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이 14일 공개한 '쌀소득 등 보전 직접지불제도 운용실태'를 들여다보면 가히 충격적이다. 직업군이 밝혀지지 않은 이들까지 합쳐 28만명이 농사를 짓지 않고 있는데도 쌀 직불금을 수령한 것이다. 특히 사회 지도층인 공무원(3만9971명), 공기업 직원(6213명) 등이 가세, 쌀 직불금을 타갔다. '경자유전'(耕者有田?농사 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하는 것) 원칙을 어기고 '쌀테크'에 치중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럴해저드(도적적해이)의 극치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이에따라 쌀 직불금 불법 수령 문제는 정치권에서도 최대 화두로 등장했다. 민주당은 이명박정부 인사도 끼어 있을 것이라며 공세를 강화했고, 한나라당은 참여정부 때의 도덕적해이를 대표하는 것이라며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청와대도 쌀직불금 문제가 민심을 뒤흔들 메가톤급 사안이라고 판단, 정부 차원의 내사에 착수하는 등 국감 정국은 돌연 '쌀직불금 정국'으로 급변하고 있다.
▶한해만 1683억 빼먹었다=감사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직불금 수령자 99만8000명 중 비농업인은 최대 28만명으로 추정됐다. 본인 또는 가족을 포함해 공무원 회사원 전문직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은 17만 명이었다. 버젓이 좋은 직업을 갖고 있는데도 농사를 짓는다고 거짓 신고, 쌀 직불금을 타간 것이다.
직업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영농 기록이 없어 실경작자가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11만 명이었다. 결국 총 28만명이 농사를 짓지 않고 있는데도 쌀 지원금을 수령한 것이다. 이들에게 지급된 2006년도 직불금은 1683억 원이었다. 1명당 평균 60만원꼴로 지급됐다.
특히 월 소득 500만원 이상의 서울과 경기 과천시 거주자 중 경기 소재 농지로 직불금을 50만원 이상 수령한 사람은 124명이었지만 이중 실경작자는 16명에 불과했다. 직불금을 신청한 고소득자인 서울과 경기 주민 중 10명중 9명이 쌀직불금을 불법 신청한 것은 매우 충격적이다.
또 전북 익산시를 비롯한 8개 시?군의 농지를 대상으로 직불금을 받은 사람 중 서울?경기에 거주하는 367명의 경작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8명만 직접 경작을 했고 나머지 259명은 현지 농업인에게 농지를 임대하고 있으면서도 직불금을 수령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면서 직불금을 수령한 65명 중 실제 경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28명에 그쳤다.
감사원 관계자는 15일 "150억원 상당의 자산을 가지고 연봉이 8억6000만원인 사람이 2억6000만원의 직불금을 타간 사례도 지적됐다"고 귀띔했다.
이렇다보니 거꾸로 실제 농민들이 직불금을 제때 받지 못하는 심각한 현상이 발생했다. 감사원이 실경작자 53만명을 분석한 결과, 7만1000명은 직불금 1068억원을 수령하지 못했다.
▶농민지원책 반성 계기로=감사원은 이 자료를 공개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전담 인력 및 조직을 확충하거나 전국적 지방조직을 가진 농업 관련의 전담기관을 지정, 관리하는 방안이 적절하다"고 밝혔다. 쌀 직불금 등 농민 지원대책에 관련된 사업에 인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다는 것이다.
하지만 쌀 직불금은 인력 문제 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허점이 크다는 평가다. 현재의 쌀직불금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주소지 기초자치단체에 직불금 대상자로 신청하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서울 서초구에 사는 사람이 강원도에서 농사를 지으면 서초구 동사무소에 직불금을 신청하고, 동사무소 직원이 농사를 짓는지 확인해서 돈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서초구 동사무소 직원이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실경작자 확인 작업은 수박 겉핥기 식이다. 이런 허점 속에서 쌀직불금의 불법 수령이 횡행한 것이다.
<쌀직불금은 '눈먼 돈?'..왜 문제인가>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의 쌀직불금 부당 신청 의혹이 공무원 사회 전체로 비화되는 가운데, 부재지주 수령 및 기업농 독식 등 현행 쌀 직불제의 '맹점'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는 이같은 지적을 반영, 내년부터 직접 농사를 짓는지 여부를 보다 까다롭게 검증한 뒤에야 직불금을 지급하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 위탁영농 인정이 화(禍) 자초
쌀 직불제는 정부가 쌀 시장 개방에 대비, 지난 2005년 기존의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공공비축제로 전환하면서 벼농사 종사자의 소득 보전 수단으로 고안한 것이다. 목표 가격과 산지 쌀값의 차이 가운데 85%를 정부가 직접 현금으로 메워준다.
논농업(벼.연근.미나리.왕골 재배)에 이용된 농지를 대상으로 하며, 직불급은 원칙적으로 이 땅에서 실제로 농업에 종사한 사람에게 지급돼야한다. 그러나 쌀직불제에서 말하는 '종사'의 개념은 '실제 경작 또는 경영'을 뜻하는 것으로, 기계 등을 활용한 부분적 위탁 영농까지 인정된다.
이는 소유 농지에서 2분의 1이상의 자기 노동력으로 경작하는 것을 의미하는 농지법상 '자경'과 차이가 있어 부당지급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논란의 불씨가 되는 부분이다.
제도 도입 이후 ▲ 2005년산(양곡) 1조5천45억원(98만4천 농가) ▲ 2006년산 1조1천539억원(99만9천 농가) ▲ 2007년산 9천912억원(102만 농가) 등 해마다 1조원 안팎의 직불금이 지급되고 있다.
◇ 구멍 숭숭..자경 증명서 한장이면 직불금
부분적 위탁 영농이 인정된다 해도, 현행 쌀소득보전직불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전혀 농사를 짓지 않고 땅만 소유한 '부재지주'들까지 별 어려움없이 직불금을 받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땅을 빌려 짓는 임대 농업의 경우 직불금은 원칙적으로 부재지주가 아닌 임대농에게 지급돼야한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부재지주가 매년 2월말 주소지 읍.면.동에 직불금을 신청하고 농지 소재지 이장.통장 등으로부터 간단히 자경 증명서 한 장만 받아오면 10월과 이듬해 3월에 걸쳐 고정 및 변동직불금을 쉽게 수령할 수 있다.
직불금 신청에 대한 사실 관계 확인 절차가 대부분 연초에 이뤄져 이장.통장 입장에서는 사실상 '자경사실' 보다는 '영농계획'의 타당성을 따질 수 밖에 없는데다, 농지 소재지에 함께 거주하는 임대농과의 관계를 생각해 문제를 지적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 임대농과 부재지주 사이에 직불금 수령을 포함한 어떤 계약 관계가 존재하는지 정부나 지자체가 일일이 파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직불금이 임대농이 아닌 지주에게 돌아가는지 정확한 통계조차 잡기 힘든 상황이다.
또 직불금이 면적에 비례해 제한없이 책정됨에따라, 규모가 큰 소수 농업인 또는 법인에 혜택이 쏠리는 현상도 문제다. 극단적인 예로 ㈜현대서산농장은 ▲2005년 53억원 ▲ 2006년 37억원 ▲ 2007년 31억원 등 지금까지 무려 121억원의 직불금을 타 갔다.
◇ 부당지급 규모 '1천700억 vs 20억'
그러나 정말 얼마나 많은 직불금이 엉뚱한 곳으로 새나갔는지 부당지급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감사원은 지난해 쌀직불제 감사 결과 지난 2006년 쌀소득보전 직불금을 받아간 99만8천명 가운데 약 28만명을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비경작자'로 추정한 바 있다. 추정 근거는 이들이 비료 구입 실적이 없고 농협 수매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만약 이 추정대로라면 2006년 한해 지급된 쌀직불금 약 1조1천억원 가운데 무려 1천680억원이 자격없는 사람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일부 의원들은 이 28만명 가운데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감사원 자료에 따르면 28만명 가운데 ▲ 회사원 9만9천900명 ▲ 공무원 4만400명 ▲ 금융계 8천400명 ▲ 공기업 6천200명 등 농업 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그러나 직불제 주무부처인 농식품부는 이 추정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직불제에서 법적으로 부분 위탁농업이 인정되고 농기계를 사용한 농업 대행이 빈번한 상황에서, 직접 비료를 사지 않고 직접 농협에 쌀을 넘기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또 농사와 다른 직업을 겸하는 사례가 많은 만큼, 수령자의 직업 분류만으로 부정 지급 규모를 짐작하기도 어렵다는 게 농식품부측의 주장이다.
농사짓는 사람이 농지 소재지와 같은 시.군.구에 살지 않는 '관외경작'의 경우도 전적으로 부당지급 사례로 몰아붙이기 애매하다. 서울 사는 사람이 부산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의심할만 하지만, 같은 시.군.구는 아니라도 인접한 시.군.구에서 농업을 영위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쌀직불금 수령 대상 가운데 약 10만7천농가가 '관외경작'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장태평 농식품부 장관도 지난 6일 국감 현장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있지만 농사를 겸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며 "감사원이 추정한 수치는 실제 부당지급 규모라기보다 부당지급 우려가 있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라고 답했다.
농식품부가 신고 등을 통해 직접 파악한 부정 지급 규모는 ▲ 2005년 2만6천677건 18억8천500만원 ▲ 2006년 2만5천256건 11억8천400만원 ▲ 2007년 399건 6천200만원 등이다. 한 해에 적게는 6천만원에서 많아도 20억원을 넘지 않는 액수로, 감사원 추정치와 비교하면 100분의 1 수준이다. 이 정도의 격차로는 감사원의 추정치나 농식품부의 적발 실적이나 모두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정부 '자경(自耕)' 확인 강화
해마다 국감 시즌마다 허술한 쌀직불금 관리 체계가 문제로 지적되자, 이미 정부는 작년부터 '쌀직불제 개선 점검단 및 태스크포스'를 운영해왔고, 마련한 개선안을 지난 7일 국회에 제출했다.
'쌀소득 등의 보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의 핵심은 '실경작 및 임대차 확인 절차 강화'에 맞춰졌다. 앞으로 직불금 신청은 농지 소재지 읍.면.동에서만 받고, 신청인이 농지 소재지와 다른 곳에 사는 '관외 경작자'일 경우 쌀 판매 및 비료 구매 실적이나 이웃 경작자의 증명 등을 통해 반드시 직접 농사를 짓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했다.
농업외 소득과 지급면적 등에 대한 상한 기준도 설정된다. 농업을 제외한 업종에서 거두는 종합소득(부부 합산)이 장관 고시 금액 이상인 사람은 쌀농사를 짓더라도 직불금을 주지 않고, 농식품부령으로 정하는 면적보다 작은 땅에만 직불금을 주도록 규정했다. 차후 고시 및 시행규칙 등을 통해 확정될 소득과 면적 상한은 3천500만원, '개인 10ha, 법인 50ha'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쌀시장 개방 피해와 무관한 신규 진입자의 직불금 수령을 막기 위해 직불금 지급 대상도 2005~2008년에 적어도 한 번이상 직불금을 받은 농업인과 농지로 한정했다. 다만 후계농으로 선정됐거나 같은 세대원이 농사를 승계한 경우 등은 계속 대상으로 인정된다.
이번 국회에서 통과될 경우, 개정안은 당장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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