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종일 시장 뒤져 3000원 벌이… 폐지 팔아선 입에 풀칠못해”
“45㎏, 4000원!”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노인들이 저울 앞에 한줄로 길게 늘어서 하루 품삯을 받는다. 더러는 리어카가 주저앉을 정도로 산더미 같은 폐지를 모아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조그만 손수레에 담아온 신문더미와 종이 박스 몇 개가 전부다. 새벽잠을 설쳐가며 모은 폐지로 받은 1000원짜리 몇장을 허리춤에 넣은 노인들은 엉덩이를 붙일 새도 없이 다시 폐지 모으러 시장으로 향한다. 이들에게는 여생이라는 개념이 없다. 오늘 먹을 저녁 찬거리를 위해, 몸져 누운 자식을 위해 폐지를 모아야 한다. 바닥을 쓸던 손은 갈퀴처럼 앙상해졌고 하루에도 수천번씩 굽혔다 펴야 하는 무릎은 망가져가고 있다. 배우지 못해서, 남들만큼 약지 못해서 고생한다는 노인들은 그래도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몸 건강히 일할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지난 10일과 12일 두차례에 걸쳐 서울 용산과 마포구 아현시장에서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 4명을 만나 고단한 그들의 일상을 들어봤다.
# 몸 성할 때 한푼이라도 벌어야
사회(이호준 기자)=왜 폐지수집 일을 하십니까. 자식들이 생활비를 주지 않나요.
박병임=아파트에서 막내아들과 같이 삽니다. 다른 자식들은 다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지만, 막내아들이 몸이 아파서 저랑 같이 삽니다. 저마저 없으면 누가 아들 밥 챙겨주고 합니까.
장봉순=올해 35살인 막내아들이 아직 결혼을 안해서 같이 살아요. 아들은 빌딩 청소일을 하고 있는데 요즘 벌이가 좋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그래도 밥도 해줘야 하고 빨래도 해줘야 하고 뒤치다꺼리 할 게 많아요. 하지 말라고 해도 집에서 놀고 있을 수만은 없지요.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양순용=올 봄에 상처하고 지금 빌라에서 혼자 삽니다. 예쁜 며느리도 둘이나 있어요. 얘네들이 같이 살자고 하지만 제가 불편해요. 여름에 더워서 웃통이라도 벗을라치면 눈치보이고 며느리도 그런거 편하지만은 않잖아요. 외롭고 적적하지만 아직까지 혼자 지낼 수 있으니까 혼자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이렇게 지내려고 합니다. 계속 일을 해왔었고 또 이거 안하면 다른 일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공과금하고 담뱃값은 제가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거예요.
민병언=딸하고 손녀들하고 같이 삽니다. 이렇게 벌어서 혼자 살 수는 없어요. 딸이 사업을 하고 있어서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저도 벌 수 있으면 버는 거죠. 그래도 돈 많이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폐지 수집한다고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때는 화가 납니다. 얼마전에는 그냥 지하철역 앞을 지나가는데 무가지 나눠주는 사람이 저더러 신문 훔쳐간다면서 막말을 하더군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오해를 받으니 정말 괴로웠습니다.
# 3000원 벌기 위해 하루종일 일해
사회(이호준기자)=하루 벌이가 얼마나 되십니까.
박병임=하루에 폐지 한번 수집하면 ㎏당 85원 정도 받습니다. 대중없지만 하루에 3000원 벌 때도 있고, 4000원 벌 때도 있어요. 몸이 아파서 다른 일은 못해요. 그나마 ㎏당 35원이던 폐지값이 요즘 많이 올라서 조금 나아요. 그러나 이걸로 생활비는 안돼요. 라면이라도 사먹을 수 있고, 그냥 놀 수 없으니 일하는 거죠. 막내아들(60)하고 같이 사는데 막내도 몸이 안좋아서 지금 일을 못합니다.
장봉순=7000원에서 1만원 정도가 하루 벌이입니다. 그나마 이렇게 1만원이라도 벌어야 라면도 사고 계란도 사죠. 이틀이나 사흘 벌면 라면 한박스는 살 수 있어요. 만원짜리가 생기면 아들한테 주기도 하고….
양순용=아침 9시쯤 나와서 새벽 1시까지 폐지를 수집하면 2만~3만원 정도 법니다. 할머니들보다 저는 힘이 좀 있어서 많이 버는 편입니다. 그래도 생활비로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죠. 움직일 수 있으니 이렇게라도 움직여서 담뱃값이라도 벌어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나오는거죠. 이렇게 번 돈 한달 다 모아봐야 예전에 공사장에서 일할 때 이틀이나 사흘 일하고 벌었던 돈에는 못미쳐요. 형편없는 수입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민병언=500원도 벌고 3000원도 벌고 대중 없습니다. 지금 이 일을 16년째 하고 있는데 먹고 살려고 한다면 벌써 그만뒀을 겁니다. 예전보다 많이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1000원 벌면 손자들 우유도 사주고 빵도 사주고 그럴 수 있으니까 나와서 하는 겁니다.
# 늦은 밤까지 폐지 수집, 쉴틈없어
사회=하루 일과가 어떻게 됩니까.
박병임=오전 9시쯤 나와서 폐지 수집해서 오후 3시쯤 수거해가고 나면 내일 또 팔아야 할 폐지를 모아야 되니까 다시 일합니다. 저녁까지 또 모아둬야 내일 팔 분량이 생기기 때문에 쉴 수 없어요. 또 하루라도 쉬면 다른 사람들이 다 모아가 버리기 때문에 계속 시장을 돌아야 해요. 경로당이나 이런 데 가려면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안갑니다. 괜히 모여서 돈이나 써야 하는데 갈 수 없죠. 그냥 쉴 때는 집에서 가만히 누워 있어요.
장봉순=아침에 일어나서 폐지 수집하고 나면 또 폐지 수집하고…. 집에 돌아 가서 살림도 해야 되고… 시간이 없죠. 움직이면 돈들어가는데 따로 하는 일은 없습니다. 공원이나 경로당 가도 특별히 재미난 것도 없어요. 우리 같이 돈 없는 사람들은 그냥 일해서 한푼이라도 벌어야지요.
양순용=다른 데 한눈팔 시간이 어디 있어요. 아침에 밥 차려 먹고 일하러 나오면 새벽 1시까지 계속 일해요. 밥먹고 담배 한대 피우는 시간 말고는 쉴 수가 없지요. 여기도 경쟁이 심해서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그나마 박스라도 한개 더 챙길 수 있어요. 일요일에는 폐지 수거하는 사람들이 안나오지만 그날도 일을 해서 모아둬야 월요일에 팔 수 있는 폐지가 생깁니다. 밤에 집에 들어가면 빨래도 하고 밥도 지어놓고…. 다른 것 할 시간이 없어요.
민병언=저는 다리가 많이 아파서 일을 계속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동네 홍보관(건강식품 판매장)에 가서 낮에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홍보관에 가면 내 또래 사람들도 많고 공연도 하고 노래자랑도 하고 해서 재밌어요. 낮에 가보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또 젊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해주고…. 그만한 데가 없더라고요. 좋은 약도 파니까 저처럼 어디 아픈 사람들 식품도 사가고….
# 병원은 비싸서 엄두도 못내
사회=건강은 어떠십니까. 병원은 자주 가시나요.
박병임=돈이 없어서 안갑니다. 그런데 쓸 돈이 어디있습니까. 제가 환갑때까지 전주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다리가 망가졌는데, 그때 병원간 이후로 한번도 안갔습니다. 결국 그때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 농사일도 못하게 돼 서울로 올라온 거지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하지는 못했어요. 얼마나 비싼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번 가기가 겁납니다. 아프면 그냥 집에 누워있는 게 제일이에요.
장봉순=잘 먹고 잘 자면 건강한데 병원을 왜 갑니까. 병원 갈 일 있으면 좋은 것 먹고 푹 쉬고 하는 게 더 낫죠. 비싸서 엄두도 못냅니다. 병원 약값이 얼만데 돈을 씁니까.
양순용=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아프게 마련입니다. 병원에 간다고 낫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저는 나라에서 정기점검 해준다고 해서 두번인가 큰 병원 가서 진료 받았습니다. 그런데 형식적이라서 검사를 해도 아픈 데가 없다고 그래요. 피 뽑고 엑스레이 찍고 검사 여러번 했는데 제가 아픈 데가 있다고 해도 검사 결과는 안아프다고 나옵디다. 엉터리예요.
민병언=양약은 먹으면 속을 다쳐서 잘 안먹습니다. 대신에 홍보관에서 건강식품 28만원짜리 사서 계속 먹습니다. 병원에 가서 비싼 돈 주고 약먹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습니다. 저도 무릎을 심하게 다쳐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요즘 홍보관에서 약을 사먹고 조금 좋아졌습니다. 옛날에 다쳤을 때 돈이 있었으면 수술해서 완전히 낫게 했을 텐데 돈이 없어서 그렇게 못했어요. 인공관절 수술이 몇 천만원 한다는데, 500만원만 든다고 해도 빚을 내서 하고 싶어요. 그런데 워낙 비싸다보니 그냥 포기하고 사는 거죠.
# 보조금도 굽신거리며 받아야 하나
사회=정부의 노인복지 혜택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박병임=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신청하려고 해도 아들이 있어서 안된다, 가족이 있어서 안된다,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지금은 아예 그런 것 생각 안합니다. 나라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 같은 사람들 도와준다고 하는데, 전 아직 한번도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어요.
장봉순=저도 그런 지원 받아본 적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조건이 안된다. 지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이렇게 너무 복잡해서 그냥 안합니다. 저는 예전에 구청에 가서 한번 크게 싸우기도 했어요. 또 보조금 받자고 동사무소 같은 데 가서 굽신거리기도 싫고 조사받기도 싫습니다 이제는. 우스갯소리지만 옛날에 인민군들이 내려왔을 때 무슨 조사한다고 와서 사는 것 둘러보고 간 것 빼면 나라에서 사람 나와서 조사해 간 적은 한번도 없어요(웃음).
양순용=노인수당으로 교통비 1만2000원인가 받는 것 빼면 나라에서 받는 보조금은 없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제가 움직여서 돈을 벌 수도 있고 해서 따로 나라에서 돈을 주거나 하는데 신청하지는 않았습니다.
민병언=저도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돈은 안받습니다. 가서 따지면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주는 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 전매청에서 28년 동안 일하면서 연금이 있었는데 딸이 사업을 시작한다고해서 일시불로 받아서 줘버렸어요. 이제는 나오는 게 없죠.
# 이제는 쉬고 싶다
사회=지금 가장 바라는 소망 한가지가 있다면….
박병임=한 푼이 중요한데 지금처럼 아파서 일을 못나가면 그것만큼 서러운 게 없어요. 그러나 이제 그만 일하고 좀 쉬었으면 좋겠어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플 때 집에서 쉬어도 되는 정도만 돼도 바랄 게 없어요.
장봉순=저도 이제 쉬고 싶습니다. 일 안하고 집에서 쉬고 놀러도 다니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요. 나라에서 한달에 한 30만원만 준다면 좋겠네요. 더 바랄 게 없죠. 그리고 우리 막내아들 얼른 돈 많이 벌어서 장가가는 거죠.
양순용=아프지 않는 게 제일이죠. 또 자식들한테 신세 안지고 오랫동안 건강하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민병언=바라는 거 없어요. 다리 아픈 거 수술해서 나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지금처럼 건강하게 그냥 탈없이 지내고 싶어요.
# 대통령 바뀌어도 우리 삶은 안변해
사회=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후보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박병임=투표는 꼭 하러 갈 겁니다. 지금은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서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몇천원씩 벌어서 라면 사고 반찬 사서 먹고 사는데 그 사람들(정치인)만 그걸 몰라요.
장봉순=국회의원이니 대통령이니 투표를 수도 없이 많이 했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대통령이 여러번 바뀌어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뭐가 달라진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좀 우리 같은 사람들 이제 먹고 살 걱정 안하고 편안히 쉬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없나요.
양순용=원래 정치하는 사람들이 서민들 삶을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서민들 말고 돈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 지내잖아요. 구조적으로 그렇게 돼있는데 누가 나온다고 해서 우리 생활이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아요. 똑같죠. 국회의원, 대통령, 장관 다 둘러보세요. 우리처럼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있는지. 그런 부자들, 힘있는 사람들하고 정치를 하다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눈에 잘 안띄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중에 신문에 나가도 그 사람들은 별로 안 바뀔 겁니다. ‘저 사람들은 뭔데 쓸데없이 한심한 이야기만 늘어놓냐’ 이런 이야기나 하겠죠. 우리 같은 사람 이야기 들어봐야 하나도 바뀌는 게 없을 걸요.
〈정리 이호준기자〉
서울시 휘경1동 구립경로당을 이용하는 노인 5명 지난 8월17일 경로당에 모여 이 사회에서 ‘노인으로 살아가기’의 고충을 토로했다. 왼쪽부터 김기종·최선녀·정길환·정남순·태종환씨. (김문석기자) |
최선녀 |
정남순 |
태종환 |
정환길 |
김기종 |
한국 사회가 매우 빠른 속도로 고령사회로 진입했지만, 노인들은 여전히 외롭고, 갈 곳도, 할 일도 없다. 일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골프 치거나 해외여행 가는 ‘행복한 노년’은 이 시대 대다수 노인들과는 거리가 멀다. 집에 혼자 있노라면 따분할 뿐 아니라 이런 저런 걱정이 든다. 공원을 배회하기도 하지만, 몸이 마음 같지 않아 그 것도 오래할 수 없다. 그래서 가는 데가 경로당이다. 주변 눈치 안 보고 편히 한 몸 눕힐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로당에서 딱히 하는 일은 없다. 더욱 길어지는 노년을 이렇게 보내야 하는가. 지난 8월17일 서울 동대문구 휘경1동 구립경로당에서 노인 5명이 만나 송진식 기자의 사회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 자식 의존 안해야 하는데
사회(송진식기자)=현재 누구와 살고 계십니까.
정환길=40년간 사업하면서 마련한 집에서 큰아들 내외와 살고 있습니다. 원래는 아내하고 둘이 지냈는데 몇 년 전부터 허리 디스크 때문에 아내 건강이 안 좋아지자 큰아들이 같이 살자고 하더군요.
김기종=아내(최선녀씨)와 둘이만 살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좀 나오는 게 있고 집이 다가구주택이라 월세를 좀 놓아서 생활비로 씁니다. 경로당에서 사무장직을 맡고 있고, 요즘은 동네 재개발 일도 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정남순=남편과 10년 전쯤 사별하고 지금은 다가구주택에 전세방을 얻어 혼자 살고 있어요. 사별 후 혼자 사는 것이 습관이 되다보니 그냥 혼자 지내는 게 편해요.
태종환=저도 혼자 살아요. 아내와는 20년 전에 사별했고 지금은 반지하 전세방에서 혼자 지냅니다.
사회=자녀분들하고 함께 살고 싶지 않으신지요
김기종=서로 불편하고 귀찮아서 둘만 사는 게 낫습니다. 같이 살자고 하면 물론 싫다고 하진 않겠지만 되도록 아이들한테 신경 안 쓰이게 하고 살고 싶어요.
정남순=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아들 셋에 딸이 한 명 있는데, 같이 살자고해도 제가 자꾸 말렸습니다. 경로당 오가며 시간 보내고 하면 그날그날 혼자 살 만합니다. 며느리나 손자들이 짬 내서 찾아오니까 괜찮아요. 혼자 지내다보니 밤에 잠이 좀 잘 안와서 힘들긴 하지만요. 아이들한테 신경 쓰게 하면 안되는데, 특히 막내아들이 신경을 많이 써요. 오히려 그게 미안합니다. 오래 살면 안되는데….(웃음)
태종환=같이 살고 싶어도 같이 살 사람이 있어야 살죠. 다들 시집 장가 가서 떠나고 혼자만 남았습니다. 1남3녀를 뒀는데 아들은 직장 때문에 중국에 나가 살고, 딸들도 가정 꾸려서 다들 바쁘죠. 짐되면 안된다는 생각에 그저 자식들 잘되길 바라며 그냥그냥 지내고 있습니다.
최선녀=정신없이 아이들 시집, 장가보내고 어쩌다보면 결국 혼자 남게 돼요. 그게 노년인 것 같습니다(웃음).
# 경로당에서 고스톱 뒤 귀가가 전부
사회=하루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태종환=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요. 오전엔 자전거타고 집 근처 중랑천변을 좀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경로당에 와서 놀다가 저녁 때쯤 돼서 술 한잔씩 먹고 집에 가는 게 일과입니다.
정남순=전에는 시내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했는데 다들 멀리 이사 가고 그런 다음에는 주로 경로당 왔다갔다 합니다. 아침에는 중랑천변에서 다른 노인들하고 어울려서 체조를 합니다. 밥 먹고 텔레비전 좀 보다가 낮 2시쯤 되면 경로당에 갑니다. 경로당에서 점 10원짜리 화투치고 놀다가 6시쯤 되면 집에 오지요.
김기종=아침에 운동을 일찍 가는 편입니다. 새벽 4시 반쯤 되면 중랑천변에 나가서 경로당분들 예닐곱분들 하고 같이 체조를 해요. 9시 정도에 경로당 문도 열 겸 왔다가 경로당 일 볼 거 있으면 봅니다. 요즘은 동네 재개발 추진위원회 일을 맡아달라고 해서 오후에는 추진위 사무실에도 좀 들르고요.
최선녀=특별히 일과라고 할게 없어요. 집안 일 하고 낮에 경로당 나와서 청소하면서 소일하고 있어요.
정환길=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데 공장이 경기도 이천에 있어요. 공장일 있으면 보러 내려가고 없으면 오후에 경로당에 나옵니다. 경로당 회장직을 맡고 있다보니 경로당지회에도 가끔 참석하고 관련 업무도 좀 보고 있지요. 시간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즐겁게 시간 보내려고 합니다. 건강관리도 좀 하면서요.
# 말 동무 있어서 경로당 애용
사회= 다른 데는 갈 데가 없나요. 왜 경로당에 나오시지요.
정남순=11년 전쯤에 이 동네로 이사와서는 거의 혼자 지냈는데 둘째며느리가 경로당을 추천했어요. 나와보니까 친구도 생기고 밥도 같이 먹고 좋았어요.
김기종=저보다는 집사람이 먼저 경로당에 나왔어요. 보통 소문을 듣고들 많이 오십니다. 휘경1동에도 경로당만 6곳이 있어요. 노인들끼리 같이 병원 다니고 하다보면 ‘어디 경로당이 좋더라’하는 소문이 나고 그렇게 한분 두분씩 오시는 겁니다.
태종환=갈 곳이 없으니까 나오게 됐지요. 어디 말동무도 없고 했는데 여기에 오면 말동무도 생기고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외로우니까… 모임에도 좀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오래 혼자 살다보니 혼자 있기도 싫은 거예요.
정환길=나이를 먹다보니까 주변 경로당이 어떤가 관심이 생겼습니다. 처음에 이 경로당에 왔을 때 회원분들이 참 반갑게 맞아주셔서 좋았어요.
최선녀=나오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아요.
# 자식에게 생활비 받기 정말 싫어
사회=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십니까.
태종환=한국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습니다. 7급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있어서 보훈처에서 매달 35만원가량 연금이 나옵니다. 거기에 기초생활수급비로 19만원 정도 구청에서 받지요. 독거노인이라도 매달 빠져나가는 돈은 만만치 않아요. 담뱃값으로 8만원 정도 쓰고 난방비, 전기세, 전화세 같은 걸로 10만원 정도 나갑니다. 잡비가 월 20만원 정도 나가니까 밥해 먹고 하다보면 용돈 안 쓰고도 35만원 정도는 나가버립니다. 친구들이랑 술 한잔 먹고 하려면 월 50만원 이상은 들지요. 저축은 생각도 못합니다.
정남순=수입이 딱히 없기 때문에 자식들이 매월 얼마 정도 생활비 겸 용돈 겸해서 돈을 줍니다. 늙으면 주로 약값이 많이 들어요. 저는 갑상선이 좀 안좋고 혈압도 높고 해서 약값이 매달 몇 만원씩 나가요. 겨울에는 난방비 등 세금만 15만원 정도 내요. 생활비 쓰고 손자들 용돈도 좀 주고 하면 한 달에 한 50만원 정도는 쓰는 것 같습니다.
김기종=국민연금이 35만원 정도 되고 월세 수입이 40만원 정도 됩니다. 합쳐서 75만원 정도면 아내랑 생활비 쓰는 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건강이에요. 아프면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아프면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노인들은 그게 걱정이에요.
최선녀=혼자 살든 둘이 살든 생활비는 거의 비슷한 거 같아요. 세금은 똑같이 내니까요. 식비에 세금 같은 거 계산하면 한 달에 적어도 50만원 정도는 가져야 생활이 가능합니다.
태종환=다음달부터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못받게 될 처지예요. 중국에 있는 아들 명의로 영등포쪽에 아파트가 있는데, 아파트 가진 아들이 있으니 생활비를 받으라는 거지요. 20만원 정도데 못받게 돼서 큰 걱정입니다. 아이들한테 손 벌려야 하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져요. 해준 것 없이 시집, 장가 보냈고 물려준 것도 없는데 아이들이 도와줄까도 사실 걱정입니다. 같이 안 사니 남남이나 다름없어요.
정환길=사업을 해서 월수입이 꽤 되는 편입니다. 생활비는 같이 사는 아들이 부담을 하고 있어요. 월수입은 주로 저축하는 데 신경쓰고 있습니다.
# 절대 아프면 안돼, 돈이 너무 들어
사회= 건강관리에 신경이 많이 쓰이시지요.
김기종=당연하지요. 노인들은 치매에 걸릴까 걱정이 많아요. 본인도 본인이지만 자식들한테도 짐이 되고 못할 짓이죠. 그래서 경로당 나와서 화투도 치고 활동도 하는게 도움이 많이 됩니다.
정남순=경로당 나와서 소일하는 것도 운동이 됩니다. 보통일이 아니에요. 여기도 일종의 살림살이잖아요. 남자분들 술 한잔 잡수면 치우고 설거지하고 하는 것은 여자들 몫입니다. 걸레도 삶아야 하고 그릇도 소독해야 하고… 그런데 남자분들은 그런 걸 아시나 몰라요.
최선녀= 병원에 가서 드러눕게 되면 그 순간부터 돈 덩어립니다. 태종환 할아버지와 동갑이신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어요. 소주 한잔만 잡숴도 바로 옆에 있는 집에 가기 힘드셨어요. 그래도 경로당에 나와서 앉았다 가시고 하셨는데 요즘 한 달 정도 안보이셔서 전화드렸더니 거동을 아예 못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경로당에서 ‘밤새 안녕하십니까’ 하는 말은 정말 말 그대로 서로 안부를 걱정하는 말들이지요.
정환길=건강하시던 분들도 1년 사이에 확 달라집니다. 하루 아침에 운동 갔다가 쓰러지셔서 며칠을 고생하시는 분도 있고, 언젠가는 아는 분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더니 금방 돌아가시더군요.
정남순=아침에 일어나면 ‘아 오늘 또 눈을 떴구나’하는 생각을 매일 해요. 밤에 잘 때는 ‘내일 눈을 뜰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물론 합니다. 가끔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하는 게 노인들 삶인 것 같습니다.
# 일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지
사회=일을 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태종환= 제 나이가 79살인데, 사실 이 나이에 일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일을 하고 싶기는 해요. 누가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줄려나 모르겠어요.
김기종=구청 봉사활동 같은 거 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보람도 느끼고 돈도 좀 벌 수 있이지요. 기회가 아주 적어요. 올 봄에도 주 4일 아침에 동네 청소하고 돈받는 봉사활동이 있었습니다. 우리 경로당에도 원하시는 분들이 지원서를 많이 써냈는데 거의 안됐어요. 왜 안되느냐 했더니 생활수준이 낮아야 한다는 겁니다.
태종환=저는 보훈처에서 연금을 받는다고 안된대요. 수입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무슨 일이라도 시켜주면 하겠는데, 그래야 몸도 움직이고 하는데 그게 잘 안돼요. 그러니 틈만 나면 경로당에 나와서 놀다 가고 그럽니다.
최선녀=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도 몸이 안좋으니까 할 수가 없지요.
정남순=젊었을 적에도 밖에 나가서 10원 한푼 벌어본 적이 없어요. 주로 아이들 키우며 살림만 했지요. 그렇게 나이 먹으니까 아예 일할 엄두를 못냅니다. 몸도 아픈 뒤로는 더욱 그렇지요.
# 경로당 말고 갈 곳이 없어요
사회= 경로당 말고 갈 만한 데가 없나요.
정남순=전에는 구청복지회 같은데 가서 글쓰기도 배웠는데 몸이 아픈 이후로는 못나갔습니다. 뭔가 배우는 것이 좋긴 하지요. 나이 많아도 컴퓨터 배우는 사람도 있고 한글 배우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건강해야 배울 수 있어요. 저는 혈압도 좀 높고 눈도 캄캄해서 배우는 게 어려워요.
태종환=경로당 말고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지요. 멀리 가는 것은 귀찮고 힘듭니다.
김기종=생각만큼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기가 어려워요.
# 노후대책 세워도 소용 없어
사회=노후대책을 미리 세워 놓으셨나요
김기종=퇴직 전엔 노후대책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퇴직금으로 1억원 정도 나오겠다 싶어서 노후에 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퇴직금 타고 나니 그대로 모여있지가 않더군요. 자식들 시집, 장가갈 때 뭐 하나라도 해주고 싶고 그런 마음에 쓰게 되고 결국은 별로 남는 게 없게 됐습니다.
최선녀=퇴직금이랑 저축해서 모아놓은 돈이랑 노후때 쓰면 되겠다 생각하지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안됩니다.
정남순=안되지요 안돼. 남편이 생전에 교직에 있어서 생활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아파트도 마련해 줬지요. 그렇게 자식들한테 한푼 두푼 투자하다 보면 돈이 안 모여요. 노후는 생각 못해요.
태종환=보훈처에서 연금이 나오니까 신경 안 썼지요. 아프면 보훈병원에 입원시켜 줄거고 죽으면 국립묘지로 갈 것이니 별로 걱정 안해봤습니다.
사회=죽음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김기종=글쎄요. 늘 죽음에 대해 생각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 죽는다는 실감은 아직 안나요.
최선녀=자다가 죽는 것이 제일 행복한 죽음이지요. 이리저리 아프지 않고 자다가, 편안하게 가는 게 제일 좋아요.
정남순=저도 요새 그렇게 생각해요. 자다가 눈뜨지 않고 가는 것, 자식들에게 애 안 먹이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어요. 죽음이 두렵기보다는 너무 오래 살까봐, 그게 두려워요.
태종환=자식들한테 의지 안하고 죽는게 제일 좋지요. 신경 안 쓰이게, 고생 안 시키고 가는 게 그게 복입니다.
김기종=경로당에 나오시다가 돌아가시는 분들 보면 병원에서 대소변 못가리시고 고생하시다가 가시는 분들 있어요. 그런데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자식, 며느리들하고 사이가 많이 안 좋아진대요. 세상이 이런걸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다들 우선 자식한테 고생 안 시키고 돌아가 주는 걸 바라는 겁니다.
정환길=‘내가 어떻게 죽겠다’는 생각을 깊이 해본 적은 없어요. 다만 자식들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장례를 대행해 주는 회사에 얼마 전에 계약을 해놓았어요. 죽게 되면 그 회사에서 장례를 다 치러준다고 합니다. 매장까지도요. 조문객 접대 정도는 자식들이 하겠지요.
# 경로당 운영비라도 늘려 주길
사회=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후보들에게 바라시는 점이 있다면.
정환길=노인복지가 가장 시급하지요. 노인연금제도가 곧 시행된다고 하던데, 65세나 70세 이상이면 누구나 똑같이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기초생활수급자만 대상이라는데, 그분들도 어렵지만 마찬가지로 어려운 분들이 많아요. 다같이 혜택을 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기종=노인복지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실제 도움이 되는 정책이 나와야 합니다. 교통비만 해도 한달에 1만2000원 정도인가밖에 안됩니다. 지하철이 무료지만 아무런 도움이 안돼요.
최선녀=당장 경로당 운영비부터 지원해야 돼요. 월 운영비로 40만원도 채 안 나오는데 세금 내고 하다보면 많이 쪼들립니다.
정환길=동대문구에만도 경로당이 114개입니다. 각 경로당마다 회원 숫자에 차이가 있어요. 어디는 10명, 20명… 우리 경로당은 80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10명 있는 곳이나 80명 있는 곳이나 운영비가 37만원 정도로 똑같아요. 1년에 3만원씩 받는 경로당 회비로도 충당이 안돼요.
김기종=아파트 단지에도 경로당이 있는데 이런 곳은 단지에서 세금지원 같은 걸 다 해줘요. 그런데 우리 경로당은 국가가 지원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쌀만해도 그래요. 북한에는 쌀이 어마어마하게 넘어간다는데 경로당에 오는 건 1년에 20㎏짜리 쌀 몇 포대가 전부입니다. 같이 모여서 자주 점심도 좀 해먹고 하면 좋을 텐데요.
정남순=제가 18년 정도 아파트 생활을 했는데 경로당을 비교해 보면 분명 조정이 필요합니다. 너무 편차가 크다는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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