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6개월 전 그는 취임 공약으로 ‘양도세 철회’ ‘중국 베이징의 예술거리인 798과 같은 예술특구 조성’ ‘미술품 감정의 전문성 강화’ 등을 내걸었다. 그의 공약은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미술품 양도세 부과, 아직 준비가 안됐다”
미술품 양도세 부과는 미술계의 최대 현안이다. 내년 1월 ‘미술품 양도소득에 대한 종합소득세 과세법안(양도가격 6000만원 이상인 고가미술품에 대해 양도 차익의 20% 과세)’ 시행을 앞두고 회원 화랑들은 법안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 서화(書畵)나 골동품에 대한 과세 법안은 사실 1991년 확정된 후 2~3년 단위로 유예되다 2004년 폐기됐다. 그러던 것이 2008년 세제개편안에 포함되면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했다. 그는 “세금을 안 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부동산 등록도 20년이 걸렸다. 미술품 가격이나 거래에 대한 기준도 기록도 없는 상태에서 세금만 부과했다가는 미술시장의 거래만 위축시키고 음성적인 거래를 부추길 수 있다”면서 “주식시장도 거래세만 내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부동산처럼 미술시장에 나온 모든 작품들의 리스트를 만든 후 과세를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는 법 시행 6개월을 앞두고 최근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6월 15일엔 경제학자들을 초청, ‘미술문화 환경 개선과 미술품 양도세 과세’에 대한 토론회도 개최했다. “경제학자 등이 발표한 자료를 모아 책으로 만들고 있다. 그 책을 들고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을 쫓아다니며 설득하겠다. 9월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까지 국회 재경위원회 소위원회에서 법안 폐지나 유보를 통과시키는 것이 목표다.”
“양평 80만평을 아트밸리로”
양도세 문제로 머리가 아프던 그에게 요즘 신나는 일이 생겼다. 그가 공약으로 외쳤던 예술특구가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7월 초 국회 문방위(위원장 정병국 의원) 소속 의원 8명과 함께 일본 나오시마 섬을 방문하고 왔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폐허였던 나오시마섬은 ‘미술’이란 옷을 입고 ‘예술의 섬’으로 변신한 후 연 3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 명소가 됐다. 그도 만사 제치고 따라 나섰다. 성과는 컸다. 예술에 관심이 없던 의원들도 나오시마의 기적을 본 후 ‘예술특구’조성에 대한 필요성을 공감했다.
일단 장소는 양평으로 모아졌다.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의 남한강연수원이 있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일대를 포함한 2.64㎢(80만여평)에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문방위는 ‘예술특구’ 조성에 총 490여억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일단 내년 예산으로 250억원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용역예산을 끝내고 예산이 확보되면 실시설계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가 구상하는 예술특구는 어떤 것일까. “현재 양평 전역에는 600여개의 작가 작업실이 있다. 인프라가 갖춰진 셈이다. 100여개의 화랑을 입주시키고 음식점·카페·숙박시설 등 온갖 관련 산업시설을 갖춘 다음 연중 공연을 유치하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다. 홍콩으로 쏠리고 있는 세계의 미술 컬렉터들을 유치해 며칠씩 머무르면서 그림도 사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국제 아트밸리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는 홍콩과 경쟁하려면 면세지역 지정도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술특구가 본격적으로 추진된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의지도 중요하고, 미술계의 의견도 조율해야 한다. 경기도 파주의 예술인 마을인 헤이리도 있는데 수백억 예산을 들여 또 다른 예술마을을 만들어야 하느냐는 반대 여론도 있을 수 있다. 인천공항에서 거리가 만만치 않은 것도 걸림돌이다. 그는 “양평까지 걸리는 시간을 확인해 보려고 여러 차례 답사를 다녀왔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이면 도착한다”고 말했다. 조성이 된다고 하더라도 서울에 기반을 둔 화랑들이 양평까지 들어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갈 길은 멀다. 그러나 일단 첫걸음은 뗀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목소리는 잔뜩 흥분이 돼 있었다.
KIAF를 세계적인 아트페어로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화랑협회의 최대 사업이자 국내 최대의 미술장터인 KIAF는 올해로 9회째다. 9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한다. 작년 KIAF가 끝나자마자 뛰어다닌 덕분에 올해는 외국 화랑 80여곳이 참가하기로 했다. 주빈국인 영국에서도 15개의 화랑이 참가한다. 작년 주빈국이었던 인도에서 딱 2곳만 참여했던 것과 비교하면 성과가 크다. 국내 화랑까지 포함하면 총 200개의 화랑이 참여한다.
미술계의 영원한 숙제, 미술품 감정
최근 5년 새 있었던 이중섭·박수근 위작 파문은 미술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법정까지 갔던 위작 시비 때문에 미술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미술품 감정 시스템에 대해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고 화랑들은 근대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내걸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미술시장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술품 감정의 전문성을 강화해 위작 시비를 차단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국내에서는 현재 화랑협회 산하에 있던 감정기구와 통합한 사단법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유일한 감정기관이다. 현재 20여명의 감정 위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도 감정위원이다.
화랑협회는 올 들어 세 번이나 미술품 감정 발전을 위한 세미나를 열었다. 그는 “안목을 높이고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선 무조건 작품을 많이 보고 공부하는 것이 최선”이라며 “머리를 맞대는 기회를 많이 만들다 보면 관심을 갖는 사람도 많이 나올 것이고 전문가도 키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술계의 에너자이저가 되기까지
그는 어릴 때부터 활달한 성격이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정외과를 가려고 했지만 선생님이 “성적이 안된다”면서 원서를 안 써줬다. 영남대 응용미술과를 갔다. 성적 때문에 바꾼 전공이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전부가 됐다.
대학 졸업 무렵 일본에서 열린 도안 디자인 대회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대상을 받았다. 도안 디자인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 기모노에 들어가는 꽃 문양 등을 도안해준 덕에 20대에 큰돈을 만졌다. 돈이 생길 때마다 미술작품을 사 모았다. 제법 작품이 모였다. 아예 화랑을 열었다. 표갤러리의 시작인 서울 여의도 미술관이었다. 1981년의 일이다. 서른한 살에 겁도 없이 미술시장에 뛰어들어 30년이 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미술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바빠 죽겠다”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그는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을까. 다음 일정을 재촉하는 전화가 계속 왔다. 일어서려는 그를 붙잡고 미술품 투자의 장점을 물었다. “미술품은 재테크도 되지만 나를 위한 투자다. 집안에 걸린 작품 한 점이 내 눈을 키우고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이렇게 즐거운 투자가 어디 있느냐.” 차분히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그는 벌써 가방을 챙겨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