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깊고 힘찬 욕망,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의 욕망이 바로 당신의 의지요,
당신의 의지가 바로 당신의 행위요,
당신의 행위가 바로 당 신의 운명이다.
-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 IV.4.5.
제1장 순수 잠재력의 법칙
태초에 존재도 비존재도 없었으며, 세상 전체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의
에너지였다... 일자 the one는 그 자신의 힘에 의해 숨쉬지 않고도 호흡했으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리그 베다)중 `창조의 찬가`
성공을 부르는 마음의 법칙 중 첫번째는 `순수 잠재력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우리 인간 본연의 상태가 순수 의식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순수 의식은 순수 잠재력이며, 온갖 가능성과 무한한 창조력의 장이다. 순수 의식은 우리 정신의 본질이다. 그것은 또한 끝간 데 없고 매인 데 없는 순수한 기쁨이기도 하다.
의식의 다른 속성들은 순수한 앎, 무한한 침묵, 완벽한 균형, 무찌를 수 없는
강인함(invincibility), 단순성, 그리고 환희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본성은
순수 잠재력의 본성이다.
당신이 스스로의 본성을 발견하고 스스로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 그 앎 자체 안에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영원한 가능성이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모든 것의 한량없는 잠재 상태potential기 때문이다.
순수 잠재력의 법칙은 또한 `하나됨unity`의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무한한 다양성 밑바닥에는 모든 것을 꿰뚫는 정신의 하나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이 에너지 장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순수 잠재력의 장은 바로 당신 자신의 참자아(`참자아`는 원어의 `Self`를 번역
할 말로서, `Ego`를 번역한 말인 `헛자아`와 대비된다-역주)다. 그러니까 당신이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을 체험하면 할수록 당신은 순수 잠재력의 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참자아를 체험하는 것, 다른 말로 `자기조회self-referral`는 마음속의 기준점이 우리 자신의 정신이지, 우리 경험의 대상들이 아님을 뜻한다.
자기조회의 반대 개념은 `대상조회object-referral`다 대상조회를 하게 되면 우리는 항상 참자아 밖에 있는 대상들, 즉 상황.사정.사람.사물 들의 영향을 받는다. 대상조회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계속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어떤 응답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그러므로 두려움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대상조회를 하게 되면 우리는 사물을 통제해야겠다는 욕구를 느낀다. 다시 말해 밖으로 드러나는 힘이 필요하다고 강렬히 느끼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사물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 밖으로 드러나는 힘을 갖고 싶어하는 욕구... 이 욕구들은 모두 그 바탕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욕구들이다. 이러한 종
류의 힘은 순수 잠재력의 힘이나 참자아의 힘 또는 `진정한`힘이 아니다.
우리가 참자아의 힘을 체험하게 되면 두려움이란 있을 수 없게 되고, 무엇을 통제하려는 강박관념도 없게 되고, 다른 사람의 승인이나 밖으로 드러나는 힘을 얻고자 하는 투쟁도 없게 된다.
대상조회를 할 때는 당신의 헛자아ego가 마음속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헛자아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헛자아는 당신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요, 당신의 사회적 가면이며, 당신이 연기하고 있는 역할이다. 당신의 사회적 가면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통제하고자 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기 때문에 힘에 의해 유지된다.
반면 당신의 참된 자기인 참자아는 당신의 정신이며 혼이다. 그것은 앞에 말한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참자아는 비판에 대해 면역이 되어 있으며, 어떠한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누구에게도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모두 나와 같은 참자아임을, 겉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정신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상조회와 자기조회 사이의 본질적 차이다. 자기조회를 하게 되면 어떤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이를 존중하며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 당신의 진정한 존재를 체험하게 된다. `자기힘Self-power`은 그러므로 참된 힘이다.
그러나 대상조회에 기반을 둔 힘은 거짓 힘이다. 이 힘은 헛자아에 기반을 둔 힘이기 때문에 조회 대상이 있는 한에서만 지속된다. 당신이 만일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거나 한 회사의 사장이라는 그럴 듯한 직함을 갖고 있다면, 혹은 돈이 아주 많다면 당신 누리는 힘은 그 직함이나 직업이나 돈과 함께 간다. 헛자아에 기반을 둔 힘은 그러한 것들이 계속되는 한에서만 지속된다. 직함, 직업, 돈이 사라지면 힘도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힘`은 영원하다. 참자아에 대한 앎에 바탕을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힘`에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자기힘`은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당신이 원하는 사물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긴다. 그러면 사람, 상황, 사물들이 자석처럼 끌려와 당신의 욕망을 뒷받침해주게 된다. 이는 또한 자연 법칙이 뒷받침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법칙의 뒷받침이란 신의 뒷받침이며 은총 상태에 있는 존재로부터 오는 뒷받침이다.
그러면 당신의 힘은 충실해져서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돈독한 유대감을 즐기게 되고, 다른 사람들 또한 당신과의 관계에 있어 돈독한 유대감을 즐기게 된다. 당신의 힘은 바로 그 참다운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연대관계의 힘인 것이다.
- 고요한 연못에 작은 돌을 던지듯 -
그러면 모든 가능성이 펼쳐지는 장인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당신이 순수 잠재력의 장에서 이익을 취하고 싶다면, 그래서 순수 의식에 숨어 있는 창조력을 충분히 활용하고 싶다면 당신은 그 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리에 들어가는 방법 중 하나가 침묵, 명상, 비판단non-judgment을 매일 실천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이 장에 숨어 있는 특질인 무한한 창조성, 자유, 환희에 도달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침묵을 실천한다 함은 일정 시간을 단지 `존재하기`에 할애한다는 뜻이다. 또한 침묵을 체험한다는 것은 말하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멀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텔레비전 보기, 라이도 듣기, 책 읽기 등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멀리한다는 의미도 된다.
당신이 침묵을 체험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한 번도 주지 않는다면, 당신 마음속의 대화에는 혼란이 생길 것이다. 가끔씩 조금이라도 시간을 따로 내어 침묵을 체험하라. 아니면 하루에 다만 얼마 동안만이라도 침묵을 지키기로 스스로 다짐해 보라. 두 시간도 좋고, 그것이 너무 길다면 한 시간도 좋다. 그리고 가끔씩은 하루 온종일, 아니면 이틀, 한 주 내내, 이런 식으로 점점 더 긴 시간을 들여 침묵을 체험해 보라.
당신이 이러한 침묵의 체험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우선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대화가 더욱 더 혼란스러워진다. 당신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강
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고 나서 첫날이나 둘째 날 완전히 미칠 지경이 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절박한 느낌과 불안감이 갑자기 그들을 덮친다. 그러나 그들이 침묵을 체험하고 있는 동안 그들 마음속의 대화는 이내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침묵이 깊어진다. 왜냐하면 잠시후 마음이 단념하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 즉 참자아.정신.선택의 주체가 말하지 않을 작정을 했다면 다른 곳으로 공연히 빙빙 돌아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마음이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속의 대화가 잠잠해지면서 당신은 순수 잠재력의 장이 아닌 고요함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각자 편한 방식대로 정기적으로 침묵을 실천하는 것이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체험하는 한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매일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하자면 적어도 아침에 30분, 저녁에 30분 정도 명상해야 한다. 명상을 통해 당신은 순수한 침묵과 순수한 앎의 장을 체험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순수 침묵의 장 안에 무한한 조직력의 장이 있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뗄 수 없이 연관되는 창조의 마지막 단계가 있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뒤에 나올 다섯 번째 법칙인 `의도와 욕망의 법칙`에서 당신은 의도의 미약한 충돌을 이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의 욕망은 저절로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선 고요함을 체험해야 한다. 고요함은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첫번째 사항이다. 왜냐하면 끝없이 많은 세부사항들을 당신만을 위해 알맞게 편성해줄 수 있는 순수 잠재력의 장과 당신을 이어주는 끈이 바로 이 고요함이기 때문이다.
잔잔한 연못에 작은 돌을 던지고 그 돌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것을 바라본다고 상상해보자. 잠시 후 돌이 물 속으로 가라앉으면 아마 당신은 돌을 또 하나 던질 것이다. 순수 침묵의 장 속으로 들어가 당신의 의도를 입력할 때도 바로 그렇게 하면 된다.
이 침묵 중에, 가장 미약한 의도만 있어도 그 의도는 모든 것을 모든 것과 이어주는 우주의 보편적 의식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면 잔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의식 속에서 고요함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마음이 출렁이는 대양과 같다면, 설령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그 안에 던져 넣는다 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성서에 이런 표현이 있다. `잠잠하라. 그리고 내가 하느님인 줄을 알라.` 이런 경지는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순수 가능성의 장에 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비판단의 실천이다. 여기서 판단이란 사물을 옳고 그름, 선과 악으로 끊임없이 가치매김하는 것을 뜻한다.
계속 가치를 판단하고, 분류하고, 딱지 붙이고, 분석한다면 당신은 마음속의 대화에 많은 혼란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렇게 혼란이 생기면 당신과 순수 잠재력의 장 사이의 에너지 흐름은 막혀버린다. 당신은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새를 그야말로 꽉 막아버리는 셈이다. 틈새는 순수 잠재력의 장과 당신 사이의 연결이다. 그것은 순수한 앎의 상태며, 생각과 생각 사이의 조용한 공간이며, 당신을 진정한 힘에 이어주는 내적 고요함이다. 그 틈새를 막아버리면 당신은 순수 잠재력의 장과 무한한 창조력에 다다를 수 있는 끈을 없애버리는 셈이 된다.
(기적의 코스 A Course in Miracles)라는 책에 이런 기도가 나온다. `오늘 나는 일어나는 어떤 일도 판단하지 않으렵니다.` 판단하지 않으면 마음속에 고요함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당신의 하루를 그러한 다짐으로 시작하려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하루 종일, 당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판다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이 다짐을 생각하라. 하루 종일 이 과정을 실천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겠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비판단을 체험해보겠다.` 그렇게 하면 그것을 차츰차츰 확신시킬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을 통해, 명상을 통해, 또 비판단을 통해 당신은 첫번째 법칙인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지킬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이 실천에 네 번째 요소를 덧붙일 수 있다. 그것은 `규칙적으로, 시간을 들여 자연과 직접 사귀어보는 일`이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면 당신은 삶의 모든 요소들과 힘들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느끼게 되고, 삶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시냇물이든, 숲이든, 산이든, 호수든, 해변이든 관계없이 자연의 지성과 그렇게 이어지면 순수 잠재력의 장에 도달하는 데 도둠이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조재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참된 본질과 접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참된 본질은 헛자아 너머에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 없으며, 자유로우며, 비판에 대해 면역되어 있고, 어떠한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으며, 마술과 신비와 매혹이 가득하다.
당신의 참된 본질에 도달하면 당신은 관계의 거울을 통해 통찰력을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관계는 결국 당신이 당신 자신과 맺는 관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죄의식, 두려움, 돈이나 성공에 대한 불안 또는 그 밖의 어떤 문제에 대한 불안감을 갖는다면 이는 당신이 지닌 인성의 바탕을 이루는 죄의식, 두려움,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성공을 했다 해도 존재의 이 기초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참된 치유는 오직 자기 자신과 가까워짐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당신이 당신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앎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다시 말해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진실로 이해했을 때 당신은 절대로 죄의식이나 두려움, 또는 돈이나 풍요나 소원성취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물질적 부의 본질이 생의 에너지요, 그것이 순수 잠재력임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 잠재력은 당신 안에 깃들인 본성이다. 점차 참된 본성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서 당신은 또한 저절로 창조적 사고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 잠재력의 장은 또한 무한한 창조력과 순수 지식의 장이기도 하므로.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당신의 방을 떠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책상에 앉아 귀를 기울이라.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다. 그저 기다리라.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저 고요하고 잠잠하고 고독해지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세상은 당신에게 거리낌없이 몸을 맡겨 제 참모습을 드러내보일 것이다. 세상은 아무런 선택도 할수 없다. 세상은 당신 발치에서 황홀경에 빠져 뒹굴 것이다.“
우주의 풍요, 그 아낌없는 내보임과 풍부함은 자연의 창조적 심성의 표현이다. 당신의 자연의 심성에 맞춰 조율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당신은 자연의 가없고 매임없는 창조
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은 당신 마음속 대화의 혼란스러움을 뛰어넘어야만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무한하고 창조적인 심성과 연결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영원하고 매임없고 창조적인 심성의 고요함을 지닌 채로 기운찬 활동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고요하고 매임없고 영원한 심성과 역동적이고 유한하며 개인적인 심성이 이렇게 기막히게 합쳐지면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정과 동의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정과 동이라는 반대방향이 공존하게 되면 당신은 상황, 맥락, 사람, 사물 들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이 반대항의 절묘한 공존을 조용한 마음으로 인정할 때 당신은 에너지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에너지 세계란 물질계의 원천이 되면서 그 자신은 물질이 아니고 재료도 아닌 양자 수프 quantum soup를 말한다.
이 에너지 세계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이며 신축성이 있고 변화하며 언제나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또 변함이 없고 잠잠하고 고요하며 영원하고 조용하다.
단지 고요함만으로는 창조성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움직임만으로는 창조성이 표현되는 어느 한 측면일 따름이다. 그러나 정과 동이 결합되면 당신의 창조성을 모든 방향으로 자유로이 해방시킬 수가 있다. 당신의 주의력이 어디로 끌리든 말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활동하면서 어디를 가든, 당신의 잠잠함을 늘 당신 안에 지니고 다녀라. 그러면 당신이 창조성의 저수지, 즉 순수 잠재력의 장에 다가가는 걸음을 당신 주위의 혼돈스런 움직임이 결코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
나는 `순수 잠재력의 법칙`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 단계를 밟기로 한다.
(1) 나는 매일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단지 존재하는 데 시간을 들임으로써 순수 잠재력의 장과 접촉한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약 30분씩 홀로 앉아 고요히 명상한다.
(2) 나는 매일 시간을 내어 자연과 사귀고, 살아 있는 만물 속에 깃들인 지성을 조용히 지켜본다.
나는 조용히 앉아 지는 해를 지켜보거나, 대양이나 시냇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저 꽃내음을 맡을 것이다.
나 자신의 침묵의 황홀경 속에서, 또 자연과의 사귐을 통해서 나는 여러 시대의 삶의 고동, 순수 잠재력의 장과 한없는 창조성을 즐길 것이다.
(3) 나는 비판단을 실천에 옮긴다.
다음과 같은 다짐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오늘 나는 일어나는 어떤 일도 판단하지 않겠다.`
하루 종일 나는 판단하지 말자는 다짐을 되새길 것이다.
제2장 줌의 법칙
우주는 역동적 교환을 통해 가능한다... 주고받음은 우주의 에너지 흐름의 여러 측면들이다. 우리가 찾는 것을 기꺼이 주고자 할 때 우리는 삶 속에 돌고 도는 우주의 풍요로움을 지키게 된다. 당신이 거듭거듭 비우시는, 그리고 싱싱한 삶으로 가득 채우시는 연약한 이
그룻. 당신이 언덕으로 골짜기로 갖고 다니시며 영원토록 새로운 선율을 불어내신 이 작은 갈입 피리...
당신의 무한한 선물들은 오직 작디작은 저의 손을 통해서만 제게로 전해집니다. 세월은 흐르고 아직도 당신은 쏟아부으시나, 그래도 여전히 채울 자리는 남습니다.
-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기타잘리`
성공을 부르는 마음의 법칙 중 두 번째는 `줌giving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주고받음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주는 역동적인 교환을 통해 기능하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몸은 우주의 몸과 기운차고 끊임없는 교환을 행하고 있다. 당신의 마음은 우주의 마음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당신의 에너지는 우주 에너지의 표현이다.
삶의 흐름은 바로 실존의 장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과 힘들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이다. 당신의 삶에서 온갖 요소들과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돈의 순환을 막는다면, 즉 우리의 유일한 의도가 돈을 꽉 움켜쥐고 쟁여놓는 것이라면, 돈이 삶의 에너지니만큼 우리는 돈이 다시 우리 삶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역시 막는 셈이 된다. 그 에너지가 계속 우리에게 오도록 하려면 에너지의 순환을 지속시켜 주어야 한다.
강물처럼 돈도 계속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체되고, 막히고, 그 고유의 생명력이 숨을 못쉬어 질식되기 시작한다. 돈은 돌고 돌아야 살아 있게 되고, 그래야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모든 관계는 주는 것 아니면 받는 것이다. 주면 받게 되고 받으면 주게 된다. 올라간 것은 내려오고 나간 것은 들어온다. 사실 받는 것은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줌과 받음은 우주 에너지 흐름의 다양한 측면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둘 중 하나의 흐름을
막는다면, 당신은 자연의 지성을 교란하는 셈이다.
모든 씨앗 속에는 수천 개의 숲의 약속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씨앗은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 씨앗은 기름진 땅에 그 지성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주게 되면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흘러 물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주면 줄수록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줌으로써 우주의 풍요한 흐름을 당신의 삶 속에 순환시키는 것이 되므로, 사실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때만 불어난다. 주는 행위를 통해 불어나지 않는 것은 줄 가치도 받을 가치도 없다.
만일 주는 행위를 통해 당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느낀다면 그때는 선물을 주었어도 참으로 준 것이 아니며, 준 것은 불어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마지못해서 준다면 그 주는 행위 속에 아무 에너지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주고받는 행위 뒤에 숨은 의도다. 그 의도는 언제나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어야 한다. 행복은 삶을 지탱하고 떠받치며, 따라서 불어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무조건 주고, 진심에서 우러나서 주면, 준 것에 비례하여 보답이 온다. 주는 행위는 그래서 즐거워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줄 때 마음의 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 안에서 당신이 주는 행위 자체로부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틀이어야 한다. 그러면 주는 행위 뒤에 숨은 에너지가 몇 배나 불어난다.
`줌의 법칙`을 실천하기란 아주 쉽고 간단하다. 즉 기쁨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라. 사랑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라.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주목하고 인정하라.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거든 다른 사람을 물질적으로 풍부하
게 도우라.
사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돕는 것이다. 이 원칙은 개인이나, 회사나, 사회나, 나라에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 당신이 삶의 온갖 좋은 것으로 축복받고 싶거든 세상의 온갖 좋은 것으로 모든 이를 조용히 축복해 주라.
준다는 생각, 축복한다는 마음가짐 또는 간단한 기도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몸이, 가장 본질적인 상태로 축소해 보면, 에너지와 정보로 된 이 우주에서 한 곳에 위치한 에너지와 정보의 다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적인 우주에서 한 곳에 모인 의식의 다발이다. `의식`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에너지와 정보 이상의 것이다. 의식은 생각으로서 살아 있는 에너지와 정보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는 우주 속에 있는, 생각의 다발들이다. 생각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삶은 의식의 영원한 춤이며, 그 춤은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 사람의 몸과 우주의 몸 사이, 사람의 마음과 우주의 마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성의 충동의 활기찬 교환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당신 이 찾는 것을 주는 법을 배우면, 당신은 생의 영원한 맥박을 자아내는 절묘하고 힘차고 생생한 움직임으로 이 춤에 활기를 불어넣고 춤의 동작을 안무해내게 될 것이다.
- 줌의 법칙`을 실행하려는 결심 -
`줌의 법칙`을 실행하는, 다시 말해 순환의 전 과정을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음과 같이 결심하는 것이다. `언제 누구와 접촉하게 되든,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결심 말이다.
이때 주는 것은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어도 좋다. 꽃일 수도, 칭찬일 수도, 기도일 수도 있다. 사실 주는 것 중에서 가장 힘있는 것은 결코 물질이 아니다. 즉 보살핌, 주목, 애정, 인정, 사랑이야말로 당신이 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선물들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것은 비용도 전혀 들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나면, 당신은 침묵중에 그에게 축복을 보내며 행복과 기쁨과 웃음을 기원해 줄 수 있다. 이렇듯 말없이 주는 행위는 대단한 힘을 지니다.
내가 어릴 때 배웠고 어른이 되어 내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갈 때는 꼭 무언가를 가지고 가라는 것이다. 누구를 방문할 때는 반드시 선물을 가지고 가자.
당신은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것도 모자라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겠는가?”
꽃을 가져가면 어떤가? 단 한 송이라도 좋다. 당신이 방문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담은 카드나 쪽지도 좋다. 칭찬을 선물로 주어도 좋다. 기도를 선물로 가져갈 수도 있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그에게 무언가를 주겠다고 결심하라. 다른 사람에게 주는 한 당신은 받고 있는 셈이다. 많이 줄수록 당신은 이 `줌의 법칙`의 기적적인 효과로 인해 더욱 많은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보다 많이 주는 당신의 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의 참된 본성은 풍부한 흐름, 즉 풍요다. 자연이 모든 필요와 욕망을 뒷받침해 주므로 우리는 본성상 풍요하다. 우리의 본성이 순수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이므로 우리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부자건 가난하건간에, 모든 부의 원천이 순수 잠재력의 장이므로 이미 풍요를 타고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식의 기쁨, 사랑, 웃음, 평화, 조화, 지식을 포함하는 모든 욕구를 실현하는 법을 알고 있다.
당신이 만일 이런 것들을 제일 먼저 찾는다면 (단지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저절로 당신에게로 올 것이다.
- 줌의 법칙`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
나는 `줌의 법칙`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 단계를 밟기로 한다.
(1) 나는 어딜 가서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에게 선물을 갖다 주겠다. 이 선물은 칭찬일 수도 있고, 꽃이나 기도일 수도 있다. 오늘 나는 내가 접촉하는 모든 이에게 무언가를 줄 것이다. 그리하여 삶에서 기쁨과 부와 풍요를 순환시키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2) 오늘 나는 살밍 내게 줄 수 있는 모든 선물을 감사히 받는다.
햇빛,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봄의 소나기, 겨울의 첫눈 등 자연이 주는 선물을 기꺼이 받을 것이다. 또한 선물이든 돈이든 찬사든 기도든,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 일에 마음을 활짝 열어놓겠다.
(3) 나는 삶의 가장 귀중한 선물인 보살핌, 애정, 인정, 사랑의 선물을 주고받음으로써 내 삶에서 부를 계속 순환시킬 것을 다짐한다.
나는 누구를 만날 때마다 조용히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과 웃음을 기원해 줄 것이다.
제3장 업의 법칙
모든 행위는 에너지의 힘을 자아내고, 그 힘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행복과 성공을 주는 행위를 선택할 때 우리의 덥은 행복과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업은 인간 자유의 영원한 주장이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우리가 우리 주변에 던지는 그물의 실들이다.
- 스와미 비베카난다
성공을 부르는 마음의 법칙중 세 번째는 `업의 법칙`이다.
업은 산스크리트 어로 `카르마 Karma`라고 하는데, 이 말은 행위와 그 결과를 함께 일컫는다.
업이란 원인인 동싱에 결과다. 모든 행위는 에너지를 낳고 그 에너지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업의 법칙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격언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살면서 행복을 만들어내고 싶다면 행복의 씨를 뿌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업이란 의식적인 선택의 행위를 뜻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끝없는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모든 가능성의 장 속에 놓이게 되며, 그 안에서 무한한 선택의 기회와 마주친다. 이 무한한 선택 중 어떤 것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업의 법칙을 이해하고 최대한 활용하는 비결은 매순간의 선택에 대해 분명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좋든 싫든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우리가 과거에 한 선택의 결과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선택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택은 분명 선택이다.
만일 내가 당신을 모욕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마음 상해하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을 칭찬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기분 좋아하거나 으쓱해하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어는 쪽이든 이 모든 것이 다 선택이다.
내가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으쓱해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신은 마음 상해하지 않는 편을 선택할 수도 있고 또 나의 칭찬에 우쭐해하지 않는 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은 (비록 무한한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는 해도) 조건반사의 다발이 되어버려서, 사람들과 상황에 의해 계속 자극을 받아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게 된다. 여기서 조건반사란 파블로프가 말한 조건화와 같다. 종이 울릴 때마다 번번이 먹을 것을 주면 개는 종이 울릴 때마다 침을 흘리기 시작한다. 하나의 자극을 다른 자극과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건화된 결과 우리들 대부분은 주위 환경이 주는 자극에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우리의 반응은 사람들과의 이런저런 상황에 의해 자동적으로 일어
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한 반응들이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며 매순간 하는 선택들임을 우리는 잊어버리곤 한다. 단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선택들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선택을 할 때 잠시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서 지금 하고 있는 선택을 주시한다면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의식의 영역에 이르는 전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주시하는 절차는 큰 힘이 된다.
어떤 선택이든 선택을 할 때는 다음 두 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첫째는 “내가 하는 이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가?”이다. 그 답은 마음속으로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내가 하는 이 선택이 나와 내 주위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이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 선택을 밀고 나가라.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면, 즉 그 선택이 당신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준다고 판단되면 그 선택을 하지 말라.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매순간 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 중에서 당신과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그 단 하나뿐인 선택을 하게 되면 자발적이고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발적이고 올바른 행동이란 합당한 순간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건 이것이 정답이다. 이런 행동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행위에 영향받는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때 우주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돕는 흥미있는 장치가 있다. 이 장치는 몸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느낌과 관련된다. 하나는 편안한 느낌이요, 다른 하나는 불편한 느낌이다.
의식적으로 선택을 하는 순간 당신의 몸에 주의를 기울이고 몸에게 물어보라.
“내가 이런 선택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몸이 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오면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오면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편안함과 불편함의 메시지는 간혹 어떤 사람들에게는 태양신경총 solar plexus의 영역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마음의 영역에 있다. 의식적으로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마음에게 물으라. 그리고 감각의 형태로 오는 신체 반응인 대답을 기다리라. 그것은 아주 미미한 수준의 느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느낌은 분명히 당신의 몸 속에 있다.
오직 마음만이 올바른 대답을 알고 있다. 마음이란 무르고 감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마음은 직관적이고 전체를 보며, 상황 판단을 잘 하고, 관계를 파악한다. 마음은 이기느냐 지느냐를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마음은 우주의 컴퓨터를 두드린다. 우주의 컴퓨터란 순수 잠재력, 순수 지식, 무한한 조직력의 영역이다.
마음은 모든 것을 헤아린다. 마음은 때로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사고의 한계 안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정확한 계산 능력을 갖고 있다. 당신은 업의 법칙을 이용하여 부와 풍요를 이루어낼 수 있으며, 온갖 좋은 것이 언제든 당신에게로 밀려들게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살면서 매순간하는 선택들이 모여서 당신의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바탕 위에서 이렇게 해나간다면, 당신은 `업의 법칙`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된다.
당신이 선택을 의식적인 앎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면 끌어 올릴수록 자신을 위해서나 주위 사람을 위해서나 자발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지난날의 업을 성공의 열쇠로 -
그러면 지난날의 업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가?
지난날의 업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다.
첫째는 업이 지은 빚을 갚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편을 선택한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이다. 이 또한 앞에서 말한 당신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이 빚을 갚자면 때로는 많은 괴로움이 따르겠지만, 업의 법칙상 이 우주에 갚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빚이란 없다. 이 우주에는 완벽한 정산 체계가 갖춰져 있어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들고나면서 to and fro` 교환되는 에너지인 것이다.
둘째는 당신의 업을 좀더 바람직한 체험으로 바꾸는 것이다. 업으로 진 빚을 갚으면서 `이 체험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러한 일은 왜 일어나며, 우주가 이를 통해 내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러한 경험을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회의 씨앗을 찾아 그 씨앗을 당신의 달마 Dharma(삶의 목적)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업을 새로운 표현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나올 일곱 번째 법칙인 `달마의 법칙`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하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면, 당신은 스스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 경험에서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우주가 내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때의 메시지는 아마도 행동의 속도를 늦추고 다음번에는 좀더 몸조심을 하라는 내용일 것이다. 만일 당신의 달마가 당신이 아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이 경험을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쓸모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봄으로써, 그 결과로 안전하게 운동하는 법에 관한 책을 써서 당신이 배운 바를 다른 사람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부상을 예방하는 특수한 신발이나 보조장치를 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업의 빚을 갚으면서 동시에 역경을 이로운 일로 전환시켜 부와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즉 어을 긍정적인 체험으로 바꾸는 것이다. 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업에 얽힌 일화 하나를 취하여 새롭고 긍정적인 업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섯째는 업을 초월하는 것이다.
업을 초월한다는 것은 업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한다는 뜻이다. 업을 초월하는 방법은 앞에서 말한 `틈새와`와 `참자아`와 `정신`을 계속해서 체험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더러운 옷을 흐르는 물에 빠는 것과도 같다. 빨래를 할 때마다 때는 조금씩 빠진다. 자꾸 빨면 빨수록 옷은 조금씩 조금씩 깨끗해진다. 틈새 속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다시 빠져나옴으로써 업의 씨앗을 깨끗이 없애버리거나 초월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명상의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
모든 행위는 업이 자아내는 일화들이다. 하다못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도 그렇다. 행위는 기억을 낳고, 기억은 욕망을 낳고, 욕망이 다시 행위를 낳는다. 당신의 영혼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업과 기억과 욕망이다. 당신의 영혼은 이 세가지 씨앗을 품고 있는 의식의 다발인 것이다.
이처럼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 씨앗을 의식함으로써 당신은 현실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은 스스로와 주위 사람들을 발전시키는 행위들을 만들어가게 된다. 이렇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참자아를 위해서나 참자아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를 위해서나 업이 발전적인 쪽으로 가는 한, 업은 행복과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 `업의 법칙`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
나는 `업의 법칙`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 단계를 밟기로 한다.
(1) 나는 오늘 매순간의 선택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선택들을 다만 지켜보기만 하면서, 본 것을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미래의 어는 순간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를 완전히 의식하는 것임을 명심하겠다.
(2) 선택을 할 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선택의 결과는 무엇인가?”
“나의 이 선택이 나에게, 그리고 이 선택으로 영향을 받을 사람들에게 성취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가?”
(3) 그 다음에는 마음에게 나를 이끌어달라고 부탁하고, 마음이 보내는 편함과 불편함의 메시지에 나를 맡긴다. 선택이 편안하게 느껴지면 마음 턱 놓고 곧 앞으로 나아간다. 불편하게 느껴지면 잠시 멈추고 마음의 눈으로 내 행위의 결과를 본다.
이렇게 무슨 일이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다면 나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최소 노력의 법칙
자연의 지성은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무심과 조화와 사랑으로 움직이낟...
조화와 기쁨과 사랑의 힘을 동원할 때 우리는 쉽게 성공과 행운을 빚어내게 된다.
완전한 존재는 가지 않아도 알며, 눈여겨보지 않아도 보며, 일부러 하지 않아도 이룬다.
- 노자
성공을 부르는 마음의 법칙중 네 번째는 `최소 노력의 법칙`이다.
이 법칙의 바탕이 되는 사실은, 자연의 지성이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그리고 신경 쓰지 않고 무심히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최소 행위의 법칙이며 무저항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조화와 사랑의 법칙이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이 법칙을 배우게 되면 원하는 바를 쉽사릴 성취할 수가 있게 된다.
자연이 돌아가는 모습을 찬찬히 관찰해 보면 그 안에는 가장 적은 힘, 즉 최소의 노력이 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풀은 자라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냥 자라고, 꽃은 피어나려고 애쓰지 않아도 핀다. 물고기는 헤엄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헤엄칠 뿐이다. 새들은 날려고 애쓰지 않아도 난다. 이것이 그들의 본성이다.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돌려고 애쓰지 않는다. 지구의 본성은, 눈이 핑핑 돌 만큼 빨리 자전하면서 우주 공간 속을 돌진하듯 공전하는 것이다.
벙긋벙긋 웃으며 기뻐하는 것은 아기의 본성이다. 환히 빛나는 것은 태양의 본성이다. 반짝이는 것은 별의 본성이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쉽게, 힘 안 들이고 구제적인 형태로 이루어내는 것은 또한 인간의 본선이다.
인도의 오래된 철학인 베다 학문 Vedic Science에서는 이 법칙이 `노력 아끼기`의 원칙으로, 또는 `적게 행하고 많이 이루기`의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당신은 아무 일 안 하고도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단지 미미한 아이디어만 있으면, 그 아이디어는 힘들이지 않고도 실현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최소 노력의 법칙`의 다른 표헌이다.
자연의 지성은 힘들이지 않고, 마찰 없이, 자발적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단선적이 아니며 직관적이고, 전체론적 holistic이며 자양을 준다. 당신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참자아에 대한 자각이 굳건히 확립되어 있을 때 당신은 `최소 노력의 법칙`을 활용할 수 있다.
당신의 행위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일 때, 바로 이때 최소의 노력이 소요된다. 왜냐하면 자연은 사랑의 에너지에 의해 하나로 지탱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행사하려 하고 그들을 통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된다.
당신이 헛자아를 위해 돈이나 권력을 찾는다면, 당신은 현재의 행복을 즐기는 대신 행복의 환상을 좇느라 에너지를 쓰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단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만 부를 추구한다면, 당신 자신에게 흘러드는 에너지의 흐름을 끊음으로써 자연의 지성이 표현되지 못하게끔 훼방놓는 셈이다.
그러나 당신의 행위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일 때는 에너지의 낭비란 없다. 사랑이 행위의 동기가 되면, 당신의 에너지는 불어나고 쌓인다. 그리하여 당신이 모아들이고 누리는 잉여 에너지가 변화하여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라도, 무한한 부까지도 창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몸을 에너지 통제의 수단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몸은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쌓아두고, 쓴다. 만일 당신이 효울적으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쌓아두고 쓰는 법을 알게 된다면 태산 같은 부라도 창출할 수 있다.
헛자아가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를 써버린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당신 마음속의 기준이 헛자아라면, 그리하여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힘을 행사하거나 그들을 통제하려 한다면, 당신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에너지는 자유로이 해방되었을 때 새롭게 제길을 찾아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만들어낼 수가 있다. 당신 마음속의 기준이 당신의 정신일 때, 당신이 비판에 대한 면역성을 갖추고 어떠한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당신은 사랑의 힘을 잘 동원하여 에너지를 창조적
으로 사용함으로써 풍요와 발전을 경험할 수 있다.
(꿈꾸는 기술 The Art of Dreaming)에서 돈 후안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 우리 에너지의 대부분은 위신을 유지하는 데 소모되고 있다... 우리가 그 위신이라는 것을 좀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두 가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첫째, 자기가 위대하다는 덧없는 생각을 고집하느라 안간힘을 쓰지 않고 우리의 에너지를 탁 풀어주게 될 것이다.
둘째, 지금 이 순간 우주의 위대함을 한눈에 포착할 만한 에너지를 스스로 공급하게 될 것이다.“
- 받아들이자, 책임지자, 방어하지 말자 -
`최소 노력의 법칙`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적게 행하고 많이 이루기`의 원칙을 실천하려면 이 세 가지를 실행해보면 된다.
`최소 노력의 법칙`의 첫째 요소는 `받아들임`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저 이렇게 다짐한다는 뜻이다. “오늘 나는 사람들과 상황과 주위 사정들을 부딪치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이 말은 `이 순간이 바로 이래야 할 순간`임을 명심하겠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전 우주의 현재 모습이 바로 그래야 할 모습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체험하는 이 순간은 과거에 체험했던 모든 순간들의 정점이다. 전 우주가 있는 그대로의 우주이므로, 지금 이 순간은 있는 그대로의 순간인 것이다.
당신이 이 순간에 맞서 싸우면, 사실은 전 우주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하는 대산, 이렇게 결심해 보자. `오늘, 이 순간에 맞서 싸움으로써 전 우주에 대항하는 몸짓을 보이지 않겠다`고. 이는 당신이 이 순간을 `받아들임`이 전적이며 완벽하다는 뜻이다.
사물을 당신이 이 순간 바라는 상태대로가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당신은 일들이 앞으로 달라지기를 `바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순간 당신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나 상황 때문에 좌절감이나 속상함을 느낄 때는, 당신의 현재 반응이 그 사람이나 상황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향한 것임을 기억하라.
이는 `당신의` 감정이며, 당신의 감정은 당신 말고 그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하고 이해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느끼는 방식에 책임을 지고 그 방식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상황과 자신이 문제라고 보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최소 노력의 법칙`의 둘째 요소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최소 노력의 법칙`의 둘째 요소는 `책임짐`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상황에 대해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상황, 이 사건,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때 책임이라는 말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창조적인 반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게 된다.
모든 문제는 기회의 씨앗을 담고 있고, 이것을 알면 당신은 그 순간을 포착해서 그것을 보다 나은 상황이나 사물로 바꾸어 놓을 수 있게 된다. 일단 이렇게 되면 이른바 `마음 상하는` 상황은 모두 새롭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소위 `괴롭히는 자`나 독재자는 모두 당신의 스승이 된다.
현실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현실을 내가 말한 식으로 해석하기를 선택했다면 주위에 여러 스승들을 갖게 될 것이며, 발전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
독재자나 괴롭히는 자, 또는 스승, 친구, 척(결국 이들 모두는 같은 의미다)과 마주할 때면 언제나 `이 순간은 당연히 이래야만 하는 순간이다`라고 생각하자.
당신이 살아가면서 방금 이 순간에 어떤 관계를 맺었든, 그 관계는 삶에서 이 순간 당신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관계인 것이다. 모든 사건들 뒤에는 숨은 뜻이 있고, 이 숨은 뜻이 당신 자신의 발전을 돕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최소 노력의 법칙`의 셋째 요소로 쉬임없이 이어진다.
`최소 노력의 법칙`의 셋째 요소는 `방어하지 않음`이다. 이는 당신의 깨달음이 무방비성이라는 토대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당신은 자신의 관점을 내세워 다른 사람에게 확신을 준다거나 다른 사라믈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을 접었다는 뜻이다.
주위 사람들을 잘 관찰해 보라. 그들이 자기 시간의 99퍼센트는 스스로의 관점을 옹호하는 데 쓰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자기의 관점을 옹호해야 한다는 마음을 버리면, 그렇게 버림으로써 이제껏 낭비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찾게 될 것이다.
당신이 방어 태세를 취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이 순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당신의 삶은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저항에 부딪쳤을 때 당신이 상황을 억지로 몰고 갈수록 그 저항은 커질 따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당신은 폭풍우에 꺾여 넘어지게 될 키 큰 떡갈나무처럼 뻣뻣이 서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폭풍우에 휘면서도 살아남는 갈대처럼 유연하고 싶을 것이다.
당신의 견해를 지키려고 고집하기를 아예 그만 두라. 지켜야 할 쟁점이 없을 때는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말 일이다. 당신이 계속해서 이렇게 한다면, 즉 싸움과 저항을 멈춘다면 당신은 현재를 선물로서 충만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전에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과거는 이야기요, 미래는 수수깨끼며, 이 순간은 선물이다. 그래서 영어로 `현재`와 `선물`은 같은 단어인 것이다.”
당신이 현재를 끌어안고 현재와 하나가 된다면, 그래서 현재와 한데 어우러진다면 당신은 불과 활활 타오르는 빛, 목숨 있고 느낌 있는 모든 존재 속에서 퍼득이는 황홀경의 섬광을 체험할 것이다. 살아 있는 만물 안에서 이 정신의 환희를 체험하기 시작하고, 그것과 가까워짐에 따라 당신안에 기쁨이 태어날 것이며, 그러면 당신은 방어하고 화내고 상처를 주는 일 같은 끔찍한 짐과 장애물을 떨구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의 마
음은 가벼워지고 근심 없고 명랑하며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 즐겁고 소박한 자유 속에서 당신은 원하는 것은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행복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지, 걱정이나 두려움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굳이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그저 당신의 의사를 스스로에게 확실히 선언하기만 하라. 그러면 삶의 순간마다 성취, 환희, 기쁨, 자유, 자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무저항의 오솔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라. 이 길은 자연의 지성이 마찰 없이,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피어나는 길이다. 받아들임, 책임짐, 방어하지 않음, 이 세 가지 요소를 절묘히 조합할 때 당신은 애쓰지 않아도 삶이 수월하게 흐르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당신이 오직 한 견해에만 완고하게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견해에 대해 열려 있을 때, 당신의 꿈과 욕망은 자연의 욕망들과 함께 흐를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집착 없이 당신의 의도를 탁 풀어놓고, 당신의 욕망이 현실로 피어나기에 알맞은 계절을 기달릴 수 있을 것이다.
제철이 오면 당신의 욕망은 실현될 것임을 확신해도 좋다. 이것이 `최소 노력의 법칙`이다.
- 최소 노력의 법칙`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나는 `최소 노력의 법칙`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 단계를 밟기로 한다.
(1) 나는 `받아들임`을 실천하겠다.
오늘 나는 사람들, 상황들, 주위 사정들,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나는 `이 순간이 바로 이래야 할 순간`임을 안다. 왜냐하면 전 우주의 지금 모습이 바로 그래야 할 모습이므로. 나는 이 순간에 맞서 싸움으로써 전 우주에 대항하는 몸짓을 하지 않겠다. 나의 받아들임은 전적이며 완벽하다. 나는 사물을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2)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니, 나는 나의 상황과 내가 문제라고 보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책임`을 진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나의 상황에 대해 나 자신도 포함하여 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임을 나는 안다. 나는 모든 문제가 숨겨진 기회임을 알고, 이렇게 기회를 민감하게 알아챔으로써 이 순간을 붙들어 보다 유익하게 전환시킬 수 있다.
(3) 오늘 나의 앎은 무방비 상태다.
나는 나의 견해를 옹호할 마음을 버릴 것이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거나 확신을 불어넣을 필요도 느끼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견해에 대해 열린 상태로 있을 것이며, 그 견해 중 어떤 것에도 완고하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제5장 의도와 욕망의 법칙
모든 의도와 욕망에는 그 성취를 위한 역학이 내재한다...
순수 잠재력의 장 안에 있는 의도와 욕망은 무한한 조직력을 지니다.
우리가 순수 잠재력이라는 기름진 땅에 의도를 도입할 때 이 무한한 조직력을 우리를 위해 가동시킬 수 있다.
태초에 욕망이 있었다. 욕망은 마음의 첫번째 씨앗이었다. 현자들은 마음으로 명상하여, 존재와 비존재를 잇는 끈을 그들의 지혜로써 발견하였다.
- (리그 베다)중 `창조의 찬가`
성공을 부르는 마음의 법칙 중 다섯 번째는 `의도와 욕망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에너지와 정보가 자연의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양자장 quantum field의 수준에서 보면 오직 에너지와 정보밖에 없다.
양자장은 순수 의식과 순수 잠재력의 장을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이 양자장은 의도와 욕망의 영향을 받는다. 이 과정을 자세히 검토해 보자.
꽃, 무지개, 나무, 풀잎, 사람의 몸... 이 모두는 본질적 요소를 해체해 보면 에너지와 정보다.
전 우주는 그 본질이 에너지와 정보의 `움직임`이다. 사람과 나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 몸에 들어 있는 정보와 에너지의 내용일 뿐이다. 물질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사람과 나무는 모두 똑같이 재 순환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탄소, 수소, 산소, 질소, 그리고 다른 아주 작은 양의 원소들이 그것이다. 이런 원소들은 실험재료를 파는 상점에 가면 몇 푼 안 주고 살 수 있는 것들이다. 당신과 나무의 차이는 그러므로 탄소, 수소, 산소의 차이가 아니다.
사실 당신과 나무는 끊임없이 탄소와 산소를 서로 주고받고 있다. 사람과 나무 사이의 진정한 차이는 바로 이 에너지와 정보에 있다.
자연의 체계 속에서 당신과 나는 특권을 부여받은 종이다. 우리는 신경계를 갖추고 있어서, 우리의 몸을 지어내는 한 곳에 집중된 `장`의 에너지와 정보 내용을 그로써 알 수있다. 우리는 이 장을 우리 자신의 생각, 느낌, 정서, 욕망, 기억, 본능, 충동, 믿음 등과 같이 주관적으로 체험한다. 바로 이 장이 객관적으로는 육체로 체험된다. 그리고 육체를 통해 우리는 이 장을 세계로서 체험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현자들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며, 너도 그것이며, 이 모두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있는 모든 것이다.”
당신의 몸은 우주의 몸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자 역학 수준에서는 뚜렷이 규정된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파동이요 파도며, 출렁임, 나선, 소용돌이고, 보다 넓은 양자장 안에서 한 곳에 교란이 일어난 현상이다. 보다 넓은 양자장, 즉 우주는 당신의 확장된 몸이다.
인간의 신경계가 그 자신의 양자장의 정보와 에너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 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 놀라운 신경계를 통하여 인간의 의식이 무한한 융통성을 지니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몸을 지어내는 정보 내용을 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양자역학적 신체 에너지와 정보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바꿀 수 있고, 그럼으로써 당신의 확장된 몸인 환경과 세계의 에너지와 정보 내용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안에서 사물을 드러내보여 줄 수 있다.
이 의식적 변화는 의식에 내재하는 두 가지 특성인 `주의 attention`와 `의도 intention`에 의해 일어난다. 주의는 에너지를 주고, 의도는 이를 변환시킨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인 것은 무엇이건 당신의 삶 속에서 더 강해질 것이다. 반대로 무엇이건 당신이 그로부터 주의를 거두어들인다면 그것은 시들고, 해체되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의도는 에너지와 정보의 변환을 촉발한다. 즉 의도는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 조직해내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마음의 법칙`들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 주의의 대상에 관한
의도의 질 quality이 무한한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조화롭게 편성하여 의도했던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주의라는 기름진 땅에서는 의도가 무한한 조직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무한한 조직력이란 무한한 시공간 사건들을 모두 한꺼번에 짜맞출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우리는 이 무한한 조직력의 표현을 풀잎 한 잎 한 잎, 꽃 한 송이 한 송이, 우리 몸의 세포 한 개 한 개에서 본다. 살아 있는 만물에서 그것이 보이는 것이다.
자연의 체계 속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서로 연관되고 이어진다. 개구리가 땅 속에서 튀어나오면 우리는 봄이 올 것임을 안다. 새들은 매년 일정한 때가 되면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한다.
자연은 교향악이다. 그리고 그 교향악은 창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조용히 조화롭게 편성되고 있다.
우리 몸은 이 교향악의 또 다른 좋은 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는 그 하나가 1초당 약6조 가지의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세포는 다른 세포들이 같은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 몸은 동시에 음악을 연주하고, 병원균을 죽이고, 아기를 만들고, 시를 낭송하고, 별들의 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한한 상호 연관의 장이 우리 몸의 정보장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경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신경계가 의식적인 의향 intent을 통해 이 조직력을 통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향은 에너지와 정보의 엄격한 망 속에 고정되거나 갇혀 있지 않다.
의향은 한없이 융통성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자연의 다른 법칙들을 어기지 않는 한 당신은 의향을 통해 글자 그대로 자연의 법칙을 통제하여 꿈과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한한 조직력을 지닌 우주의 컴퓨터를 당신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다. 당신은 창조의 마지막 단계로 가서 의도를 입력할 수 있고, 그렇게 의도를 이력하기만 해도 무한한 상관 관계의 장은 활성화된다.
노력이 필요 없는, 자발적인, 마찰 없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드러난 상태로 표현되고 싶어하는 순수 잠재력의 흐름에 바탕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의도다.
여기에서 한 가지 말해둘 점은, 당신의 의향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성공을 부르는 마음의 법칙 일곱 가지`를 잘 지키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 의도의 힘을 이용하는 비결 -
의도는 욕망 뒤에 숨은 진정한 힘이다.
의향 하나만 놓고 보면 그 힘은 대단히 크다. 의향이란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만으로는 약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욕망이란 주의에 집착이 곁들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의향은 이 책에 나오는 다른 모든 법칙과 밀접하게 연결된 욕망이지만, 특히 여섯 번째 법칙인 `초탈의 법칙`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초탈(집착하지 않음)과 결합된 의도는 삶에 중점을 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앎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앎 속에서 행위가 이루어질 때 그 행위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 된다. 당신의 `의향`은 미래를 위한 것이지만 당신의 `주의`는 현재에 집중되어 있
다. 당신의 주의가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면 미래에 대한 당신의 의향은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미래는 현재 안에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의도하라. 당신은 집착하지 않는 의도를 통하여 언제나 미래를 창조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에 맞서 싸우려고 애쓰지 마라.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의식의 특성들이다. 과거는 회상이요 기억이며, 미래는 미리 내다봄이며, 현재는 앎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생각의 움직임이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상상 속에서 태어난다. 오직 앎인 현재만이 실재하며 영원하다.
현재는 있다. 현재는 시공간, 물질, 에너지를 위한 잠재력이다. 현재는 그 자체로서 추상적인 힘으로 체험되는 영원한 가능성의 장이다. 그 추상적 힘이 빛이든, 열이든, 전기든 자력이든 중력이든 말이다. 이러한 힘들은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미래에 존재 하는 것도 아니다. 이 힘들은 그저 지금 여기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추상적 힘을 해석하면 구체적인 현상과 형태를 체험할 수 있따. 추상적 힘을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해석하면 과거의 체험이 만들어지고, 같은 추상적 힘을 앞을 내다보면서 해석하면 미래가 만들어진다. 추상적 힘들은 의식 속의 주의가 지닌 특질들이다. 이러한 특질들이 과거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이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현재의 행위는 미래를 만들어내는 기름진 토양이 되는 것이다.
현재의 집착하지 않는 자유에 바탕을 둔 의도는 물질, 에너지, 시공간 사건들이 적절하게 섞이도록 촉매제 역할을 함으로써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창조하게끔 해준다.
만일 당신이 삶에 중심을 둔 `지금 이 순간`의 앎을 지니고 있다면, 실제로 우리가 인지하는 장애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상상 속의 장애들은 부서져 사라져버린다. 인지된 장애들 중 나머지 5-10퍼센트는 한 점을 지향하는 의도에 의하여 기회로 전환될 수 있다.
한 점을 지향하는 의도란 한번 정해진 목적을 굽히지 않는 주의의 특질이다.
한 점을 지향하는 의도란 당신의 주의를 뜻한 바 결과에 집중시키되 꺾임 없는 목적을 갖고, 그리 함으로써 당신이 기울인 주의의 집중성이 절대로 장애물을 만나 흐트러지거나 무너져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의 의식으로부터 장애란 장애는 모조리, 완벽하게 추방하는 것이다. 당신은 강력한 열정을 갖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평정을 유재할 수 있다. 집착하지 않는 앎과 한 저에 집중된 의도가 동시에 발휘하는 힘이 바로 이것이다.
의도의 힘을 잘 이용하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당신이 워하는 어떤 것이든 창조할 수 있다. 분투 노력을 통해서도 성과는 얻어질 수 있으나, 그러려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스트레스, 심장 발작, 면역 체계의 기능 장애 등이 그 대가다.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 위하여 다음에 제시하는 것과 같은 다섯 단계를 밟아가면, 당신의 의도가 특유의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1) 틈새 속으로 살며시 미끄러져 들어라라. 생각과 생각 사이의 그 고요한 공간에 중심을 잡고, 침묵, 즉 당신 본연의 상태인 그 `존재`의 경지속으로 푹 잠겨들라.
(2) 그러한 `존재`의 경지에 자리잡게 되면 당신의 의도와 욕망을 탁 풀어놓으라.
당신이 현재 그 틈새 속에 있다면, 아무 생각도 아무 의도도 없게 된다. 그러나 그 틈새에서 빠져나오면, 즉 틈새와 생각 사이의 그 경계에 있게 되면, 그때 의도를 도입시키라. 당신에게 일련의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글로 적어, 틈새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신의 의도의 초점을 그 목표에 맞춰 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당신이 사회 생활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의도를 갖고 틈새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의도가 이미 거기에, 당신의 앎 속에서 어렴풋이 깜박이고 있을 것이다. 의도와 욕망을 틈새 속에 풀어놓는다는 것은 그것들을 손수 잠재력이라는 기름진 땅에 심는 것, 그래서 제철이 왔을때 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잘 자라고 있는지 본답시고 욕망의 씨앗을 땅 속에서 파내보거나 하면 안 된다. 또 그 씨앗들이 어떻게 꽃을 피우는지, 그 방식에 무작정 집착해서도 안 된다. 단지 그것들을 탁 풀어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3) 자기조회의 경지에 머무르랴.
당신의 참자아, 즉 당신의 순수 잠재력의 장에로의 이어짐을 아는 그 경지에 차분히 머물러 있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을 보되 세상의 눈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비판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뜻도 된다. 그러한 자기조회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결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만 간직하는 것이다. 당신과 똑같은 욕망을 함께 지니고 있으면서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 누구와도 욕망을 함께 나누지 말라.
(4)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 이 말 뜻은 특별한 결과를 얻겠다는 고지식한 집착을 단념하고 불확실성의 지혜 속에 살라는 것이다. 삶이라는 여행길에서 비록 결과를 모른다 해도 그 순간순간을 즐기라는 것이다.
(5) 세세한 부분들은 우주의 뜻에 맡기라.
당신의 의도와 욕망이 틈새 속에 풀어지면 그것들은 무한한 조직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세부 사항들을 당신을 위해 조화롭게 편성해 주는, 의도의 그 무한한 조직력을 믿으라. 당신의 참본성은 순수 정신임을 기억하라. 어디를 가든 당신의 정신을 의식하고 다니며, 당신의 욕망을 가만히 풀어놓으라. 그러면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우주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 의도와 욕망의 법칙`을 실행활에 적용하기 -
나는 `의도와 욕망의 법칙`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 단계를 밟기로 한다.
(1) 나는 내 모든 욕망을 목록으로 작성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이 목록을 가지고 다닌다. 나는 침묵과 명상 속으로 들어가지 전에 이 목록을 볼 것이다.
밤에 자기 전에도 볼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이 목록을 볼 것이다.
(2) 나는 내 욕망을 적은 이 목록을 해방시켜 창조의 모태에 바칠 것이다. 일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며, 우주의 큰 뜻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원대한 의도를 나를 위해 품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3) 나는 모든 행위를 함에 있어 `지금 이 순간 알기`를 실천하자고 스스로를 깨우칠 것이다. 나는 장애물들이 지금 이 순간 나의 주의를 하잘것없는 것으로 만들거나 무로 돌려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나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며, 나의 가장 깊고 간절한 의도와 욕망을 통해 미래를 드러내보일 것이다.
제6장 초탈의 법칙
초탈 속에 불확실성의 지혜가 있다...
불확실성의 지혜 속에 옛 조건의 감옥인 지난날로부터의 자유, 알려진 사실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모든 가능성의 장인 미지의 세계로 기꺼이 발을 내디딜 때 우리는 우주의 춤을 조화롭게 편성하는 창조 정신에 승복하게 된다.
한 나무에 앉은 두 마리 황금새처럼, 헛자아와 참자아는 한 몸 속에 사는 절친한 친구. 헛자아는 삶이라는 나무의 달고 신 열매를 먹지만, 참자아는 초탈 속에 지켜볼 따름이다.
- 문다카 우파니샤드
성공을 부르는 마음의 법칙 중 여섯 번째는 `초탈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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