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기업구조조정 적임자 vs 전력 화려한 변신의 귀재
최근 재계, 특히 자동차산업과 금융계에선 한 인물을 주목하고 있다. 사모펀드인 서울인베스트의 박윤배 대표. 그가 법정관리 상태인 쌍용자동차를 살리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투자금 6000억원을 모아 내년 초 쌍용차를 인수한 뒤 3년 안에 확실한 회생 징후를 보여 주고, 5년 안에 실제 성과를 내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지난 1일 국립국악원 주최로 임원들과 공장 노동자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사 화합을 다짐하는 국악 공연이 열리고 있다. 경찰이 농성 노조원 진압을 위해 진입할 당시 깨진 쌍용차 본관 유리창을 통해 내다본 모습이 이채롭다. <김정근 기자>
정부조차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있는 쌍용차 인수에 도전한 그의 '야심'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사실 '화려한 전력'이다. 1957년생, 고졸 출신 노동운동가로 징역살이를 두 번이나 한 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노사문제 자문역으로 변신했던 그는 이후 대통령자문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과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을 거쳐 2002년에 서울인베스트를 설립해 그룹 구조조정 전문가로 나섰다. 이러한 경력 탓에 그에 대해서는 "노·사·정을 모두 거친 기업구조조정 적임자"라는 평가와 "현장 출신을 충분히 활용해 자신의 입지를 세운 변신의 귀재"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쌍용차 인수의 5부 능선은 넘었다"는 그를 여의도 개인사무실에서 만났다.
"인수자금 절반인 1500억 투자 확정"
왜 쌍용차를 인수하려 하나. 회생시킬 자신이 있는가.
"쌍용차는 크게 봐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망했다. 하나는 상하이차의 경영 실패이고, 또 하나는 노사관계 악화이다. 이 부분이 사업구조조정과 기업회생 전문인 우리 회사의 비전과 맞아떨어진다. 회생 가능성은 높다. 그 근거는 첫째 악화된 노사관계 회복은 우리가 책임지면 되고, 30여 년 자동차 제조에 매달려 온 전문 기술이 살아 있다. 자금력이 문제이다. 이 또한 이번 펀딩으로 충당할 수 있다. 우리는 3년 안에 뚜렷한 회복 징후를 만들 수 있고, 5년 뒤엔 확실한 결실을 내올 수 있다고 판단한다."
박윤배 대표는 지난 9월22일 쌍용차의 고위 임원을 만나 "기관투자가 모집을 통해 6000억원 가량의 자금을 모아 쌍용차를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현재 쌍용차 측엔 서울인베스트 외에도 해외 기업 2, 3곳이 인수 의사를 타진한 상태다. 쌍용차 인수금액은 신주발행을 50% 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3000억원 정도라는 게 박 대표의 진단이다. 인수자가 없으면 가격은 더 떨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떤 사람들이 쌍용차 인수에 관심이 있나.
"그동안 200~300명을 만났다. 99%가 다 반대하더라. 몇해 전까지만 해도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쌍용차의 존재감은 5% 정도였다. 이는 렉스톤 등 SUV와 체어맨 등 세단이 준 긍정적인 존재감이었다. 하지만 77일간의 노사분쟁으로 존재감은 100배 이상 커졌다. 그러나 100%로 부정적 존재감이더라. 망할 것이다, 망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박 대표는 이미 지난 여름부터 '기적 쌍용차 사모펀드'를 구성해 서울인베스트를 설립한 이후 인연을 맺어 온 굵직굵직한 큰 손들부터 외국인 투자자까지 쌍용차 투자를 설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반응은 거의 '노(no)'였다고 한다. 노사문제가 너무 부각돼 일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투자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진념 전 노동부장관의 생각을 바꾸고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의 도움을 얻으면서 여론을 형성했다.
현재 투자금은 얼마나 모았으며, 향후 추가 모금 진행은.
"현재 쌍용차와 관련된 중소기업 자본가가 500억원 투자를 약속했고 쌍용차 임직원이 500억원, 경기도와 평택시가 500억원 각각 투자할 것으로 잠정 협의된 상태다. 원칙적으로 모두 합의된 상태로, 5부 능선을 넘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국민연금, 사학연금 등 연기금 쪽과 협의할 것이다. 큰 규모를 밝힌 해외투자자의 타진도 있지만 가능한 한 국내 토종 자본, 공공성을 지닌 장기 투자를 이끌 것이다. 현재 쌍용차와 경기도, 평택시 등 정책자금적 의미의 투자, 연기금 등 공공적 성격의 투자, 해외투자를 비롯한 전문투자 등 3그룹과 협상 중이다."
노동운동 후 김우중 회장 자문 역할
쌍용차 인수전에 뛰어든 것과 함께 드라마틱한 경력이 화제다. 걸어온 길을 설명해 달라.
"1957년 출생으로 서울 신진고 졸업 후 대우중공업 등 여러 공장을 다니면 노동운동을 했다.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혐의로 두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이때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노동운동가들인 김문수 경기도지사, 심상정 전 진보신당 의원, 박노해 시인들과 어울렸다.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 등이 당시 노동운동의 리더그룹이었다."
박 대표는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인천 주안과 구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88년 이후 비합법 노동자 정치조직인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삼민동맹) 활동을 했다. 춘천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1991년엔 책 < 다시 노동해방의 깃발로 우뚝 서기 위하여 > 를 펴내기도 했다.
1993년경에 김우중 회장과 인연이 닿은 것으로 알고 있다.
"두 번째 옥살이를 하고 나온 당시는 소련 붕괴에 이은 사회주의 몰락 과정에서 신지호 현 의원 등이 운동권에 대해 거침없이 비난을 가할 때였다. 나 역시 내가 믿었던 사회주의에 다소간의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 큰 줄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고민은 한국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중심에 서 있는 재벌의 속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김우중 회장에게 재벌의 속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대우그룹 노사의 자문을 요청해 6년 정도 활동했다."
당시만 해도 김우중 회장은 해외 출장길에 비행기에서 조훈현 등 바둑기사나 유명인들과 담론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박 대표도 이때 열흘 정도 유럽 순방에 함께했다고 한다. 그후 1993년 대우그룹 산하 대우경제연구소엔 조직 하나가 생겼다. 산업사회연구본부(산사연)로 명명된 이 조직은 그룹 노사문제를 담당하는 '비선'으로, 학계 3명과 노동계 3명으로 구성됐다. 그 가운데 박 대표는 리더 역할을 했다는 게 당시 대우 비서실 직원들의 말이다.
당시 산사연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노사 양측에서 적극적으로는 외교관, 소극적으로는 통역관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당시 노사가 공식적으로 풀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 비선으로서 타협을 이끌어냈다는 평가와 대노협 사무실에 '박윤배 출입금지' 방이 붙을 정도로 반감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노사 교섭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사측 입장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전 대우 비서실 직원은 "당시 김 회장이 운동권 출신으로 세계경영, 노사문제 해결을 모색했으나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고 전했고, 당시 대우그룹노조협의회(대노협)의 한 간부도 "과거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 문제를 풀려고 굉장히 열정적이었지만 당시 노동운동은 원칙적이고 경직돼 있었기 때문에 사측 사람에 대한 반감이 많아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다"고 전했다. 물론 다른 평가도 존재한다. 함께 산사연 활동을 한 한 인사는 "목표의식이 뚜렷해 남들은 다 안 될 것 같다고 해도 그는 도전했다"면서 "김 회장과의 인연을 통해 노동일변도였던 사상이 중도로 왔고, 노동 현장과 시장을 이해하고 조절하려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실 상임 고문'에 대해 이력이 다소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다
"스스로 존재 파워를 키웠고, 그만큼 권한을 가졌다. 그룹 회장과 독대하고 본인 주장을 강하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상임 고문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대우그룹엔 '고문'이라는 직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고치기 대장' 길 걸을 것"
이후 김영삼 정부 때 노사관계개혁위원회 공익위원, 김대중 정부 때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 노무현 정부 때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을 지냈다. 그때마다 자신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고졸이었기 때문이다. 현장과 사측, 중재자를 거치는 것이 상당히 좋은 경험이었다. 중노위 공익위원 당시에도 3년 동안 가장 많이 조정위원회에 참석해 활동했다. 노측은 사용자 출신이라는 것, 사측은 노동 현장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사실을 기반으로 판단하고 조정했다. 이를 통해 이후 내가 갈 길을 '기업을 변화시키는 비즈니스'로 결정했다. 나의 가치에도 맞고 능력이나 경력에도 맞다고 판단했다."
최근 서울인베스트는 주식시장에서 '집단소송 1호'라는 총대를 멨다. 증권 관련 집단소송은 2005년 법 시행 이후 제기된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 1위 굴착기 부품업체 진성티이씨가 통화 관련 파생상품인 키코(KIKO) 손실을 누락시키는 과정에서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이로 인해 손해를 본 투자자가 1700명이다. 그 대표 소송자로 나선 것이다. 800억원대의 손해배상이 걸린 이 소송은 김앤장을 상대로 현재 진행 중이다. 나는 상업적인 비즈니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부르지만 공적인 일은 다 무료로 진행한다. 우리 가격을 인정해 의뢰했기 때문에 무료로 하는 것이다. 이 법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제정됐지만 5년 동안 사문화돼 있었다. 이 소송에서 반드시 이겨 기업을 변화시키는 비즈니스를 실현해 보이겠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기업브랜드 제고 차원에서 서울인베스트가 접근한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도 던졌다. 이에 박 대표는 "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단 1%라도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현재 국내에선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나 변양호 전 금융정책국장도 사모펀드를 운영하고 있다. 정부의 요직에서 관련 업계를 훤히 들여다본 관료 출신들과의 경쟁에서 고졸 출신의 노동운동가가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
"그들은 경제의 내로라하는 경력을 지니고 있고, 국가 경험이 있어 투자자를 모으는 데 그 권력과 권위가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사실 내 경력은 소설 소재에 가깝지 투자 요건은 아니다. 마이너스 요소이다. 하지만 시장은 내 경력이 아니라 돈이 되는가를 보고 투자한다. 시장논리로 더 무장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승부수이다."
한 보수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시민운동가가 아니라 돈을 잘 벌고 싶은 사업가일 뿐"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전면 부정하는 것인가.
"나는 기업의 세계, 자본의 시장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을 하고 싶다. 뭐든지 뚝딱뚝딱 고치니 우리 딸은 내게 '고치기 대장'이라고 부른다. 우리 딸이 붙여준 별명처럼 자본시장에서의 '고치기 대장'이 되고 싶다. 혁명은 기존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미가 있지만 고치기는 온고지신이다. 고친다는 것은 기존 존재를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인정하고 가는 거 아닌가. 자본세계를 고치는 것, 이것이 내가 가는 길이다."
쌍용차 인수에 나선 서울인베스트의 박윤배 사장이 화제다. 고졸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자문역과 노사정 공익위원을 거친 경력답게 그에 대한 평가 또한 엇갈린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지난 1일 국립국악원 주최로 임원들과 공장 노동자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사 화합을 다짐하는 국악 공연이 열리고 있다. 경찰이 농성 노조원 진압을 위해 진입할 당시 깨진 쌍용차 본관 유리창을 통해 내다본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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