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무엇을 꿈꾸나
?-조선
1. 쏘련식으로 차를 모는 운전수
무자년 새해벽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라선시 혜성회사의 초청을 받아 조선방문길에 올랐다. 새해의 첫 출국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안고.
조선방문은 이번이 3번째이다. 첫 번째 방문했던 시간은1996년가을. 목적지는 함경북도 회령시였다. 첫 방문의 인상은 퍼그나 실망적이었다. 조선의 세관공무원들이 외국인들에게 일부러 트집잡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말을 쓰면서 범인을 대하듯 하는 무례한 태도에 나라를 대표하는 첫 창구에서 나라에 수치를 가져다 주는 행위라 생각하여 무척 유감스러웠다.
두 번째 방문은 1996년말. 차사고로 목숨을 잃을 번했던 아슬한 순간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로 하여 아름다운 추억에 금상첨화가 되기도 하였다. 그 해 조선해외원호위원회의 초청으로 10일간 평양으로 들어가서 나라에서 해외 조선동포들에게 주는 최고급 대우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7년 새해 첫날은 평양해방호텔에서 맞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1메타이상은 내려 쌓였었다. 기분이 무척 상쾌하고 올해는 좋은 한 해가 되리라는 느낌이였다. 이틀이 지난 1월3일, 안내를 맡은 지도원이 길이 얼음빙판이 됐을 것이라는 걱정은 하면서도 저를 묘향산 구경을 시키고 싶다고 하면서 모험적이지만 가볼 의향이 있느냐는 물음에 한번 체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하면서 흔쾌히 대답하고 길을 떠났다. 아니나 다를가 평양을 벗어나 얼마 멀리 가지 않아 산길내리막길이 온통 얼음판이 되여 번들번들하였다. 운전수가 차를 세우자고 제동을 밟는 순간 차바퀴는 이미 얼음강판에 올라선지라 차는 미끄름을 타기 시작하였다. 30도 이상의 경사도인 내리막길에서 차는 마치 스키운동원이 스키를 타듯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 내달리였다. 마침 운전석 뒤에 앉았던지라 운전석 뒤 받침을 꽉 잡고 손발과 다리에 온 힘을 다 주어 뻗치면서 앞만 주시하였다. 결국 차량은 길옆45도 경사에 50여 메타 길이의 언덕을 따라 내리 달리면서 돌덩이들을 하나 둘 넘나들다가 도랑창에 콱 부딪치고 번져졌다. 아마 그때 운전수가 햇내기였다면 큰 사고를 모면치 못했을 것이다. 로련한 운전수이므로 끝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핸들을 꽉 잡고 견지했으니 사고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후담이다. 혼비백산한 운전수는 차밖으로 튀여나오자 바람으로 나를 부축하여 차밖으로 꺼내주었다. 크게 다치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있어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운전수는 무작정 나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였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손님을 걱정하여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면서 나 역시 코 마루가 시큼해 나는 것이였다.
그때 문제는 차를 어떤 방법으로 길우로 끌어올려 가겠는가 하는 것이다. 궁리를 하고 있는데 멀리서 아물거리는 사람의 그름자 두개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였다. 찾아온 사람은 중년의 군인이였는데 길가다가 우리차가 사고치는 전경을 지켜보고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장 고마운 사람은 어려울 때 찾아와서 도움주는 사람이상 없다는 도리를 절실히 깨달은 것이 그때였고, 인간이란 남을 배려할 수 있을 때만이 그 가치가 빛을 뿌리는구나 하는 인생도리를 실제적으로 터득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들은 자기 일처럼 달라붙어 차를 밀어 바로 세우고 길우에 올라가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바를 메여 끌어 올려주고는 이름도 남기지 않고 자기 갈 길을 재촉하였다.
이번 세 번째 걸음은 꼭 11년만에 이루어진 셈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마음이다. 이번 걸음은 라선시에서 두번째 큰 규모의 기업인 혜성회사와 사업할 수 있는 찾아 고찰하려 나가는 것인데 마침 조선의 최대명절인 2,16경축 날을 하루 앞두고 들어가게 되여 어떤 경축행사들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금번 초청을 알선해준
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불러 타고 바로 권하세관으로 향하였는데 가져가는 짐짝중에 2메타길이의 장판바닥재가 있어 차뒤편 짐칸에서부터 뒤좌석 하나를 엎어놓고 좌석구멍을 뚫고 운전석중간까지 짐을 싣다 보니 그 자리에 앉은
권하세관 대문입구에서부터 출국확인절차를 받게 되여 있다. 문제는 그 자리에 사람과 짐짝을 모두 부려야 하고 확인후에는 차량을 출입이 금지되고 사람이 모든 짐짝을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권하세관을 나오니 조선뻐스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정월초순이라 다니는 사람이 적어 차에는 우리 일행 외 3명이 더 있었다. 권하세관에서 다리를 건너서 조선원정세관까지 가는데 약200메타이다. 승차요금은 일인당 인민페 5원이라고 한다. 조선버스 운전수와 승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우리고객을 맞아주었다.
버스는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다리를 건너가는 버스 차창 밖으로 땅땅 얼어붙은 두만강줄기가 한눈에 안겨온다.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바로 이 강줄기를 넘나들며 항일하고 독립운동을 벌린 것이 아니였던가?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찹찹해 지는 것이였다.
어느덧 버스는 국경을 넘어 조선원정세관에 도착했다. 조선땅을 밟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별로 싱숭생숭해 나는 것 같았다. 중국이 이제는 상업시대여서 생계와 장사를 위하여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3일만 고향을 떠나도 생각난다고 했지 않은가? 그런데 반세기를 넘어서 아직 고향을 찾지 못한 우리의 1세 어르신들의 마음이 여북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떠오르며 <<원정세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우리의 1세들에 비하면 나는 오늘 너무 쉽게 이 땅을 밟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3번이나 말이다.
일행의 재촉으로 세관대문을 들어섰다. 통관수속을 하는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 되였다. 통관신청서를 작성하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첫번째 창구를 찾아 여권을 들여 밀었다. 힐끔 올려다보는 담당사무관의 눈길이 매서웠다. 그는 여권을 이리번지고 저리번지면서 수차례 한국으로 드나들던 여권 페이지를 한장 한장씩 체크해보는 것이다. 실무에 아주 깐깐함을 보여주었다. 담당사무관은 조사를 끝낸 후 아무 말 없이 여권과 서류를 넘겨주면서 <<다됐습니다. 옆 창구로 가세요>> 하고 생각보다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긴장이 확 풀리면서 옛날처럼 딱딱하게만 생각했던 자신이 촌스러운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휴대품을 검사하는 데서도 별로의 까다로움이 없이 통관시켜주어서 참으로 쉬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첫 조사 창구와 세관이 100여 메타 거리를 사이 두고 있었다.
택시는 일본도요다 차인데 중고품인데다가 먼지에 덮여서 보기에 어설펐다. 그런데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운전수는 새 옷 차림에 깔끔한 얼굴을 하고 동작이 아주 날렵하였다. 역시 훈춘에서 싣던 방식으로 짐을 싣고 떠났는데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비포장도로라 불편하여 짐을 앞으로 더 빼서 운전수어깨너머로 짐을 옮기자고 했는데 운전수는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그리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행중의 차 속에서 짐을 조절하는데 한참 복새판을 이루었다. 그런데도 운전수는 차를 세우지 않고 일사천리로 운전하는데 그 운전 솜씨가 과연 승용차운동원선수 같았다.
산중턱을 오르내리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주행하면서 운전수에게 궁금한 것을 문의하였다. 통상적으로 중국의 택시운전수들은 그 지역의 첫 창구역할을 하며 많은 지역정보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를 테운 이 운전수는 손님과 대화하기보다는 산길운전에 모든 정력을 쏟아 앞만 보고 페달을 밟는 것이다. 오히려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그러기로 30분쯤 달리고 시간적 여유가 있던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가 운전하는 이 택시는 운전수개인의 것이 아니고 회사의 것인데 매월마다 회사에 바치는 비용은 조선화폐로 60만원(인민폐 약 3,000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류비와 보수비를 본인이 부담하는데 개인에게는 큰 돈벌이는 되지 않으나 괜찮은 직업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옛날과 달리 매일마다 하는 학습을 일주일에 한번씩 한다고 하면서 래일은 제일 큰 명절이니 아마 시정부에서 큰 예술행사가 있을 것 같은데 보러 가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해주었다. 우리로 말하면 자기개인에게 도움안되는 일이면 그냥 공식적인 일로 지나쳐 버릴 텐데 이들의 아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안내하는 모습에서 국민 스스로 자신들의 명절로 마음속 깊이에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하는 감상을 받게 되였다.
그의 말을 듣게 되면서 도로 양편과 산중턱 그리고 큰 건물마다에 새겨져 있는 구호판에 대한 인상도 점차 리해의 척도가 달라짐을 느낄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에는 상업광고판은 너무 없고 정치 구호판이 너무 많다고 하겠지만, 꺼꾸로 우리중국에는 정치구호판이 너무 없고 상업광고판이 너무 판을 치는 것에 문제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그래서 중국호금도주석의 조화리론은 단순한 인간과 자연, 경제와 문화의 조화라는 벽을 넘어서 정치와 사회, 인간의 조화적인 성분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깨달음이 생겼다.
택시는 어느덧 라진시와 5키로의 거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차에 휘발유가 떨어져버렸다. 어떻게 하는가? 우리보다도 운전수의 사정이 더 난처했다. 운전수는 대뜸 차머리를 돌려세워서 <<쏘련운전을 해야지뭐>>하면서 꺼꾸로 올리막 길을 속도 내여 달리는 것이였다. 얼마나 속이 타겠는가! 이제 시간은 10여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의 입에서 연속 에씨! 에씨!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러기로 올리막 길 약 1키로를 두고 더 이상기름이 없자 차를 원상태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길에 나가 서서 달려오는 차를 불러 세우는 것이였다. 암호인양 대뜸 공구상자를 열고 바줄을 꺼내여 앞차에 연결시켜 올리막 길 끝까지 끌고 올라가는 것이였다. 꼭대기까지 오른후 바줄을 벗기고 내리막길에 차를 천천히 몰아서 바로 산밑에 있는 주요소에 가서 기름을 넣고 우리를 목적지까지 실어주는 것이였다.
차를 뒤로 몰면 기름을 안태우냐? 그것과 쏘련운전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나의 어리석은 물음에 그는 휘발유통을 기울어지게 하여 얍게 깔려있는 밑바닥의 기름이 한곳으로 고이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고, 쏘련운전이라고 하는 것은 쏘련사람들이 몸집움직임과 행동이 좀 우둔하게 보여서 우둔하게 운전하는 것으로 표현하여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 말에 우리 일행은 모두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웃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 보는 그는 오히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피씩 웃음을 던지며 우리에게 작별악수를 청했다. 그의 꺼칠하고 억센 손아귀를 잡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에게 무엇이 감염되는 것 같았다. 순간 뇌리에는 이런 것이 스쳐지나 갔다. 참으로 깊은 생활지혜가 숨어있고, 어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의지가 있구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해학적으로 현실을 대하는 그 모습에서 오히려 우리가 겸허하게 따라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2. 춤과 노래와 꿈을 잃지 않은 민족
우리가 찾은
우리는 그사이 호텔을 잡고 거리를 잠깐 돌아보기로 하였다. 호텔은 중국상인들이 투자하여 건설한 것이 많았다. 2성급으로 보이는 호텔방값은 일인당 하루에 50원이고 아침식사까지 포함한다고 하니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이였다. 중요거리 량옆으로 조선국기와 로동당당기가 줄줄이 꽂혀져 있었다. 중국에서도 정부기관에서 명절이면 기관대문이나 건물꼭대기에 국기를 꽂고, 한국에서는 모든 길거리 건물주가 책임지고 국기를 꽂는 풍경을 보아 왔기에 여기서도 당연히 꽂겠지 하는 생각에 별로 신기치 않았다.
시장거리 량옆에는 늦은 저녁까지 장사군들이 상품을 거리바닥 매장에 펼쳐놓고 팔고 있었다. 래일이 명절이라 그런지 장터는 팔고 사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였다. 상품들로는 술, 담배, 옷, 식품, 일상생활용품 등 비교적 풍성한데 대부분은 중국에서 들어온 물품들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활발하였다.
저녁식사는 라선시에서 제일고급으로 꼽히는 음식점으로 초대되였다. 첫걸음에 너무 호화로운데 초대를 받으니 미안적은 생각이 앞섰다. 별로 해놓은 것 없이 초대부터 받으면 항상 빚으로 남으니까. 그는 중국가면 너무 풍성히 접대를 해주는데 여기는 그러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여러가지 신선한 바다고기회에 양주, 맥주하여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주어 배가 불쑥 나오도록 잘 먹었다. 주인의 호방하고 후더운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역시 중국인상인들과 많은 교류를 한다더니 중국식을 많이 다라 배운 것 같기도 하였다.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몇 년을 사귄 친구마냥 만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였다.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전혀 서먹함이 없도록 친근감을 주는 그의 소탈한 모습에서 그의 활달하고 짜임새 있는 사교능력을 보아낼 수 있었다.
우리민족의 전통된장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찾아온 것을 아는 채사장은 자기 역시 한때도 된장이 없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중국에 가면 다른 물건보다 된장은 꼭 잊지 않고 사가지고 들어온다고 한다. 그런데 된장을 생산해서 돈을 버느냐는 예리한 질문을 들이대는 것이였다. 역시 경영인다운 자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된장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을 드렸다. 즉, 전통된장은 우리민족의 신토불이로서 우리민족음식 식단에 가장 기초적인 식품인 동시에 영양과 질병예방 및 치료기능이 뛰여 나므로 이미 과학적으로 약식동원(藥食同源)으로 인증하고 있다. 즉, 식료품이면서 약품의 기능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계식으로 생산하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고 최소 6개월이상 장독에서 자연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쳐야하는데다, 가정집에서 만든 것과 시장에서 가격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업에서 리익을 창출해낼 수 없으므로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순수한 전통된장을 생산하는 기업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설명해주었다.
이에 채사장은 듣고보니 그렇네요. 전 조선에도 된장을 만드는 기업이 없고, 전체 조선에 된장이 시급히 수요되고, 또 전체 조선인들이 된장을 싫다는 사람이 없으니 참 좋은 것이네요. 원글보기
'생활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남북戰] `상하이의 밤` 적신 박지성-정대세의 눈물 (0) | 2008.03.27 |
---|---|
[스크랩] 퇴근길 지하철 불청객들 (0) | 2008.03.17 |
중국소녀 “내 몸에 ‘남성’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0) | 2008.03.03 |
“장관님 댁에 태극기 다셨나요” (0) | 2008.03.03 |
[스크랩] `땅이 늪이 된다` 땅 때문에 낙마하는 공직자들 (0) | 2008.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