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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편네’들 힘모으니…접시 깨지긴커녕 사장님들로 우뚝

여행가/허기성 2013. 8. 23. 19:39

지난 7일 독일 베를린 미테에 위치한 ‘여편네 창업주 협동조합’(바이버비르트샤프트) 건물 앞에 기자들이 몰려와 있다. 이날 필립 뢰슬러 독일 경제장관이 직접 조합을 방문했다. 베를린/한주연 통신원

독일 여성창업 요람 ‘여편네 조합’

“그래, 여편네가 뭘 할 수 있을지 보여주겠다!”

최악의 실업률로 고민 중인 유럽연합(EU)에서 이런 슬로건을 내건 ‘여편네 창업주 협동조합’(Weiberwirtschaft·이하 여편네 조합)이란 이름의 독일 여성경제협동조합이 눈길을 끌고 있다. 반어적이고 도발적인 이름 때문만은 아니다. 적절한 지원이 갖춰지면 소자본 여성 창업주들의 대부분이 성공할 수 있음을 20여년간 수치로 증명해온 덕분이다.

 여성 총리가 이끄는 경제대국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독일 여성의 경제적 위상은 낮은 편이다. 독일연방통계청 자료를 보면, 20∼64살 여성의 70%가 생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그 중 46%는 시간제 노동자다. 2013년 독일 여성의 평균 소득은 남성보다 22% 낮다. 직장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여성들이 창업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여성 운영 사업장이 2002년 58만5000곳에서 2011년 90만곳으로 늘었을 정도다. 그런데 결과가 더 나쁘다. 여성 자영업자의 소득이 남성보다 34%나 낮다. 독일 평균보다 자영업에서 남녀 소득 격차가 더 크다. 상황이 이런데 여편네 조합의 창업 성공률은 70%다. 독일 평균을 20%포인트나 웃돈다. ‘연구대상’이 된 이유다.

여성 일자리·소득 남성보다 열악
20여년전 발족한 ‘여편네조합’서
돈·노하우 등 지원 사업 뒷받침
창업성공률 평균보다 20%p 높아

 전직 유치원 교사인 서른다섯살 주부 아이젤 클루트는 여편네 조합의 도움을 받아 연매출 15만유로(약 2억2260만원)를 올리는 회사의 사장이 됐다. 그는 결혼 이후 아이 셋을 낳고 길렀다. 그 과정에서 가사와 육아에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머릿속에 맴돌던 사업구상은 창업으로 이어졌다. 2005년 보모와 가사도우미 중개회사 퓡크트헨을 차렸다. 처음엔 집에서 파트타임 1인 사업체로 시작했다. 시작은 소박했지만, 곧 수요가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09년 그는 용기를 내 ‘여성 창업 도우미’인 여편네 조합의 문을 두드렸다. 여기서 받은 지원을 밑거름 삼아 사업을 확장했다. 현재 직원 2명과 함께 도우미 21명의 일자리를 중개해주고 있다.

 

독일 베를린 미테에 위치한 ‘여편네 창업주 협동조합’(바이버비르트샤프트) 건물에서 이곳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창업한 여성들과 조합 관계자들이 함께 서 있다. 바이버비르트샤프트 누리집

여편네 조합은 성공의 발판이 돼줬다. 클루트는 조합을 통해 창업 자금과 공간과 노하우를 제공받았다. 그는 조합에 딸린 대출업체에서 일반 신용 대출보다 낮은 금리로 5000유로(약 740만원) 이하 소액 대출을 받았다. 소액 대출이 쉽지 않은 독일에서 이런 대출은 큰 힘이 된다. 베를린 미테에 자리를 잡은 조합 건물에 사무실도 얻었다. 임대료는 1㎡당 9유로(약 1만3000원)다. 1㎡당 13∼50유로인 인근 사무실보다 훨씬 저렴했다. 특히 처음 6개월은 임대료의 50%를, 다음 6개월은 25%를 깎아줬다. 건물 안에 마련된 유치원에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점도 ‘직장 맘’에게는 행운이었다.

 6000㎡ 조합 건물 안에는 여성들이 운영하는 사업체 60여곳이 들어서 있다. 서점, 카페, 식당부터 정보기술(IT) 업체, 약국, 변호사 사무실 등 전문 사업장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클루트처럼 이 건물에서 사업을 시작해, 회사를 키워 이사를 나가는 창업주들도 많다.

 이달 초 베를린에서 만난 여편네 조합의 대표 카티야 폰 데어 베이(50)는 우수한 ‘창업 성적표’의 비결을 귀띔해줬다. 그는 “창업을 해보면 계획과 현실이 많이 다르다. 사업을 시작한 여성들이 현실적 어려움에 부닥칠 때, 이곳에선 전문가와 다른 창업자들에게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높은 창업 성공률의 핵심은 네트워크다”라고 말했다. 창업 성공률뿐만 아니라 창업주들의 만족도도 높다. 폰 데어 베이 대표는 “여성 사업체는 남성이 운영하는 사업체에 비해 규모도 작고 수익도 높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카티야 폰 헬도로프는 2년 전 여편네 조합을 통해 ‘재료 마피아’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스폰지, 플라스틱 같은 재활용 폐품을 예술가에게 되파는 일을 한다. 어린이를 위한 환경교육과 미술 워크숍도 병행한다. 아직 큰 수익은 못 내고 있지만 생계를 유지할 정도는 된다. 그는 “미래를 믿는다”며 자신감에 차 있다.

지원 핵심은 협동조합 네트워크
조합 건물에만 60개 업체 입주
한 지붕 창업자들 서로 도움줘
EU 전체로 ‘비결’ 전수 나서기

 여성경제협동조합 아이디어는 1980년대 여성운동에서 태동했다. 1985년 베를린자유대학 사회학과의 한 여학생은 논문을 쓰다 자영업자 3명 중 1명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창업에 나서는 여성들에 대한 지원이 전혀 없었고, 여성 자영업자들의 사업 환경이 남성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이 학생은 여성학술회의에 참가해 이런 연구 결과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여성들이 창업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논의의 싹을 틔웠다. 유치원 등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조건도 고려했다. 하지만 이런 구상을 현실화하기까지는 몇년이 걸렸다. 1989년 마침내 여편네 조합을 협동조합으로 등록했으나, 이번엔 건물 마련이 난제였다. 독일 통일이 이들에게 기회가 됐다. 동독의 국유재산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신탁청을 통해 1992년 화장품 공장 건물을 저렴하게 구입했다. 옛 동독지역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던 독일 정부의 투자를 받았고, 베를린시의 대출도 받았다. 이후 1800만유로(약 269억원)를 들여 친환경 에너지 건물로 탈바꿈한 공장이 지금의 조합 본부다.

 조합 건물 1층 입구에 있는 여성창업자센터는 여성 창업주들을 위해 문을 활짝 열고 있다. 8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창업 관련 상담을 해준다. 이 건물에 사무실을 임대하려면 먼저 조합원 등록을 하고 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조합비는 103유로(약 15만4000원)다. 창업자들 이외에 여성 자영업자를 지원하고 싶은 이들도 조합원이 될 수 있다. 현재 조합원은 1700명 정도다. 수익 배당이나 조합비 환불은 받을 수 없지만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 지분에 관계없이 한표를 행사한다.

 독일에는 여편네 조합 이외에도 비슷한 구실을 하는 여성 자영업자 지원 단체가 12곳이나 있다. 이들 단체들이 네트워크를 구성해 협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협동조합 방식은 여편네 조합이 유일하다. 국민 4명에 1명꼴인 1800만명이 협동조합원일 정도로 ‘협동조합 선진국’인 독일 상황에서는 의외다. 나머지 단체들은 공익협회나 펀드 형식으로 운영된다. 폰 데어 베이 대표는 “협동조합은 여성 창업을 지원한다는 우리의 아이디어에 최선”이라며 “협동조합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은 조합원들의 이해에도 맞다”고 설명했다. 유럽 등 세계 각국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의 시대’에, 공공 자금의 부족을 시민 연대로 풀어간다는 점도 의미있는 실험이다. 최근엔 젊은 조합원의 참여가 부쩍 늘고 있다. 폰 데어 베이 대표는 “우리는 새로운 흐름에 열려 있고, 창업주들과 접촉하며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독일과 유럽연합의 많은 예비 여성 창업자들과 단체들도 여편네 조합의 성공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99년부터 14년간 조합을 이끌어 온 폰 데어 베이 대표는 유럽연합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비결을 전수하고 있다. 창립을 준비하고 있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여성창업센터는 초기 단계부터 이 조합의 도움을 받고 있다. 베를린시의 관광 프로그램 중엔 여편네 조합 방문 코스도 있다. “조합을 방문했다가 ‘이런 단체라면 나도 후원하겠다’며 조합원이 되는 여성도 많다”고 조합 관계자가 말했다. 이곳에서 서로 돕고 지원을 받으며 성공한 여성 창업주들의 성공 사례는 유럽 여성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