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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란으로 3억년의 생과 사를 이어..........

여행가/허기성 2005. 7. 27. 16:22
산란으로 3억년의 생과 사를 이어오다
▲ 한여름의 고추잠자리는 가을날 잘 익은 고추처럼 빨갛다.
ⓒ2005 오희삼
뜨거운 여름볕이 연못 위의 수련 봉오리를 열어젖힐 때, 잠자리들은 떼 지어 연못 위 허공을 유영한다. 그들의 비행은 가볍고 날렵하다. 잠자리의 비행 궤적은 종잡을 수 없이 빠르고 유추할 수 없이 복잡하다. 그들은 다만 날개 달린 동물의 자유를 만끽하듯, 풀잎 끝에 앉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새 눈앞에 잉잉거린다. 그 작고 가벼운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란한 비행(飛行)의 동력원(動力源)을 나의 관념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라이트 형제가 발견한 비행 원리의 핵심은 물체를 허공에 떠 있을 수 있게 하는 양력(揚力)이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며 차창 밖으로 팔을 비행기의 날개처럼 펼쳐낼 때, 손의 단면에 와 닿는 바람의 각도에 따라 손은 들려지고 내려지는데 손이 들려지는 힘이 양력이다. 이것은 다만 물체를 허공에 띄울 수 있는 힘만을 제공할 뿐이다.

▲ 먹이를 먹고 있는 밀잠자리.
ⓒ2005 오희삼
비행의 지향은 '떠 있으며' 동시에 나아감인데, 이 나아감을 위해 '비행기'는 엔진의 동력을 필요로 한다. 떠있음과 나아감의 조합으로 비행하는 '비행기'의 이동 경로는 이차원 방정식으로 설정이 가능하다. 이 이동 경로가 곧 항로(航路)인데, 최첨단 비행기라 할지라도 오직 설정된 항로에서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비행기'의 조종은 설정된 항로를 따라 안전하게 떠있음과 안전하게 나아감을 위한 복잡한 장치들을 조작하는 단순함에 있다.

잠자리는 이 단순한 비행기의 구조적 원형에 가장 가까운 날곤충이다. 선형(線形) 몸체와 열십자로 교차하는 쌍날개를 탑재한 잠자리의 기하학적 구조는 비행기와 같은데, 이는 비행기의 설계가 잠자리의 몸에서 빌어왔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비행기'의 비행은 단지 이동의 방편으로만 설계되었을 뿐이지만, 잠자리의 비행은 단순한 이동만을 위한 비행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노동 행위이자 잠자리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 선형(線形) 몸체와 열십자로 교차하는 쌍날개를 탑재한 잠자리의 기하학적 구조는 비행기와 같은데, 이는 비행기의 설계가 잠자리의 몸에서 빌어왔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2005 오희삼
잠자리들의 비행 목적은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다. 잠자리의 먹잇감인 하루살이나 모기나 파리 같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빠르고 날렵한 비행력이 필요하다. 잠자리는 '비행기'들이 흉내낼 수 없는 갖가지 선회 비행과 순간적인 180도의 회전, 상하좌우로의 전환 등을 언제나 어디서나 해낼 수 있는데, 이런 비행의 기술은 오직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서 필요한 잠자리들의 생존 조건인 셈이다.

'비행기'에게 설정되는 항로는 잠자리들에게 존재 의미가 없다. 삼차원의 공간 속으로 날개를 저어 가는 무수한 궤적이 곧 잠자리의 항로인데, 저들의 항로는 삼차원 방정식으로의 계량이 불가능하다. 저들의 항로는 수치로 계량되거나 논리로 이해되는 경계선의 외곽에 있다.

▲ 뜨거운 햇살이 유월의 하늘에 쏟아질 때 잠자리들은 빛나는 날개를 달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2005 오희삼
대개의 잠자리는 한해살이다. 그들의 고향은 물 속이다. 알에서 깨어난 잠자리는 유충의 형태로 연못이나 늪 속의 물풀과 바닥의 진흙 속에서 유년을 보낸다. 어린 유충을 수채(水蠆)라 하는데 어미의 보살핌, 그 살가운 모성애의 존재를 모른다. 먹고 먹히는 양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야생의 세계에서, 태어나면서 독립하고 홀로서야 하는 어린 수채들의 삶은 그래서 고독하고 가엾다. 부화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알들은 천적들의 먹이로 희생된다. 가까스로 부화한 잠자리의 애벌레들은 봄 동안 여러 번의 탈피 과정을 거친다.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하여 스스로 살길을 터득한 애벌레들에게만 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의 날개가 주어진다.

▲ 수컷의 꼬리 끝에는 갈고리 모양의 부속기 한 쌍이 있는데, 이는 교접할 때 암컷의 머리와 가슴 사이에 패인 홈통에 끼워 두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2005 오희삼
잠자리는 번데기의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성충(成蟲)이 되는 불완전 변태를 한다. 뜨거운 햇살이 유월의 하늘에 쏟아질 때 잠자리들은 빛나는 날개를 달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화(羽化)다. 우화하는 순간에 잠자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속에 지녔던 날개를 편다. 여름날의 물가에서 잠자리들은 날개를 펄럭거리며 삼차원의 무한 공간을 비행한다. 펄럭일 수 있는 날개가 잠자리들에게는 곧 어른이 되는 상징일 터인데, 여름은 저들에게 날개를 펄럭일 수 있는 생애의 첫 여름이자 또한 마지막 여름이다.

▲ 수정이 끝나면 잠자리는 곧바로 산란한다. 암컷은 꼬리를 바르르 떨면서 물속으로 알을 보낸다.
ⓒ2005 오희삼
여름 내내 잠자리는 노동으로써 비행을 하는데, 저들의 비행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있다. 그들이 태어난 연못가에서 내년 여름을 맞이할 알을 산란하는 일인데, 잠자리 종족이 이 땅에 태어난 이래 3억년을 이어온 그들만의 전통이다.

비행을 통한 사냥으로 잠자리는 몸속에 에너지를 저장하는데, 그 쓰임은 오직 건강한 알의 생산에 있다. 허공에서 잠자리들의 교접(交接) 행위는 쾌락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며,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교접은 성(聖)스러운 종교적 의식과도 같다. 수련 꽃 활짝 핀 연못가의 허공은 의식의 제단이 된다.

▲ 비행을 통한 사냥으로 잠자리는 몸속에 에너지를 저장하는데, 그 쓰임은 오직 건강한 알의 생산에 있다.
ⓒ2005 오희삼
수컷의 꼬리 끝에는 갈고리 모양의 부속기 한 쌍이 있는데, 이는 교접할 때 암컷의 머리와 가슴 사이에 패인 홈통에 끼워 두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허공에서 두 몸을 하나로 엮기 위해서다. 부속기로 연결된 두 몸은 공중 급유하는 비행기와 같다. 뜨거운 햇볕이 축복처럼 쏟아지는 여름 날, 잠자리들의 교접은 이루어진다.

교접의 순간에도 떠 있기 위한 날갯짓은 계속 되어야 한다. 떠 있을 때, 나아가기 위한 동력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한 것이어서, 허공에 떠 있기 위한 날갯짓은 더 힘차야 한다(헬리콥터도 나아갈 때보다 떠 있을 때 더 많은 연료를 소비한다).

▲ 수련 꽃 활짝 핀 연못가의 허공은 의식의 제단이 된다.
ⓒ2005 오희삼
고통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암컷은 온몸을 휘어 꼬리 끝 마디에 있는 교접기를, 가슴 언저리에 있는 수컷의 교접기에 접합시킨다. 접합의 순간에 일직선이던 두 몸은 허공에 하트 모양을 그려내고, 이 찰나의 순간에 수컷의 꼬리 끝마디에 저장된 정자가 교접된 가슴 부위로 이동하며 수정이 이루어진다.

수정이 끝나면 잠자리는 곧바로 산란한다. 암컷은 꼬리를 바르르 떨면서 물 속으로 알을 보낸다. 수컷들도 산란 동안은 주변을 지키며 암컷을 호위하는데, 수정된 알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성애다. 그것은 지난 겨울 추위 속에서 제 삶을 품어 주었던 물속으로 잠자리는 자신의 분신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잠자리들의 숙명이다.

▲ 펄럭일 수 있는 날개가 잠자리들에게는 곧 어른이 되는 상징일 터인데, 여름은 저들에게 날개를 펄럭일 수 있는 생애의 첫 여름이자 또한 마지막 여름이다.
ⓒ2005 오희삼
1년 후 다시 여름이 오면 산란된 알 중에서 살아 남은 몇몇은 제 어미처럼 산란할 것이다. 그리고 제 분신들과 생이별을 할 것이다. 한 잠자리의 생(生)은 산란(産卵)으로 짧은 삶을 마감(死)하는 것이지만, 산란을 통해 새로운 생(生)을 잇는 것으로 잠자리의 삶은 완성된다. 완성된 개별적 삶들의 생과 사가 이어지고 포개지면서 잠자리 종족의 생은 영위되고, 그렇게 3억년의 시간을 흘러왔다.

야생의 모든 동물들의 죽음은 비극적이다. 수명을 다한 후의 여생(餘生)의 삶이 야생의 동물들에게는 없다. 생이 괴롭거나 고달파서 자살하는 야생동물도 우리의 관념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세대와 세대를 잇는 종족의 이어짐을 위해 허위(虛僞) 없이 살다갈 뿐이다. 산란 후 어느 허공에 떠 있지 못하고 지상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잠자리의 주검은 가엾고 쓸쓸하지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가볍다. 죽은 잠자리의 몸은 말한다. 날지 못하는 잠자리는 이미 잠자리의 생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