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외면한 채 잉여금 높은 대기업들… 금호아시아나·한화·롯데·두산은 M&A 시장에 베팅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된 12월 결산 546개 제조업체의 2007년 말 현재 유보율(잉여금/자본금)이 675.57%에 달했다. 조사 대상 업체의 잉여금(자본잉여금+이익잉여금) 총액은 358조1501억원으로, 1년 전에 견줘 11.75% 늘었다. 10대 그룹(자산 기준)에서는 삼성의 유보율이 1488%(잉여금 69조8548억원)로 가장 높았고 현대중공업(1398%), SK(1378%), 롯데(1194%), 한진(824%) 순이었다. 10대 그룹의 평균 유보율은 787%로, 2006년 말(694%)보다 큰 폭으로 증가했다. 잉여금이 자본금의 8배 가까이 된다. 유보율이 높다는 건 재무구조가 탄탄해 자금 여력이 크다는 것인데,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내부 유보로 쌓아둔 채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로벌 경쟁보단 안정적 내수 시장
△ 연구·개발 투자는 않고 인수·합병 사냥에 나선다? 금호아시아나가 인수한 대우건설 사옥. |
그런데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금호아시아나, 한화, 롯데 그리고 재계 11위인 두산이 눈길을 끈다. 금호아시아나는 2007년 말 잉여금이 4조2059억원으로, 유보율이 12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화는 이익잉여금이 2조4497억원으로, 유보율이 268%였다. 두 그룹 모두 10대 그룹의 평균 유보율에 견줘 훨씬 적다. 왜 그럴까? 금호아시아나는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이미 많은 현금을 썼기 때문이다. 한화 역시 대한생명을 인수하면서 잉여금 실탄을 많이 소진했다. 반면, 인수·합병(M&A) 시장에 대형 매물이 나올 때마다 인수의향자로 거론되는 롯데는 잉여금이 13조6483억원으로, 유보율은 1194%에 이른다. 쌓아둔 돈은 워낙 많은데, 롯데 계열사들이 영위하는 사업 내용들을 보면 대규모 투자를 일으킬 필요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롯데는 올 초 대한화재를 인수하는 등 새로운 사업영역 확장에 나서고 있다. 기존의 각종 사업들이 이미 성숙 단계를 지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금호아시아나·한화·롯데 등보다 앞서 두산그룹은 이미 한국중공업,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 등 알짜기업들을 인수해 재계 10위권에 진입하기도 했다.
이들 재벌기업은 지난 몇 년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알짜기업 인수·합병 각축전에서 거액을 베팅해 매물들을 거머쥐고 있다.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외환위기 직후 유동성 위기를 맞고 쓰러졌던 수익성 좋은 기업들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업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즉, 생산·판매하는 제품들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보다는 안정적인 내수 시장에 치중돼 있다는 점이다. 정승일 국민대 겸임교수는 “한화, 금호아시아나, 롯데, 농심, 대림 등의 경우 수십 년간 내수 시장의 독점적 틀 속에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장사해왔다. 내부 유보 현금을 투자에 쓰지 않고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외환위기 때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며 “연구·개발 투자를 늘려 기술개발을 한다거나 글로벌 시장에 나가 싸우는 데 큰 관심이 없고, 국내 시장에서 보수적으로 영업해온 기업들”이라고 말했다. 막대한 영업이익을 현금으로 쌓아둔 채 투자는 하지 않고 있다가 근래 들어 알짜기업들을 마구 손에 넣어 덩치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삼성·현대차·SK·현대중공업
실제로 이런 재벌기업들의 업종을 보면, 유통·식음료, 관광·레저, 운송 등이 주력이다. 막대한 추가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이 생명인 고부가가치 제조업이나 생명과학 산업 등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막대한 현금을 투자할 만한 기존 사업이 별로 없다 보니 사내 유보금을 동원해 알짜배기 매물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새로운 고용은 신규 투자가 이뤄져야 창출된다. 기존 알짜기업을 인수한 재벌기업들은 오히려 사들인 기업의 주식가치를 높이려고 인력 감축을 시도하기 일쑤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인수·합병 시장의 경험이 말해주는 바다. 다른 재벌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해온 롯데, 금호아시아나, 한화, 두산 등이 인수·합병 시장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지금, 삼성, 현대차, SK, 현대중공업 등도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와 상호출자금지 규제 완화를 기다리며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
대우조선을 먹고 싶습니다
대우조선해양을 둘러싼 인수 경쟁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대우조선의 새 주인이 되기 위해 굴지의 기업들이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인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대우조선의 대주주는 산업은행(31.26%)과 한국자산관리공사(19.11%)다. 산업은행은 이달 안에 대우조선 실사를 끝낸 뒤, 7월 매각공고와 인수의향서 접수, 8월 우선협상자 선정, 12월 매매계약 차례로 매각 수준을 밟아나갈 계획이다. 물론 일정은 다소 지연될 수 있다. 출사표를 던진 곳은 포스코, 한화, GS, 두산 등으로 4강 구도를 이루고 있다.
△ 대우조선해양 거제 옥포 조선소 전경. (사진/대우조선) |
대우조선 인수전에는 최고경영자(CEO)가 팔을 걷어붙이고 진두지휘하고 있다. 대우조선은 매력적이다. 실적 때문이다. 지난해 대우조선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7조1048억원과 3275억원에 이르렀다. 2004년 67억달러에 그친 수주액도 215억달러로 치솟았다. LNG선과 해양 시추 설비, 잠수함 등 첨단 조선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력도 뽐낸다. 대우조선은 수주량 기준으로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에 이은 3위를 내달린다.
그래서 인수 가격은 높은 편이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은 인수 가격이 최소 6조~7조원, 많게는 10조원이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상호 비방과 악성 루머까지
대우조선은 새 정부 들어 처음으로 맞는 대형 인수·합병(M&A) 물건이다. 인수에 눈독을 들이는 기업들의 재계 순위를 뒤바꿀 수 있는 규모다. CEO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 그들의 능력을 검증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인수 과정에서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쏠린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회의석상에서 “‘제2의 창업’이란 각오로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총력을 기울여달라”고 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지난해 보복폭행 사건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김 회장이 인수에 성공해 명예회복을 벼르고 있다는 얘기도 나돈다. 한화는 ㈜한화, 한화석유화학 등 에너지 사업 계열사들과의 시너지 효과가 높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허창수 GS홀딩스 회장은 계열사 경영진 150여 명이 참석한 임원 모임에서 “어려운 경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위험 속에 싹트고 있는 성장 기회를 효과적으로 포착해야 한다”며 대우조선 인수 뜻을 내비쳤다. 허 회장은 2004년 LG그룹에서 계열을 분리한 뒤 인천정유, 대한통운, 하이마트 등 주요 M&A전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대우조선을 잡아야 한다. GS그룹은 대우조선을 인수해 기존의 정유·건설업과 사업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계획이다.
△ 대우조선 인수전에 나선 최고경영자(CEO). |
이구택 포스코 회장도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대우조선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윤석만 포스코 사장도 “대우조선 공동 인수를 희망하는 업체들이 있다”며 인수 뜻을 밝혔다. 포스코는 그동안 M&A에 너무 소홀히 해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우조선 인수를 통해 이같은 비판을 잠재운다는 전략이다. 포스코는 안정적인 철강 수요처 확보를 강조하고 있다.
두산그룹은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총괄하에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직접 인수전에 나섰다. 박용성 회장은 비자금 사태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난해 3월 두산중공업 이사회 의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최근 중앙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한 것도 인수전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박용만 회장은 “대우 사람들의 개척 정신, 저돌성, 장사꾼 기질이 마음에 든다”며 인수에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두산그룹은 대우조선을 인수하면 발전, 조선, 건설장비, 기계 등 두산의 중공업 포트폴리오가 완성돼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
이처럼 CEO들이 강한 의욕을 내비치다 보니, 상호 비방과 악성 루머가 흘러들고 있다. 한화 경영기획실장 금춘수 사장은 6월16일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는 철판을 팔고 엔진을 팔려고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선업에 쓰이는 두꺼운 철판인 후판을 만드는 포스코와 선박 엔진을 생산하는 두산을 겨냥한 발언이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포스코 이사회 의장 출신이어서 M&A가 포스코에 유리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루머도 나돌았다.
주가 폭락과 신용등급 강등 위험도
대우 계열사가 M&A 시장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우그룹은 1999년 8월 12개 핵심 계열사가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되면서 해체됐다. 대우그룹은 대규모 차입으로 확장경영을 하다 외환위기를 맞은 뒤 이자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몰락했다. ㈜대우는 대우건설, 대우인터내셔널로 분할됐다. 대우중공업은 대우조선과 대우종합기계로 나뉘어 해체됐다.
지난해 매각된 대우종합기계는 두산그룹으로 넘어가 두산인프라코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대우건설은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넘어갔다. 앞서 대우자동차는 GM에 팔려 GM대우로 사명이 교체됐다. 이외에 대우캐피탈은 아주그룹으로 넘어갔고, 대우정밀은 ST중공업에 넘어가 S&T대우로 이름이 변경됐다.
하지만 시장에 매물로 나온 기업을 인수한 일부 기업들은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부메랑이 돼 타격을 받고 있다. 과거 대우그룹처럼 빚을 내 무리하게 M&A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M&A 인수 대금을 조달하기 위해 끌어썼던 외부 차입금이 부담으로 다가오고 주가 폭락과 신용등급 강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6월24일 코스피 시장에서 금호산업은 전일보다 1.42% 하락한 2만7700원에 거래를 마치며 52주 신저가를 경신했다. 전고점인 지난해 11월 초 8만7400원에서 70% 가까이 급락했다. 지난해 금호산업이 대우건설을 인수할 당시 과다하게 외부 차입금을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M&A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한화그룹 계열사들도 주가 하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화가 올해 들어 43% 폭락했고 한화석화는 32% 하락했다.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따른 그룹 차원의 자금 소요가 짐이 되고 있는 셈이다.
신용등급도 강등되고 있다. 금호산업의 신용등급은 인수 전 ‘BBB’에서 ‘BBB-’로 강등됐고, 하이마트를 인수한 유진기업도 ‘BBB-(안정적)’에서 ‘BBB-(유동적)’으로 조정됐다.
무리한 인수 추진은 주가·신용등급 하락에 이어 채권시장에서 회사채 거래도 어렵게 만드는 ‘나비효과’를 낳고 있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대우조선 인수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진 기업의 회사채가 최근 거래가 잘 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대우조선 인수에 나설 경우 자금 압박이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에서다. 인수에 성공할 경우 기업의 자금 흐름을 경색시킬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인수 실패 때는 채권을 팔아 마련한 현금의 용도를 찾기 힘들어져 더 큰 문제가 된다. 자칫 신용등급이라도 하락하게 되면 채권 가격이 급격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관련 기업이 회사채 발행 자금을 어떤 목적으로 쓸지 시장참여자가 의심하기 때문이다. 설령 회사채 발행 기업이 다른 목적을 분명히 밝히더라도 시장에서는 이 자금이 대우조선 인수 자금으로 쓰일 것으로 예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아직까지 루머에 그칠 뿐이다. 하지만 거액이 오가는 채권시장의 특성상 작은 불확실성에도 거래는 부담스럽다.
대우그룹 몰락의 교훈
최근 STX그룹 계열사가 연쇄적으로 유상증자를 한 것도 이런 추측을 더욱 키웠다. STX그룹은 유상증자 자금의 용도가 대우조선 인수 자금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있지만 시장에선 “인수를 위한 사전 포석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해석이 분분했다. STX가 6월6일 공시를 통해 3078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하자 4일 만에 주가가 30% 넘게 폭락했다. STX조선은 6월18일 조회공시 답변을 통해 “대우조선 인수 참여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인수 참여와 관련해 현재 구체적으로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대우조선을 품기 위한 기업들의 인수전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매물 시장에 나온 기업을 이리저리 재어보지 않은 채 덥석 인수할 경우 후유증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M&A를 통해 그룹 주력사업을 바꾸고 재계 순위를 끌어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과중한 차입과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대규모 유상증자는 주가를 끌어내리게 된다.
대우그룹이 급성장한 것은 적극적인 M&A를 통해서였지만, 대우그룹의 몰락 역시 과도한 차입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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