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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눈"

돈과 나

여행가/허기성 2009. 9. 12. 14:57

 

돈과 나

자본주의에서 부의 추구는 지상 명령이다. 그리고 그 표현 형태인 돈은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뭐니뭐니 해도 그 매력의 핵심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나에게 돈은 단지 편리한 생활도구 즉 일용품의 구매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편리함에도 한계가 있으니 내 통장은 '화수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장의 잔고에 따라 구매력이 좌우된다. 통장의 숫자가 나의 구매 욕망을 통제하는 주인인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돈은 단순한 구매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이윤을 창출하는 화폐 즉 자본이다. 자본으로 전화된 화폐는 '화수분'이 된다. 그래서 자본가의 욕망은 통장 잔고를 벗어난다. 빚보다 이윤이 더 크다는 확신이 있다면 기업가의 모험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모험의 성공은 신화가 되고, 그 결과 큰 '화수분'이 만들어지면 사회적 권력이 된다

돈과는 인연이 없는 팔자이지만 통장에 1만 원이 남았어도, 100억 원이 있다는 가정을 자주한다. 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물론 100억 원이 있다는 가정 아래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보면 내가 현재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신문에 매일 보도되는 경제 현상을 조금 더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금리가 연1%가 높아졌다는 기사에 통 눈이 가지 않는 이유는 내 통장 잔액 때문이다. 그러나 100억 원이 있다고 가정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1년에 1억을 이자로 준다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작은 뉴스가 빅뉴스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문제점은 그 이해의 즐거움에만 만족하는 것이다.

거시 경제지표뿐만 아니라 재테크 얘기도 재미있게 들여다보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한다. 천성이 게으른 탓도 있지만 100억 원처럼 많은 돈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장 잔고와 욕망의 반비례 운동에 만족하며 산다.

네버엔딩 스토리!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개인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사태는 금융자본과 화폐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했다. 금융자본의 자유화와 세계화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가졌지만, 몇몇 신자유주의 비판서를 읽는 것에 만족했다. 전공과의 거리 때문에 체계적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조그만 사건을 조사하다 엄청난 배후를 밝혀내는 수사추리물 영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졌다. 저금리와 주택 가격 상승이란 조건에서 주택담보금융회사들의 경쟁과 탐욕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 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을 남발하게 된다. 만약 이 채권만 부실화되었다면 작은 에피소드였을 것이다.

비우량 담보 대출에 대한 채권을 사들인 대형 투자은행은 그것을 기초 자산으로 유동화증권을 만들어 고수익을 노리는 헤지펀드 등에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우량 채권과 비우량 채권을 섞는 상술이 발휘되고, 파생상품들은 유동 자산시장을 뻥튀기한다. 부풀어 오른 풍선이 언젠가는 터지듯이, 금리가 오르고 부동산 경기가 꺼지자 주택담보금융회사의 부실을 시작으로 그 파생상품에 투자했던 헤지펀드, 보험회사, 투자은행 등이 줄줄이 파산 신청을 하게 된다.

이번에도 시장이 불을 냈고 국가는 소방수 역할을 했다. G20 정상들은 2008년 11월 워싱턴에 모여 금융 감독의 강화와 경기 부양을 위해 노력한다고 합의했다. 저금리 정책과 재정 지출 확대로 급속한 신용 경색 및 경기 하락을 방지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 와중에 얼마나 급했는지 금융 자유화의 전도사라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뒤로 하고 미국 5대 투자회사 중 하나는 파산시켰고, 둘은 국유화해버렸다.

2009년 1월 다보스 포럼이나 4월 G20 정상회의의 공통적 화두는 금융 규제와 감독의 강화였다. 고든 브라운 영국총리의 경우 2009년 3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신념은 종말을 맞이했으며 강력한 금융 규제의 도입을 주장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2009년 8월 1조6000억 달러가 넘어섰다는 손실 규모뿐만 아니라 금융 부실이 전파되는 속도와 범위에서 파생상품과 헤지펀드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2008년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가져온 공포 때문에 여러 위기설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대외 의존도가 높고, 금융시장의 개방도가 높다는 점이 성장 동력보다는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라는 평가 때문이었다. 급격하게 몸 부풀리기를 한 금융기관의 부실 문제를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급격한 환율 변화에 따른 외환 위기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에 걸린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미국발 금융 위기가 어떤 형태이든 한국 경제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가정 아래 다양한 위기설이 회자되었다. 당시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 중 하나는 'IMF 사태'라는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IMF 사태'의 교훈은 금융 위기가 우리 경제를 빗겨가는 법이 없으며, 그 영향력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희극적 사태가 소위 '미네르바 사건'이다. 정부의 발표보다 인터넷 논객의 주장에 시장이 더 뜨겁게 반응하자 검찰은 기소해버렸다.

현재 각 국가의 저금리 정책과 재정 지출 확대로 급한 불은 끈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유동성 과잉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박 때문인지 '출구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주장과 다시 위기에 빠질지 모른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전문가들의 주장이 엇갈리니 나도 누구의 장단에 춤을 춰야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보면서 유동성 과잉에 따른 '출구 전략'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대한 출구전략을 세워야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로 보이는 별빛은 네 개의 빛나는 별

▲ <화폐, 마법의 사중주>(고병권 지음, 그린비 펴냄) ⓒ프레시안
의문을 풀기 위해 이런 저런 책을 검토하던 중 고병권의 <화폐, 마법의 사중주>(고병권 지음, 그린비 펴냄)가 눈에 들어왔다. 화폐라는 제목도 눈에 들어왔지만, 고병권이란 이름이 더 손길을 끌었다. 재테크에 대한 책은 분명 아닐 테고, 현 금융 위기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겠지만, 화폐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시야를 보여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읽었다.

저자는 화폐가 자연적 사물이 아니라 역사적 관계의 산물이라고 전제한다. 따라서 질문은 화폐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산출되었느냐가 된다. 화폐를 구성체(formation)로 이해하자는 제안이다. 비유하자면 이순신 장군이 누구냐가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맥락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다. 저자는 화폐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서양 근대에 등장했는지 보여준다. 화폐가 '마법의 사중주'의 사중주인 이유는 근대의 시장(경제적 차원), 국가(정치적 차원), 사회(인간관계의 차원), 과학(인식적 차원) 등의 복합적 형성의 계기를 갖기 때문이다.

본문의 스토리를 한마디로 비유하면 마을을 떠도는 석양의 건맨이 무슨 사연으로 결혼해서 정착하게 되었느냐이다. 중세 말기 대외 교역과 환어음을 거래하던 화폐 거래 네트워크가 어떻게 '이방인'의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화폐의 주인이 어떻게 베니스의 상인에서 잉글랜드 은행장으로 되었느냐는 이야기다.

중세로부터 근대로 넘어왔고 그 인과적 서술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탄생을 경제의 자연사적 필연성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 이행의 필연성에 네 가지 마디를 엮어 놓는다. 우리 눈에 하나로 보이는 저 별빛은 네 개의 별빛이라는 것이다. 우선 대외 무역을 담당했던 은행가들은 중세 경제의 중심축에서 떨어진 섬이었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석양의 건맨과 국가의 운명적 만남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석양의 건맨은 대외 무역과 환어음을 담당했던 화폐 거래 네트워크다. 15~6세기 상법은 사업을 수행한 나라의 화폐로만 값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대외 교역에서 환전 문제가 어려운 과제였다고 한다. 오늘날 달러가 가치 척도의 통일성을 부여하지만 당시에는 통일된 가치 척도가 없었기 때문에 환전하는 기술은 일종의 가보였다.

통분을 거쳐야 계산되는 분수 문제로 비유할 수 있겠다. 달러라는 공통 분모가 없었기 때문에 각 화폐의 교환 비율을 일일이 계산했다는 얘기다. 놀라운 계산 능력과 그것을 실행할 네트워크를 가진 그들이 이방인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대외 무역을 담당해서가 아니라 그 화폐 거래 네트워크가 공동체 내부(domestic area)의 밖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화폐 경제가 중세의 공동체 경제를 파괴한다는 생각과 화폐에 대한 물신성이 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신념 때문에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가치 척도를 하는 금과 은이 서유럽에 도입되면서 그들의 가보는 더 이상 비밀스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계산을 금과 은이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외적 화폐 네트워크는 17~8세기 국민 국가 형성과 함께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계기는 왕조전쟁, 궁정의 사치, 관료제의 발달의 악순환으로 이어진 '영토국가'의 화폐 거래 네트워크 포섭이다. '영토국가'는 자신의 유지 비용을 공채와 조세를 통해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공채 즉 국가의 채무는 공공은행의 필요성이 부각되었고, 조세의 효율성을 위한 화폐의 필요성도 부각되었다. 그 결과 중심축이 대외 무역을 담당했던 화폐 거래 네트워크에서 '영토국가' 내의 화폐 거래 네트워크로 포섭되었다.

이렇게 포섭된 화폐 거래 네트워크는 화폐주권의 확립과 중앙은행 제도를 통해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전화된다. 저자는 이 과정을 영국의 중앙은행의 성립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저자는 석양의 건맨이었던 화폐 거래 네트워크가 국가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근대적 형태의 자본 관계로 정착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에두아르도 윌의 주장이 재미있다. "화폐를 '일반화된 등가물'로 만든 것은 상업적 교환이 아니라 조세라는 주장"은 화폐가 시장 교환을 통해 발생한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오늘날에도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중요한 논쟁거리다. 브뤼노프가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을 화폐와 노동(시장)에 근거지우는 것처럼, 근대 화폐경제의 탄생 과정을 국가의 탄생 과정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맑스도 <자본론>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에서 자본 공식 안에 있어야 하지만 자본 공식 밖에서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화폐와 노동의 특수성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어쨌든 여기서 주목할 점은 화폐경제의 정착에는 초기 자본주의부터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폐관계의 힘! 공동체의 해체와 이식

외곽순환도로를 도는 순환버스였던 화폐 거래 네트워크가 국가를 매개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시내버스가 되자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저자는 화폐가 인간의 공동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는 통념에 맞서, 근대 화폐가 특정한 종류의 공동체이며 과거 공동체의 발전이 아닌 해체를 통해서 성립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스미스를 비롯하여 화폐가 교환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통념 즉 원자화된 교환 모델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모스의 <증여론>에 따르면, 교환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씨족, 부족, 가족 등의 공동체였으며, 교환의 목적은 공동체의 유대 강화 혹은 질서 유지였다. 즉 교환이란 증여-답례의 메커니즘이며, 화폐는 그 메커니즘의 상징물이다.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에 따르면, 각 공동체들의 목표는 '자급자족의 이상'을 구현하고 '잉여의 형성을 방지'하는 것이다. 다만 전쟁이 동맹의 필요성을 낳고 그 수단이 증여라는 교환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 공동체 안에서는 화폐 공동체가 등장할 수 없다. 화폐 공동체는 기존의 공동체를 해체하면서 자신을 이식한다.

인간의 새로운 결합 원리로서 '계약'(교환), 결합의 주체로서 '개인'(부르주아지), 결합의 목적으로서 '이익'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의 공적영역(polis)와 사적영역(oikos)의 구별은 사라지고,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을 잠식하고, 사적영역의 총체가 공적영역을 대체하게 된다. 여기서 초점은 화폐 관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화폐의 변신 : 거울, 혈액, 생물

마지막으로 인식체계로서 화폐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다룬다.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에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다.

특히 근대의 화폐론을 3단계로 나눠 거울, 혈액, 생물의 이미지로 비유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근대 화폐론은 대체로 화폐와 부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집중되었다. 화폐는 16세기에는 그 자체로 부이면서 부의 척도로 간주되었고(거울), 17~18세기에는 부의 표상으로 간주되었으며(혈액), 19세기에는 부의 생산수단으로 강조되었다(생물)"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생물학이 분류학에서 세포학으로 발전해나간 것과 유사하다.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근대 자본주의의 완성은 결국 화폐가 단순히 부의 표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산수단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화폐 거래 네트워크가 정치, 경제, 사회를 관통해가는 힘의 반영이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이상의 분석을 통하여 저자는 근대 화폐의 의미를 상품, 권력, 관계, 부로 결론짓는다. 부로 표현되는 화폐는 시장을 통해서 상품으로, 국가를 통해서 명령이나 권력으로, 사회를 통해서 인간 관계를 생성시키거나 확장하는 힘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저자의 결론은 고대 영웅이 모험을 통해서 등장하듯이 화폐도 네 개의 '모험'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이 화폐라는 영웅의 캐릭터를 형성한다.

막차 타고 떠나는 기분

들어올 때와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고, 한숨 돌린 각 나라들이 약속대로 금융자본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낼지 의문이다. 하긴 현실을 인식하기도 힘들지만 안다 하더라도 실천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달러가 휴지 조각이 될 때까지 금융자본의 자유화와 세계화는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위기와 충격이 올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대외 의존도와 금융 개방화가 심한 우리나라의 경우 그 위기와 충격에 항상 시달릴 것이라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심장부에서 금융자본의 규제와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노력을 모색할 때 우리는 금융-산업 분리, 산업은행 민영화, 방송을 비롯한 공공기관의 민영화, 감세 정책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혹시 막차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은 지울 수 없다. 이 의문 또한 '마법의 사중주'처럼 정치, 경제, 사회, 인식의 각 지평이 가진 이행의 계기 속에서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