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남성 38세, 여성 41세면 살아온 날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같다고 한다. 남성은 73.9세, 여성은 80.8세가 평균 수명인 셈이니 10년 전에 비해 4.7세 가량 높아졌다.
수명은 늘어났지만 IMF를 기점으로 평생직업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정년은 점점 단축되고 있다. 50대 후반에서 60세가 기준이었던 정년은 어느새 40대들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실제로 아웃플레이스먼트제도를 실시하는 경총이나 한국DBM을 찾는 이들은 40대 중반에서 5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퇴직 후 20년에서 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이들, 때문에 인생의 2모작은 필수다.
20년 안팎의 기간 직장에 다니며 그 이상의 기간을 버티기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퇴직자나 퇴직을 앞둔 이들은 창업과 재취업이라는 두 갈래 길에 서게 된다.
그러나 재취업을 하던 창업을 하던 난관은 있게 마련이다. 재취업자들은 취업 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취업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대기업 부장이었는데……”라는 생각이 새로운 직장을 찾는 시기를 늦추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한주택공사 회계부장으로 정년 퇴직한 조병하씨는 이 때문에 1년이라는 시간을 그냥 보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고 눈높이를 낮추는 것만이 인생의 2막을 성공적으로 개척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한다.
남이섬 인근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한종선씨는 퇴직 전 사전조사를 통해 미리 창업을 한 사례다. 고등학교 교사인 그는 정년까지 몇 년의 시간이 남았지만 2005년 여름 펜션을 오픈하고 주중에는 교사로 주말에는 펜션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땅을 살 때부터 집을 짓기까지 실패하는 주변 사람을 여럿 봤다”고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 사전조사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러주는 사례다.
<이코노믹 리뷰>는 병술년 새해를 맞아 퇴직을 앞둔 이들을 위해 인생의 2막을 성공적으로 개척했거나 준비중인 이들을 만나보았다.
◇ 조병하 (69·전 주공 회계부장, 동아약수하이츠 상가 경비원) “집 짓는 회사에서 집 지키는 회사로 전직했죠”
약수역 인근 동아약수하이츠 상가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조병하씨는 노인들 사이에서 유명인사다. 방송 출연도 여러 번 했고 각 지역 노인복지관을 순회하며 매년 한두 차례 성공 취업사례를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순넷에 정년퇴직하기 전까지 대한주택공사에서 회계 담당으로 30년을 근무했다. 소위 잘 나가는 공기업 직원이었던 그가 경비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퇴직금을 받고 1년 간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 시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아직 이렇게 건강한 데 할 일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죠. 그래서 중구 고령자취업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눈높이를 낮춘다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식들한테 용돈이나 받으며 사는 것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지금의 직장에 면접을 보고 입사하게 된 거죠.”
처음 그가 경비원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의 반대도 컸다. 그러나 월급을 받아 손주들 용돈도 쥐어주고, 쉴 때보다 부쩍 건강해진 남편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게 됐다고.
사실 경비원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새벽 5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퇴근하는 격일제 근무가 9시 출근, 6시 퇴근에 익숙했던 그에게는 다소 버거웠다. 3개월 간 마음을 다잡으며 새로운 인생에서 실패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버틴 후 비로소 그에게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주로 후배 퇴직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언한다.
“일 할 수 있는 게 행복하다는 것을 하루하루 느낍니다. 가끔 일이 힘들 때 1년 간 놀았던 때를 떠올리면 다시 힘이 납니다. 퇴직 후 무모하게 투자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때문에 투자는 신중히, 그리고 일은 평생 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금 그의 월급은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5년 전 주공에서 근무할 때 급여의 30% 수준이지만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삶이 만족스럽다. 4년 간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 4명의 경비원 중 반장이라는 직책도 얻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하고 싶냐는 질문에 조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이라고 말한다. 동년배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그를 보니 앞으로 10년은 거뜬히 약수하이츠를 지킬 기세다.
◇ 정두호 (69·맥도날드 센트럴시티점) “쉼 없이 일하는 게 장수 비결이죠”
“일하는 습관이 생기면서, 인생이 달라지더군요. 젊고 건강한 삶의 향기가 생활 곳곳에서 묻어 나옵니다. 내 주변의 잘못된 것들과 내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반성하게 되면서, 얼굴 표정까지 바뀌었습니다.”
맥도날드 센트럴시티점에는 칠순의 할아버지가 10대 청소년들과 똑같이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정두호씨가 바로 그다. 다른 직원들은 그를 ‘아버님’이라 부른다.
비록 출근하는 날보다 집에서 쉬어야 하는 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평균 5∼6시간씩 매장에서 일한다. 노동의 대가로 받는 시급은 얼마 안 되지만,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지난 2002년 공직을 퇴임한 후 정씨는 한때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이, 그저 멍하니 TV만 쳐다보며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용기를 내어 찾아간 곳이 서초구 고령자취업알선센터다. 이 곳에서 소개받은 새 일자리가 바로 맥도날드 ‘크루(Crew)’라는, 시간제 매장직원이다.
정씨는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나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라며 “돈을 번다는 것보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즐거움이 가장 큰 소득이며, 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맥도날드 매장에서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는 것을 친구들은 가볍게 보지만, 그는 노동을 신성하게 생각하며, 그릴에서 햄버거를 만들 때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스스로 마음이 충만해지고, 자신이 하는 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과거 외국 출장 길에 열심히 일하는 고령자들을 볼 때마다,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체면이나 격식을 떠나, 정년 없이 평생을 여러 계층과 같이 호흡하며 일하는 것이 ‘앙코르 인생’을 열어 가는 길이며, 장수 비결이라 생각합니다.”
일터에 나가는 날이 소풍 전날 잠 못 이루는 어린아이처럼 기다려진다는 정씨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체력을 잘 관리하여, 노동을 통해 제2의 인생을 값지게 살찌우겠다고 다짐한다.
◇ 이영준 (45·전 한미은행지점장, 펜션 창업) “전원생활·안정투자 2마리 토끼 잡았다”
영동고속도로 면온I.C.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가면 만날 수 있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유포리 금당계곡 상류 아늑한 산자락에 안겨있는 목조주택 6동. 네덜란드에서 막 옮겨온 듯한 풍차 펜션이 맨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이 ‘봄여름가을겨울’ 펜션이다. 보광휘닉스파크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 펜션 이영준 사장은 한미은행 지점장 출신이다. 은행에 근무할 때부터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되는 것을 보고 펜션사업에 관심을 갖고,‘인생 2모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모친이 양평에서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일손을 도우며, 실전 감각을 쌓았다.
이 사장은 “전원주택형 펜션은 재산관리 측면에서도 훌륭한 재테크 수단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원생활을 보장받으면서, 투자액의 손실도 거의 없기 때문이죠”라고 말한다.
지난 2002년 임야와 밭 4000여 평을 구입, 210평을 대지로 전환했다. 이곳은 반경 1km 이내에 농가나 축사가 없어 펜션 최적지다.
펜션에 대한 책과 자료를 부지런히 모으고, 드림펜션 염관식 사장 등 전문가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은행에서 퇴직한 후 2003년 8월부터 펜션 건축에 착수, 3개월 만에 완공했다. 건축구조는 선호도가 높은 목조주택으로 선택했으며, 총 투자비용은 10억원 가량.
봄여름가을겨울은 부대시설을 부족함 없이 이용할 수 있고, 이용객들의 프라이버시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꾸몄다. 펜션도 비즈니스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커다란 경쟁력이다.
“대부분의 ‘나 홀로’ 펜션은 근린생활시설과 부대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고, 단지형 펜션은 위탁식 경영이라 따뜻한 만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둘의 장점만을 모아, 틈새전략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 노부모님이 건강을 되찾으신 것이 기쁘다는 이 사장은 “금융업에 종사했던 터라 서비스정신이 몸에 배어, 펜션사업이 적성에 잘 맞습니다. 가족들간의 역할분담이 잘 이뤄져 어려운 점도 없고, 손님들도 수려한 풍광과 펜션시설에 모두 만족해합니다”라고 밝혔다.
◇ 이건석 (44·취업준비생)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마포구 대흥동 경총 산업기술인력 아웃플레이스먼트센터에서 늦깎이 취업 준비생 이건석씨는 담당 컨설턴트와 지원할 회사를 선별하고 이력서 작성에 분주하다.
그의 이력서를 살짝 엿봤다. 서울대 체육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라는 화려한 타이틀로 시작해 컴퓨터학원을 운영하기도 했고 의료벤처에서 NGO단체까지….
사실 이건석씨는 6급 시각장애인이다. 대학원 시절 교통사고로 안면부를 크게 다치면서 교수의 꿈을 키우던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국립대 사범대를 졸업하면 주어지던 교사임용도 그가 졸업하던 해 위헌판결로 사라지면서 선의의 피해를 보게 됐다.
결국 대학원을 졸업한 후 취업을 포기하고 컴퓨터학원을 차리고 캐드와 그래픽을 가르쳤다. 그러나 마흔살이 되던 해 소프트웨어 단속이 시작되면서 가뜩이나 재투자가 필요한 그에게 부담이 가중되자 사업을 정리하고 뒤늦게 직장생활을 결심하게 되었단다.
처음 그는 온라인 취업사이트를 통해 입사지원을 했고 몇몇 회사에 입사해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온라인상에 취업정보를 올려놓은 기업 중 옥석을 가리기란 쉽지 않았다. 더러는 다단계회사도 있었단다.
그러던 중 취업박람회장을 찾았다가 아웃플레이스먼트센터의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지난 3개월 동안 무작위로 5000통 정도 이력서를 보냈지만 그에게 연락이 온 경우는 드물었다. 취업 상담을 받으며 이력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새로 배우고 왜 자신의 이력서가 선택되지 않았는지 원인부터 분석했다.
취업 준비생으로서 자신의 어떤 점을 알리고 싶냐는 질문이 나오기 무섭게 그는 “아마 40대 가운데 저 만큼 컴퓨터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기획안 작성과 영문프레젠테이션은 젊은 사람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 시절에는 교수님의 지도하에 체육교과서 5종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며 재치 있게 대답한다.
이건석씨가 현재 희망하는 취업 분야 0순위는 시민단체다.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다. 또 체육과 접목한 전공을 살려 의료산업체에서도 일하고 싶단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교통비와 식비만 받아도 좋습니다. 물론 제 가치를 높게 인정해 주시면 더 좋겠죠”
◇ 이용명 (48·전 LG CNS 부장, 놀부보쌈 오픈 준비 중) “노후준비, 정년 없는 창업이 딱이죠”
LG CNS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18년 간 근무한 이용명씨는 2004년 퇴직 후 회사에서 마련해 준 아웃플레이스먼트 교육을 4개월 간 수료한 후 준비기간을 거쳐 2005년 12월 말 놀부보쌈 중계점을 인수하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퇴직 후 창업의 길을 열어준 회사가 고맙다는 이용명씨는 ‘창업을 해보자’고 마음먹고는 한국DBM에서 창업 교육을 받았다. 계약서 쓰는 법부터 상권분석까지 꼼꼼히 지도받은 그는 처음 하는 사업인 만큼 실패 확률이 적도록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신중한 성격의 이용명씨는 담당 컨설턴트와 장소, 업종 선택을 하는 데만 6개월이 넘게 소요됐다. 그러던 중 중계동에 놀부보쌈 가맹점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고 컨설턴트와 현장을 방문하고 12월 21일 계약서를 작성했다. 앞으로 한 달 간은 본사에서 서비스 교육을 받을 예정이라는 그는 “퇴직 후 명함이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는데 부장이 아닌 사장 명함을 만들게 됐네요”라며 미소를 짓는다.
그가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재취업을 해도 곧 정년이 됩니다. 노후 준비를 하기에는 짧은 기간이죠. 그래서 정년이 없는 창업을 선택했죠. 처음에는 ‘과연’이라며 의심을 하던 아내가 이제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어 요즘은 자신감이 넘친답니다.”
어엿한 예비 사장님은 퇴직을 앞둔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여유로움도 보였다.
“퇴직 전에 나중에 창업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했지만 사전조사가 부족해 준비기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맛과 서비스가 좋은 집이 있으면 그때는 왜 물어볼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어요. 틈틈이 퇴직 이후를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습니다.”
병술년 개띠해를 맞아 인생의 2막을 준비하는 이용명씨는 1958년 개띠생이다. 자신이 태어난 해를 맞는 그는 올 한 해 가족들에게 당당한 홀로서기에 성공한 자신을 선물하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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