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은 개털도 아닌가 봐. 이거 정말 섭섭해서 원.”
한 이불 덮고 자는 남자가 식사를 하다 말고 나를 본다. 개털...아무 쓸모없는 하챦은 존재를 두고 ‘개털’이라는 말로 싸잡아 버리는 건데... 이 남자, 무슨 섭섭한 것이 있는가보다 싶다. 때론 밉고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날 있었어도 단 한번도 내가 자기를 ‘개털’처럼 생각한 적은 없노라는 걸 자기 알고 내 알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사실이건만.
“아니, 도대체 이 무슨 쑈킹 스토리? 난데없이 웬 개털타령?”
원래가 무던한 사람이 늘어놓는 푸념이라 한번 더 귀가 기울여진다.
“오이김치 좀 익혀서 주라. 생오이는 비려서 싫어. 새콤하게 익혀서 달라니까 어째 아들놈 입맛 밖에 몰라.”
오호, 바로 그것이었군, 오이소박이.
“하긴 우리 어머니도 옛날에 새콤하게 익혀서 내 입맛에 맞춰 해주시던데. 내가 이해를 해야지,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뭔가 영 불만이 가득 찬 표정이다.
지금껏 만들어 먹을 엄두를 못 내다가 최근에야 겨우 만드는 법을 알게 된 것이 있었다면 바로 오이소박이였다. 지금같은 여름에 한창 입맛 나게 먹을 수 있는 제철 음식이라 나도 어지간히 오이소박이를 좋아하지만 한번도 (정말이지 실수로라도 단 한번도) 맛있게 담아 보질 못한 탓에 몇 년동안은 해먹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만드는 것 같은데 나는 아무리 공들여 만들어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맛이 나질 않는 것이 솜씨가 뛰어난 사람들에게 비법을 전해 듣고 해 보아도, 요리 싸이트를 뒤져 가며 해 보아도 도무지 맛이 안 나는 것이 한때 포기해 버린 과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전 시누 형님이 하시는 갈비집에서 먹어 본 오이소박이 맛에 아하,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한번 담아 보고 또 실패하면 그 때가서 물어 보리라 생각하며 짐작되는대로 해 보았더니 생각하던 그 맛이 나는 것이었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환희가 이 정도 아니었을까. 무엇이든 때가 있었나보다. 올해는 여한 없이 오이소박이를 만들어 먹으리라 생각하며 부족한 솜씨 탓에 그동안 못 해먹은 것에 대한 보상심리라도 동원된 듯 올 들어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오이소박이를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의 입맛이 다른 거였다. 남편은 새콤하게 익힌 것을 좋아하고 큰아들 놈은 익히지 않은 싱싱한 것을 좋아하니 다 만들어 놓고도 그것이 문제 아닌 문제였다.
“그냥 어른이 양보 합시다.”
사실, 멀리 배정된 학교 다니느라 고생하는 아들놈 생각에 소박이를 만들자마자 냉장고로 직행시켜 익지 않은 싱싱한 오이소박이만 계속 밥상 위에 올라 왔던 것이다. 아들녀석이 오이김치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모정에 젖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달아 오이소박이를 담았다. 그러나 그 뒤안길 너머로 섭섭한 마음을 가진 한 남자가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아들녀석 입맛에만 맞춘 것을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잘난(?) 오이소박이 때문에 자신을 ‘개털신세’처럼 느끼는 그 남자에게 오늘은 웬지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알았어. 새콤하게 익혀 줄게. 삐짐 모드 즉시 해제하기.”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통을 밖에 내놓아 하루정도 콧바람 쐬어 주니 아주 맞춤으로 새콤하게 익었다.
“그렇지, 바로 이 맛이야. 밥 한 공기 더.”
“난 익은 거 싫다니까. 익은 오이김치 먹으면 비위가 상해요. 안 익은 걸로 해주세요.”
“아빠가 생오이 비리다고 싫다고 하셔서 익혔어. 그냥 한번 먹어 봐.”
“익은 김치는 죽어도 못 먹겠어요. 그냥 안 먹을래.”
누굴 탓하랴. 까다롭기로는 세계 올림픽대회 금메달감인 친할머니의 미각을 그대로 대물림 받은 아들놈인데.
“이 놈아, 이 오이김치 땜에 아빠가 개털된 사연도 모르고?”
“개털이요? 아빠가요? 아빠가 왜 오이김치 땜에 개털이 되요?”
“그런 거 있어, 임마. 굳이 알려고 하지마 다치는 수가 있으니까. 앞으로는 뭐든 엄마가 해주는대로 먹도록.”
아들놈은 오이소박이에 젓가락도 안 대고 기어이 다른 반찬으로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는다.
하긴 [맞기 싫은 매는 억지로 맞아도 먹기 싫은 건 죽어도 못 먹는다]는 속담은 한낱 쓸모 없는 말장난만은 결코 아니려니.
가끔 세 부자가 경쟁하듯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애들 커갈수록 서방은 완전 뒷전이라더니 우리집도 크게 다르지 않군.”
“엄마는 아빠 밖에 몰라.”
“엄마는 형 밖에 몰라.”
“엄마는 막내아들 밖에 몰라.”
이런 난감할데가...그 동안 세 남자에게 마구마구 퍼 주어 이젠 마음에 남아 있는 애정의 면적은 달랑 한조각 뿐인것 같은데 나누어 달라는 곳은 아직도 지천에 널렸으니 이 무슨 팔자소관인지. 주어진 의무감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실천한 죄 아닌 죄로 제대로 한번 돌아보지도 못한 체 방치해 버린 나 자신은 황폐하기 짝이 없는데.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덧 세월가고 나이만 먹고 그러다가 한 점 먼지로 소멸해 갈 것을 생각하니 인생길이 마냥 덧없이 느껴지는 거였다. 때때로 세워 놓은 내 인생의 대형 프로젝트마저 깊은 장롱 서랍 속의 혼수예단처럼 때깔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며 발을 동동 굴리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살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위로도 해 보는 것이었다. 이나마 조금 남은 애정을 이젠 나를 위해 사용하면 안되겠니 하고 자문해 보지만 그러나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여 괜시리 마음이 처연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전에 없던 오기가 치받혀 올라 오는 것이다.
“이것 봐 오빠들. 진정한 개털은 당신들이 아니고 바로 나라구. 그러니 앞으로 내 앞에서 엄살 떨기 없기.”
“자기가 왜 개털이야. 옆에서 듣는 사람 섭하게. 정말 개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쯔쯔쯔 ”
“엄마가 왜 개털이예요?”
“그럼 개털 아니면 소털인감? 이 마음을 누가 알어. 저 달이나 알아줄까.”
괜히 내 신세가 외로워져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 만들어 조각 얼음 몇 개 띄운 뒤 헤드셋 끼고 컴 앞에 앉는다. 하긴 그렇지 뭐, 사는 거 뭐 있나. 그래도 이렇게 살 때가 가장 좋았다고 혼자 꿍얼거릴때가 오겠지. 명멸하는 인생길을 사노라면 누렁이 개털도 저 바람에 힘차게 나부낄 때가 언젠가는 꼭 오려니.
창 너머 밤 하늘엔 솜사탕 같은 구름의 무리들이 달 곁에서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게 떠 있다.
'³о삶"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70층,120층,500층, 어 어… 엘리베이터 타고 우주 왔다! (0) | 2006.07.12 |
---|---|
[스크랩] 이 기막힌 사랑 (0) | 2006.07.10 |
사랑이란. (0) | 2006.07.08 |
사업인생 50부터,, (0) | 2006.06.27 |
퇴직자들의 성공2막 스토리 (0) | 2006.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