 있게 되었다. 이후 조조가 그녀의 부친 채옹에게 후사가 없음을 불쌍히 여겨 금과 구슬로 그녀를 사 돌아오도록 한후 동사에게 개가시켰다. 이로부터 보면, 그녀는 세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스스로 치욕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또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건전한 가족 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유가는
남존여비를 내세웠다.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정절관에 치우친 관념을
보여주었고 남녀간의 유별을 강조했다. 아울러 시어머니를 모시는 방법의 제시와 남편을 섬기는 법칙 등 다양한 견해를 나타냈다.
  그러나 춘추 시대의 귀족 계층에서 혼외 성관계가 하나의 보편화된 현상으로 자리잡았으며, 이에 비례하여 정조 관념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위진 남북조에 이르러 유가의 위력이 감소하여 정절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더욱 거세어졌다.

 

        제 4장 쾌락의 도덕적 가치 설정 : 결혼의 원칙

      1. 남녀 관계의 사회적 규범
  결혼은 인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결합 방식이므로 이에 대한 탐구는
우리들의 인류 사회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인류
사회가 발전한 기본 규율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결혼 형태의 변화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 발전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그 사회 발전 수준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 준다. 인류 역사상 상고 시대 인류가 장기간의 군혼과 잡교의 단계를 거쳤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옛날 태고 시대에는 항상 군주가 없었고,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살았으며, 어머니는 알았지만 아버지는 몰랐고, 친척.형제.부부.남녀의 구별이 없었으며, 상하.장유의 도가 없었다.
  위 글에서는 중국에서의 군혼과 잡교는 태고 시대부터 있어 왔으며, 상고 시대에는 남녀가 어울려 놀았지만 중매도 없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당시는 친척, 형제, 자매, 부부 등의 구분 없이 모여
살았으며, 남녀 관계는 혼인이라는 의식을 거치지 않은 '잡유', 즉 잡교가
성행하였다. [예기.곡례]에서는 이러한 잡교 상태를 일컬어 '부자취진'이라고 했다.
  원시 사회 이후에 출현한 씨족은 인류 최초의 연합체이다. 이 시기에는 남녀 관계를 물질적인 생산력으로 조절할 수 없었으며, 생산 활동을 주도하는 집단 또한 성 집단이 아니었다. 씨족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씨족과 연합체를 이루어야만 했다. 이 연합체는 생산적인 사회 관계를 기초로 하여 결성된 것이 아니라 남녀 관게의 연합이라는 토대 위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씨족 사회 초기에는 생산적인 사회 관계와 남녀간의 사회 관계가 병존했는데, 전자는 경제적 측면에서 씨족 구성원들을 하나로 연계시켰고, 후자는 남녀간의 결합을 가져왔다. 생산 관계와 생산인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이다. 동일한 경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는 교합이 불가능했지만, 경제적으로 독립된 사람들끼리는 가능했다. 이를 '족외 혼'이라고 한다. 족외 군혼은 씨족과 씨족 간의 결혼이지 개체와 개체를 위한 결합이 아니므로 모든 개체는 다른 씨족의 개체와 교합할 권리가 없다. 이런 점에서 족외 군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혼인으로 볼 수 없다.
  봉건 사회로 진입한 후에도 중국 이외의 소수 민족 중 적지 않은 수가 원시 군혼 단계 상태에 머물렀다. 가령 그 당시 고려 사람들의 "풍속은 음란하였지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풍속에는 많은 수의 유녀가 있고, 남자도 항상 그 사람이 아니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모여 놀았으며 귀천의 구분이 없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군혼과 잡교의 구분은 일정한 규범과 지역의 제한 여부에 따른다. 군혼은 인류가 몽매하던 시대의 후기에 나타난 혈연혼의 시작이고, 잡교는 어떠한 규범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같은 무리끼리 거주하는 동물처럼 성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잡교가 어떤 질서도 없이 문란한 성행위만을 추구했다는 말은 아니다.

 

      2. 결혼은 음과 양의 균형
  결혼를 통한 남녀간의 성적 결합은 자연에서 상호 작용하는 두 가지 힘의 축소판이다. 인간은 우주의 하늘과 대지가 결합하듯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결혼이라는 의식을 치른다. 유가에서는 하늘과 땅, 음과 양이 조화롭게 교합되는 것이 사물의 생기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i) 하늘과 땅 두 기가 밀접하게 교차하여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남녀
음양이 그 정을 교합하여 만물이 나뉘어 새것으로 태어난다.

  ii) 만약 하늘과 땅이 화합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결혼은 만대에 걸쳐 후세를 얻을 수 있는 중대한 의식이다.

  iii) 귀매란 천지의 큰 뜻이다. 천지가 교합하지 못하면 만무리 흥성하지
못한다.
  위의 세번째 문장에 보이는 '귀매'란 딸을 시집보내는 것으로,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음양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고 자연의 번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문헌 가운데 이와 유사한 기록은 비교적 적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천자와 황후는 태양과 달, 음과 양과 같아 서로 구한 이후에 이루어진다"라든지, "해는 동쪽에서 나오고, 달은 서쪽에서 나오는데, 이 음양의 구분이 부부의 위치이다"라는 말들이 그렇다.
  이렇듯 남녀의 결혼이 해와 달, 음과 양이 결합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관념은 유가의 모든 우주의 구조를 하나의 음양 이원이 교합하는 생식 모형으로 귀납시킨 것과 관련성이 있다. [주역.서괘]에서는 '함'괘를 논할 때, 이렇게 말했다.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남녀가 있으며, 남녀가 있은 이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 있은 후에 군주와 신하가 있고, 군주와 신하가 있은 이후에 상하가 있고, 상하가 있은 이후에 예의가 펼쳐진다. 부부의 도는 영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중국의 전통 문화 속에 있는 음양 숭배 관념의 기원을 근본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순자가 말했듯이, "[역]의 '함'쾌는 부부의 도를 나타낸 것이다. 부부의 도는 바르지 않을 수 없는데,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함'은 감응하는 것으로,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낮은 것의 아래에 있고, 남자가 여자의 아래에 있고, 부드러운 것이 위에 있고, 강한 것이 아래에 있다." 순자가 부부의 도와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을 연관지은 것은 [예기]의 "혼례는 예의 근본이다"라는 말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한대의 왕충은 유가에서 말하는 부부의 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유가에서 말하는 부부의 도는 천지를 본받은 것이다. 부부가 천지를 본받았음을 알면서 부부의 도로 미루어 천지의 본성을 논함을 모른다는 것은 의심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주는 남녀가 때를 놓쳐 짝이 없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또 한대의 낭개는 유폐된 궁녀가 너무 많으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며, 이것은 자연 재해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궁인으로 황제를 모시는 사람의 수는 천 명쯤 되는데, 살아 있지만
깊숙한 곳에 격리되어 있으니, 부부간의 정을 융성하게 쌓지 못한 기가 위로는 하느님을 감응시켰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궁인을 많이 가짐으로써 하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천자의 자손 대부분이 요절하여 후사를 잇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듯 결혼은 양과 음의 균형을 상징한다. 사실상 우주의 원리인 음양은 빛과 어둠,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등 중국 만다라를 의미했다. 검은 물고기 무늬에 흰 점이 있고 흰 물고기 무늬에 검은 점이 있는 음양 이미지는 원칙적으로 상하 개념이 아닌 상대적으로 동등한 개념을 나타낸다. 또한 이 음양 이미지는 남성과 여성은 각각 하나의 우주로서 남성적 특징과 여성적 특징을 고루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3. 결혼 사실을 숨긴 순임금
  후세에 위대한 성군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순 임금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혼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황제 요임금은 아황과 여영 두 딸을 순임금에게 시집보냈다. 순임금은 부모나 다른 사람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만일 후세의 봉건 예교 입장에서 본다면, 순임금의 이러한 행동은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순임금이 그러한 행동을 취한 것은 후사를 고려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만장이 묻기를, "[시경]에 '아내를 취함에 어떻게 할 것인가? 반드시
부모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으니, 이 말대로 믿는다면 순임금과 같이 할 수 없는데, 순임금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장가간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자, 맹자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알렸다면 장가들지 못했을 것이다. 남녀가 결혼한다는 것은 사람의 주된 도리인데 만일 부모에게 알린다면, 인간의 중대한 도리를 이루지 못하고 부모에게 원망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알리지 않은 것이다." 만장이 묻기를 "순임금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장가간 것에 대해서는 제가 벌써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임금이 순에게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면서도 알리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자, 맹자가 말하기를, "요임금 또한 부모에게 알리면 아내를 얻어 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맹자는 남녀가 결혼한다는 말을 '남녀 거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남녀가 한 방에 있다는 말로 남녀의 성행위를 비유한다. 맹자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사람의 중대한 도리, 즉 '인지대륜'으로 보았다. [백호통]에서 "남녀의 교합은 인륜의 시작으로, 부부만한 것은 없다... 그래서 결혼 예절을 두고 인륜을 중시하고 후사를 널리 잇는 것이다"라는 말은 비록 남녀의 교합이 인륜의 시작이긴 하지만, 절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맹자]를 보면, 어떤 사람이 옥려자에게 예절, 음식, 색 중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묻는 문장이 보인다. 옥려자가 "예가 중요하다"고 말하자, 상대방은 뜻하지 않게 이런 질문을 했다.
  예법에 따라 먹을 것을 구하면 굶어 죽지만, 예법에 따르지 않고 먹을 것을 구하여 음식을 얻을 수 있다면, 반드시 예법으로 하겠는가? 친영(예절로써 아내를 맞이하는 것)하면 아내를 얻을 수 없고, 친영하지 않으면 아내를 얻을 수 있다면, 반드시 친영하겠는가?
  옥려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맹자에게 달려가 가르침을 구했다. 맹자는 질문하는 이가 고의로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했다고 생각하고는 "쇠가 새털보다 무겁다는 것은 어찌 혁대 고리만한 쇠와 한 수레의 새털과의 비교를 말함이겠는가? 먹는 것 가운데서 중요한 것과 예법 가운데서 가벼운 것과를 비교하면 어찌 먹을 것만이 무거울 뿐이겠는가? 또 여색의 중요한 것과 예법의 가벼운 것과를 비교하면 어찌 여색이 중요할 뿐이겠는가?"라고 말했다. 맹자는 예를 중시해야 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옥려자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반문하도록 하여 음식이나 색이 예절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다음 예문을 읽어 보면 그러한 의도가 드러난다.
  형의 팔을 비틀어서 빼앗아 먹는다면 먹을 수 있고, 팔을 비틀지 아니하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면 팔을 비틀겠느냐? 동녘 집 담을 넘어서 그 집 처녀를 끌어오면 아내를 얻을 수 있고, 끌어오지 아니하면 아내를 얻을 수 없다면 끌어오려 하겠는가?
  이 글의 결론은 이렇다. 아내를 맞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친영이 예를
행하는 것이지만, 만일 친영의 예를 실행하여 아내를 얻으면, 양자는 병행 할 수 없으므로 아내를 중시하고, 친영의 예를 경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거리낌없는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무례하게 아내를 얻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성인 공자는 인간의 내적인 요구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태도를 취하여 "부귀라는 것은 사람들이 탐내는 것이지만, 정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미색을 추구하는 것처럼 미덕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하여 "다 되었구나! 나는 아직도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음식과 남녀의 일은 인간의 두 가지 큰 욕심이므로 반드시 절제가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4. 성인은 아버지가 없었을까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의 시조는 남녀간의 교합 없이 태어났다. 예를 들면, 화서는 거인의 발자취를 밝고 복희를 낳았으며, 안등은 신룡에게 감동되어 신농씨를 낳았고, 경도는 붉은 용을 만나 요를 낳았으며, 악등은 큰 무지개를 보고 순을 낳았고, 부도는 흰 기가 달을 뚫는 것을 보고 탕을 낳았다. 그리고 진나라의 선조는 전욱 제의 후예로서, 이름은 여수인데, 베를 짜고 있을 때,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아들 대업을 낳았으며, 야랑국의 시조 야랑후는 물가에서 빨래하던 여자의 다리 사이로 흘러들어온 대나무 통 속에서 나왔고, 북이색리국의 한 시녀는 하늘에 기가 있더니 닭만큼 큰 것이 내려왔기 때문에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으며, 우민국 백성들은 모두 깃털이 나 있고, 난민국 백성들은 모두 알에서 나왔다고 한다. 또한 은나라의 시조인 설의 탄생 또한 이러한 실례 중 하나인데, 이에 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간적이 목욕할 때 제비 알을 삼켜 설을 낳았다는 설로서, 은나라의 시조인 설의 어머니는 간적이라 불렀고, 유융씨의 딸이며, 제곡의 둘째
부인이었다는 것이다. 간적 등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설이라는 견해다.

  둘째, 누대 위에서 제비알을 삼켜 설을 낳았다는 설이다. 간적, 건자, 두
자매는 요대에 있는 제곡의 비이며, 하늘에서 제비로 하여금 알을 떨어뜨리도록 하여, 간적이 이것을 삼켜 설을 낳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짇날 고매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아들을 구하여 설을 낳았다는 설이다. 하늘이 명령하여 새에게 날아가 상의 시조를 낳도록 했다. 춘분날 제비가 왔을 때, 탕의 선조 유융씨의 딸 간적은 고행씨제의 배필인데, 황제가 그녀를 이끌고 고매에게 기도하여 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설의 공통점은 설의 어머니는 유융씨의 딸이며 제곡과
결혼하였지만, 설의생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주나라의 시조 후직의 탄생에 관한 얘기도 눈여겨볼 문제이다. 주나라의 시조 후직은 이름이 기이다. 그의 어머니는 유태씨의 딸로 강원이라 불렀는데, 강원은 제곡의 정비였다. 강원이 들에 나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았는데, 갑자기 마음이 기뻐지면서 그것을 밟고 싶어졌다. 그녀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으니 마치 아기를 가진 듯 배 안이 꿈틀거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강원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밟은 결과 후직을 임신하여 낳게
되었다. [시경.대아.생민]에게는 이 일을 노래하고 있다.

  처음 백성을 낳은 분은 강원이라네
  백성을 어떻게 낳았을까?
  정결히 제사지냈네
  자식 없는 불길한 징조 버리고 제곡의 발자국 밟자
  마음이 기뻐져 잠시 머무니
  임신하여 삼가고
  낳아 길렀으니
  이가 후직이네

  간적과 강원은 모두 전설 속의 왕 제곡의 비였다. 그러나 그녀들이 낳은 섦과 후직은 그 제곡과는 무관하며, 모두 신교의 결과이다. 또 이들은 제사지낼 때 아이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제사가 수많은 남녀의 잡교 장소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상고 시대 각 나라의 시조와 성인이 아버지가 없고 하늘의 기운을 느껴
태어났다는 것은 이른바 감생 신화의 한 부분이다. 과연 성인들에게는 정말로
아버지가 없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관념상 아버지라는 개념이 없었을 뿐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성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자기와 아버지의 혈연 관계를 알지 못했고, 어머니도 아버지, 아들과의 필연적인 관계를 명백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식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어머니가 가족 관계나 상속에 대한 모든 문제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각 나라의 시조의 탄생이 이처럼 기이한 것은 우연한 일인가? 우연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가 있을까? 현대 학자들은 이 문제를 신화 전설에 귀속시켜 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씨족 시조인 모친의 이름을 보존하고, 시조는 그의 모친이 어떤 신령스런 것과 성교하여 탄생되었다고 보았다"는 모건의 주장은 그리스인과 라틴인이 모계에서 부계로 전향한 시기를 연구하면서 지적한 것이다. 모건은 성인들의 어머니는 알 수 있지만 아버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은 부계 사회로 발전해 가는 흔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원시 시대 인간들이 어머니는 알고 아버지는 몰랐던 문제는 신화
전설에서뿐만 아니라 문화 영역의 다른 방면에도 반영되었다. 가령 '성'자의 기원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듯하다. 본래 '성'(성은 본래 씨와 구분되어 오다가,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여 부정되었다는 것을 고염무는 [일지록]에서 지적하고 있다.)이란 글자는 혈통을 중심으로 삼는 개념이며, 여자라는 뜻의 '여'와 태어나다는 의미의 '생'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갑골문을 보면, 땅에서 물이 솟아나는 모습을 나타내는 '생'과 어머니를 나타내는 글자 '모'의 결합이다. 이는 성의 결정이 모계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분명 여자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중국 사호가 모계제였음을 밝혀 주는 중요한 근거로써 '성'자는 자주 인용되고 있다.
  성이란 것은 사람이 태어난 바이다. 여라는 글자와 생이라는 글자로 나뉘는 회의자이다. 생은 또한 성자이다. 옛날의 신령스러운 성인들은 모두 그 어머니가 하늘에 감응하여 낳은 아이였다. 그러므로 하날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춘추.은공 8년]의 좌씨의 주해에서 "하늘의 아들이 덕을 세웠을 때는 그 태어난 곳을 따라서 성을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신노의 어머니가 강수에서 살았고, 황제의 어머니가 희수에서 살았으며, 순의 어머니가 허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 어머니가 살았던 지명을 따 그 성을 삼았다. 그러므로 성이란 어머니의 출생을 따르는 것이다.
  물론 시조의 탄생을 모계로만 논의하는 것이 다소 무리일 개연성은 있지만, 그간의 고고학적 성과는 이런 점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고대의 수많은 중요한 성씨 가운데 '요', '희', '강', '영' 등은 '여'가 부수이다. 이것은 일정한 역사 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5. 동성 불혼
  동성 불혼은 씨족내의 사람끼리 결혼하던 것이 족외혼으로 넘어가면서
나타났다. 족외혼은 같은 도포 형제 자매간의 혼인을 금지했으며, 또 같은 씨족 내부의 구성원간의 통혼 또한 금지시켰다. 동성 불혼은 서주초기의 산물이며, 주나라 조상들이 외족혼을 실행할 때 남긴 규정이다.
  주나라 조상들은 씨족 부락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외혼제를 실행함에 있어 반드시 성명의 구별에 근거하였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지역을 기초로 했던 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는 씨족으로 대체되었고, 이와 같은 동성 불혼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작용을 상실하게 되었다. 동성 불혼과 유사한 것으로는 각종 수계혼이나 전방제를 금지하는 '종처 불혼'이 있다. 상나라 사람에게는 성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없었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성이 같은 자끼리의 혼인을 금하지 않았지만, 주나라 제도에서는 처음으로 동성 불혼이 지켜졌다. [예기.대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4세(위로는 고조에서 아래로는 자기형제에 이르기까지 같은 고조의 뒤를 이은 자를 말한다. 즉 종증조부모, 종조부모, 아버지의 형제와 백모, 숙모, 본인의 삼종형제를 가리킨다)로서 그 동족을 위해 시마의 복을 입는 것은 상복의 끝이다. 5세(고조의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 즉 구족의 밖으로서 동적이라고 할 수 없다)로서 단문(초상때 웃옷의 왼쪽 소매를 벗는 일과 관을 벗고 머리를 묶어매는 일)하는 것은 동성의 예를 감쇄하는 것이다. 6세에 이르러서 그 친함이 마침내 다 되어 단문도 하지 않고 조문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다.
서성(고조 이상의 본성에서 갈라진 성, 씨족이란 뜻과 같음)은 위로 고조의 아버지와는 성을 달리하고 그 친함은 5세로서 다하게 된다. 이렇듯 은친이 아래에 이르러 다하여 이미 동성이 아닌 자와는 혼인을 통할 수가 있겠는가?
서성이 비록 갈라졌다 할지라도 종실은 그 세계에 서성의 분파.족인 따위를 기록하여 본성으로써 이들과 연계되므로 분리되는 일이란 없다. 또 족인을 연결시키는 데 있어 음식의 에로서 하므로 딴 씨족처럼 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서성인 백세의 먼 것이라 해도 혼인하는 일이 없는데, 주나라 제도가 그러하였다.
  또 [좌전.양공 28년]에는 "경사의 가신은 노포등에게 말하기를, '남녀의
결혼은 성씨를 구별해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경씨와 노포씨는 모두 강씨 성이다.
  주대 동성 불혼은 외혼제를 실행한 결과이다. 이러한 기록은 대부분 후대의 것으로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충분치 못한 면이 있다. 춘추 시대에는 동성 불혼 이유를 "남녀가 동성이면 후세가 번성하지 못한다"고 하여 생리학적 측면에서 해석한 면이 있었다. 즉 동성간 혼인을 하면 2세는 체질이 허약하고 기형아이거나 지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요절할 확률이 높다는 인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첩을 살 때도, 그 성을 모르면 점을 쳐 보라고 하였다.
  동성 불혼을 주장한 또 하나의 이유는 생산력이 낮았던 시대에 인구를 늘리고 체질을 증강시키는 일은 생존과 발전의 관건이었는데, 근친상간은 이 목적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즉 "아내를 얻을 때 같은 성을 피하는 것은 문란해져 멸망하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동성 불혼을 외침에도 불구하고 동성간의 결혼은 항상 있어 왔다. 가령 공자는 "소공이 오나라의 공주에게 장가를 드니, 오나라는 노나라와 같이 희성이었기 때문에 오맹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소공이 예법을 안다면 누구인들 예법을 모르겠는가"라고 했던 부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전국 시대 이후, 씨를 성으로 삼았고, 한대 이후부터는 성씨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 불혼은 대체로 금지되지 않았다.

 

      6. 결혼의 과정 : 육례
  유가 예의에서는 혼례를 매우 중시하여 "남녀의 구별이 있은 연후에 부부의 의가 있으며, 부부의 의가 있은 이후에 부자간의 친함이 있고, 부자간의 친함이 있은 이후에 군주와 신하 간의 바름이 있다. 때문에 '혼례는 예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혼인의 준비 단계에는 육례라는 것이 있다.(육례에 대한 견해는
[의례.사혼례]와 [예기.혼의]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책은 진왕조 건국 전후의 작품으로, 유학자들이 각지에 유행하는 풍속과 전인들의 기록을 총망라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새로운 통치 계층이 사회 통치 질서를 공고히 하고통일된 도덕 표준과 사상 표준을 제정하기 위해서이다.) '육례'가 제정된 이후, 통일된 혼인 의식이 만들어져 2,000여 년이나 게속되었다.
  혼례는 남자가 중매자를 통해 혼인을 청하고, 여자의 생년월일을 묻고, 점을 치고, 남자 집에서 여자 집으로 예물을 보내며, 결혼 날짜를 선택하고, 신랑이 직접 여자 집으로 가 신부를 맞아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때문에 공경하고 신중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혼례이다. 육례가 갖추어지면 이것을 빙이라 하고, 육례가 갖추어 지지 않으면 이것을 분이라 한다.
  이 글은 혼례의 내용, 목적, 의의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혼례 의식이 저녁에 이루어져 밤에 첫날밤을 치른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본래 고대에는 지배층의 혼인만을 '혼'이라고 했으며, 일반 백성들은 육례 의식을 밟지 않고 결혼했기 때문에 '분'이라고 했다.
  '육례'의 과정과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첫째, 납채 : 남자가 중매자를 통해 혼인을 청하는 일로서 정혼의
첫단계이다.(한대의 [공작동남비]에서 유란지가 중경의 어머니에게 내쫓겨 집으로 돌아온 후, 중매인이 찾아왔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 부분은 육례 중 납채에 해당한다.) 이때는 반드시 기러기를 사용하는데, 큰 기러기는 후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러기를 사용하는 것은 때에 따라 남북으로 오가며 그 계절을 잃지 않으니, 여자를 빼앗지 않을 때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또 비행하다가 멈춰 열을 이루는 것은 결혼 예절을 밝힌 것이며, 장유에 순서가 있어 넘지 않는다." 납채 때를 제외한 다른 육례 과정에서도 기러기를 사용한다. 기러기 외에도 검붉은 명주, 양 등 30여 종의 예물이 있었다.
'현훈'을 가져가는 까닭은 '현'은 하늘을 상징하고, '훈'은 땅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며, 양을 가져가는 이유는 그것이 길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대 황제들이 황후를 간택할 때의 납채 의식은 상당히 사치스러워 황금 20만 근, 말 20필 등을 보냈다. 이러한 풍조는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전해져 납채에 있어 재물을 중시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둘째, 문명 : 여자 쪽에서 결혼을 승낙하면, 사람을 보내 여자의 생년월일을 물어 남자의 생년월일과 합친 후 혼인의 길흉을 점친다. 이때 여자 쪽에서는 남자 쪽에서 온 사람을 환대한다.

  셋째, 납길 : 점을 쳐서 길하면, 점을 통한 합혼 소식을 여자 쪽에 알린다.

  넷째, 납징 : 사실상 매매혼이 변화되어 전해진 풍속으로, '납폐'라고도
하며, 남자가 비단과 같은 중요한 예물을 여자 쪽에 보낸다. 육례 중 유일하게 기러기를 사용하지 않고 의식을 치른다.

  다섯째, 천기 : 남자 쪽에서 여자 쪽에 결혼 날짜를 묻는 것으로 결혼 수속이 끝났음을 나타낸다. 한대 사람들은 길일을 택해 결혼하지 않으면 개인이 사망하거나 가문이 멸망하는 등의 큰 재앙이 닥친다고 보았다. 때문에 길일을 택해 결혼하는 것은 한대 혼인 풍속에서는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여섯째, 친영 : 신랑이 직접 여자 집으로 가 신부를 맞아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친영할 대, 신랑은 검정색 예복에 검정색 수레를 타고, 신랑 앞쪽에 가는 사람이 촛불을 들고 인도하며, ㄷ족에는 수레 두 대가 따라와 함께 신부 집으로 간다. 신부 집에 도착한 신랑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다. 그러면 신부 아버지가 직접 문 밖에 나와 신랑과 남자 쪽 빈객을 집으로 맞이한다. 이때 신랑은 기러기를 여자 쪽에 건네주고 예절을 행한다.
  이러한 '육례'를 모두 실행하는 것은 광의적 의미로서의 혼례이고,
'친영'만으로도 혼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의 다섯 가지 '예'는 혼인의 준비 단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육례를 밟아 결혼식을 올린 신랑은 신부와 첫날밤을 치르게 된다. 이 의식은 신부가 데려간 여동생이나 하녀도 신랑과 성행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첫날밤을 치른 다음날 아침 신랑은 신부를 부모 및 제실에 모신 조상들의 영전에 인사시킨다. 이 인사는 석 달 동안 계속되고, 그 후 신부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공인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벌 사족들의 혼인에 있어서도 육례 의식을 준수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혼례는 간소화되었다. 게다가 관리나 백성들은 육례가 복잡하다는 이유로그 격식에 따라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송대에 이르러, 육례는 더욱 간략화 되었다.([주자가례]에서는 또 납길을 제외시켜 더욱 간단하게 바꾸었다.)


   
      제 5장 결혼의 다양한 유형

    1. 복희와 여와의 결혼 : 형매혼
  형매혼이란 형제 자매 간의  결혼을 말한다. 형매혼의 대표적인 실례는 복희와 여와  남매의 신화이다.
  복희와 여와 남매는 대홍수로 대지 위의 모든 인간들이 죽었을  때, 유일하게 살아  남은 자들로서, 본래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호리병박 속에서 살아 남았기  때문에 복희라고 부르게 되었다.  복희는 바로 호리병박을  뜻하며, 또  '포희', '포희'라고 부르게 되었
다. 여와는음제로 복희를 보필하여 통치했으며, 복희의 여동생이다.([풍속통의],   [춘추세보]에서는 "화서가 낳은 사내는 복희이고,  여자는 여와이다"라고  했으며, 노동의  [옥천자집,여마이결교시]에서는 "여와는 본래  복희의 아내이다"라고  했다. 또한 [제왕세기집존]에서는  "여와는 
성이 풍으로 복희의 제도를 이었으며,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으로 하루에 칠십번 변화를 부렸다"고 했다.) 이들이 남매에서 부부가 되어 인류를 만들었다는 신화는 당나라  때 이용의 [독이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비가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내려 큰 홍수가 났는데, 사람들은 전부 물에 빠져 죽고 복희 남매만 갈대 속에 누워 다행이 어려움을 면했다. 이들은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갈대에서 나왔는데, 이 세상에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한 신선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없으니,  너희들이 부부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멸종될 것이다.'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노인의 말만  듣고 친남매가 부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앞으로 걸어나가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부부가 될  것을 권하였다. 그들은 화를 내고 까마귀의 머리를 자르고 말했다. '만일 네가 몸과 머리를 이어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부부가 될 것이다.' 말을 막 마치자, 까마귀의 머리와 몸이 하나로 이어져  깍깍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날아갔다. 그러나 복희 남매는 여전히 부부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은  계속하여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자식을 점지해 주는 여신인 낭랑을 만나게 되었다. 낭랑도 그들에게 부부가  될 것을 권하고,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믿지 않자,  낭랑은 말했다. '너희들이 각자 다른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 불을 피워  두 줄기의 연기가 하나로 합쳐진다면,  부부가 되는  것은 하늘의 뜻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낭랑의 말대로 하자, 과연  두 줄기의 연기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래서 부부가 되었다.
  이 내용을 보충하면 이러하다. 대홍수로  대지 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지만, 용감한 오누이는 열심히 일하며  매우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늘문이 항상 열려 있었다. 그래서 오누이는 손을 마주잡고 하늘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통하여 하늘나라에 올라가곤 하였다. 세월은 흘러 오이는 성인이 되었다. 오빠는 여동생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여동생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친혈육인데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어?"  그러나 오빠의 결혼 제의는 계속되었고,  이에 여동생은 이런 제안을 하였다. "오빠, 내 뒤를  쫓아와  봐요. 만일 오빠가 나를 붙잡으면 오빠와  결혼할게." 그리하여 두 오누이는 커다란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경주를 시작하였다. 누이동생은 민첩하고 영리하여 쉽게 오빠에게 잡히지 않았다. 오빠는 꾀를 내어  계속  뒤쫓다가 갑자기 몸의 반대 방향으로 돌려 달렸다. 이를 예측하지 못한 여동생은  그만 오빠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두 오누이는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아내는 고깃덩어리를 낳았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이 부부는 고깃덩어리를 잘게 잘라 종이에 싼 다음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에 올라 하늘 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들이 사다리를 반쯤 올랐을 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와 종이가 찢어져 고깃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그 조각들은 지상에  닿자마자 모두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래서 나뭇잎 위에 떨어져 사람이 된 자에게는 섭이라는 성씨를 주고, 나무위에 떨어져 사람이 된자에게는 목이라는 성씨를 주는식으로 고깃조각이  떨어진 곳의 사물의 명칭을 따서 그들의 성씨로 삼았다. 이 이후로 지상에는 또다시 인간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희 부부는 인류를 재창조한 시조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전설에 의거하여 복희와 여와를 세상을 창조한 신이며  인류의 시조로 간주하고 있다. 또 출토된 복희와 여와상 가운데 구(방형을 그리는 데 쓰는 자)와  규(원형을 그리는데 쓰는 제구)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있어 이들을 인류 문화의 창시자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여와와
복희의 상반신은 사람의 몸으로 중국고유의 긴 옷을 걸치고 관을 쓰고 있지만, 하반신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두 꼬리가 한데 엉켜 교미하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 성교  관계가 있었으며, 인류의 생육자임을 나타낸다. 단지 복희의 손에는 태양을 받들고 있고, 여와의 손에는 달을 받들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남매끼리의 통혼에 관한 전설은 원시 시기 초기 인간들 사이에는 이미 혈연혼이 존재했음을 반영한다.(이와 같은 형매혼에  관한 전설은  또 얼굴에  무늬를 새긴 대만  고산족의  전설에서도 볼 수 있다. 아주 먼 옛날 커다란  돌덩어리가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깨지더니 그  속에서 남매가 나왔다. 이들이 성장한 후,  배우자를  찾아 결혼할 방법이 없자, 누이동생은 오빠가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에 재를 묻혀 화장을 하고 결혼을 하였다.)

 

    2. 황제의 결혼 이야기 : 대우혼
  대우혼은 족외 군혼을 모체로 하며, 일부 일처제로 향하는 과도기적  단계이다. 여성은 성년이 되면 다른 씨족의 배우자가 될 수 있었으며, 또 교합할 수도 있었다. 이 경우  남자는 저녁 식사후에 여자가 살고 있는 곳으로 왔다가 다음날 아침 식사 전에 떠나야만 한다.  여자의 집에서 밤
을 보내는 남자는 무기나 자신의 물건 중  하나를 여자의 방문 앞에 놓아두어 뒤에  오는 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이런 관계는 쌍방의 동의하에 가능하다. 때문에 한 여자의 남자 배우자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며, 남성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대우혼의 시초는 황제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황제는...서릉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취), 그녀가 바로 유조이다. 유조는 황제의 정실로서 두 아들을 낳았다.
  황제에게는 스물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성이 같은 자는 청양과  이고 두명뿐이고, 모두 자기 성으로 삼았다. 청양은 방뢰씨의 생질이고, 이고는  동어씨의 생질이다. 어머니는 같지만, 다른 성을 가진 자는, 네 명의 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열두 가지 성을 가졌다. 첫번째 문
장에 보이는 '취'자는 본래 남자가 한 여자의 귀를 잡은 모습으로 '아내를  취하는 남자', 즉 결혼을 의미한다.
  대우혼이 성숙 단계로 접어들자 대우 가정이 나타나게 되었다. 대우 가정의  탄생은 단순히 양성간의 성교 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적  연계의 시작을 의미하고, 씨족 구성원간의  경제적 관계는 약화시켰지만 가정 내부의 연계는 강화시켰다.  모계 혈통의 지배하에서  결혼은 남자가  여자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취하는 것이었고,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중시하고 남자를 경시하였다.

 

    3. 일부 일처제의 특수한 형태들 : 전방제와 잉첩제 

  남녀 관계가 군혼과  잡교에서 일부 일처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성교 대상은 점점  축소되어 갔다. 부모와 자녀의 성행위를 금지하고 남매간의 성행위를 금지하여  혈연 관계가  있는 남녀간에는 성행위를 하지 못하게 했다.  군혼제가 일부 일처제로 바뀌는 과정의 중간 단계가  바로 화혼
제이다.
  화혼제는 자매 혹은 더 많은 수의 여성을 한 남자의 아내로 맞이하거나, 형제 혹은 더 많은 수의 남성을 한 여자의 남편으로  맞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점점 일처 다부제 혹은 일부 다처제로 자리잡아 갔다.
  일처 다부제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읍달국에서는 형제가 같은 아내를  얻었으며, 부인이 지아비가 한 명 있으면 뿔이 하나 있는 모자를  쓰고, 형제가 많은 자는 그 수에  따라 뿔을 만들었다.
그리고 멸이라는 자는 키가 작고 왜소했는데, 형제가 한 명의 아내를 공동으로 취하였으며, 부인은 머리에 뿔을 만들어 지아비 수를 나타냈다.
  이에 비해 일부 다처제에  관한 기록을 보면, "제후가 한번에 아홉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아홉 주가 있는 것과 같아  아내가 한 명이고 첩이 여덟 명이며", "우두머리의  처는 수십 명이고  여자 노비는 수백 명이다"
  실제로 중국의 일부 다처제와 일처 다부제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은 편이다.  순임금이 아황, 여영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화혼제의  전형적인 예이다. 후대의 제왕들이 수많은  처첩을 소유한 것은 사실상 일부 다처제를 실행한 것이지만, 겉으로는 처와 첩을 분리하여  '일처 다첩'의 형태
였다.
  일부 다처제와 일처 다부제의 특징을  보면,  첫째, 이후의 일부 일처제와는 상대적으로  성교 관계가 전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군혼성이 있고,  둘째, 오랜 역사의 군혼과 잡교에  비해 비교적 작은 범위 안에서 군혼이  행해졌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배타성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  비교적
고정된 혼인 형식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가취성이 있다.
  일부 다처제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고대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전방제와 잉첩제이다.

  (1) 지아비가 요절한 경우의 결혼 방식 : 전방제
  전방제는 지아비가 요절하면 아내는 반드시  죽은 자의 형제나 당형제 심지어는 아버지에게 다
시 시집가는 결혼 형태를 말한다. 이 전방제는 일부 일처제의 특수한 형식으로  '수계혼', '속혼', '환친'이라고도 한다. 전방제의 시행 배경은 무엇인가?
  부계 씨족 사회가  노예 사회에 이르면서 부녀자들은 모두 씨족과  종족 안의 하나의 재산이었다. 생산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 씨족과 종족은 하나의 재산이라도 지키려고 했지만 용이하지 않았다. 때문에 다른 종족에서 시집온 여자를  잃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동생이나
형이 그녀를 취할 수 있고, 자식이나 조카들도 그녀를 취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손자들까지도 그녀를 취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것은 동족을 단결시키는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매우 타당성이 있다. 전방제는 특히 춘추 전국 시대에 많이  발생했는데,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조부가 사망했을 경우 손자가 과부가 된 조모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으로, 이것을 '인'이라 했다. [좌전, 문공 16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주양왕의 여동생은 송양공에게 시집가 양부인이 되었지만, 일찍 과부가 되었다. 송양공의 손자 포는 사람됨이 어질고 예의  바르며 용모 또한
수려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양부인은 포를 보고 춘심이 싹터 배필로  맞이하려고 했지만 포의 거절로 달성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송나라에 기황이 들었고, 군주 송소공은 어리석어 난국을 헤쳐나가지 못했다. 포는 기황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공경  대신을  끌어안고 인재
르 띵사들여 국사를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양부인은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자기 재산을 전부 풀어 공자 포를 지원했고, 민심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이들은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
  둘째,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들이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으로, '증'이라고 했다. 그러나 또 조카와 숙부 혹은 백부 등의 방계 친척의 아내와 혼인 관계를 맺을 경우는 '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위선공은 이강과 간음하여  급을  낳았는데, 이강은 본래 위선공의 아버지  위장공의 부인이었으며, 위선공의 서모였다.
  셋째,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고, 동생이 죽으면 형이 제수씨를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방제의 좋은 실례는 순임금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순은 상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이다. 순의 아버지 고수는 아내가 죽자 후처를 얻어 상을 낳았다. 고수는  후처와 상을 사랑하는 대신 순을 미워하여 항상 죽일 방법을 강구하였다.
  요는 순에게 갈포로 만든 옷과 거문고를  하사했고, 창고를 지어 주며 소와 양을  상으로 주었다. 고수는 여전히 또 순을 죽이려고 했는데, 하루는 순에게 창고를 올라가서  벽토를 바르게 하고 아래서 불을 질러 창고를 태워 버렸다. 그러나 순은 삿갓 두 개로  자신을 보호하며 창고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면하였다. 그 뒤 고수는 또 순에게 우물을 파게 했다. 순은 우물을 파면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비밀 구멍을 함께 팠다. 순은 우물을 파면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비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와 도망갔다. 고수와 상은 기뻐하며 순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은 '이 계책은 원래 제가 생각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부모와 함께 순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였다. 이때 그는 '순의 아내인 요의  두 딸과 거문고는 제가 가지고, 소와 양,  창고는 부모님께 나눠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순을 죽이고 순의 아내 아황과 여영을 자기 아내로 삼으로 한 것은 중국 역사상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풍속이다. 이와 같은 유의 전방제의 실례는 또 찾을 수 있다.  가령 "옛날 창오요라
는 자는 아름다운 아내를 얻게 되자 형에게 양보했고... 맹묘는 형수를 아내로 맞아 다섯 아들을 낳았다"고 했는데, 이 두 명 중 한 명은 춘추 시대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전국 시대 사람으로, 당시 형제간의 전방제가 보편적인 사회현상이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방제는 종법 제도하의  남성이란 절대적 주권과 지위를 지닌 가장이며, 가족 중의 여성, 특히 남편을 잃은 과부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배 권력을 지닌 가장이며, 가족  중의 여성, 특히 남편을 잃은 과부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배 권력을 가지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물론 전방
제의 목적은 먼저 부권 통치의 확립과 처첩의 사유 재산화이다.
 
  (2) 자매가 함께 시집가는 방식 : 양첩제
  잉첩제는 원시  사회의 족외혼이 대우혼으로 발전하는  과도기 형식이다. "옛날  딸을 시집보낼 때는 반드시 조카딸이 따라갔는데,  이것을 잉이라 한다"라고 했듯이, 잉첩제란 한 여자가 출가할 때, 같은 성을 가진 여자 동생과  노비가 함께 시집가는 것을 말한다. 가령  맏딸과 결혼하는 남자는 그 여자의 일정한 나이가 찬  자매 또한 아내로 맞이할 권리가  있었다. 잉첩은  정실 부인은 아니지만, 지위는 첩에 비해서는 높았으니, 정부인과 첩의 중간층이었다.
  최초로 자매가 함께 시집간  에는 요임금이 두  딸을 순임금에게 준  것이다.(요와 순은 모두 전설 속의 원시 사회 후기의 인물로 대우혼이 개체혼으로 향하는  과도기에 살았으며, 한번에 두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후대의 잉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하나라의 다섯번째 군주 소강은 즉
위하기 전에 우유씨의 백정이었는데, 우사의  두  딸을 동시에 취했다. 은상 시기로  들어서면서 잉첩제는 제도화되어 성행하기 시작했다.  시집갈  때 동행하는 여성은 대부분  친동생이었으며, 그것은 보편화된 것이었다.

  i) 언니를 출가시키면서 여동생을  함께 보내면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처럼 멀리 갈  수 있어 길하다.
  ii) 여동생은 언니를 따라  출가하지만, 언니는 동생 같지 않기 때문에 반대로  잉이 되어보내진다.
  iii) 제을의 시집간 딸, 언니의 시집갈 때 입은 옷은 동생이 시집갈 때 입은 옷보다 아름답다.  춘추 시기에도 잉첩제가 성행하였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가령  [시경,대아] '한혁'의 "한후가 맞이하는 배필될 이... 뒤따르는  아홉 명의 신부들"이라든가, [빈풍]'칠월'의  "여인네 마음 서글퍼지니, 공자님과 함께 시집가고 싶다네"는 잉첩제를 말한다. 여기서 '자'는 빈공의 여자이며, 서글픈 마음을 지닌 여자는 조카딸과 여자 몸종이다. 또 "위장공은  또 진나라에서 아내를 취했는데, 이름이 역규이며, 효백을  낳았다... 역규의 동생 대규는 환공을 낳았다"는  것 또한 한 실례이다.)  [좌전, 희공 17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제나라 제후의 부인은 세  명이었는데, 왕희, 서영, 채희에게는 모두 아들이 없었다.  제나라 제후는 여색을 좋아하여  많은 여자를 총애했는데  부인처럼 사랑받는 여자[즉 잉첩]는 여섯 명이나 되었다. 자위희는  무맹을 낳았고,소위희는 혜공을 낳았으며, 정희는 효공을 낳았고, 갈영은 소공을 낳았으며, 밀희는 의공을 낳았
고, 송화자는 공자 옹을 낳았다.
  잉첩은 또 여자 쪽과 같은 성을 가진 국가의 조카딸이나  여동생을 포괄하기도 한다.  춘추 시대 노나라의 송공희에게는 세 나라에서 온  잉이 있었고, 관중에게는 세 성의  여자가 있었으며, 진백납에게는 다섯 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노나라의 백희는  송공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본국의 조카딸과 여동생 이외에 노나라와 같은 성의 국가인 위, 진 두나라에서도 잉첩을 보냈다.
어떤 때는 다른 성을 가진 나라에서 잉첩을 보내기도 했다. 대부가  아내를 얻을  때도 조카딸이나 여동생과 같은 성을 가진 나라의 잉첩이 있었다는 기록도 관심거리다.  가령 노나라 장선숙은 아내가 두 아이를 낳은 후 죽자, 아내의 조카딸을 정실로 삼았다. ([의례,사혼례]에 "수무제, 잉
선"의 예가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일의 흔히 었었음을 말한다.)
  잉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었는가? 이 점은 여성의 성 능력과 연관되므로 주의해야 할 문제이다.
  천자가 황후를 취할 때 세개의 제후국에서  잉첩을  보내 오는데, 각 나라에서 세 명,  왕후가 데리고 오는 두 명의 잉, 총 열두 명이 따라오게 된다.
  제후가 한 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할 때, 두 나라에서는 잉을  취하고, 또 각각의 질, 제종을 취한다. 질은 형의 자식이고, 제는 동생이다.  제후는 한번에 아홉 여자를 맞는다. 또 이  세 여자는 각기 두 여자를 데리고 시집을 온다. 그래서 아홉 명의 여자가 되는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 경대부의 지위는 제후들보다 낮아 다른 나라에서  잉을 보내는 일이  없고, 단지 시집오는 여자의  조카딸과 여동생만이 따라왔다. 때문에  "대부에게는 두 명의  잉이 없었으므로 조카딸과 여동생을 잉으로 삼았고," "선비는 한  명의 아내와  한 명의 첩이 있을 뿐  잉을 두지 못했다." 물론 선비 계층에도 잉첩제가 존재했었는가 하는 문제는 논쟁이 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들의 성생활에는 일정한 규칙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첩이 비록 늙었을지라도 나이  50이 안되었으면  반드시 닷새는 모신다. 50이 찼으면  모시지 않는다.
  이것은 여성의 성적 권리를 가리킨다. '닷새를 모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일일어'는 제후의 제도이다. 제후는 아홉 여자를 취하는데, 조카와 동생 두 명이 모시는 것이 사흘이고, 다음으로 두 잉이 나흘째를 모시며, 그 다음 부인이 밤을 모셔 오일이 된다.
  비록 고대의  부부들은 잠자리를 제외하곤  서로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남자는 여자에게 예의를 갖추어야만 했다. 즉 남자는 많은 수의  아내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성적으로 소홀히 해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아내나 첩과  성행위를 할 수  있는
횟수와 순서조차도 엄격하게  정해졌다.  이런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기는 남자  나이가 70세가 되었을 경우다.
  간혹 신부들 중에는 잉첩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하는 이도 있었으며, 반대로 잉첩의 신분이면서도 신부와 함께 가는 것을 기뻐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시경, 국풍, 강유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강물은 갈라져 흐르고
  아가씨는 시집을 가는데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네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뒤에 후회하게 되리

  강물 옆에 늪이 있고
  아가씨는 시집을 가는데
  나와 함께 하려 않네
  나와 함께 하려 않지만
  뒤에는 함께 살게 되리

  강은 지류가 많고
  아가씨는 시집을 가는데
  내게는 들리지도 않네
  내게는 들리지도 않지만
  탄식하며 노래 부르리

  이 시에서 '강물은 갈라져 흐르고'라는 것은 잉첩과 남자와의 이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잉첩과 남자 주인과의 관계는  혼인 관계이지 결코 정통 예법에 따른 것은  아니다. 정현은  "혼인의 도는 시집가고  장가드는 예를 말한다"고 했고, 이로부터 공영달은  "남자는 저녁 때  여자를 맞으며, 여자는 남자 때문에  온다"라고 부연 설명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혼인의 주지는 예의에 입각한 혼취에 있다.  즉 남녀가 동거하여도 예의에 부합하지 못하면 혼인   관계는 형성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잉첩은 주인과 양성 관계에 있으며,  사회적으로 그들의 성행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잉첩제 또한 일종의  혼례 제도인 것이다. 이것은  일부 이처제의  혼인 형태에 속하는 특수한 혼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잉, 첩제는 불합리한 혼인 제도라는  점에서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역경, 혁괘]  단에서 "물과 물은 서로 숨쉬게 한다.
두 여자가 함께 기거하면 그 뜻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데, 이것을 혁이라 한다"고 했지만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참고적으로 잉에는 흔히 '잉싱'이라고  하는 남성 노비가 있었다. 은나라의 명재상  이윤은 유신씨의 딸이 상나라 탕에게 시집갈 때의 잉신이었으며, 진목공을 도와  패업을 이룬 백리해 또한 일찍이 잉신을 지낸 적이 있다.
  잉첩제는 한대에 이르러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대  사람들이 일부  일처제를 엄격히 지켰다는 말은 아니다.  한대에는 부부  이외의 성생활은 잉첩과 비슷한 부류의  애첩에 의지하였는데, 이 당시의  애첩 이름으로는 '소첩', '소부', '소부',  '방처', '하처', '외부'등
이 대표적이다.(소첩의 예를 보면, 서한 시기 사부가 매승은 양나라에 있을 때, 소첩 한 명을 맞이하였는데, 이름이 고모이다. 매승이 동쪽으로  돌아올 때, 고모가 따라오지 않으려고 하자, 매우 화를  내며 수천금을 주어 그녀를  남겨 두고  어머니와 살도록 했다. 또  [한서, 영행전]을 보면, 장팽조는 소첩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방처의 지위는  낮은 편이고, 하처는 낮은 비첩의 총칭일 가능성이 있으며, 외부는 오늘날의 정부와 유사한 것으로 그  사회에서는 인정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리고 한대 소처, 방처는 단 한 명에 그친 것이 아니다. [한서, 원추전]에서는 "왕이 술과 색을 좋아하는 것은 금했지만, 첩은 많이 취했다."라고 했고,   [후한서, 양절왕창전]에서는 "신 창에게는 37명의 소처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 당시  자식이 없어 첩을  들이는 일은 민간에서도 흔히  있었다. [의림] 및 [태평어람], p.388과 p.366에서  인용한 [풍속통]에서는 "진류 지방의 한 부유한  집에는 90세가 되었으나 아들이 없자 농부의 딸을 첩으로 맞았다"고 했다.)

 

    4. 일부 일처제와 그 발전된 형태들
  일부 일처제는 생산력이 충분히 향상되고, 남녀 모두가 목축과  농경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었을 때 나타난 가족 단위이다. 따라서 일부 일처제는  사유제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염철론]에 의하면, 옛날 이상적인  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방법이었
는데, 이후 선비들은 한 명의 첩을 두었고,  대부는 두 명을 두었으며, 제후는  조카딸과 여동생 아홉 여자르 띵두었으며, 지금 제후는  백여명이 있고, 경대부는 십여 명이 있으며, 부자는 방에  가득 채웠다고 했다. 즉 인류 최초의  혼인 방식은 일부 일처제였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바뀌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옛 사람들이 항상 말하는  '부부 일체'의 본래 의미는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여 혼인을   하면, 법률적, 도의적으로 서로  책임을 져야 하며, 부부를 '배우'라고  하듯 서로간의 성적 관계를 나
타낸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부부 관계에 있어 아내는 독립된 인격체라고  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남자의 결정에 따라야 하며, 심지어 아내의 신분은 같이 살고  있는 남자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혼례에 있어) 부부가 뇌를 함께 먹는  것은 존비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은 작위가 없으나 남편의 작위를 따르며 앉는 순서도  남편의 나이에 따라  한다.(부녀자의 칭호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당대에는 1품 및 국공의 아내는 국부인이라 하고,  3품 이상의 부인은
부인이라고 했으며, 그  아래로는 군군, 현군, 향군등이 있었다. 송대에는  군부인 이하로 숙인, 석인, 영인, 공인, 의인, 안인, 유인 등이 있었다. 원대에는  당송의 제도를 참고하여 부인의 봉호에는 일곱 가지 등급이 있었다.  명대에는 1, 2품 관리의  아내를 모두 부인이라 했다. 그리고  청대에는 1품 관리의 아내는 1품  부인, 2품  관리의 아내는 부인,  그 밖의 3품에서 7품까지는 명,  청대 똑같이 숙인, 공인, 의인, 안인, 유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자가 천자이면 부인은 황후가  되고,  남자가 제후이면 아내는 부인이 되며,  남자가 대부이면 아내는 명부가 되었다.  한위시기에는 특수한 몇 예를 제외하고는 부인은 흔히  직위와 봉록이 없었다.
  일부 일처제는 여자는 한 남자만을 가질 수 있는데 반해 남자는 여러명의 여자를 거느릴 수 있는 일부 다처제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명목상 정실로 칭해지는 여자는 한 명뿐이지만,  첩은 매우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아내 한 사람만으로는 사내아이의 생산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 고대 최초의 일부 일처제는 겁탈혼, 매매혼, 중매혼 등 다른 형식을 통해 발전했다.

 

  (1) 겁탈혼
  원시 사회 모계 씨족이 해체되고 부계  씨족 사회로 향하는 과도기 때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남자 쪽 씨족으로 출가한  것이 아니라 강제성을  지닌 겁탈혼의 방식으로  결혼했다.
겁탈혼이 원시 사회의 부계 씨족 시대에 나타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이 시대 남성은 주요한 생산 노동력인 데 비해 부녀자의 지위는 내려갔다는 데 있고, 둘째는  여자는 일단 성인이 되면 가정을 노동력이며, 씨족 재산의 일부분이었기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역경]의 다음 문장은 겁탈혼에 관한 것이다.
  i) 이 여자를 취하지 마소/ 미모의 낭군만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네
  ii) 나가지 못하고 방황한다/ 말을 탄 사람이 오는데/ 도적이 아니라 좋은 짝이라네
  iii) 말을 타고 와/ 피눈물을 주룩주룩 흘린다.

  위 글에서는 남자가 위풍당당하게 말을 달려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 여자를 납치하듯 데리고 나오고, 여자는 상심하여 우는 모습을 묘사했다.  어떤 이들은 이처럼 말을 타고  배회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여자를 겁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혼을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기도  했
다. "도적이 아니라 좋은 짝이라네"는 [주역]에 흔히 보이는 말이다. "강도가아니면   자기 결혼 상대로 좋다. 이전에 (음양  화합의)비를 만난 적이 있으면  길하다"는 말도 보인다. 그런데  비를 만나면 왜 길하다고 하는가?  여자를 겁탈한 후 비가 내리면 빗물에  족적이 사라져 상대방이
쫓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의 문장들은  강도가 신부를 탈취하는 일은  캄캄한 밤에 가능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공자가 시집간 여자의 집에서는  사흘 밤 촛불을 끄지 않아 서로 떨어지는  것을 생각하고,  부인을 얻은 집은 사흘간 음악을 하지 않아 친부모를 생각한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혼례는 축하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결혼 소식이 누설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 등도  겁탈혼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겁탈혼의 의미는 '혼인'이라는  개념, 즉 "혼이란 어두울 때 예를  행하기 때문에 혼이라고 한다. 인이란 부인이  남편으로 인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이라 하는"것과  밀접하다. 또 [설문]에서는 "부인을 얻는 것이 저녁 때이기 때문에  혼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혼인이 황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 저녁이 되어서야 혼례를 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동한의 정현은 "혼인 방법이란 가취의 예를 가리키며," "남편을 혼이라 하고,  아내를 인이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공영달은 "남자는 황혼 무렵에 여자를  맞이하고, 여자는 남자를 따라온다...남녀의  몸을 논하여 가취라고  하는것은 아주 알맞게 결합할 때를  가리키며, 이것을 혼인이라고 한다. 이 일은  한 가지뿐이므로  '혼인 방법이란 가취의 예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아]는 남녀 부모에 의거한 것이며, 이것은 남녀의 몸에 근거하여 남편은 황혼  무렵에 맞이하고, 아내는 이로 인해 따라간다.그래서 남편을 혼이라 하고, 아내를 인이라 한 것이다"라고 했다.
  겁탈혼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같은 씨족의 여자를 겁탈하여 아내로 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원시 사회 부락간의 전쟁에서 상대 씨족  부락의 부녀자를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삼은 후, 자기 씨족  부락의 남자에게 분배하여 아내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역경]이전에도 겁탈혼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보인다. [사기, 하본기]에는, 예가 하대 네번째 군주의 왕위를 차지한 후, 한착이 예를 죽이고 예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내용이 보이고, [국어, 진어칠]에는 하걸이 유시씨를 공격하자, 유시씨는 미녀를  하걸에게 바쳐 첩을 삼게 함으로써  강화를 맺었다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건은 초기 겁탈혼의 두 가지 기본  방식, 즉 첫째는 무력으로 겁탈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규모의 무력의 부산물임을 대표한다.
  개인이 무력으로 부녀자를 약탈하여 첩으로 삼는 것은 춘추 시기 이전의 문헌에서도 더러 보인다. 이 가능성은 노예주에게  있어 그들이 고용하고 있는 신하나 노예는 사람들에게  내재된  일체의 권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부녀자를 약탈하여 첩으로  삼는 일은 결코 특별
한 일이 아닌 것이다. 가령 송나라  태재 화부독은 길에서 사마 공부가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공부가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으며,  노장공은 궁궐 안의 높은 누대에서 당씨 집의 미모의 여자를 발견하고는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겁탈
하여 첩으로 삼았고, 초나라 공자 재는 영윤의 지위에 있을 때, 대사마의  처첩이 자기의 처첩보다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자, 대사마를 죽이고  그의 처첩과 재산을 전부 몰수하여  자기의 소유로 했다. 그리고 적나라 사람이  장구여라는  부락을 정벌하여 얻은  숙외, 계외라는 두 여자를   공자 중이에게 보낸 것 또한 겁탈혼의 한 예이다. 그리고 초나라 왕은 식나라를 멸하고  그 왕의 아내 규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취했으며, 초나라 성왕은 정나라를 구해  주고 정나라  군주의 두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돌아갔고, 진나라는  제후들을 평정할 때마다 그  나라의 궁실을 모방하여 함양의  북쪽 산기슭에 지어 제후들에게서  빼앗을 미안과 종고로 가득메웠다.  또 한문제의 생모 박희는  본래 위나라 왕 표의 여자였는데, 한신의 포로가 되어 한고조의 여자가 되었다.
또 견후는 본래 원소의 며느리인데, 조조는 원소를 멸망시키고 그녀를  차지했다. 이처럼 적군의 여자를 약탈하는 일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정신적인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겁탈혼은 세력이 강한 자가 그보다 못한 상대방에게 여자를 바치도록 협박하는 형태로 변모해 갔다. 이 점에서 한대의 '화진'은  상고 시대 겁탈혼의 맥을 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겁탈혼 풍속은 한조의 역사 발전과 더불어 점점 사라졌지만, 소수 민족들에게서는 여전히 성행했다. 한대 북부 변방 지역의 오환족은 "먼저 여자를 약탈하여 정을  통하고" 동거하다가 반년이나 100일이 지난 후, 소,  말, 양을 처가로 보내 빙례로 삼았다.  그런 연후 남자는 여자를 따라
여자 쪽 집으로 가서 1년 혹은 2년간 함께  산다. 그 후 여자 집에서는 집이나  결혼 용품  등과 함께 딸을 준다. 오환족의 이러한 풍속은 겁탈혼이면서도 복역혼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토곡혼족의 결혼은 빙재를 후하게 하지만 결혼 방식만은 겁탈혼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여하튼 겁탈혼이란 남자가 무력으로 여자를  겁탈하여 강제로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 '약탈혼', '양전혼'이라고도 하며, 고대 씨족 부락의 외혼제의 유속이기도 하다.

  (2) 매매혼
  겁탈혼 이후 나타난 결혼 형태는  매매혼이다. 매매혼이란 사유제  혼인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남자 쪽에서 많은  양의 재물을 지불하고 여자 쪽의  부녀자를 취하는 교역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고대 전설 속의 복희가 암수 한 쌍의  사슴 가죽을 결혼 예물로 한 것은  겁탈혼이 매매혼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고대 사람들은 가죽을 화폐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슴 가죽은 사실상 매매혼에서 필요한 재물에 해당한다.
  사유제가 형성됨에 따라 상품  교환 또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처는 예절을  갖춰  맞이하였지만, 첩은 임의로 매매할 수 있었다.  잉으로 얻은 첩은 고급 귀족의 특권이 있었으므로 매매가 불가능했지만, 이와 달리 야합을 통해 얻은 첩은 쉽게 팔고 살 수 있는 상대였다.
  매매혼은 특히 한대에 유행하여  황제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주례]와 [예기]를 보면, 천자, 제후, 백성들이 결혼할  때는 빙금, 채례에 관한 규정이 있다. "
황제가 황후를 맞이할  때는 황금 만 근을 빙례로 했지만,"  이를 훨씬 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서한 말, 평제는 왕망의 딸을  황후로 맞으면서 황금 20만 근, 은  10만 근을 보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사치스러운 기풍은 동한 때에도 여전히 지속되어 제후,  선비, 서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에서는 첩을 사는 행위를   허락하였다. [회남자,도응훈]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노나라의   법률에는 누구든지 각국의 첩이 되어 흩어져  있는 부녀자를 사서 돌아오면 관청에서  상을 준다고 했고, 공자의 제자 자공이 많은 수의 노나라 여자를 사서 돌아왔다고  한다. 정부에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국외에서 첩이 된  사람을 사오는 것을 장려햇음은 밖에서 첩이  된 자의 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는 예이다. 예의지국이었던 노나로  또한 이와 같았으니, 다른 나라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제후국에서 궁궐의 아름다운 첩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했다. 한나라 통치자는   강대한  전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양의 돈을  진나라에 주기로 결정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궁궐의  미녀를 보내 강화를 청했다. 또 위양왕은 초나라와의 여맹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절색 미녀를 선발하여 초회왕에게 보내  첩이  되도록 했다. 또 진무왕은 서융을 위로하기 위해 100명의 미녀를 보내기도 했다.
  매매혼은 쌍방 가정의 이익에 치중하여 혼인 당사자들의 의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남녀간의 애정 위에서 행해진 결혼은 아닌 것이다.

 

  (3) 중매혼
  1) 중매인을 통한 결혼
  매매혼 이후에 나타난 중매혼은 중매자가 있어 빙례를 받아 혼례 형식을 이행하여 남녀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이다. [위풍, 맹]시의 "내가 시기 늦추자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겐 좋은 중매인이 없소"라는 것  또한 그 당시 이미   예교가 형성되었음을 반영한다. 당률에는  '매빙'이라는 용어가 있으며, 소의에서도 "혼인하는 방법에는 반드시 중매를 실행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양가의 젊은 남녀를 결혼이라는 끈으로 묶는  역할을 한 이가  중매인이다. 중매인은 양가 부모의 지위 및 신부의 순결 여부, 예물 등  구체적인 문제까지 개입을 했다. 아울러  법 규정에 부합하지 못하는 혼인의 책입은 또한  중매인에게도 있었다. [시경, 제풍, 남산]에서는  그 당시 중매자를 통한 혼례를 노래하고 있다. 

  삼을 심을 때에는 어떻게 하나
  가로 세로로 이랑을 일구어야지
  장가를 들 때는 어떻게 하나
  반드시 부모에게 고해야지
  이미 고하고 데려간 것을
  어째서 또 괴롭히는가
  장작을 팰 때엔 어떻게 하나
  도끼가 없으면 팰 수 없지
  장가를 들 때는 어찌하는가
  중매인이 없어서는 안 되지
  이미 중매 넣어 얻은 아내를
  어째서 또 곤란하게 하는가

  이 시는 삼을 심을 때 먼저 이랑을 일구듯 아내를 얻으려면 반드시 부모에게 알려 동의를 얻어야 하며, 중매를 통하지 않으면 혼인을 못한다는 내용이다.(그러나 사실상 이  시는 양공을 풍자한 시이다. 대부들은 양공이 그의 누이와  간통하는  것을 보고 이 시를 짓고 멀리 떠났다고  한
다. 양공은 제나라 희공의 아들이고,  누이는 바로 문강이다. 문강은 노나라 환공에게  출가했지만, 뒤에 양공과 간음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 [시경, 빈푼, 벌가]시를 보자.

  도끼자루 베자면 어떻게 하지
  도끼 아니면 안 되는 거지
  마누라 얻으려면 어떻게 하지
  중매인 아니면 안 되는 거지

  이는 예절에 입각하여 하는 결혼을 노래한 것으로,  '도끼자루'와 '도끼'는 결혼과  혼례를 비유한 것이다.
  혼인을 할 때는  반드시 '부모지명, 매작지언'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는 선진 시기에  이미 보여 왔는데, 그 의미는 후세와 다소 차이가 있다. '부모의  명'이란 부모의 비준을  얻는 것으로, 부모가 가장 많은 부결권을 가지고 있지만, 혼인을 강제로 시킬 수는 없었다.  후에 예교가 성행하면서 이 말은 부모가  임의로 자녀들의 혼인을 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매작지언'은  일종의 예의이고 수단이었다. 때문에 '부모지명, 매작지언'을 만족시키는 조건하에서도  자유 연애를 통한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정나라 서오범의 여동생은  매우 아름다웠다. 공손초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공손혹이  사람을 보내 강제로 빙례를 하려고 하였다. 서오범은 두려운 나머지 자산에게 이  일을 말했다. 자산은 '이는 국가의 정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니, 당신의 근심이 아닙니다.  그녀가 시
집가기를 원하는 자에게 주십시오.' 서오범은 두 사람에게 그녀가  직접 선택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모두 동의했다. 공손혹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와 정혼 예물을 진열한  후에 나갔다. 공손초는 군복을 입고  나와 좌우에 활을  차고 수레를 뛰어넘었다.  여자는 방에서 이들을
보고 말했다. '공손혹이 확실히 아름답지만  공손초가 진정한 사내이다. 장부는 장부  같아야 하고 아내는 아내 같아야 하는 것, 이것이 이른바 순리이다.' 그래서 공손초에게 시집을 갔다.
  공손초와 공손혹이 미인을 서로  맞이하려고 다투자,  서오범과 자산은 두 귀족을 각기  미인 앞에 세워 자신을 표현하도록 한  결과, 미인은 씩씩하고 건강한 공손초를 선택했다.  그러나 공손혹이 약속을 어기고  상대방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으려고  했으나,  공손초와의 싸움에서 져  상처를 입고 돌아갔다.
  또 한무제 때의 평양공주 또한 자유 연애론자였다.
  평양공주는 남편이 병으로 인해 경성을  떠나 봉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홀로 지내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열후 한 명을  택하여 외로움을 달래고자 하였다. 공주는 주위 사람들과  장안성에서  어떤 열후가 남편이 될  수 있는가를 상의하였는데, 모두 대장군이  좋다고 말하였다. 공주는 웃으
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집에서 나왔으며 그를 기병으로 삼아 나를  호위하고  따라다니게 하였는데, 어떻게 남편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좌우의 시어가  "현재 대장군의 누이는 황후이고 세 아들은 모두 제후이고 천하를 진동시킬 만큼  부귀합니다.  그런데 공주께서는 어찌하여 사람을 멸시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공주는 이 혼사를  허락하였다. 이 일은 황후에게 알려졌고 무제에게 보고되었으며,  위장군은 평양공주를 맞이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이러한 예는 민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현의 맹씨라는 자에게는 딸이  있는데, 살이 찌고 못생겼으며 피부색도 검었고, 돌절구를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셌다.  그녀는 배우자를 선택하여 시집가지 못하고 서른 살이 되었다.  부모가 그 연유를 묻자, 그녀는 "양백란처럼  현명한 사
람을 얻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양홍은 이 얘기를 듣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면 중매인 없은 결혼은 가능할까?  "처녀에게 중매인이  없으면 늙어도 시집가지  못하고, 중매인을 버리고 자랑하다가는 혼사길이 막혀 남이  사가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의  명령과 중매인의 말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담구멍을 파고  서로 엿보며 담장을 넘어서 서로  따라가게 되면
부모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천하게 여긴다." 중매인이 없으면, 심하게는 정숙하지 못하다는 의심까지 받게 된다.(본래 "부인이 남편을 구할 때는 반드시 중매인을 쓴 이후에 집안일을 이루어야 하는데, 남편을 구함에 있어 중매인을 쓰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며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직접 자신이  중매하는 여자는 추하고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부모'는 광의적 의미로서 혼인하는 자의  부모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없으면 조부모나 같은  종족의 백부나 숙부 등과 같이 존경받는 친척 어른도 결혼 결정권자가 될 수  있다. 또  관료 집단에서 가장 높은 장관은 하급 관리의 결혼을 결정할 수 있고, 주인은 그  휘하의 노비의 결혼을 주관할 수 있다.
  사실 유가 예교에서 "혼례는 예의 근본이고," '부모지명, 매작지언'의 기본원칙을   규정한 목적은 "멀리로는 음란함을 막기 위해서이다."   춘추 전국 시대에는 중매에  있어 관매라는 것이 있었다. 관매는 '부'와  '칭'으로 그들의 직업을 나타냈다. '부'의 함의는 [시경]의 "도끼자루를  베다"에서 취한 것이고, '칭'의 함의는 기준이 있어 재는 것이다. 관매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사신을 중매인으로 삼는 것이다. 즉  천자가 제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면  같은  성을 가진 나라의 대신을 중매인으로   삼았고,  제후가 아내를 얻으려고  할 때도  대신을 중매인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송나라에서는 화원에게 예의를 갖춰 노나라를 방문하도록 하여, 목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만일 제후가 그 나라에서 중매인을 구할 수 없을 경우는 사신이 직접 가면 중매의 의미가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직업적인 관매이다. [주례,  지관, 매씨]에서는 "매씨는 만민의 재판을 관장한다. 남녀가 스스로 이름을 이룬 이상 모두  생년월일과 이름을 기록하여 남자 30세에  아내를 얻게 하고, 여자 20세에 시집을 가도록 했다." 이런 관매는 모든 사람의 혼인 등기를 담당했다.

 

  2) 중매의 기원
  처음 중매인의 역할을 한 사람은  무격(여자 무당을 '무'라하고, 남자 무당을  '격'이라 함)이었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무풍이 소실됨에 따라 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대의 [풍속통의]의 기록에 의하면, 여와는 신에게 기도하여 여매가 되어 혼인을 주관하게 되었고, 또 여와가 인류를 위해 혼인 제도를 세웠기 때문에 혼인신이 되어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여와  외에 중국 고대의 혼인신으로는 고매가 있다. "중매를 하기 때문에 후세의  나라에서는 아이를  낳게 해주는 신인 고매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여와는 달의 여신이며, 또 남녀의 결혼을 주관하는  고매신이다. 후세의 전설에서 혼인의 신을 월하노인 혹은 월로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월하노인에 관한 고사를 보자.
  당나라 때 위고라는 노총각이 있었다. 그가 송성에 이르렀을 때, 푸른 달빛이  흰 수염의 노인을 밝게 비추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노인은 보퉁이에 몸을 기댄채 책을 펼쳐  놓고 있었고, 위고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묻자,  이 세상의 결혼에 대해 조사하는 중이라고 했다. 보퉁이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자, 노인은 그것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여기에는 붉은  밧줄이 있어 부부를 맺어주지. 사람들을 이것으로 매어 놓으면 먼 곳에 있든 원수지간이든 간에 부부가 되지." 위고는 노인의 말에 솔깃하여 자신의  배필 감이 어느 곳에 있는지 물었다. "송성에 있네. 불쪽에서 채소 파는 노파가 안고 있는 아이가 자네 배필이네."  그러나 위고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14년 뒤, 그는 태수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문득  노인의 말이 생각나 신부에게 일신에 관해  물어보니, 자신은 태수의 양딸로, 송성 북쪽에  사는 한  유모에 의해 길러졌다고 했다.
  고매 사당은 대대로 언제나 있었는데, 흔히  도성  남쪽의 교외에 세워졌다. [시경, 대아,  비궁]에서 말하는 '비궁'이 이 고매신의 사당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비'란  깊숙이 닫는 것이고, '궁'은 종묘를 뜻한다. 이곳은 신비한  색채를 띤 건축으로, 평상시는 닫혀 있지만, 매년 특정한  날에 성대한 의식이 거행된다. 이날은  중춘 달의 '제비가 이르는 날(삼날)'이다.  그러나  이날이 구체적으로 언제이고, 제비가 어느 곳에 이르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태양신이 인간에게 강림하는 계절인 봄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이날의 상징적인 의미이다. 이날이 되면 "큰 소를  잡아  고매에게 제사지낸다. 천자가 직접 참가하며  후비도 구빈을  이끌고 함께 참석한다. 이때 임신한  후궁은 예를 행하는데, 고매신 앞에서 활집을  차게 하고 활과 화살을 주어 그녀들 모두가 아들 낳기를 바랐다."  원시 풍속에서 활과  화살은 남녀 성교의 상징이었다. 또 이 중춘 2월에는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하여도 금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매에게 제사지낼 때는 춤고 추었는데, 이것을 '만무'라고  하며 성적 자극을 풍부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시경, 대아, 비궁]에서,  "고매에게 만무로써 제사지내는 것이다. 그  춤은 유혹성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고매의 제사는 자못 사악하고 음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만이란 무용의 총칭"이라고 주장하는데, 믿을만 하지 못하다. 예를 들면, 초나라 문왕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은 과부가 된 형수를 취하려고 그녀의 궁전  옆에서 만무를 추었는데, 이때 부인은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군은 이 춤을 추어 전쟁을  방비했는데, 지금 당신은 원수를 찾지 않고 미망인의 옆에서  춤을 추니, 이상하지 않소!" 여기서 미망인이   '무'자 앞에 '족'자를 덧붙인 것은 이것이 무용의 한 종류였음을 뜻한다.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펄쩍펄쩍 뛰는 춤을 추어 성 자극을 높였을 수 있다.

 

      제 6장 결혼의 일그러진 단면
  천지 음양의 화합 원리에서 출발한 결혼 제도는 남녀간의 애정을  기초로 한 것으로서,  그 시기는 일정한 틀이 있었다. 남녀가 제때에 결혼을 해야 했지만, 결혼 적령기가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혼인 연령에 대한 다양한 관념과  인식은 사회, 정치, 경제적 요소에  의해 결정되었다.
만일 사회가 번창하면 인구 증가가  가속화되지만, 이와 달리 생산력이 저하되면  인구는 감소한다. 따라서 인구 증가는 생산력의 증대를 의미한다.

    1. 조혼과 만혼
  고대에 행해진 성인 의식에는 관례와 계례가 있다. 관례란 머리를 묶고 관을  쓰는 것으로, 남자 나이 20세 때  거행하는 성인 의식이다.  관례를 거행한 남자는  이미 성숙되었으며,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계례는 머리를 묶어  비녀를 꽂는 것으로 여자 15세 때 거행하는 성인  의식
을 말한다. 계례 또한 여자가 혼인할 연령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략적인 것이었으며,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남자는 20세에 이르면 관을 쓰고 비로소 예를 배운다. 30이  되면 아내를 맞이하고  비로소 남링자로서의 일을 다스린다. 여자는 15세가 되면 비녀를 꽂고 20세에 출가한다. 만일 까닭이 있어 출가하지 못할때에는 23세까지는 출가해야 한다.   남자는 20세에 관을 쓰고,  관을 쓰면 장부의 행렬에 들어가게 된다. 30세에 아내를   얻는다.
여자는 15세에 결혼을 허락받고, 20세에 시집을 간다.
  또 "결혼을 허락받은 자는  15세에 비녀를 꽂지만, 결혼 허락을 받지 못한  자는 20세가  되어서 비녀를 꽂는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역대 관가의 조서나  몇몇 개인의 예제에도  남녀의 혼인 연령에 관한 규정이 보이는데, 대략 남자는 15세에서 30세 사이, 여자는  13세에서 20세 사
이에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16세에서 20세 사이에  결혼을 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또 "[예기]에서 제시한 혼인 연령은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후기 유가들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어떤 이는 이 말을 남자 30세, 20세가 되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이 때문에 혹자는 주대에 만혼이 시행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결혼 연령의 상한선일 뿐이다.
  노애공이 공자에게 질문했다. '남자  16세이면 정자가 통하고, 여자 14세이면 월경이  있어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주례]에 의하면,  남자 30세에 아내가 있고, 여자 20세에  남편이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늦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무릇 [주례]에서는  최고의 수치를 말한 것으로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20세에 관을 써 사람의 아버지가  될 서단이 되고, 여자는  15세에 출가를 허락받아 다른  사람과 통하는 도가 있게  됩니다.' 
[공자가어]는 한대 이후에 지어진 위서이지만,  고대인의 혼인 연령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1) 조혼의 제창과 장려
  1) 조혼의 제창
  봉건 사회에서는 일가 일호를  생산 단위로 했으므로, 남자가 일찍 아내를 얻으면  집안에  노동력이 증가하여 생산력이 발전하는  장점이 있었다. 또 봉건적인 종법 제도에서는 아들로  대를 잇는 것을 매우 중시했으므로 일찍 아내를 얻으면 일찍 아들을 얻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자식이 많아야 다복하다는  관념은 조혼을 제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혼의 정도는 역사적 변천과 각종 사회적 요소의 영향으로 인해 각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시대에는 홀어머니나 홀아버지가 존재하는  것은 인성을 어기고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때에 배우자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일반 사람들은 배우자를  칭하여 우라고 한다. 그 아내와  짝을 짓는 것은 음양이 서로  이루는 도의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방을 이룬다. 현명한  군주는 남녀로 하여금 제때에 배우자가 없도록 하지 않는다.
  따라서 왕충은 혼인 적령기를 잃으면 사람은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을 상실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지적했다.
  상고 시대에는 음기와 양기가 화합하여 순수하고, 혼인은 적당한 연령에  따라 진행하며, 백성들은 선천적으로 음양이  조화를 이룬 기를 받아 출생하고,  태어난 후 상해를 입지 않으면 골격이 강건하기 때문에 크고 장수하며, 모양이 아름답다.
  사실 진한 이전에는 결혼 시기가 매우 빨랐다.  그 당시 사회 풍속상  남자 나이 30이  되어도 아내를 얻지 못하면 홀아비라고  하였고, 여자 나이 20세가 되어도 결혼하지 못하면  때를  넘겼
다고 했다. 따라서 "옛  성왕은 (인구의 증가를 위하여) 남자는 20세가  되면 반드시 가정을  가져야 하고, 여자는 15세가 되면  반드시 시집가서 지아비를 섬겨야 한다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견해가 생겨났다. 그 당시는   사방에서 전란이  발생하여 각  나라마다 인원을  보충하여 생산을  발전시키는 일이 시급하였기 때문에 조혼을  장려한 것이다. 이런 조혼 장려는  봉건 통치자에게  인구 정책의 근거를 제시했으며, 봉건 제왕은  부국 강병을 위해 조혼을 법령으로 정해 노동  생산력과 병사의 수를 증가시키려 했다.

 

  2) 조혼의 장려와 반대 여론의 대두
  춘추 전국 시기 제후들은 모두  조혼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이 조혼의 시조이다. 이후  각 조대는 인구의 증가를 사회 번영으로 간주하였으며, 역대 제왕들은 생식을  제창하고  조혼을 주장하게 되었다. 한혜제 6년, "여자 나이 15세   이상 30세 이하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인두세를  다섯배 거두었다."고 한 것은 세금을 가중시키는 방법으로 조혼을 장려했음을 말한다.
  이 당시 제왕의 배우자의 나이는 상당히  어렸다. 한소제가 보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고, 상관황후는 여섯 살이었다. 황후의  나이 열다섯 살 때, 소제가 죽었다. 또 한평제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는 아홉 살이었는데,  그에게 시집온 왕망의 딸도 아홉  살이 도이가다.
반소 또한 열네 살 때 조세숙의  집안으로 시집갔다. 진대에는 한나라 때보다  조혼이 심해졌다.
진무제때는 "여자 나이 열일곱이 되었어도 부모가 출가시키지 않으면 관리가 짝을 지어 준다."고 했다.   이런 상황은 남북조 때 집중적으로  나타나, 남조 양나라의 고조 정귀빈은 열 네 살  때 시집을 왔고, 진문제 침후는 열 살경에 시집을 왔다. 북조 위나라 헌문제가  양위할 때의 나이가
열일곱인데, 아들 효문제가 벌써 다섯 살이었다.
  이후에 "여자 나이 14세 이상 20세  이하인데도 시집을 가지 않은 자는 모두 모이도록 하고 숨는 자가 있으면 그 가장을  사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다. 이것은 한대에 15세에  출가시켰던 것보다 한 살이나 줄어든 것이다. 북주 건덕 3년에는 "이  이후로 남자 15세, 여자 13세 이상...
군민일 때는 결혼을 하라"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
  [춘추외전]에서는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에  빠른 시간내에 복수하기 위해 남자  20세, 여자 17세가 되어도 결혼을 하지 않는 자는 부모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상앙의 변법은 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조혼 풍속은 계속 이어졌다.
  고대 문학 작품에서도 민간의 조혼 풍속이 반영되었다. 가령 한악부  [공작동남비]에서는 초중경의 처 유씨를 묘사하여 "16세에 시서를 읊고/ 17세에 시집가서  부인이 되었건만/ 마음은 항상 고달프고 슬프구나"라고 했고, 이백의 악부시 [장간행]에서는 "열넷에  당신 아내  되어/ 수줍어
얼굴 펴본 적도  없다"고 했으며, 양무제의  [하중지수지가]에서는 "시냇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낙양의 여자아이 이름은 막수라는  "시냇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낙양의 여자아이 이름은  막수라고 하네/ 열세 살에는 길쌈을 할 수 있었고/ 열네 살에 언덕 남쪽에서 뽕나무를  땄지/ 열다섯에
시집가 노랑의 부인이 되고/ 열여섯에 아후를 닮은 아니 낳았네"라고 했다.
  한대의 조혼은 그 당시  왕실과 민간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남자의 초혼  시기는  15세에서 18세경이었다. 예를 들면 "건녕 4년 4월  계축일에 귀인 송씨를 황후로 세웠다"라는 글이 있다. 영제는 건녕 원년 12세에 즉위하였으므로  결혼할 당시 15세였다. 또 "건화 원년 가을 7월
을 미일에 황후 양씨를 세웠다"라고 했는데,  그때 환제는  15세에 즉위했으므로 결혼은  16세에 한 것이다. 이때는 성적으로 완전히 성숙되지  못하여 적합한 혼인 연령은 아니다.  여자가 21세가 되면 신기가 충족되기 때문에 근본이 되는 치아가 다 자라게 되고,  남자는  24세가 되어야만
신기가 충족되고 근육과 뼈가 강해지기 때문에 근본이 되는 치아가 다 자라게 된다.
  남조의 유명한 의사 저징은 이렇게 말했다.
  건평 효왕의 비와 희는 모두  아름다웠지만 아들이 없어 민간에서 여자들을 선발하여 모시도록 했으나 그래도 아들이 없었다. 묻기를 '아들을 구하는 방법이 있소?'라고 하자, 저징이 대답하기를 , '남녀의 성교에는 마땅한  나이가  있습니다. 남자는 16세면 정자가 생성될지라도  30세에
아내를 얻어야 하고, 여자는 14세에 월경을  시작할지라도 반드시 20세에 시집을 보내야 합니다.
모두 음양이 완벽하게 충실해진 연후에 성행위를  하여 잉태를 하고, 잉태를 하여  기르고, 길러진 아이는 건강하고 오래 살 것입니다. 지금  막 월경을 시작한 여자가 남색을 가까이 하면 음기가  일찍 빠져나가 불완전한 채로 상처가 있으며,  실하지 못하여 흔들립니다. 이 때문에 교접을
하여도 잉태하지 못하고, 기르는 아이는 장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에게 아들이 없는 이유입니다.
  또 한대의 학자 왕길은  "부부는 인륜의 큰  줄기이고 천수의 맹아이다. 세속에서  너무 일찍 결혼하는 것은 사람의 아버지가 되는  도를 알지 못하고 아들을 낳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화가 밝지 못하고 백성의  많은 수가 요절했다."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식견 있는 선비들의 조혼에 대한 반대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2) 만혼의 이유
  만혼의 경우는 대부분 개인적인  사정이나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특히 여성의 만혼  이유는 다양했는데, 우선 볼품없는 외모로 인해 배우자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전국 시대 제나라 무염 고을에  종리춘이라는 여자가  살았는데, 그녀의 생김새는 세상에 둘도  없이
추악했다. 정수리가 절구통처럼 패였고, 두 눈은 움푹 들어갔으며,  손가락 발가락이  길고 마디가 울퉁불퉁하며, 들창코에다 목젖이 툭   튀어나왔고, 목덜미는 살이 쪄서 머리카락이  없으며,  허리는 굽고 가슴은 앞으로 나왔고, 살갗은 칠흑처럼 검었다. 그녀는 나이 40이 되도록 데려가는
사람이 없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출가할 곳을 찾아다녔으나  결혼하지 못했다.  뒤늦게 선왕의  황후가 되었다.
  또한 가난한 집안의 딸은 결혼 자금이  없어 시집을 늦게 갔다. 오대때 조연의  [빈녀]라는 시의 "중매가 없어 출가가 더딤을  한하다/ 늙어서 좋은 시절을 만나게 되었네/ 흰머리   가득하여 신부가 되었으니/ 부잣집의 나이 어린 여자들의 비웃음을 받으리"라는 것은 이 사실을 입증한다.
  또 기녀나 궁녀도 만혼을  했다. 역대 제왕들은 민간에서 선발한 어린 여자들을  궁녀로  들였는데, 이 중 나이가 찰 때까지  제왕의 은총을 받지 못한 여자들은 궁궐 밖으로  내쫓았는데, 그때는 대부분 30세를 넘겼다.
  이 밖에도 본인의 품행이  단정치 못하거나,(한고조  유방은 청년 시절에 술과 여색을  좋아하고, 집안의 생산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30여 세가 되어서야 여치와 결혼을 했다) 학업을 위해, 혹은 사회적 동란으로 인해 늦게 결혼하기도 했다.

 

    2. 겹사돈 제도와 동성 불혼
  겹사돈 제도는 혼인한 집안끼리 다시 결혼을 하여 연결되는 것으로 표친혼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양나라 황왕이  죽자, 아들이 뒤를 이었는데, 황왕의 여동생  원자를 외숙부 임보의 처로 삼고, 임보의 조카 소를 황후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두 집안이 혼인 관계를 세 차례 맺었음을 알 수  있다.([한서, 외척전]에서는 상관황후는 선제의 숙조모이고,  사후는 상관후의 이모인데, 선제는 곽후를 취했으니,  이것은 숙조모의 이모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중친은  그 형태상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인가는 항상 인가가 되고, 혼가는 항상 혼가되며, 인가, 친가가 서로 되는 상황이 있다.(여자 쪽의 씨를 혼이라 하고, 남자쪽의 씨를 인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상 겹사돈 제도가 성행한  이유는 무엇보다는 혼인은 "두 성이 잘 결합함으로써 위로는 종묘를 섬기고, 아래로는 후세를 잇기 때문에 군자가 이를 중시했다."는  전통적인 혼인 관념에서 비롯된다. 일부 대성들은 자기 가문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신분과 유사한 몇몇  성과만 결혼했다. 상층 사회에서의 중친 혼인은  또  친족 관계를 연계시켜 권력과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 수단이었으며, 제후 왕국간의 중친은 정치상 외교 수단이었다.
  겹사돈 제도는 서주 때 이미 나타났다. [좌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통혼  범위에는 엄겨한 등급 제한이 있었다. 천자 가족은 제후국의  왕실과만 통혼할 수 있고, 제후국 왕족의 혼인 또한 다른 성을 지닌 제후국 왕족과 결혼해야 했다. 가령 제나라와 노나라, 진나라와 진나라는 대대로
결혼 관계를 유지했다. 아울러 제후국간에는  대소의 구분이 있어  약소국은 강대국과  결혼하지 못했다. 가령 제희공은 딸을 정나라 태자 홀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정나라에서는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묻자, 태자 홀의 결혼은 동등한  가문과 해야 되는데,  제나라는 작
고 정나라는 크므로 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전국 시대에 이르러 천하가 혼란 속에 휩싸이고 예악이  붕괴되면서, 종법  등급제도에도 영향이 미쳐 문벌화된 혼인 제도를 약화시켰다. 그래서 한대의 결혼에서는  혈통보다는 본인의 정치, 경제적 지위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가령, 공주의 배필은  반드시 열후여야 한다고 규정했
다. 위청은 가난했을 때는 평양공주  집의 노비였지만, 이후 흉노를 공격하는 혁혁한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고, 장평후로  봉해졌다. 평양공주는 위청의 미천한 출신이나  혈통에 개의치 않고 결혼했다. 황제가 황후를 세울 때도 출신과 혈통을 문제삼지 않았다.  한무제의 위황후 위자부는 본래 평양 공주 집의 가녀였고, 이부인의 창기였으며, 한선제의 허황후는  죄인 허광한의 딸이었다.
  위진 남북조 시기의 정치와 사회의 한 특징이라면 계급과 문벌의 구분이 매우 엄격하였는데 혼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위왕조는  처음으로 구품 중정제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9품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으로서, 중정이란 고하를 분별하는  것이다. 상품의 세족은 그 지위와  명성이 비천
한 가문에게 약탈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더욱더 자신들의  신분을 높여  자긍심을 갖는가  하면 비천한 가문을 억눌렀다. 그 당시는 세족을 '사'라 하고, 평민을 '서'라 했으며, 사족은 또
구문, 차문, 후문, 훈문등의 경계가 엄격하게 지켜졌다.  문벌을 엄수하고 세족의 지위를 지키는 데 있어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비슷한 문벌끼리 혼인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혼인 제도의  문벌화는 극성기에 이르렀다. 서족이 사족과  혼인하여 사회적 지위가 바뀌는 경우도  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당시 결혼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혈통 문벌 관념이다. 남조 시대에는 동진 정권을 따라 도강한 왕, 사, 원, 소와 본토의 고, 육, 주, 장 등이 명문 성이었고, 북조 때에는 최, 노, 이, 정이 대성이었다. 이런 명문 귀족의  문벌혼은 대대로  인척이 되는데, 남조의 왕, 사 두  집안은 계속되는 통혼으로 10여 세대에 걸쳐 인척 관계에 있었다.
  북조에 이르자 혼인에 있어서의 문벌 구분은 더욱 엄격해져  법령화되었다. 북위 화평  4편 조서에서 "황족, 사부, 백왕공후백과  사민 집안은 백공,  기교, 비성과 혼인할  수 없으며, 이를 범하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태화 2년 조서에서는 "황족, 귀족  및 사민의 집안
은 다른 부류와 혼인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당시 혼인의 병폐라면 문벌 귀족들이 자신들의 부귀를 과시하기 위해 사치스런 혼사를 치른 것이며, 이런  경향은 문벌이 다소 낮은  사람들도 모방했다. 조익은 [십이사차기]에서  이 문제를 제시했다.
  위, 제나라 때 결혼식은 재물을 서로 숭상하였다. 높은 가문과 낮은 가문이  결혼하는 것은 재물의 이익 때문이다. 이후로 이것은 풍속이  되어 모든 결혼에서 재물을 일삼게 되었고, 그 양을 다투는 것은 전혀 괴이한 일이 아니었다.
  조익의 견해는 자못  타당성이 있다. 북제의 문학가  안지추도 "근래 결혼은 딸을  팔아 재산을 거두고, 아내를 사면서 비단을 낸다."라며 이 점을 지적했다.
  사치스런 혼인이 사회에 팽배해지자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들은 적령기에 자식들을 결혼시킬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딸을 낳으면  물에 던져 죽이는  일도 발생했다.(북위 효문제 때 비록 조서를 내려   금지시켰고, 태화 20년에  다시 조서를  내려 남녀가 결혼  시기를 놓치면  
 고대 중춘에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져 결혼했던 것처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때문에 북주 건덕 3년에  또 조서를 내려 지금 이후로 남자 15세 여자  13세  이상이면 검소하게 결혼을 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 문벌 귀족들은 오히려
조혼을 하게 되었다.(북제가 왕족 고엄을 죽였을 때, 14세였는데, 이미 유복자가 다섯 명이나 되었다) 또 문벌의 엄격한 구분은 겁탈혼  현상은 낳기도 했다.(북제 때 고건은 박양노씨에게 구혼을 하였는데, 문벌의 차이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건과 동생  고양은 노씨의 딸
을 겁탈했다. 이 일은 상고 시기의  겁탈혼과 비교할 때, 형식적인 면에서는  유사성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시경, 제풍]의 '포전'시는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로 인한  불가능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큰 밭을 갈지 마라/ 가라지만  무성할걸/ 멀리 있는 사람은 생각 마라/  마음만 따끔따끔 아플걸/ 큰 밭은 갈지 마라/  가라지만 덥수룩할걸/ 어리고 예쁜 떠꺼머리   총각을/ 얼마간 헤어졌다 만나도/ 갑자기 관쓴 어른 되었다네" 이 시는 어떻게 보면  신분이 다른 남녀간의 사랑을 금지하는 경고성이 강하다. 이것은  그 당시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나누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물론 어떤  이는 이 시는 "멀리  강 있는 남편을 생각하는  여인의 노래"라고 하고, 또 [모시서]에서는 "제나라 양공이 예의 없이  큰 공을 구하고, 덕을 닥지 않으면서 제후들이 따르기를 바라며, 뜻만이 커서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구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풍자한 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3. 이혼과 재혼
  (1) 이혼의 방식
  고대 결혼 예절은 복잡하지만, 이혼 수속은 매우 간단했다. 어떤 법률적 결단을  거칠 필요 없이 남자가 한 통의 '휴서'를  써서 아내에게 자기 집에서 떠나도록 하면 부부 관계가   상실되었다. 이 당시에는 이혼을 절혼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기환공이 노나라로  와서  (조견을 하였는데) 문공을 만나 숙희와 이혼을 요청하면서  양국의 혼인 관계를 단절시키지는  않는다고  하자. 문공이 허락했다.
  춘추 전국 시대 혼례 중에는 '반마' 의식이 있다. '반마'는 딸을 시집보낼 때, 말을 함께 보내 시집에서 쫓겨날 경우  이 말을 타고 돌아오도록 했다.  말을 돌려보내는 것은 사실상 고대  혼인의 한 형식으로 이혼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석 달 후, 종묘에서  조상들에게 인사를 마치면, 신랑이 그 말을 돌려보냄으로써 부부의 정이 확고해졌음을 나타내고 백년해로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예기, 증자문]에 "3개월간  종묘에 알현하는 것을 내귀라고 한다. 날을   택하여 사당에 제사지내고 부인의 예를 이룬다"는  글이 보이는데, 이것은 신부가  3개월 후  종묘의 예를 실행한 후에야 정식 신분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3개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개월  내에 쌍방이 화해를 하지 못하면 혼인은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고, 여자는  예법상으로는 아직 다른 사람의 부인이 아니므로 더 훌륭하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유리함이 있다.  이것은 여자의  정조를 중시하지 않은 것이다.

 

  1) 출처와 칠거지악
  일반적으로 '출처'라는 말은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후나 경대부를 비롯한 귀족 사회에서는  자기 자매가 이혼을 당하면 '내귀'라 하고, 다른 사람의   자매가 이혼당하면 '대귀'라고 하여 표현상의 차이를 두었다. 예를 들면, "부인 강씨가 제나라에서 돌아
왔는데, 좌씨는 '대귀'라고 했다"라는 말이라든지 "가을, 담백의 딸이 돌아왔는데,  좌씨는 '출'이라고 했다."고 한 것들이 그러하다.
  '출처'는 귀족 남자가  갖고 있는 권력의 한  징표이기도 하다. 고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때 여자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면 버리고 재혼하는 아리이 비일비재했다.  주나라 이후 이런 권력은 남성만이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출처'에는 일곱 가지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유가에서  규정한 것으로 '칠거'(우리들은 칠거지악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다)라고 한다.
   부인이 내쫓기는 이유 일곱가지는 이렇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아 덕을 거스림,  아들이 없어 대를 끊음, 음란하여  종족을 어지럽힘, 질투하여 집을  어지럽힘, 나쁜 질병이 있어  제수를 차릴 수 없음, 말이 많아 친척을 떼어 놓음, 도적질을 하여 의를 어김.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이유는 종법제와 관계가 있다.  한대 진평이라는 자는 젊었을 때 방탕한 삶을 살아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던 그의 형수가 진평을  헐뜯자, 진평의 형은 그녀를 버렸다.
  [한서,왕길전]에 보면, 왕길의 이웃집에  심어 놓은 대추나무 가지가 왕길의  집으로 넘어왔는데, 왕길의 처는 대추를 따서 왕길에게 주었고,   그 결과 이혼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  당시 도둑질이라는 것은 어떤 큰 것을 훔치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후한서,풍연전]을 보면, 풍연은 북쪽 땅 임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임씨는 성격이 흉포하고 질투심이 많아 풍연이  다른 첩을 맞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풍연의 전처 소생 풍표,풍강을 학대하였다. 후에 풍연은  그녀를 쫓아냈다. 풍연은 임씨 딸의 동생  임무달에게
편지를 보내 이 일에 관해 설명하였는데, 이 편지는 사람들이  지아비를 섬기는 방법을 교육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 편지의 첫머리는 "천지의 본성을 보면,  사람에게는 즐거움과 노여움이 있으며, 부부의 도를 보면 의에는 헤어짐과 결합이 있다"로 시작된다.
  [화양국지,광한사녀찬]에 보면, 여돈이라는 사람은  형과 함께 살고 있었다. 부모가 약간의 유산을 남기자, 형수가  그것을 독점하려고 했다. 지혜로웠던 여돈의  처는 여돈에게 부모님의  유산을 그들에게 모두 주도록  권유했다. 그래서 여돈은 밭과  노비를 형수에게 주고, 이사를  갔다. 어느 날, 여돈이 밭을 갈다가 금그릇을 발견하자, 아내는 그것을  형에게 주도록  하여 함께갔다.
  형수는 그들이 돈을 빌리러   온  것으로 생각하여 홀대했지만,  후에 그들이  금그릇을 보내온  
 것을 알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때 형은 깨달은 바가 있어 아내를 내쫓고  재산을 동생에게 나눠 주었다.
  여자가 부모님을 모시지 않을  경우도 이혼을 당하게 된다. 즉 부모님을 정성껏  보팔피지  않거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한 편견이 있을 경우는 이혼을 당했다. 이에 관한  예는 매우 많다.
[후한서, 포영전]에서는 "포영은 계모를 효성스럽게 섬겼는데, 아내가 어머니  앞에서 개를 꾸짖자 영원히 내쫓았다"라고 했고, [후한서, 열녀광한강시처전] 상에는 "시는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으며, 처는 열심히 받들고 순종했다. 어머니가 강물을 마시고 싶어했는데, 강물은 집으로부터 6, 7리나 떨어져 있었다. 처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물을 길어  바람을 맞으며  왔지만 제때에 이르지 못했다. 어머니는 갈증이 심했고,  시는 이 책임을 물어 그녀를 내쫓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종법제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을 '칠거'가운데 맨 앞에 놓인다.
  일시적인 정치 관계를 위해 아내를 버리는 일도 있었다. [후한서, 반초전]을 보면, 그 당시 대신 이읍은 처음 전으로 갔을 때, 호랑이  같은 적이 두렵고, 또 반초의 공을  질투하여 황제에게 반초를 비방하는 편지를 다.  그 내용은 반초에게는 애첩이 있는데 사랑하는 아들을  끌어안고 외국에서 편안히 살려는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반초는 이  일을 안 후  "나에게는 공자의 학생 증언같은 현명함이 없고, 증언을 비방하는 것처럼 나를 비방하는 사람만이 있구나"라고 탄식하고 무고한 첩과 이혼을 하게 되었다.
  또 [한비자, 세림]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위나라의 어떤 사람은  자식을 시집보내면서 "반드시 개인적으로 재산을 모아  두도록 해라.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었다가 내쫓기는 것이  대부분이니, 함께 사는 것은 요행이다"라고 했다. 그의 자식은 그래서 사사로이 재산을 모았으며, 그녀
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개인 재산이 많다고 생각하여 내쫓았다. 자식이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의 재물은 시집갈 때의 두 배나 되었다.
  종법제하에서는 가정의 공동 재산을 요구하여  사유 재산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 사유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예법에서는 종족의 일체를 강조하고 가부장제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한 가정의 재산은  가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내나 자식들은 그들만의  독립된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이것은 가장은 한 가정의 재산을 지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식도 재산의 일부로  간주하였고, 심지어는  매매까지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가졌던 것이다.(양주 이전에는 부분적으로나마 여자가 또  이혼을 먼저 제시할 수 있었다. 물론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는 1) 남편의 정조 불량 2) 남편의 악질 3) 남편의 지나친 가난 4) 남녀 쌍방 가정의 첨예한 모순 등과 같은 조건하에서만 여론의 지지 및 법률로써 인정을 받았다. [공작동남비]의 유란지는 이 중 네번째 조건에 부합하여 이혼을  요구하였다.) 다음 문장을 보면  그 정도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제나라 환공은 채희와  함께 유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채희가  배를 흔들자, 환공은  두려워하며 안색이 바뀌었지만 멈추지를 않았다. 환공은 노여워하여 그녀를 내쫓았다.
  채희는 제환공과 장난을  친 것이지만, 친정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주의할 가치가  있는 이혼 사례 하나를 더 보자.  장아의 장녀가 시집을 가서 금왕손의 부인이  되어 딸 하나를 낳았다. 장아가 점을 보니, 두 딸 모두 귀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두 딸을 귀한  신분이 되게 하려고 금씨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다. 금씨는 화가 나서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태자궁으로 들어갔다. 태자는 그녀를 사랑하여 삼녀일남을 낳았다.
  이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장아는 두  딸이 모두 귀한 신분이 된다는 점을 믿고,  금왕손의 아내가 된 장녀를 이혼시키고 태자에게 주었다.  오래지 않아 태자는 황제에 즉위했다.  그가 바로 한경제이다. 후에 한무제가 즉위하자,  그는 자기의 이복누이를 궁궐로 데리고 왔다.  이것은 사유제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남녀 불평등 관계의 필연적 산물이며, 또 전방제,  매매혼 등의 결과이다.
  이 시기의 남녀의 결혼은 표면적으로는 남자가 아내를 얻는  것이지만, 사실상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맞이하는 것이며, 시어머니의 권력은  매우 커 종족을 대표하는 세력이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는 '출처'가 남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에 의해 결정되기도 했다.
  아들은 그 아내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지만, 부모가 좋아하지 않으면 내쫓았다. 아들은  그 아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부모가 이  아이는 나를 잘 섬긴다고 하면, 아들은 부부의 예를 행하여 백년해로한다.
  남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첫번째 아내를 내쫓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이런 횡포를  막는 버팀목역할을 한 것은 여자 쪽 친척들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첫번째 아내를  내쫓을 경우, 남자는 그 아내가 데리고 온 동기나 다른 처첩들까지 모두 돌려보내야 했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위나라의 대숙질이라는 자는  첫째 부인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녀가 데려온  조카만을 사랑했다. 대숙질은 정치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첫째 부인을 내쫓고 한 고관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때 첫째 부인의 조카도 함께 떠나는 일이  너무 슬퍼, 그녀에게 따로  집을 마련해 주고  첫째 부인처럼 행세하도록 했다. 후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고관은 자신의 딸을 다시 찾아갔고, 대숙질은 관직과 명성을 잃게 되었다.
  옛날에는 출처에도 일정한 예법이 있었다.
  제후의 부인으로서 죄가  있어 이혼할 때에는 사자를 시켜 그녀를  친정 나라로 돌려 보내도록 한다. 그리고 부인이 그 본국에  이를 때까지는 부인의 예로써 대하고 그 본국에 들어갈  때  역시 부인의 예로써 들어간다. 사자는 군명을 전해서 말하기를, 과군이  불민하여 부인을  따라 사직, 종묘를 섬길 수가 없어 사신 아무개로 하여금  감히 집사에까지 그 뜻을 고한다고 한다. [그러면 주인도 대답하기를, 과군이 진실로  전에 이 아이(부인을 가리킴)를 가르치지  못하여 기추(비와 쓰레받기. 남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겸양해서 하는 말)의  소임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사양했는데,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과군이 어찌  삼가 군명을 기다리지 않겠느냐고  한다. 
여기에서 사자를 따라온 유사관은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기명을 늘어놓아 이를 돌려준다. 그러면  주인측 유사관 역시 이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출'을 당한 여자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  가지 상황에서는 '내쫓을' 수 없도록 규정하였는데  이것을 '삼불거'라고 한다. 즉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함께 삼년상을 치렀을 경우, 이전에는  빈천했지만 후에 부귀해진 경우이다. 그러나  이 '삼불거'는 귀족 여자의  특권으로 규정되었을 뿐  일반  부녀자들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법률적 보장도 없었다.('칠거', '삼불거'의 규정은 한위때에 특히 중시되었다. 당대에는  칠거가 법으로까지 규정되었다. "이혼당할 일곱 가지 이유도 없는  아내를 의절을 하여 내쫓는 자는 1년 반 동안 법을  받고 , 비록 칠거를 범했을지라도 삼불거가 있는데  쫓아내는 자는 곧장 100대를  때려 다시 결합하도록 한다. 만일  악질에 걸렸거나 간음을 저지른  자라면 이 법률을 사용하지  못한다.)
 
  2) 남자의 버림
  여자들은 '출'되는 것 외에도 남자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다. [시경, 패풍, 곡풍] 시의 일부를 보자.

  살랑살랑 동풍에
  흐렸다 비가 왔다
  한 마음으로 힘써 살아 왔으니
  성내어서야 안되지요
  순무 뽑고 무를 뽑을 때는
  뿌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니
  그 사랑 변하지만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함께 하려 했지요
 
  가는 길 차마 발이 안 떨어짐은
  마음의 원한 때문
  멀리 배웅하는 건 그만두고
  문안에서 보내고 마네
  그 누가 씀바귀를 쓰다 했던가
  내게는 냉이보다 달아요
  그대는 새사람에 마음이 빠져
  형제처럼 즐기겠지요

  이 시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쓴  것이다.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어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정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시의 1장에서는 자기를 버린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과거의 사랑을 생각하고, 2장에서는 남편에게 쫓겨나던 쓰라린 아픔을 되새긴다.
  다음 [시경, 위풍, 맹]시 역시 이러한 내용이다.

  어수룩한 한 남자가
  돈을 안고 실을 사러 왔었는데
  실을 사러 온게 아니라
  내게 수작을 건다
  그이를 전송하러 기수를 건너
  돈구 땅까지 갔었지
  내가 시기 늦춘 것이 아니라
  당신에겐 좋은 중매인이 없었다
  제발 노여워하지 마오
  가을을 기약하자고 했었다
 
  허물어진 담 위에 올라앉아
  복관 쪽만 멍청히 보았지만
  복관의 그대 보이지 않아
  한없이 울었지요
  복관의 그대를 만나게 되자
  웃으며 말하였지
  여러 가지 점을 쳐 보니
  불길하다는 점괘 없자
  당신의 수레를 몰고 와
  나를 재물과 함께 데려갔었지
 
  뽕잎이 지기 전엔
  그 잎새가 싱싱하였으니
  아아 비둘기야
  오디 따먹지 마라
  아아 여자들이여
  남자에게 빠지지 마라
  남자가 빠지는 것은
  그래도 할 말이 있지만
  여자가 빠지는 것은
  말할 수도 없다네

  뽕잎이 시들어
  누렇게 떨어졌네
  나는 그대에게로 가서
  삼년을 가난에 주렸지
  기수물은 넘실넘실
  수레 포장을 적셨었지
  여자로서 잘못이 없는데
  남자인 그대는 처음과 행동이 다르네
  남자란 믿을 수 없는 것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네

  삼년 동안 부인으로서
  방에서 쉴 새 없이 수고하였고
  새벽 일찍 일어나 밤 늦게 자서
  아침도 몰랐었지
  언약이 이루어지자
  그는 난폭해졌으나
  형제들은 알지도 못하고
  나를 보고 허허 웃기만 했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 자신이 슬퍼지네

  그대와 해로하려 했는데
  늙으니 나로 하여 원망케 하네
  기수에는 기수의 기슭이 있고
  진펄에는 진펄대로 둔덕이 있소
  처녀 시절엔 웃으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죠
  믿음으로 맹세할 땐 성실하였는데
  이렇게 마음이 바뀔 줄이야
  바뀔 줄은 생각도 않았는데
  이제는 끝장이 났는가

 

  이 시는 한 여자가 연애 결혼한 후 결국 버림받는 불행한 과정을  적나라하게  노래하고 있다. 1장에서는 연애하고 약혼한 과정을  묘사했고, 2장에서는 시집갔던 때의 일을 노래했으며, 3장에서는 시집가서 고생했던 일을  회고하고 후회했으며, 4장에서는 고생 끝에 남편의  마음이  바뀌
었음을 노래했고, 5장에서는 이만 하다  결국 남편에게 쫓겨난 일을 노래했으며, 6장에서는 옛날 회고하며 지금의 자기 신세를 슬퍼한 것이다.
  이 외에도 버림받은 여자의 고통을  노래한 시는 가 가시대마다 매우 많다. 그 중  인구에  회자되는 것으로는 한나라 말 왕찬의 [출부부], 삼국 시대 조식의 [출부부], 당대 고황의 [기부사]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은 정황은 그 당시  여자의 낮은 지위를 충분히 보여 준다. 그렇지만 여자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있었으며,([한서,  주매신전]을 보면, 주매신은 집이 가난한데다 책읽기를 좋아하여 산업에 무관심하였다. 주매신의  아내는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자  주매신을 떠났다.)  한대에는 또 아내가 남편의 버림을 받은 후 보복을 하는 일도 있었다.([후한서, 곽태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황윤이라는 자는 총명하고  재능이 있었다. 사도 원외의 조카딸이  시집을 가려고 하는데, 황윤을 본 후, "만일 이러한 남자와 있을 수 있다면  만족스럽겠구나"라고 탄식했다. 황윤은 이 사실을 알고 아내 하후씨를 내쫓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지모가 있어  시어머니에게 내가  떠나면 황가와는 영원히 이별해야 하니,  친족들과 이별의 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황씨 가족 300여 명이 왔고, 하후씨는 황윤의 15가지  죄악을 신랄하게 폭로한 후에 수레에 올라 떠났다. 황윤은 이로부터 지위와 명예를 모두 상실했다.)

 

  (2) 재혼
  중국 고대  여성의 재혼은 이혼과 마찬가지로  보편화된 일이었다. "서울에는 중매를 관장하는 자가 있어 홀아비와 과부를 모아  결합시켜  주었는데, 이를 합독이라 한다." 합독은 춘추  전국 시대 매관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그 당시는 홀아비와 과부의 재혼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
다. 춘추 전국 시대 재혼은 주위 사람이  원해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들의 의사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면, 한경제 황후의 어머니  장아는 왕중에게 시집가 일남이녀를  낳았는데, 왕중이 죽자 장릉전씨에게로 개가하여 전분과 전승을 낳았다. 또 탁문군과 사마상여도  탁문군이 과부가
되어 혼자 살던 시기에  연애를 하여 결혼하였다. 소무가 흉노에 억류되어  있을 때, 그의  아내는 소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재가했다. [삼국지]에  의하면, 손권의 두 딸과 남편이 죽자  다시 결혼을 했으면, 원희의 아내 견씨는 원희가 멸망한  후 조비에게 시집을 갔다. 유모의 처 목씨는
유모가 죽은 후 유비에게 시집을 갔고, 손권의 서 부인은 원래 육상의 아내인데, 육상이 죽자 손권에게 시집왔다. 그리고 채문희는 본래 위중도의   아내였는데, 그가 죽자 흉노의 포로가  되어 좌현왕의 부인이 되었고, 한나라로 돌아온 후에는 다시 개가하여 동사의 아내가  되었다. 또 [예
기, 단궁상]에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달랐다"말은 여자가 재혼했음을  뜻하는  말이다. [백호통, 간쟁]에서는 이전 시대의 "끊어진 교제는 친구를 사귈 수 있고, 버려진  아내는 개가할 수 있다"고 하여 이혼한 여자가 개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한대에도 지아비가 죽으면 아내가 개가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진평은 성장하여 아내를 맞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나, 부유한  사람은 그와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고, 가난한 사람은  진평이 또 부끄럽게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 후, 부자  장부에게 오가라는 손녀딸이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감히 취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진평은 그녈르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마을에 큰 장례가 있자,  진평은  집이 가난하였으므로 제일 먼저 가서 끝까지 남아 도와 주었다. 장부는  상가집에 있는  그를 훌륭하게 보았다. 진평 또한 고의로 뒤에 갔으며, 장부는 진평을 따라  그의 집까지 도착하였는데, 집이 너무 가난하여 자리로 문을 만들었고, 문 밖에는  길게 나 있는 여러 개의 수레바퀴 자국이 있었다. 장부는 돌아와 그의 아들  중에게 말했다. '나는 손녀딸을 진평에게 주려고 한다. '  중은 '진평은 가난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한 현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나의 딸을 그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했다. 장부는  '진평처럼 아름다우면서 오랫동안 가난한  자가 있겠느냐!'라고  말하고는 결국 손녀딸을 그에게 주었다.
  장부의 손녀딸 오가의 재혼은 그 당시 사회에서 과부의 재혼을 허락했음을 의미한다.
  서한 시기의 재혼에 관한 일 중 가장  흥미 있는 것은 주매신의 아내가 이혼을 하고 개가한 일일 것이다. 주매신은 처음에서는 생활이  어려워 땔나무를 해서 연명해 갔다. 이러한  생활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고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만 갔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
햇다. 이때, 주매신은 자신은 지금  40세가 넘었는데, 50세가 되면 부귀하게 될 것이고, 그   공을 아내에게 돌리겠노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아내는 주매신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 어느 날  주매신이 땔나무 단을 길가에 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과거의 아내는 재혼한 남자와 그곳을 자나가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그를 보고  집으로 들어가 밥을 먹도록 했다. 후에 주매신은  관리가 되었고,  과거 아내의  부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한  달 후,  아내는 후회하고 자살을 했다.
  동한 시기의 재혼은 매우 자유로웠다.
  여남 정원의 아내는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친정으로 내쫓기게 되었다. 친정에서는  그녀를  화중이라는 자에게 개가시켰다. 하루는  화중과 그의  아내가 조정의 수레를 타고 시장을  달리고 있는데, 정원의가 길가에  앉아 있다 이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과거 나의 아내였는데, 어떠한 잘못도 없었건만   나의 어머니가 그녀를 너무 싫어했소.  그녀는 좋은 운명이 되었군." 화중은 고위 관리이면서도  시댁에서 쫓겨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재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당시 유명 인사였던 채옹의 딸 문희 또한 이와  같았다. 그년느 처음에는  위중도의 아내였지만, 위중도가 죽고 자식이 없자 친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후에 흉노의 포로가  되어 갔다가 좌현왕의 아내가 되었다. 후에 조조느  채옹에게 아들이 없음을 고려하고 돈을 주고 문희를 사왔는데, 그년느 또 재혼을 하여 동사의 아내가 되어 총애를 받았다.
  한나라 건안 연간, 여강부의 하급 관리  중 초중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아내  유씨와 금실이 좋았다. 그러나 초중경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싫어하여 이혼하도록 한다. 유씨는 친정으로 돌아온 후 개가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지만, 집안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 결국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후대 사람들은 이 비극적인 부부를 위해 [공작동남비]라는 장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 시에서는 유란지`초중경 부부의 애틋한 사랑과 이  사랑을 죽음으로 몰고 간 봉건제하의 악습에 저항하는 정신을 강하게 노래하고 있다.

  양가에서 합장을 요구하여
  화산 옆에 합장을 했네
  동쪽과 서쪽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고
  좌우에는 오동나무를 심었다
  가지끼리 서로 덮고,
  나뭇잎끼리 서로 통하는구나
  그 가운데 한쌍의 새가 나는데,
  원앙이라고 이름하네
  고개 들어 서로 보고 우니
  밤마다 오경에 이르렀네
  행인은 그 소리를 귀에 가득 담고 달려가고
  과부는 일어나 방황한다
  후세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를 보고 잊지 말라 하네

  봉건 예교의 죄앙긍띵 폭로하면서  혼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 시는 중국 최초의  시극이다.
특히 이 시의 결미는 낭만주의 색채가 물씬 풍겨 비극적인 애정에 장려한 분위기를 가미시켰다.

 

    4. 첩
  (1) 첩의 출현 이유

  모계제의 철저한 붕괴와 남권의 신장으로 대를 이을 아들에 대한  관념, 즉 아내가  많으면 많은 수의 자식을 얻을 수 있었고, 자기 종족의 세력을 확대하여  적과 대항하는 동시에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후사를 잇는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 이것은 제왕이  많은 수의 처를 둘 수  있었던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백호통, 가취]에서는 "천자와 제후가  한번 결혼에 아홉 명의 여자를 취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라에서 후사를 널리 잇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일반 평민들이 첩을 맞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만일 본처가 후사를 이을 사내아이를 낳을 수  없다면, 첩을 받아들이는 일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만아리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이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질투'로 이혼 사유가 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주대의 종법 제도가 확립된  후 더욱 심해졌다. [시경`주남`여치]에서는  자식을 잘 낳은 '여치'로 부녀자의 미덕을 비유하여 노래했다.

  여치 날개 소리
  슬슬 울리는데
  그대의 자손들도
  여치처럼 번성하기를
 
  여치 날개 소리
  붕붕 울리는데
  그대의 자손들도
  여치처럼 끊임없기를
 
  여치 날개 소리
  직직 울리는데
  그대의 자손들도
  여치처럼 모여 즐기기를
  이 시는 자기 집안의 자손이 번성할  것을 축원한 작품이다. 또 [도요]시도 이와  유사한 의미
를 담고 있다.
  싱싱한 복숭아에 화사한 꽃이 피었네
  시집가는 아가씨 한 집안을 화락케 하소서
 
  싱싱한 복숭아나무에 탐스럼 열매가 열렸네
  시집가는 아가씨 온 집안을 화락케 하소서

  싱싱한 복숭아나무에 푸른 잎새가 무성하네
  시집가는 아가씨 온 집안 식구를 화목케 하소서

  이 시는 결혼을 축하하는 시로, 복숭아의 꽃, 열매, 잎새를  통해 이 아가씨의  현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또 자손을 번창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고대 사람들은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은 유전적인 요소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이것을 배우자 선택의 한 조건으로  삼았다. 진
무제는 태자의 배우자를 뽑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위공의 딸은 다섯을 낳을 수 있지만, 가공의 딸은 다섯을 낳을 수 없다. 위씨 집안은 종자가 어질고 자식을 많이  낳으며, 아름답고 장수하며 피부색이 하얗다. 그러나 가씨 집안의 종자는 질투가 많고 자식이  적고 못생겼으며 수명이 짧고
피부색이 검다."
  따라서 다처 풍속은 상당한 자유가 있었으며, 첩이 출현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2) 처와 첩의 구분과 불평등한 지위
  한 남자에게 여러 명의  처첩이 있을 경우, 처첩들이 낳은 아들의 적서의구분이 없다면 아버지의 지위와 유산을 계승하는  문제에 혼란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혼란을  방지하고  해결하기 위해 사회에서는 종법을 중시하고, 인륜을 강구하기 시작했던 것이 처와 첩의 구분이었다. 선
진 시기 처와 첩의 구별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으며, 또 명확한 예법의 한계가 없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황제로부터  순임금에 이르는 '사비', '삼부인'은 모두 부인을  칭한다. 황제의 사비에는 정, 차의 구별이 있다. 은대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  왕의 많은 처에 대해서  단지 '제부', '다부'로만 칭하고 있는데,  만리 특별히 어떤 사람을 가리킨다면  '부'라고 해야 했을  것이고,
은고종의 부호, 부연, 부성 등은 역사학자들이 어떤 사람이 정처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갑골문에서의 '첩'은 일반적으로 여자 노예를 지칭하지만, 정처인 '제부'보다 지위가 낮지는 않았다.
  서진 건국 초기에는 삼국의 전쟁으로 가정이 흩어지고 처와  첩이 전도되었으며,  서자가 적자로 바뀌는 현상이 많이 발생하였다. 진무제는 진시 5년에 특별히 이런 조서를 선포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상하를 분별하고, 귀천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근세 이래로는 많은 수가 총애를 받았다. 지금 이후부터는 첩잉이 정실로 오르지 못하도록 하라.
  사실상 은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처와 첩의  귀천의 구별이 있었다. 서처와 첩은  신분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에 있어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거주하는 곳을 보면, 처는 집의 정방에 있기 때문에 '정방'이라고도 하지만, 첩은 측실에서만 살 수 있었다. 때로는 첩을  단독으로 떨어진 작은 정원에서 기거하도록 하는데, 이 때문에 첩을 '측실', '편방', '방처'라고도 한다.  또 어떤 첩은 집 문 밖에서 거주하는데, 대부분 남편이  몰래 맞이한 여자로 처가  집안으로  들이는 거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분이 낮은  첩은 독자적인 측실도 없이 처가 머물고 있는 방의 어느 한켠에 있기도 한다.
  처는 비록 '중궤(가정의 음식을 주재한다)'의 명칭이 있지만, 첩을 취할 수  있는 가정의 처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주방에 나올 필요가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남편과 함께 마주 앉는다. 그러나 첩은 옆에서만 수발을 들  뿐 동석은  할 수 없다. 남편이 관직이나 공적이  있으면 아내는 그 남편의 신분에 상응하는 예복을 입어야 하지만, 첩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일상복 또한 처와 첩의 구별이 있다.  처의 복장은 대부분 정색을 사용하고  도안도 복이다 장수 등을 뜻하는  것들로 장중함, 전아함, 화려함 등을 나타낸다. 그러나 첩은 대부분  간색을 사용하고 도안에 있어서도 복숭아꽃, 배꽃 등과 나비 등이며 화려함에 치중했다.
  처의 호칭은 춘추 시대 이전까지는 남편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달랐다. 가령 제후  군주의 정처는 부인이라 했고, 대부, 선비의 정처는 또 다른 명칭이 있다. 한대  이후 각 시대의  특정 계급 관원의 어머니와 처는 태부인,  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등급  자격이다.  한대부터는 이미 결혼한 여성을 존칭하여 부인이라고 했다. 때문에 첩이 많은  집에서는 흔히 첩을 정처를 칭하는 부인이 되고, 후세에도 태태라고 하여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 맞이한 첩은 집안 문을 들어선 후, 처에게 예절을 갖추어야 했다.
  첩의 지위는 [사기, 항우본기]의  다음 이야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항우의 병사는 해하아래에서 방벽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군사는 적고  군량은 다 떨어진데다 한나라 군대와  제후의 군대가 여러겹으로 포위하여  사면초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항우는  술잔을 들고 비통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시운이 불리하여 추 또한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좋을까?
  추는 항우가 항상 타고 다니던 준마이고  우는 총희이다. 여기서  항우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애첩과 애마를 나란히 제시했으며, 또 말을 첩보다 먼저 말한 것은 여자와  말을 동등하게, 심지어는 여자가 말보다 못하다고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가의 '삼례'에서는 남성의 사회적 등급에 따라 아내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있다.

  i) 천자의 비는 후라고 하고, 제후의 아내는 부인이라고 하며, 대부의 아내는 유인이라 하고,  선비의 아내는 부인이라 하며, 서인의 아내는 처라고 한다.
  ii) 천자에게는 후, 부인, 세부, 빈, 처, 첩이 있다.
  iii) 공후에게는 부인, 세부, 처, 첩이 있다.

  이런 기록에 의거하면, 천자는 126명, 제후는 아홉 명의  처첩을 가질 수 있으며, 대부는 일처이첩만을 소유할 수 있었다. 사실 소유하고  있는 여성의 수가 많고 적음은 재력의 상징이며, 각 귀족들이 소유하는 처첩은 법으로 규정한 수를  훨씬 넘었다. 첩은  대부분 돈을 주고  사오거나
약탈하여 얻는다. 따라서  처음부터 독립된 인격은 상실되고 남성의  부속품이 되는 것이다.  남성들은 그들 자신의 도덕률로 정조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동한의 정현이 주를  단 [예기, 단궁]에서는 제곡에 관해 말하면서,  요는 네 명의 비가  있었고, 순은 세  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하나라에는  12명으로 늘었고, 은나라에는 39명,  주나라는 121이 되엇다고 했다. 이런  구체적인 숫자는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선진 제후의  군주는
"한번에 아홉 명의 여자를 맞이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주나라  천자의 비빈수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주례]와 [예기]속의 '세부', '빈비',  '어처'등의 명칭 또한  비교적 일치하여 주대에 이미 비빈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주대 왕후는 육궁의 우두머리로,  궁궐  안에
서의 지위는 천자와 같다. '육궁'이란 황후가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세 명의  부인은 삼공과 지위가 같고, 구빈은 구경과 같으며, 세부는 대부와 같고, 어처는 사와 같다.
  이런 제도 규정에 의하면, 주나라 천자가   소유한 비빈은 총 121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수에 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많은 수의 비빈  가운데 '후비'의 지위가 가장 높다. 천자의 후비를 후라고 칭하는 이유는  "우는  군주다. 천하에서 그를  존경하기 때문에 후라고 한다." 사실 '후'의 원래 의미는 후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군주를 지칭한다. 예를 들면, 하나라의 군주 하계, 하우는 모두 하후로도 칭해졌다.  사실상 경대부가 한 명의 처와 두  명의 첩을 두는 것은 현명한 자를 존중하고 후사 계승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선비가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두는 까닭은 아래에 있는 자의 경대부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므로 일부다처 관념이 이미  영구 불멸의 지위로 간주되며, 지위의 귀천에 따라  처와  첩의 많고 적음을 결정한다.
  자녀들의 아버지와 처 및 첩에 대한 칭호도 엄격하게 구별된다.  춘추 시기 이전  처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첩에게 서면상으로는 '제모'라고 하였으며, 교육을  받은 자는  '자모', '보모'라고 했다. 첩의 자녀는 아버지의 정처에게 '모' 혹은 '부인'이라고 했고,  자기 어머니에게도 '모'라
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다른 첩에  대한 칭호는 '제모'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첩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서출임을 부끄럽게 여겨 자기의 어머니는 '제랑'이라고 했다.
  상례에 있어서도 처첩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처는  3년상을 치러야 했지만, 첩은  1년상만 치르면 되었다. 처의  자녀와 첩의 자녀는 모두 3년상을  치러야 했다. 처가 죽으면 첩은 1년상을  치렀는데, 어떤 조대에는 3개월만 치렀고, 처와 첩의 자녀는  모두 3년상을 치렀다. 첩이 죽으면, 처와 첩의 자녀는  상을 지킬 필요가 없었으며, 첩의 친자식만 1년상을 지키고, 다른 첩의 자식들은 상에 참여하지 않았다.
  처가 죽은 후에는 남편과 합주하기 위해  사당에 안치하여 자손의  제사를 받게 한다.  시신은 남편과 합장하므로, "살아서는 같은 방에 있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첩이 죽으면 남편과 합주할  수도 합장할 수도 없다. 예외가 있다면,  첩의 자식이 적자에 비해 출세하여 고위 관리가 되면, 그의 어머니를 태부인으로 승격하여 아버지와  합장했다. 남편이 죽은 뒤, 처는 평생 수절을 해야 되며, 만일 개가를 하면 부정하다는 시선을 받게 된다.
  첩에도 등급과 귀천의 구별이 있다. 선진 전적에서는  대부분 '귀첩', '천첩'의  명칭이 있다.
첩의 귀천의 구별과 등급의 차이는 첩을  받으들이는 자의 신분상의 지위와 소유하고  있는 첩의 숫자상의 차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  첩의 다른 내원 및 미색과 재능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첩의 등급이 가장  복잡한 것은 당연히 왕실일 것이다. 왕은  특수한 계층으로, 이  계층의 다처식 혼인 형태의 표현 형식은 빈비제이다. 중국 제왕의 빈비제는 주에  처음  보여 진나라 때 형성되었으며, 이후 각 조대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대체로  주나라 제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즉 주나라 때 천자는 한 명의  왕비를 두고, 여섯 개의 궁을 세워 세 명의  부인, 아홉  명의 빈, 스물일곱 명의 세부, 여든한 명의 첩을 두었다.
  [예기, 곡례]에 의하면, 주대 천자의 첩에느 나부인, 세부,  빈, 처, 첩 등 여러  종의 등급이 있는데, 처 이상은 귀첩에 속하지만, 첩은  천첩에 속하며, 첩 중에도 많은 등급이 있다. 진나라 때 비빈에는 아홉 등급의 작위가 있었다. 한대에는 끊임없이 증가하여  한원제때는  열네 등급까지 있었고, 최고의 소의의 지위는  승상에 상당하며, 작위와 봉록 등은 제후왕과 같다. 가장  등급이 낮은 무연, 공화 등은  백석의 녹미를 받는 낮은 관리에 해당된다.  무연 이하에는 또 등급에 들어가지 않는 신분이 매우  낮은 첩도 있다. 수당 시기,  비빈은 총 여덟 등급이었고,  등급  구분은 관품에 상당항 정일품부터 정팔품까지 있으며, 이외에도 품에 들어가지 않는 첩도 있다.
  제환공이 십여  명의 제후들과 규구에서 맺은  맹약(기원전 651년)에 "첩을 처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볼 때, 그  당시 통치자들이 처와 첩의 문제를 어느 정도  중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춘추 시대 첩을 처로 삼은 몇몇 군주와 경대부는 가정의 불화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고 사방의 이웃에까지 재앙을 끼친 일이 있었다. 봉건  시대로 들어선 이후, 첩을 처로 삼은 자에  대해 예법을 따라야 된다고 했다.  이것에 위배되면 사람들의 경시를  받게 되고, 또 법률적인  징계를 받았다. 서한 때의 공향후 부안은 애제 황후의 부친인데, 처와 첩의  지위를 어지럽게 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하고 온 가족이 합포로 유배되었다.

  (3) 부귀의 상징과 동침의 질서
  중국의 일부 일처제는  사실상 일부 다처제로서 춘추 전국 시대  이후 제도 형식으로 규정되었다. 일부 다처는 주로 노예주나 귀족, 관료들이 실행하였다.  그들은 혼인과는 관계없이 여자 노예를 마음대로 농락하였다. 즉 그녀들은  남자의 성욕을 발설하는  대상이며 노리개감에  지나지
않았다. 다처는 그 당시 민간에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중국 봉건 제왕의 다처 형식은 빈비제로 표현되었지만, 관리와 평민 계층은 첩을  들인다는 의미의 납첩으로 표현되었다. 첩에 대한 칭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첩에 속한다. 때문에  후세에는 처첩
을 합쳐 '내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처와  첩은 고대에 엄격히 구별되었다.  [한비자, 내저설하]의 다음 글에서는 고대 중국 평민들 또한 첩을 얻는 것이 부귀의 상징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위나라 사람으로 부부가 기도를 드리는다, 축원하여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이유없이  베 백 필만 얻게 해 주십시오.' 그 남편이 말했다. '어찌하여  조금 바라오?' 그녀는  대답했다. '이보다 많으면 당신은 첩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평민들의 다처에 대한 주장 또한 보기 어렵지 않다. 가령 [태평경]  권 35에서는 '일남이녀법'이 있으니, "태황 천상의 안정된 기운이 장차  이르려고 하니, 순수하게 하늘을  본받아야 한다. 그래서 한 남자로  하여금 두 여자를 얻게 하여 음양을  상징한다. 양수는 홀수이고, 음수는
짝수이다. 태화의 기가 이른다... 그래서 한 남자에 두 여자가 있게 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대 상층  사회에서 많은 수의 첩을  취하는 것은 부귀의 상징이었다.  [한악부, 상봉행]에서는 그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이렇게 노래했다. 

  황금으로 그대의 문을 만들고
  백옥으로 그대의 당을 만들었네
  당 위에는 술잔과 술이 놓여 있고
  한단의 배우를 부린다
  정원에는 계수나무 나 있고
  아름다운 등불은 빛나기도 하구나
  형제 두세 사람
  차남은 시랑이 되었네
  닷새에 한번 돌아오니
  길 위에는 절로 광채가 난다
  문 들어설 때 왼쪽으로 돌아보니
  한 쌍의 원앙만 보인다
  원앙 72마리가
  자연스레 늘어서 있네
  소리는 낭랑도 하고
  학의 소리가 동서쪽의 곁방에서 들린다
  대부는 비단을 짜고
  중부는 유황을 짠다
  소부는 하는 일이 없이
  금실을 끼고 높은 당으로 오른다
 
  [서경잡기]를 보면, 사마상여는 무릉 사람의 딸을 첩으로  삼았는데, 이처럼 다처는 왕왕 가정을 파괴하고, 부부간의 이혼을  초래하기도 했다. 탁문군은 [백두음]에서 당시의 슬픔과  탄식을 이렇게 노래했다. 

  쓸쓸하고 쓸쓸하네
  첩 얻는다고 하여 울 필요 없지
  원하는 건 한 사람의 마음 얻어
  흰머리 헤어지지 않는 것

  이렇듯 여성은 남자의 부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주대에는 예제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천자, 제후, 대부의 처첩의  수를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방에 있는 시간과  질서까지도 정했다. 천자와 후비의 동침 순서 또한 복잡하여   '여사'라는 관직까지 있게 되이가다. 여사는  제식에 정해진 규정대로 비빈들로 하여금 오른손에 금, 은,  동 등 다른 재료로 만든 반지를  끼게 하여 신분을 명확히 하고 천자를  모시는일이  끝난 것을 확인한 후에 그 결과를 기록했다. 그 후 여사는 왕을 모셨던  여자들의 오른손에  있던 가락지를 왼손으로 옮겨 끼운 후에 성행위를 했던  날짜와 시간을 기록했다. 또한  여사는 여자들의  건강 상태와 월경 기간 등을 왕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여사는  교접 때마다 '관'이라고  불리는  붉은 붓으로 교접 횟수를 정확히 기록했다.  그래서 후대 '동사'라는 말은 통치자의  성생활을  가리키는 의미로 널리 쓰였다. 아울러  그녀들이 평소 행동거지를 기록하여 이후에  참고했다. 비빈들은 월경 기간 중에는 양볼에 붉은색을 칠하여 자기의 생리 현상을 나타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천체, 음양, 역수로 일의 순서를 결정하기 좋아하여 후비와  제왕 귀족이 함께 방에 있는 순서조차도 달의  밝기와 크기에 따라 결정했다. 달은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점점차 오르고, 그 후 그믐날까지는 점점 사그라드는데, 이 변화 규칙에 의거하여 초하루부터 보름
까지는 지위가 낮은 여자부터 시작하여  높은 여자로 나아갔고, 그 다음부터  그믐까지는 지위가  높은 여자에서 낮은 여자 순으로 안배되었다. 왕이 서열이 낮은 여자들과  먼저 성행위를  한 것은 그녀들의 질 분비물을  통해서 성적 능력을 보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적 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왕비와 동침을  하면 훌륭한 2세를 수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후비들간의 총애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 이와는 다른 견해도  있다. 황후는 매일 밤 천자와 같은  방에 있어야 하는데, 5일  간격으로 하루씩 쉬게 되며, 이때  다른 비빈이 천자와 동침한다. 이런 제도는 제후들도  사용했다. 흔히 50세 이하의 측실은  회임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군주와  동침할 권리가 있지만, 50세 이상이  되면 동침할 수 없다. 오직 정실만은 나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
  대부는 일처 이첩으로 사흘을 한 주기로 한다. 그러나 사족들은 일처 일첩일  뿐이다. 또한 처와 첩의 자격은 엄격히 구별되어, 처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동침할 수 있었지만,  첩은 남자가 잠든 후에는 방에서 나와야 했다.
 
      제 7장 성적 욕망의 제도적 장치 : 기녀
    1. 기녀의 탄생
  서양의 경우 기녀의 기원을 종교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기원전 3000년에  세워진 바빌론 왕국에 기녀가 나타났고, 함무라비 왕이 정권을 잡았을 때, 신전에는 남자  사제, 종, 장인 이외에도 존경받는 여사제가 적지 않았다. 그녀들은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다. 또 '신'과 '기도자'사이에서 종사하는 '성직 기녀'가 있었는데, 그녀들의 수입은 신전의 중요한  재원이기도 했다.
바빌론 신전의 기녀는 일생 동안 한번은  신전에 들어가 낯선 남자에게몸을 주어야  한다. 이때  남자는 은이나 비단을 성직 기녀의  치마에 던져 주고 동침하는데, 여자에게는 선택 권리가   없으며 여신에게 임무를 다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  기녀들은 어떠한 
치욕감도 느끼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서양의 성직 기녀와 유사한  역할을 한 이는  무녀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녀란 신에게 바쳐진 여성으로서 폐경기가  될 때까지 처녀여야만 했으며, 몸가짐은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이러한 처녀 무녀들과  함께  신전에서 일하는 여성이  사원  창부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기녀의 기원을 은상의 여무에 두고,  그 시대를 '무창 시대'라고 한다. 그 시대 지배  계급 사람들은 공적, 사적인 일을 계획하고 처리할 때 신탁에 의지하였다. 이들은 점술  혹은 톱풀의 마른 줄기 묶음을 움직여 보는 것으로 다가올 미래를  점쳤다. 아울러 접신 상태에서 신착의  말을 할
수  있는 영매를 청하기도 했다. 영매에는 남자 영매와 여자 영매가 있었지만  신탁을 푸는 일은 본시 여자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종교 기녀'의 성교   목적은 종교 신앙, 즉 신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이지 금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지만 여무가 기녀의 기원이라는  견해는 증거가 희박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주장은 여무가 후세의 창기와 마찬가지로 노래와 춤에  뛰어나다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후세 여자들이 기녀가 된 까닭은 경제적  혹은  정치적 압박 때문이었음을 홀시하고 있다는 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주장은  서양에서 말하는 '종교 매음'설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장민균의 기녀의 기원에 관한 다음 글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웃음을 파는 기원은  반드시 사회적 역사적인 방면에서 탐구해야  한다. 몽매했던 시대,  인류가 겪은 집단혼 시대에는 웃음을 파는 일은 없었으며, 이 시대 이전 난혼  및 규율이  없던 성교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므로   웃음을 파는 것은 그  이후 시대에  나타낫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부계 씨족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유 재산과 대우혼이  싹트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의 출현으로 웃음을 파는 이도  증가하게 되었다. 씨족 사회에서 다른 종족의  약탈을  받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결국 노예로 전락하고,  그  중에서도 여자는 예속 계급이 된다.  그
후 가부장제의 씨족내에서 일부 다처제가 나타났다. 일부  일처제가 처음 발생했을 때,  권력 있는 족장, 수장, 승려들은 모두 일부  다처  형식을 취했다. 여기서 여자  노예는 처첩의 서열에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의도적으로 몸을 팔아 이익을 취하기  시작했다. 노예에 한정하면,  씨족내의 하층 계급 여성의 일부분 또한  이러한 경향이 있다. 오늘날 미개화된 인종  사이에는 결혼 전의 정절을 중시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대부분 웃음을 팔아  출가 비용을 만든다. 이런 현상은 그 후 생산의 발달, 단순  물물 교환이 상품과 화폐 교환 단계로 바뀜에  따라 웃음을 파는 것은 더욱 분명한 형식으로 나타나 인육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시대, 생식기 숭배 관념의 발달 시기는 성행위는 일종의  신비한 즐거움이었으며, 자유스런  집단혼이 일부  일처제로 진입하면서 남성은 이  제도의 속박을 받게 되자 물질적인 보수로써 여성의 육체를  얻으려고 했다. 이  또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초에는 강제적 혹은 의식적이었지만, 우발적으로 웃음을 파는 행위인 '창부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직업적인 매춘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볼 때, 중국 기녀의 탄생은  씨족  사회의 사유제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일부 일처제 형성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숭  가다. 당시 씨족 사회의 우두머리나 몇몇  가장들은 자신들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하여 안으로는  생산품을 분배하고 밖으로는 다른  씨족과의 교환을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식량, 화폐, 노예  등은 재산의 중요한 기초가 었으며,  이러한 토대 위에 기녀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녀의  탄생은 원시인의 성애 관념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기녀는 노예 사회에서 노예를 부리는 자의 가정에서 기른 가기에서 기원한다고 보고 있다. 가기는 한 명  혹은 몇 명의 통치자들에게 오락과 성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돈을 목적으로 성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기녀의 원류가 되엇다고 할 수 있다.

 

    2. 기녀의 성적 도구화
  일반적으로 기녀라고 하면 매춘을 업으로 삼는 여자를 말판다.  매춘이란 육체를  금전과 바꾸는 행위이다. 이러한 의미로서  현재의 기녀를 보면 완전히 부합하지만,  고대의 기녀와는  차이가 있다.('기녀'라는 말을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매춘을 업으로 하는  여자가 아니라 본래 노래와  춤을 업으로 삼은 여자를 가리킨다. 가령 [설문해자]에서는 '기, 부인소물야'라고 하였으며,
위나라 사람 장읍의 [비창]에서는 '기'자를  미녀로 해석했으며, 수대 육법언의  [절운]에서는 '기,  여악야'라고 하였다. 이후 [정자통],  [강회자전]등에서도 '기'를 '여락'으로 풀이했다.  '
여락'은 [고희자전]등에서도  '기'를 '여락'으로 풀이했다.   '여락'은 고대에 용모가 수려하고 가무에 뛰어난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또 '(기생)기'자는 고대에 '(재주)기'자와  통용되었다. '(재주)기'는  춤 솜씨 혹은 이것을 익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재주)기'는 기녀가  음악이나 무용  및 오락 예술 등의  기예를 가리켰다.  '기'자는 또 고대에는 항상  '(광대)창', '(창녀)창' 등의 글자와 함께 사용되어  가무 예술에 종사하는 여자를 가리켰다.) 다시  말해서 고대의 기녀는  음악과 가무와 같은 예술에 종사하며 사람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여자로서 결코 매춘을 본업으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기녀가 돈을 받고 육체를  파는 시기인 것과
는 차이가 있다.  이런 기녀는 당송대 때 나타나기  시작하여 명청대에 형성되어 매음으로  기녀를  대신하기도 했다. 기녀는 처음에는 주로 예술만을 팔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색[몸]과 예술을 팔게 되었고, 그 후에는 색만을 파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중국의 기녀 발달은 통치자들의  음란한 기풍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실상 악무  노예는 통치자의 수요에 따라  나타났다. 갑골문 복사 가운데 '무신'은  노예 신분의 전업 무용인을  말한다. 그 주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 이외에도 제사나 기타 악무 활동에 참가해야 한다.
  사우제 사회가 정착된  이후, 각 조대의 통치자는 다처의 특권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또  많은 여자들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역사상 노예 사회로 진입한  초기에는 통치자들이 성색에 탐닉했는데, 그들이 즐긴 음악과  무용은 모두 성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이런 음악과 무용은 원시 시대의 그것과는 달리 압박, 착취, 음란을 특징으로 한다.
  하나라의걸과 은나라의  주는 사치스런 음악을 일삼았으니,   큰북, 편종, 편경, 피리,  퉁소 등의 음을 냄에 있어서 거대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고, 많은  것을 장업하고  화려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기이하고 상궤를  벗어난  것을 추구하여서 일찍이  귀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과 눈으로 번 적이 없는 것 등으로써 힘써서 서로 과도하게 했고, 표준  도량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걸, 상주 등의 통치자는 모두  성대한 장관을 감상하고  많은 수가 등장하는  악무를 즐겼으며, 이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그래서 "걸임금 시대에 여락 3만  명이 새벽에 문에서 떠들면 그 노래 소리가 온 들녘까지 들렸다." 또 춘추 시대  초장왕이 즉위하자 "성
색이 음란해져, 왼손으로는 진나라 여자를  끌어안고,  오른손으로는 월나라 여자를  끌어안았으며," 제경공은 당시 "왼쪽에는 기수를 두고, 오른쪽에는 배우를 두었고," 오왕 부차의 후궁 가운데 관기의  수는 수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외교 활동과 사람들의 교제하는 데 있어 여자는 고급 예물품으로 간주되어 서로 주고받는 대상이었다. 여자는 모든  통치 계급의 노리개에 불과했다. 가령 기원전 562년,  진도공이 병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에서는 음악을 할 줄 아는  여자 16명과 다른  예물을 보
내와 강화를 구했으며, 진도공은 예물을 받은 후에 또 음악을 하는 여자 8명을 공신에게 주었다.

    3. 기녀의 유형
  기녀의 범위는 협의적인 것과  광의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매춘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협의적  의미로서의 기녀는  영리를 목적으로 자기의 미색과 재능을  공개적으로 팔아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여자를 말한다. 광의적 의미로서는  기녀는 다변화된 기녀를 포괄하는 것으로, 주로 수도권에서  매춘을 부업으로  하여 비공개적으로 몸을  파는 여자를 말한다. 그리고 매춘 내용으로부터 보면, 협의적  의미로서의 기녀는 전통 개념 속에  성교를 내용으로  하는 성과 금전 간의 교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광의적 의미로서의 기녀는 나그네를 위해 각종  색정을 제공하는 행위를 포괄한다.
  기녀의 호칭은 매우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면, 신녀, 야도랑, 풍성부인, 정로, 고해인, 소랑 등이 있다.
  중국 역사상 기녀의 종류는 매우  많지만, 중요한 것이 영업을 기준으로 하는 가기,  관기, 시기, 영기, 궁기, 승기 등이다.(기녀는 또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도 분류된다. 

 

첫째, 출생 지역에 따른 분류로, 시기의 탄생을 따라 출현하였으며, 그 발전 또한  기기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기녀의 출신 지역을 광범위하게 구분하여 남기와 북기로 구분하였었다. 그러나 당송 시기에 이르면서 기업이 발전하고  번영하게 되자, 기녀의 지역적 특성은  더욱더 두르러져  촉기, 항기, 오기, 경기 등의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명청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구분이 더욱더 세
분화되었는데, 서가가 편찬한 [청패류초]에서는 기녀를  지역에 따라 25종으로  분류하였다. 

 

둘째, 직업 혹은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장기를 기준으로 하여  가기, 악기, 무기, 시기,  사기, 음기, 우기 등으로 분류한다. 가기는 노래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기녀이고,  악기는 음악  연주에 뛰어난  기녀이다. 그리고 무기는 춤에, 시기는 시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있다.

 

셋째, 윤리 도덕을 기준으로 하여 양기, 의기, 악기, 간기 등으로 분류한다. 의기란  정조나 신의 등을 가지고 있는 기녀를 가리킨다. 그러나 악기나 간기는 품행이 사악한 기녀로,  이익을 얻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류이다.

 

넷째, 외모를 기준으로 하여 미기, 추기, 비기,  왜기  등으로 분류한다. 미기는 외모가 아름다운 기녀이다.  역대 기녀들의 아르다움에 대한  요구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략 백옥같이 하얀 피부, 검고 둥근 눈동자, 몸집이 작고  유연해야 한다. 

 

다섯째,
나이를 기준으로 하여 노기, 추기로 구분된다.

 

여섯째, 경영 방식에 따라 좌기와  유기로 구분된
다.

 

일곱째, 정치 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공기와 사기로 구분된다. 여덟째,  개인 재산 정도에 따라 부귀와 빈기로 구분된다. 이  밖에도 기녀의  조직형태, 질병 여부 등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1) 가기
  가기란 가정에서 양성한 기녀를 말한다.  가기를 양성하는 풍조는 한대에 시작되여  남북조 때 번성했다. 그녀들은 그 시대 가무 예물의 대표자이며, 통치 계급의 수요에 부합하기 위해 엄격한 훈련을 받아 훌륭한 문화적 소양을 쌓았다.
  중국 고대 가기의 출현은 비교적 복잡하다. 처음에는 '가기'로 시작하여,  '무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또 '궁기', '관기', '시기', '사기'로 발전하여 사회 생활 속으로 광범위하에 파고들었다. '가기'는 하걸이 양성한  여락, 창우 3만 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는데, 이들이 '노예 창기'이다. 이후 이런 기풍은 성행하여, 위로는 천자와  왕후 장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대부나 부호들에 이르기까지 여자 노예를 양성하여 즐겼으며, 그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권세와 재산 정도를 나타냈다. 이러한 여자 노예는 몸과 재능을 모두 바쳤다.  가기는 대부분 노래와 춤이 뛰어나고 미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락'이라고도 부른다. 이 밖에도 시희, 소첩, 성기, 가희, 무희, 미인, 창기 등으로 세분되고 있다. 황제의 가기에 대해서는  후세에 '어기', '궁기'라고 부른다. 서주는 노예 제도가 매운 번성한 사회로 여자 노예를 양성하는 기풍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에, '가기'는 서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가기의 탄생 원인은 우선, 정치적 불안과 성 도덕의 문란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왕이나 제후 등 지배층 인사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개최하는 연회나 자신의 음탕함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무하는 여자들을 두었다. 이 여자들이 가기이며, '여락'이라고도 한다. 그 당시는  외모가 빼어난 가기들을 다른 나라의 제후들에게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또 사고 파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기의 구성원은 대부분 여자 노예 중 가무에 탁월한 자나 전쟁 포로로 잡힌  여자 등이었다. 또한 훗날 관기의 효시가 된다.
  하상 시기, 제후 사대부들 소유의 노예 기녀에 관한 기록은 적지만, 갑골문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약간은 살펴볼 수 있다. 안양은 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의 '해', '라', '폐'등의 문자는 노예 기녀와 관련이 있다. 가령 '첩'자는  갑골문에서 여자 노예를 뜻하고, '라'는  가기를 가리킨다.
이 밖에 상조 여성 포로와 노예 중의 강,  희, 진, 폐 등도 대부분 노예의 주인인  귀족의 '침상 노예'가 되거나 혹은 가기가 되었다.
  춘추 전국 시기 군주는 대부분 극도로 황음무도하였다. 그들은 다처의 특권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또 수많은 관기를 차지하고 음락을 즐겼으므로 다음과 같은 말조차 있었다.
  사방 열 자의 음식상과 시첩 수백 명을 내가 뜻을 얻더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군주는 사사로이 축적하여 큰 나라는 수천 명의 여자를 소유하고  있고, 작은 나라는 수백 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위완이 주연을 열었을 때, "초나라 여자가 앞에서 춤을 추고, 오나라 여자는 뒤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월나라 여자는 왼쪽에서 금실을 타고, 진나라 여자는 뒤에서  쟁을 탔다"는 기록도 있다.
  진한 시기 귀족 사대부들의 가기  양성 기풍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통치자들이  음란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색에 탐닉한 기록은 비일비재하다. 가령 [한서, 원황후전]에서는  "다섯 명의 제후 형제가 사치를 다투었다... 후원에는 희첩이 각기 수십 명이고, 어린  노예가 천여 명이며, 악기를 늘어놓고, 정나라 여자가 춤을 추며, 광대가 있고, 개와 말이  좇는다"라고 했다. 사실 제후나 사대부들의 집에 있는 기녀의 수 또한 국왕에 버금가지 않았다.  "제후의 처첩은 수백 명까지 이르렀고, 부유한 관리나 백성들은 가기 수십 명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가 많고 밖으로는 홀아비가 많았다." 가령 위나라 대부 공량환자의 집에는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은 부녀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고," 월나라 평원군의 비첩과 기녀 또한  수백 명이나 되었으며, 한무제 때의 무안후 전분도 백여 명의 여자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가기들은 주인의 오락과 성욕을 발설하는 도구로 신체상의 어떠한 자유도 없었으며, 생사 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었다. 또한 그들은 첩과 다르다. 가기들은 주인에게  가무와 악곡으로 봉사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방면의 훈련을 해야 하며, 또 성을 제공하는 일까지 해야 한다. 때문에 진
왕조 때 은중문이라는 자가 송무에게 기녀를 양성할 것을 권하자, 송무는 "나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자신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가기를 기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첩은 가무와 같은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고, 예술적 재능을 지니지  않아도 되며,
오직 주인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면 되었다. 또 가기의 지위는 첩에 비해 낮았다. 그리고 가기의 물질적인 생활은 일반 평민보다 좋았다. 관료, 지주, 부호들은 가와  첩을 많이 소유하여 자신의 권세와 재력을 과시했으며, 또 이 가기들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훌륭한 음식을 제공함으로
써 자신의 지위와 사치스러움을 드러냈다. 결국 이런 가기는 고급장식품,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가기의 성행은 위진 남북조 시기에 이르러서이다. 귀족 사대부와 지방 호족이나  재력 있는 사인들 사이에서 가기 양성 기풍이 성행했다.  이 당시 가기는 권력이나 재력의 상징물  중 하나였다. 귀족들이 소유한 가의 수는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 개인이 소유한 가기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가의 정치에 미치는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그래서 북위의 선무제는 가기 제도를 엄격하게 세워 관원들의 방탕한 생활을 절제하도록 요구했고, 남조의 소제는 황문랑에 오르지 못한 자는 가기를 갖지 못하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기 양성 기풍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당대 관료 귀족이 가기를 양성하는 수와 규모에 대해서는 정부가 관원의 급에 따라 명확히 규정하였다.) 더욱이 민간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 가령 예장의 풍속은 자못 오나라와 비슷하여, 군자는 방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소인은 열심히 경작을 한다. 관을 쓴 사
람은 대부분 몇 명의 부인이 있어 저자의 상점에 얼굴을 내미니, 결국 얼마 안되는 이익은 그 남자에게 준다. 효렴을 천거하여 더욱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전처가 비록 몇해  동안 성실하여 자녀가 방안에 가득할지라도 쫓겨나니, 후대 사람들은 피하시오라고 했다.
  송대는 음욕이 흐르던 시대이다. 이 시기  통치자 및 군력자들은 향락 주의를  지향했다. 개국 황제 조광윤은 신하들에게 많은 재력을 쌓아 즐기도록 하였고, 인종, 진종 등도 여색을 즐기도록 권유했다. 이로 인해 관료나 사대부들이 양성하던 가기 기풍이 보편화되고 대중화되었다. 가기의
수는 재력 여하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더욱이 송대에는 승려까지도 가기를  거느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2) 관기
  권세가의 통제를 받던 '가기'는 점점 변하여 '관기'가 되었다. 관기는 지방  관청에 소속된 기녀를 말한다. 관기는 지방 장관에게  오락을 제공하고 관청에서 거행하는 각종  연회에서 가무와 음악 등을 제공하여쓴데, 동침하지는 않았다. 관기는 또 공기, 관노, 관류, 부기, 현기 등으로도
불렸다. 관기는 하왕조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열녀전, 하걸말회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걸왕은 예와 의를 버리고 부인들과  사통했고 미녀들을 구하여 후궁을 채웠다.  배우와 광대와 악사들, 그리고 색다른 신기한 놀이를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곁에 두고, 직접 요란스럽고 음란한 음악을 만들어 밤낮으로 말희와 함께 궁녀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며 이것을  멈추는 날이 없었
다. 말희를 무릎 위에 앉히고 그녀의 말은 무엇이나 들어주었으며 혼미하고  어지럽게 굴어 인륜의 도를 잃었다. 또 교만하고 사치스러움이 끝이 없고, 술로 만든 연못에 배를  띄웠다. 한번 북을  치면 이 소리에 따라 소처럼 엎드려서 술을 마시는 자가 3천 명이었는데, 그들의  머리에 굴
레를 씌워 연못의 술을 엎드려서 소가  물을 먹듯이 마시도록 하였다. 술을 마시다가  너무 취해 고꾸라져 죽는 자가 있으면 말희는 그것을 보고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즐거움으로 삼았다.
  상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 또한 호색가이며 음란한 폭군이었다. [사기, 은본기]에 의하면, 그는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여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사연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하게 하고, 북리에서 추는 것 같은 저속
한 춤과 음탕하고 퇴폐적인 가락을 새로 만들도록 하였다. 또한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녹대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를 곡식으로 채우게 하였다.  게다가 여기 저기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물을 수집하여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의 원대를 크게 확장하여 여러 가지  야수와 새들을 잡아다가
이곳에 풀어놓았다. 주는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또한 사구에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들
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처럼 고기를 매달아 고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 술을 마시며 놀았다.
  관기는 당대에는 '관사 부인', '관사 여자', '관노'등으로 불렸다. 당나라 초  각 지방 관청에서는 일정 수준을 갖춘 관기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다. 중당 시기에는 지방  관기가 비교적 보편화되었으며, 심지어 현급에서도 관기를 두었다. 관기는 만당 시기에 더욱  흥성했다. 송대에 들어서면서 관기는 영기와 더불어 상품화되었는데, 이것은 송대 도시 경제의 번영과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

  (3) 사기
  사기란 사사롭게 육체를 파는 여성들로서 일반적으로 매춘녀와 다를바 없었다.  그녀들은 가기와 달리 어떤 관료나 지주 혹은 부호에게 전속되어 있지 않았으며, 개별 혹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몸을 팔지 않았고, 병사들만을 위해 종사하지도 않았으며, 사회의 모든 남자를 대상으로 하
였다. 그녀들 중 절대 다수가 수준 높은 가무나 기예를 이용하여 남자의 환심을  얻는 일도 없었고, 이러한 훈련도 받지도 않았다. 일반 남자들 또한 그녀들에게 많은 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주로 남자들의 성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이 사기에도  고, 중, 저의 구분이 있었다. 고급 기녀는 미색과 예능을 겸하여 문화적 소양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사고가 민첩하며, 심지어 훌륭한 가기보다 뛰어난 이도 있었다. 그녀들은 주로 몇몇 상유층 인사들만 상대했다. 사기는 춘추 전국 시기에 이미 출현하였다. [사기, 화식열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중산은 땅이 척박하고 인구가 많은데다, 주왕이 음란한 짓을 저지른 사구  일대에는 아직도 은나라 후예가 남아 있어, 백성의 성격은  조급하고 투기에 능하며 이익을 보는 것으로  먹고 살았다. 사내들은 함께 어울려 희롱하고 놀며, 슬픈 노래를 불러 울분을  터뜨리고, 움직였다하면 패를 지어 사람을 때리거나 약탈하고, 쉴 때에는 도굴을 하여 교묘한 위조품을 만들고 간악한 짓을 일삼았으며, 잘생긴 사람은 배우가 되기도 하였다. 여자들은 거문고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신발을 질질 끌고 곳곳을 찾아다니며 부귀한 사람에게 아부하여 첩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이들
은 각 제후국에 두루 퍼져 있었다. 그리고 조나라와 정나라의 미인들은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긴 소매를 나부끼고 경쾌한 발놀림으로 춤을 추어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유혹했다. 그들은 재물을 위해서라면 천리 길도 멀다 않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
다.
  이러한 사기의 출현은 공식적인 창가 혹은 창루를 낳았다. 이 창가는 경제 상황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즐기고 싶어도 창기를 소유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고, 부유하지만 창기의 소유를 지배층의 특권으로 인식하여 창기를 갖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게다가 급격한 사회 변화로 중산 계층
과 농민 가족이 해체됨에 따라 많은 수의 여성들이 직업을 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개인이 경영하는 창가가 생겨난 것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기녀들의 춤과 노래를 즐기며 먹고 마시고 밤을 지새웠다. 이 시기는 상업  경제가 초보적인 발전 단계에 있으며 도시  문화의 발전이 완만하기 때문에 가기는 상류층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나, 시장의 상업 종사자들에게는 보편적인 것이 못되었다. 오직 육조 시기에 이르러 가장 번화지였던 강남  일대의 성시에서만 사기가 활약했다. 이런 상황에 관해서는 [옥대신영]과 [악부시집]의 몇몇 시에  반영되어 있다. 가령 [양양락]의 "아침에 양양성을 출발하여/ 저녁에 대제의 숙소에 이르렀다/ 대제의 수많은 여인/ 아름다움은 사나이의 눈을 놀라게 한다"고 노래했는데, 이것은 당시 이  지역에 사기가 성행했음을 반영한다.([석성락]은 당시 떠돌이 나그네가 성행했으며, 기녀들은 잠시의 틈도  없이 접대했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야도랑]의 시구는 그 당시 관료, 귀족에게도 기가  있으며, 심지어 황제조차도 기녀의 집에 머무는 일이 있었음을 반영한다)
  그 당시 사기는 장강 일대의 성시에서 비교적 발달했다. 개별 이름의 기녀가 처음 출현했으며, 후세까지 전해졌는데, 남송, 남제 때의 요옥경과 소소소가 그들이다.

  (4) 영기
  영기는 군기라고도 하며 군영에 설치한 기녀로서 주로 병사들에게 성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당송 이후로는 대외 영업을 하고  항상 문관을 접대했다. 특히 육조 시대의  영기와 가기는 모두 노예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기는 춘추말, 전국 초에 이미 출현했지만, 영기 제도의 정식 확립은  한대에 이루어졌다. 이렇듯 영기의 원류는 이 시기에 이미 갖추어졌다. [월절서], [오월춘추]등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470년경 월왕 구천은 산 정상에서 지나가는 과부를 만나게 되자, 여성을 그리워하는 군사들에
게 성을 제공하도록 하여 사기를 증진시켰다. 이러한 일은 임시 방편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중국 영기 제도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정자통]에 인용된 [한무제 외사]에서는 "한무제가 처음으로 영기를 설치하여 아내가 없는 군사를 모시도록 했다"고 했다. 한무제는
재능 있고 공을 좋아하는 황제였다. 그는 해마다 원정을 나가 병사들을 자주 일으켰기 때문에 군심을 안정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이 중요한 문제였다. 영기는 바로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였다.
  한왕조 때 영기가 정식으로 세워지기 전에는  부녀자를 군영과 억지로 짝을 지어  주는 제도가 있었다. 한나라 장수 이릉은 군대를 이끌고 관동으로 나갔다가 몇몇 강도의  아내를 진영으로 압송해 와 병사들의 아내로 주었다. 물론 이 여자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수레  속에 던져 놓고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일을 마친 후에 목을 베었다. 이런 '억배'제는 당시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었으며, 게다가 사병의 수는 많고 부녀자는 적었으므로 여자를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때문에 통치자들은 영기를 두어 병사들이 공동으로 향유하고 성욕을 발설
하도록 했다.
  위진 남북 시기 기녀의 중요한 연원 중 하나는 군대의 포로이다. 삼국간의  싸움, 오호 십육국의 황하 유역 패권 다툼은 중국 역사상 종족의 대변동, 이동 시기였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왕이 되었지만, 패하면 포로가 되었으며,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들은 '잡호', '영호'가 되어 대대로 세습이 되었다. 북제 후주 무편 7년 3월, 잡호의 여자로 20세 이하 14세 이상의  결혼을 하지 않은 자를 모두 성에 모아 기녀로 만들었다. 둘째는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이 도둑질을  하면 그 집안의 여자는 기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진조의 범견이라는 자가 죽을 죄를 짓자, 그의 딸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관기가 되었다.  또 "양나라 제도에 의하면, 대역죄를 지은 자는 어머니, 아내, 자매 및 조카까지 연좌되며, 처의 자식과 첩의 딸은 똑같이 관의 노비가 된다. 도적질을 한 자의 처자식은 영기가 된다"고 했다.
  당대에는 영기가 군대 안의 낙영에 예속되었다는 점에서 '영적기', '낙영  기인', '낙영 자녀'라고도 불렀다. 영기는 군대의 '영서' 혹은 '낙영'안에서 거주하고 영장,  낙장의 관리하에 있기 때문에 임의로 외출하거나 다른 손님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
았다.

  (5) 시기
  춘추 시대 초 시기는 기원의 탄생과 더불어 중국 기녀사에 있어 큰 사건이다. 시기는 '상기'라고도 하며 일정한 대가를 받고 공개적으로 색을 파는 여자를 말한다.
  제나라 재상 관중이 '여려'를 설치했는데, '여'란 문이라는 뜻으로 당시 귀족들이 머물던 곳이다.그러므로 '여려'란 궁궐 안의 여자들을 거주할 수 있는 곳을 뜻하며, 국가에서 경영하는 기원의 시초이다. 기원이란 기녀들의 매음 장소를 말한다. 기원이라는 명칭 이외에 청루(기원의 문이
대부분 검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는 데서 불려짐), 구란(고대에는 배우가 연주를 하거나 재능을 펼치던 곳이었으나, 후에 기원의 통칭으로 변함), 화대, 수국, 행원등 그 수는 매우 많다.
  관중이 국가 기원을 만든 것은 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목적 때문이었는데,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i)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해 여시를 두어 남자의 돈을 거두어  관으로 보냈는데, 이것이 소위 후대의 화대인 것이다.

  ii) 성적 욕구를 발설할 곳이 없는  남자들로 하여금 고뇌하지 않도록 하는 한편  수많은 여자 노예로 하여금 안정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비자, 외저설]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하루는 환공이 미복 차림으로 민간을 지나게 되었다. 논문직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70인데도 아내가 업었다. 환공이 관중에게 '백성들 가운데 늙었는데도 아내가  없는 자가 있소?'라고 묻자, 관중이 '녹문직이라는 자는 70세인데 아내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환공이 '어찌하면 그가 아내를 얻게 하겠소?'라고 하자, 관중은  '신이 듣기로는 군주가 재물을쌓아  두면 백성들은 반드시 궁핍하게 되고, 궁궐 안에 원망하는 여자가 있으면 늙어도 아내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라고 했으며, 이에 환공은 '옳다'라고 했다.  그리고 궁궐에 명령하여 일찍이 임금은  성은을 입지 못한 여자는 출가하도록 하고, 또 남자는 20세가 되면 아내를 얻고, 여자는  15세가 되면 시집을 가도록 명령했다. 그러한즉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게 되었고, 밖으로는  아내를 얻지 못한 자가 없게 되었다.

  iii) 제후들이 유세가를 자기 사람으로 흡수하기 위한 것이다. 그 당시  제나라는 패로 칭하려고 하였으므로 인재와 유세가들을 등용해야만 했다. 유세가들은 대부분 방랑 생활을 하며 부녀자와 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기원을 설치하여 그들을 흡수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iv) 제후들에게 음락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가령 옛날 제나라 환공이 패왕이 되었을 때에는, 그는 조정의 일은 포숙에게 맡기고 조정 밖의 일은 관중에게 맡긴 후, 신발을  하고 부인을 태우고 매일 시장에서 노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제환공이 여색을 좋아했음을 말한다.
  관중은 기원을 창설한 이후, 다른 나라를 분열에 이르게 했고, 기녀를 이용하여 강국을 제압하기도 했다. 기녀의 힘이 십만 병력보다 컸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후대의 '미인계'와 같은 말은 여기에서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제나라 사람들은 공자가  노나라에서 관직을 맡고 있어 노나라가 부강해질 것이고, 그러면  자기 나라가 위협을 받게 될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때 이차라는 사람의 주장에 따라 80명의 미녀를 선발하여 무늬 있는 옷을 입혀 당락을 추게 했으며, 또 명마 30필을 노나라 군주에게 보냈다. 노나라 군주는 이에 탐닉하여  장기간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이 때문에 공자는 실망하여 노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또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와 수년에 걸쳐 전쟁을 하면서 병사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부녀자를 보내 위로했다. 이것은 관중의 '여려'의 변형된 모습니다.
  이후 상업의 번성과 도시의 흥기, 정전제의 파괴와 더불어 부녀자들 가운데  기녀가 되는 수가 나날이 증가했다. 그리고 전국 시기에는 금속 화폐가 통용되면서 사창이  만연되었다. 진한 시대 시기는 군사들을 위한 복무 이외에 몇몇 귀족 사대부 및 지방  호족들에게도 음락을 제공하였다.
어떤 시기는 재색을 겸비하고 있어 통치자의 각별한 총애를 받기도 했다.  가령 이연년의 여동생은 본래 중산 지역 출신의 기녀인데, 이연년이 한무제 앞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노래로써 칭찬한 것을 계기로 궁궐에 들어와 이부인이 되었다.
  시기는 위진 남북조 시대에 활약하기 시작했다. 가령 북방에는 벌써 영업을  하는 기녀가 출현했다. 그리고 남방의 도시에는 상업적인  매음 현상이 보편되기 시작했다.  당대에는 도시경제의 번영과 더불어 시기도 신속하게 발전하여 당대 기녀들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갖게 되었
다.(노조린의 [장안고의]에서 초당 시기 장안성의 시기의 생활을 생동감 있게  반영하였다. 성당 시기의 시기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복무 내용에 있어서도 집에서 손님을 맞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유명 인사들의 연회에 초청되어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원대의 시기는 복무 방식에 따라 양분할 수 있는데, 예술을 파는 구란기와 몸을  파는 평강기이다. 구란기는 주로 가무, 잡극 등의 활동에 종사하면서  미모로 사람들을 대했다. 반면 평강기는  기원, 다방, 술집, 여관 등에서 매춘 행위를 했다.

  (6) 궁기
  궁기는 궁궐에서는 가무를 제공하는 기녀로, '궁첩', '궁아'등으로도 불렸다. 궁기는 황가에서 거행하는 각종 연회나 행사에 출연하였고,  평상시에는 황제를 위해 여러 가지  오락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동침은 하지 않았다.
  궁기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크게  발달했다. 궁기는 진시황이 지은 여러  채의 궁궐에 기거하면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 당대 시인 두목은  [아방궁부]에서 당시 진시황과 궁기의 모습을 노래했다. 한대의 제왕들 또한 궁궐에 수만 명의 후궁을 두고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
  궁기는 위진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면서 점점 쇠약해졌다. 궁기의 쇠락이 봉건 통치자들의 음란한 생활의 청산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무절제한 생활은 더욱 심해  갔다. 위무제 조조는 "술을 대하고 노래하니. 인생이 얼마인가"라고 한 동시에 "기녀를 곁에 두고 언제나 저녁
까지 이르며," 방중술로 수명을 연장하기를 바랐다. 조조의 아들 조비 또한  나라의 미녀들을 모두 궁궐로 불러 모으는가 하면, 또 조조의 총애를 받던 첩마저도 자기에게 음락을 제공하도록 했다. 그리고 서촉의 후주 유선은 온종일  여색에 탐닉하여 멸망했고, 동오의 손호  또한 호색가로 수천 명의 미녀들과 밤낮으로 즐겼다. 진나라의 사마염은 정치적 역량은 뛰어났지만 생활은 방탕했다.
  수왕조는 단명한 왕조이지만, 궁기만큼은 가장 발달한 시대에 속했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수양제는 중국 고대 제왕 중에서도 가장 황음 모두한 군주였다. 수양제는 즉위한  후, 천하의 미녀를 선발하여 향유하려고 했다. 장안의 후궁에는  황후를 제외하고 3비, 9빈, 12첨,  15미인 재인, 24보림, 2어녀, 37채녀등 총 124명의 처첩을 두었으며, 또 궁녀 3, 4천 명을 두었다. 수양제는 이렇게 많은 미녀로도 자신의 색욕을 채우지 못해 동도 낙양궁에 5호,  16원을 설치하여 미녀들을 두었다.
  궁기는 당대에서 여전히 성행하였다. 당태종 즉위 초인 무덕 9년(626)년, 궁기의  수는 3천 명이었으나, 당현종때는 선제의 시녀가 8천 명, 추궁이 3천 명이나 되었다.
  당대의 궁기는 수나라 제도를 답습하였지만, 교방 제도를 실행하였다. 교방은  무덕 연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운소부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교방으로 회복되었다. 당현종 때, 장안의 내외 교방은 1만 1409명이나 되었다. 교방의 여자들간에도 재색의 차이에 따라  다른 등급으로 구분되었
다. 의춘원의 궁기가 특히  가장 높았으며, 그녀들은  언제나 황제앞에서 공연을 하였기  때문에 '내인' 혹은 '전두인'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교방의 일반 기녀는 '궁인'이라고 불렸으며, 그녀들은 대부분 평민 집안의 여자로 용모가 아름다워도 후궁이 되지 못했다.
  교방 이외에 궁궐 안에 설치한 이원에서도 예술적 재능과 미색을 겸비한  궁기를 모았다. 이곳의 궁기를 이원기라고 하며, 교방기가 가무 연출에 치중한 반면, 이들은 악기 연주에 치중했다.
  오대 십국의 국기 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계승하였지만, 전쟁과 통치 기간의  짧음으로 인해 그 규모와 수적인 면에서는 당대보다 작았다. 특히 궁기가 발달한 국가는 전촉, 후당, 남당이다.

    4. 기녀의 운명
  인간은 '혼'과 '백'이라는 두 가지 영혼을 가지고 있다. '혼'과 '백'은 무엇인가?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백이라 부르고, 이미 백이 생기고 양기에서 움직이면 혼이라 부른다. 사람의 정기를 혼이라 하고, 형체를 백이라 한다. '혼'은 정신적인 영이며, '백'은 육체적인 영으로, 전자가 죽어서도 후손들의 제사를 받는 영원한 존재라면, 후자는 죽은 후 시체가 썩을 때까지만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고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정기인 혼이 형체인 백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또  사람이 죽으면 혼을 불러 백에 되돌린 뒤에 땅에 매장해야  되며,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떠돌이  귀신이 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사체가 된 '백'을 가능한 오래도록 보존하려고 옥 같은  것들을 부장품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통치자가 죽으면 통치자의 도구나 노리개에 불과했던 여자들과 함께 매장시켜 사후 세계에서까지 그의 소유가 되도록 했다. 이것이 순장 제도이다.
  순장 제도는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사회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원시  사회 말기에서 계급 사회 초기에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하상 시기 노예의 주인인  귀족이 기녀를 순장시키는 일이 성행하였고, 후손들도 이들을 죽여 조상이나 신령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춘추 전국 시기 통치자들이 기녀를 순장하는 제도는 보편화되었다. 묵자는  "천자나 제후가 죽었을 경우에는 순사자의 수가 많으면 수백  명이요, 적으면 수십 명을 헤아리게  된다. 장군이나 대부 등 높은 벼슬아치들이 죽어도 순사자가  수십 명에서 못돼도 대여섯 명은  넘는다"고 했다.
순장되는 기녀는 대부분 통치자 생전에 총애를 받던 여자들이다.
  진대에 이르러 기녀의 순장 제도는 더욱 발전한다. "9월, 역산에  진시황을 안장하였다... 2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좇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여 명령을 내려서 모두 순장시켜 버리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처럼 진시황의 후궁은 처첩 이외에도 수만 명의 여락가 궁기가 있었으며, 때문에 순장에 있어서도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봉건제의 탄생과 더불어 이러한 순장 제도에 불만의 소리가 높아  갔다. 기원전 621년, 진목공이 죽은 후 177명을 순장하자, "나라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황조]를 지었다." 또 '결초보은'고사도 이런 순장을 반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사는 [춘추좌씨전, 선공 15년]에 나
온다.
  춘추 시대에 진나라에 위무자란 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애첩이 하나  있었다. 위무자는 병에 걸린 지 얼마 안되어 아들 과에게 '내가 죽거든 내가 아끼던 첩을  개가시키도록 하거라'라고 했다. 그러나 병이 아주 위독해지자, 위무자는 다시 과를 불러 '내가 죽으면 내 첩도 순장시키도록
해라'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위무자는 죽었다. 그러나 과는 서모를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시켰다.
  얼마 후, 진 환공이 역사 두회를 앞세워 진나라를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과는 참패했고, 목숨마저 위태롭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과가 두회를 피해 있는 힘껏 도망치는데, 갑자기 뒤쫓아오던 두회가 풀밭에 쓰러졌다. 과는 달려가 두회를 붙잡고는 그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풀들이 모두 엮어져 있었다. 두회는 바로 이  풀 때문에 넘어진 것이었다. 그날 밤  과의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당신이 개가시켜 준 여자의 아비가 되는 사람이오.  그대가 선친의 유언을 제대로 따랐기 때문에 죽을 뻔하던 내 딸리 살았소.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렇게 한 것이고'라고 했다.
  이 시기 처첩, 자녀, 기녀[노예]는  주인의 사유 재산이자 도구에 불과했다.  주인이 사후에도 이들을 거느리고 싶어하면 생순(산채로 매장하는 것)하거나 살순(죽여 매장하는 것)했다. 순장의 규모는 죽은 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차이를 보였는데, "천자의 순장에는 많게는 수백 명, 적게
는 수 십명 동원됐으며, 장군이나  대부의 순장에는 많게는 수십  명, 적게는 몇 명만을  동반했다."
  이후로 노예나 여자를 대신하여 나무나 진흙 혹은 금속 등으로 만든 인형을 부장품으로 이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산사람을 순장하는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
2세 황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후궁과 장인을 순장시키는 일이 있었고,  또 명태조 주원장이 죽은 후 40명의 비빈과 궁녀를 순장하였다.
  기녀들은 영기, 가기, 사기를 막론하고 대다수가 비참한 삶을 살았다. 어떠한 기녀들은 부유한 탕자의 첩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버림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푸르고  푸른 방죽의 끝]이라는 시는 버림받은 창가 출신 여자의 한을 노래하고있다.

  방죽의 풀은 푸르디 푸르고
  정원의 버들은 울창하기 그지없네
  젊고 젊은 2층의 여자
  창으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내비치네
  붉게 화장한 두 뺨이 아름다운데
  앞으로 내민 흰 손은 가냘프다
  에전에는 창가의 가희였건만
  이제는 탕자의 아내가 되었네
  지아비는 떠난 후 돌아오지 않으니
  빈 침상에서 홀로 지새우기 어렵다

  이 시는 고시로서 봄날에 남자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이부인,  조비연 등과 같은 극소수의 아름다운 기녀들은 귀속  계층으로 진입하여 부귀 영화를 누렸다.  기녀들의 신분 상승 조건은 우선 미모로 황제나 대관,  귀족들의 총애를 받아야 하고, 둘째는  수완을 발휘하여 환심을 사야 하며, 셋째는 아들이 있어야 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불가능했다. 이 부인은 이 점을 정확히 간파하여 한무제에게 "저는 아름다운 용모때문에 미천한 신분임에도 황상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로 사람을 섬기는 자는 그 미색이 쇠하면 애정이 줄어
들고, 애정이 줄면 은혜가 끊기게 됩니다"라고 했다.
  진나라 때 한단의 희(진시황의 어머니), 조위의 변황후(조비의 어머니) 등은 아들이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끝까지 지위가 유지됐다. 그러나 조비연의 경우는 성제에 의해  황후가 되었지만 아들이 없어, 평제 즉위후에는 다시 서인이 되어, 최후에는 자살을 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양한 시대부터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남북조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불교의 절은 산속에 있으며, 많은 수의 남자를 중으로 만르었을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비구니로 만들었다. 그때는 또 도교가 발전하여 여자들이 여자 도사가 되기도 했다. 비구니 혹은 여자 도사가 되면 어느 정도의 생활은 보장되었다. 때문에 이것은 기녀들의 귀착점이 되기도 하였다. 기녀가 비구니가 되고 여자 도사가 되었다고 하여 생활  보장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당시 비구니는 종교적인 가무 활동을 거행하여 신과 인간을 즐겁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에서는 기녀의 장점을 발휘하도록 했다.

 

출처: (네이버) 도덕사랑카페

출처 : 오토바이같이 달려가는 내인생...
글쓴이 : 묵언하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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