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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처·조강지부의 역습(逆襲)'

여행가/허기성 2013. 8. 28. 19:16

우리OO이 아빠를 돌려주세요.” (조강지처)
“XX씨는 이제 당신보다 저를 더 사랑해요. 깨끗이 물러나 주세요.” (불륜녀)

  2000년대 이전까지 조강지처(糟糠之妻)와 불륜녀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가정의 화목과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조강지처는 ‘내 남편의 애인’을 찾아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제발 떠나달라”고 사정했습니다.젊고 예쁜 불륜녀는 “당신 남편은 당신이 싫다고 하지 않느냐. 많은 걸 바라지 않으니 이혼만 해달라”고 당당하게 말했죠. 대부분의 ‘막장 드라마’가 이런 장면을 자주 다뤘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무일푼으로 쫓겨나기만 했던 조강지처들이 이제는 남편을 무일푼으로 쫓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불륜녀들에게서도 위자료를 받아내고 있습니다. 법원도 가정파탄에 책임이 없다고 판단되면 조강지처들의 손을 확실히 들어주고 있지요.


	[클릭! 취재 인사이드] '조강지처·조강지부의 역습(逆襲)'
간통 혐의가 형사법정에서 무혐의로 판결이 날지언정, 가정법원은 ‘가정의 근간(根幹)을 흔들만한 불륜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되면 주저없이 불륜녀의 책임을 인정합니다. 물론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내 아내의 불륜남’에게서 많은 남편들이 수천만원씩의 위자료를 받아냅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 및 조강지부((糟糠之夫)의 역습(逆襲)’이 펼쳐지고 있는 거지요.

 수십년간 불륜녀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받아왔던 한 여성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새댁 시절부터 중년을 넘긴 지금까지, A(여·65)씨를 40여년간 괴롭힌 사람은 이웃집 여자 B(72)씨였습니다. A씨는 남편과 1970년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B씨와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B씨는 A씨의 존재를 알면서도 아랑곳않고 내연녀로 살아왔죠. 결혼 42년 만인 2012년, A씨는 결국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냈습니다. 남편의 외도 때문에 A씨는 이미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던 A씨는 이번엔 독하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남편과 이혼한 데 이어 불륜녀 B씨에게도 “5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소송을 낸 것입니다. 이에 대전가정법원 천안지원 차주희 판사는 올 1월 “B씨가 A씨의 남편과 부정한 행위를 한 기간이 40년 가까운 장기간인 점 등을 참작해 A씨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인다”고 판결했습니다.

 수십년간 남편을 빼앗겼던 A씨의 슬픔에 비하면 위자료 5000만원은 큰돈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상간(相姦)녀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5000만원은 이례적으로 큰 금액입니다.이처럼 장기간 정신적 고통을 받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불륜녀가 조강지처에게 위자료를 물어줘야 한다는 판결은 거의 ‘규칙’처럼 정착된 상황입니다.

 최근 서울가정법원에서 나온 판결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혼한 40대 여성 C씨는 전 남편과 바람을 피운 여성 D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원래 C씨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지난해 남편의 금고에서 남편과 D씨가 성관계하는 영상이 담긴 CD를 우연히 발견하고 소송을 냈습니다.이에 재판부는 “D씨는 남성에게 배우자(C씨)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정행위를 해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원인을 제공했다”며 “D씨는 C씨의 정신적 고통을 금전적으로나마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D씨는 꼼짝없이 C씨에게 2000만원을 물어주게 됐습니다.

 
◇ “간통죄 유죄판결 쉽지 않으니 차라리 불륜 배우자와 상간(相姦)자에게서 위자료나 받아내자”는 경우 늘어나

하지만 모든 불륜 남녀들이 본부인(本婦人)·본남편에게 위자료를 배상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관계자는 “이혼 이후에 불륜 사실이 발각돼, 사실상 불륜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발생했던 적이 없었다고 판단되면 위자료 지급 판결이 나오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불륜이 가정파탄과 이혼의 중요한 원인이 됐을 경우에만 불륜 남녀에게 배상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3년 전 성격차이로 이혼한 전 부인이 알고 보니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면, 뒤늦게 위자료를 청구하긴 어렵다는 이야기죠. 또 ‘내 아버지의 불륜녀’ ‘우리 엄마의 남자’에게 자녀들이 위자료를 청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지난해 1월 수원지법 민사7부(재판장 김지영)는 유모(44)씨가 아버지의 내연녀 정모(55)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씨는 정씨에게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유씨의 아버지는 1996년부터 정씨와 내연관계를 맺었으며, 2008년 간암으로 숨질 때까지 정씨와 동거했다고 합니다.이 때문에 유씨 가족은 완전히 파탄났고, 유씨는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고혈압에 시달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혼인관계에서 정조·동거 의무는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의무이고, 당사자 간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며 “유씨의 아버지와 정씨가 간통으로 아이까지 출산했지만, 정씨가 유씨에게까지 가정파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고 봤습니다. 불륜남녀에 대한 위자료 청구는 남편이나 부인의 권한이지, 자식의 권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 법조계에서는 ‘본부인·본남편의 반격’이 증가하는 원인으로 ‘간통죄 유죄 판결의 감소’를 들었습니다. 간통죄로 형사처벌 대상이 된 사람은 2005년 7575명에서 2010년 3311명으로 절반 이상 줄었습니다.‘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간통 사건에 공권력이 개입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수차례 일었고, 간통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사건 현장’을 덮쳐야 하는데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간통죄로 고소해서 감옥에 집어넣기는 어려우니, 배우자와 상간(相姦)자에게 차라리 위자료를 받아내자”는 공감대와 분위기가 늘어난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대로라면 ‘막장 드라마’의 시나리오는 대폭 수정돼야 할 것입니다. 불륜녀가 뻔뻔하게 집에 들이닥쳐 조강지처를 핍박하는 모습은 구시대적입니다. 조강지처가 불륜녀에게 고소장을 들고 가 “당신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받았으니 위자료를 준비하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현실적이겠지요. 일부 이혼전문 변호사들 사이에선 “불륜으로 인한 위자료 배상 범위가 앞으로 점차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옵니다. 과거엔 남부끄러운 일이라며 쉬쉬했던 일들이 공적 영역으로 나오게 되면서, 판단하기 어려웠던 미묘한 감정의 문제도 법원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불륜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좀더 정교하게 형성되면, 자식이 부모의 불륜남녀를 상대로 위자료를 받아내는 것도 가능해질 수 있겠지요. 달라진, 앞으로도 더 달라질 ‘조강지처·조강지부들의 역습’이 사뭇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