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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변에 주민들이 '왁자지껄'... 무슨 일일까

여행가/허기성 2013. 12. 12. 17:17

 

북한 해변에 주민들이 '왁자지껄'... 무슨 일일까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잊힌 우리 나라,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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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민속공원에 재현해 놓은 발해궁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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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역사시간 때 교과서에서 읽은 얄팍한 지식이 전부다.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의 고토에 세운 나라로, 한때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나마 역사 교과서에 언급돼 있어 막연히 우리의 고대국가 중 하나였다고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발해가 문화적으로 어떤 나라였는지를 비롯해 발해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갖고 있는 위상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히 배운 기억이 없다. "지배계급이 고구려 사람들일 뿐 주민의 대부분이 말갈인들이었다"며 발해를 마치 남의 나라인 것처럼 다뤘던 역사 선생님의 접근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당연히 남쪽에는 유적마저 없으니 발해가 우리나라였다는 게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을 듯하다. 점차 발해는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모양새다. 그런데 그 발해의 유적이 통째로 남아있다고 하니 어찌 흥분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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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심사 풍경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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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려 몇 발자국 옮기자 발해 유적인 개심사가 눈에 들어왔다. 겉보기에는 남한에서 봐왔던 여타 고려시대 절들과 다를 게 없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혹시라도 나는 이 절이 '내가 이제껏 봐 왔던 절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면 어쩌나' 하며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모습이었다면, 발해를 남의 나라인 것처럼 취급했던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며 별다른 감흥없이 이 절을 휘익 둘러보고 나왔을 테니까.

 발해시대 절 개심사 풍경
ⓒ 신은미


물론 나는 불교 건축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 그러니 설사 남한에서 본 사찰들과 그 양식이 다르다고 해도 그 차이를 알 턱이 없을 터. 그저 내 눈에는 개심사가 조국의 땅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고려시대 절의 모습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나는 대웅전의 단청이며, 범종 등 구석구석 최대한 사진을 많이 찍어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다른 왕조들의 절과 비교해 특별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든 칠보산의 위험한 비포장도로가 되레 나로 하여금 이 절에 대한 정서를 한층 더 깊게 한다. 구도를 하는 수도승이 가파른 언덕을 미끄러지듯 넘어져 가며 간신히 기어오르는 것처럼.

중국인들은 우리가 태동했을지도 모를 요하가 흘러들어 가는 바다를 발해만(보하이만)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지도에도 그렇게 명명돼 있다. 그렇다면, 그 바다의 주인은 바로 우리라는 말 아닐까.

신라와 등을 지고 살다 홀로 최후를 맞았을 발해여, 외로워 마라. 그대들의 8천만 후예들이 반도와 해외에 살고 있다. 그대들의 후예들은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그대들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북에서 먼 친척을 만나다

개심사를 떠난 우리 일행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산길을 따라 오늘 머물 내칠보 관광려관에 도착했다. 함경북도 산골짜기 여관에도 불빛은 환하다. 전기 사정이 확실히 예전에 비해 좋아진 것 같다. 지난해 들렀던 개성의 민속호텔이 생각난다. 당시 호텔 지배인은 "저녁 식사때 정전이 될지도 모르니 손전등을 꼭 준비해오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전이 됐었다. 다행히도 식사를 마친 후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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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주를 따르는 설향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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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현지 관광안내원 아저씨의 휴대전화로 미리 연락을 받은 여관의 식당에는 이미 음식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대동강맥주'가 어김없이 올라와 있다. 웨이트리스가 "칠보산은 공기가 좋아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니 마음껏 드시라"고 알려준다.

남편과 나는 유럽 관광객들의 음식과 함께 놓여 있는 우리 식사를 안내원들의 식탁으로 옮겨달라고 청했다. 안내원들과 함께 동포의 정을 나누며 식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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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평산 신씨인 현지 안내원 신철민과 함께. 따져보니 내 할아버지 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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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은 자리 옆에는 현지 안내원 아저씨가 있었다. 자신을 신철민이라 소개한다. 평산 신씨인 내 할아버지 항렬이 '철'자 돌림인데 이분의 이름에도 '철'자가 들어가 있다. 혹시나 해서 본을 물어봤다.

"실례지만 무슨 신씨예요?"
"평산 신씨입니다."
"어머, 나도 평산 신씨인데 그럼 돌림자가 '철'자인가요?"
"네, '철'자입니다. 우리 아버지 대는 '현'자이고, 제 자식대는 '동'자입니다. 그다음이 '섭'자이고."
"어머, 그러시군요. 나는 여자라서 돌림자를 쓰지 않았는데, 우리 대가 '섭'자이고 제 아버님 대가 '동'자 돌림이에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이 닮았다"며 옆에 있는 다른 안내원들이 맞장구를 친다. 눈이 참 많이 닮았단다.

"아이고, 내 손녀뻘이시네요."

신철민 안내원이 깜짝 놀라며 반가워한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한다. 이후 신철민은 나를 '손녀따님'이라고 다정하게 부르며 따뜻하게 나를 대해줬다. 우리의 전통이 북한에도 남아있고, 사람들은 그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얽혀있다. 씨족사회의 전통이 남과 북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남'이 될 수 있을까.

식사 전 맥주를 마시며 '고난의 행군' 시절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자강도(옛 평안북도에서 분리된 새 행정구역) 사람들은 '니탄국수'라는 것을 먹었다고 한다. 니탄이란 석탄의 일종이라는데, 뜻을 풀이해 보면 석탄으로 만든 국수다. 그런데 이 음식은 당시 요리경연대회에 출품돼 상을 받은 음식이란다. 석탄으로 국수를 만들다니…. 역시 인간은 극한에 달하면 별 재주를 다 발휘하는 걸까. 가슴이 쓰려오면서도 먹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과연 '니탄국수'는 어떤 맛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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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보산 여관에서 안내원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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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물·고비나물 등 칠보산의 향취를 듬뿍 품은 산나물과 명태조림·도루묵 튀김 등 신선한 동해바다의 해산물, 게다가 오리도리탕까지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밥상에는 온갖 생선이 끊이지 않고 올랐다'는 어머니의 옛 친구 '오랑아줌마'의 말씀을 떠올려본다. '고난의 행군' 시절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내게 주어진 귀한 음식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김없이 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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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신철민 안내원이 생수병에 담아 준 칠보산 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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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칠보산의 향긋한 내음이 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이런 황홀경에 젖어 있음도 잠깐, 그새 모기들이 쉴 새 없이 나를 공격한다.

그러나 유리알처럼 맑은 칠보산의 공기에  흠뻑 취한 우리 부부는 그래도 창문을 열어놓기로 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여니 현지 안내원 신철민 '할아버지'가 노란 액체가 담긴 플라스틱 생수병을 들고 서 있다.

"칠보산 꿀입니다. 주무시기 전에 꼭 드시고 또 물에 타서리 갖고 다니시면서 드십시요. 이 산골짜기에서 제가 손녀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꿀을 받아드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어 방문을 닫고 돌아서니 콧등이 시큰해진다.

이곳이 핵폭탄 실험장 근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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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암절벽 아래 세워진 칠보산 관광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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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남편이 조용히 내게 묻는다.

"당신 지금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나 있어?"
"어떤 곳이라니요, 함경북도 길주 명천의 칠보산이지."
"이곳이 바로 핵폭탄 실험장이 있는 곳이야."

나는 기겁을 하고 남편에게 물었다.

"핵폭탄 실험장이요?"
"응. 당신은 뉴스는 안 보고 허구한 날 연속극이나 보고 있으니 알 턱이 없지. 북한의 핵폭탄 실험장이 바로 이곳 길주 풍계리에 있어."
"어머, 풍계리라는 곳이 여기서 가까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우리나라의 '군'이나 '리'라는 것이 작으니 절대로 여기서 멀지는 않을 거야."

"어머, 그러면 이 동네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지 않았을까요? 여보, 우리 어서 창문 닫읍시다."
"에이구 호들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바로 옆 네바다 주에서는 핵실험을 수백 번도 더 했어. 당신 라스베이거스에 가면서 그것도 몰랐지?"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 주에서 핵실험을 했다고요?"
"응, 그래도 아무 일 없었으니 엄살부리지마. 여기서는 세 번뿐이 안 한 걸로 알고 있어. 그러니 걱정 말고 어서 잠이나 자."

이 아름다운 산 옆에 핵폭탄 실험장이 있다니. 그 충격으로 칠보산의 기암괴석에 흠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다.

자리에 누워 핵문제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북한은 왜 핵을 갖고 있을까. 핵은 '가난한 자의 선택'이라고도 하던데 그래서 일까. 아니면 미국으로부터 핵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해 대응하려는 것일까.

한미합동 군사훈련 때 등장하는 미군의 핵 잠수함이나 핵 폭격기는 북한의 핵에 대비하는 것일까. 왜 미국은 수천 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북한에게는 갖지 말라고 하는 걸까. 북한은 평화가 보장되면 핵을 포기할까. 왜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은 용인하고 다른 아랍국가들의 핵은 기를 쓰고 막는 걸까.

머리가 복잡해지고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혹시 남편이 알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려고 했지만, 남편은 이내 잠이 들었다. 괜스레 사람 걱정하게 만들어놓고 코만 골면서 잔다. 장수산 가는 차 안에서 설향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남녘의 대통령께서 '머리 위에 핵을 이고 살 수는 없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발밑에 미군의 핵을 깔고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그리고 북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 정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미국은 우리의 민족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분단 상황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 수도 있다. 우리의 민족 문제나 통일을 이런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골치가 아파온다. 이를 어찌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핵이 북미간의 문제라고 해도 이는 우리 민족 전체의 생존과 맞물려 있다. 분명 이에 대한 남한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남한은 경제강국으로서 그 역할을 짊어질 수 있는 역량이 있지 않은가.

문득 미국과 중국의 관계정상화가 떠오른다. 당시 미국의 집권당은 공화당이었고 대통령은 닉슨이었다. 미-중 정상화도 보수정당인 공화당 정권이 주도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지, 민주당 정권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남북문제도 마찬가지 아닐까. 민족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박근혜 정부가 더 많은 국민적 동의와 지지를 바탕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도 해본다.

만약 그녀가 '종북몰이'를 접고, 북한을 형제의 정으로 대하며 함께 손을 잡고간다면 우리의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된다면 그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와 조국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나갔다. 평안북도 묘향산의 공기보다 이곳의 공기가 더 상쾌하게 느껴진다. 북한의 자연경관은 무척 빼어나다. 석유가 모자라기 때문이겠지만, 화학제품으로 인한 공해도 거의 없다. 만약 북한 동포들이 이와 같은 상태에서 경제발전을 이뤄낸다면 '녹색혁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럼 평양은 '공산혁명의 수도'라는 호칭 외에 '녹색혁명의 수도'라는 별칭을 하나 더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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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보산 려관 식당 웨이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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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의 오늘 일정은 외칠보를 구경한 뒤 해칠보를 향해 바다로 가는 것. 우리의 식사를 담당했던 웨이트리스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눈다. 이 웨이트리스는 헤어스타일이며 옷차림이며 어찌 그리도 남한 여성과 똑같은지. 처음 그녀를 보는 순간, 남한에 온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녀는 유럽 관광객들과 인사를 마친 뒤 우리 부부에게 다가왔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동포의 정을 듬뿍 담아준다. 순간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말이 생각난다. 스스로를 '뿌리없는 풀'이라고 불렀던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는 그녀의 저서 <평양의 여름휴가 : 내가 본 북조선>에서 "마음이 조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적어놨다.

유미리 작가의 조부모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이라고 한다. 게다가 드라마 <온에어> <풀하우스>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녀는 북한을 방문하기 전 무려 10여 차례나 남한에 다녀갔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왜 한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북한에 가서야 "마음이 조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썼을까.

나는 그녀의 기행문을 읽으면서 의문을 품어왔다. 이런 의문에 대해 그녀는 한국의 기자들에게 "남한에는 사무적인 일로 다녀갔으며 북한에는 휴가차 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추측하건대 그녀가 본 남한은 뿌리 내리지 못하는 야생풀처럼 살았던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되레 조부모가 이야기해줬던 '고향'의 이미지가 북한에 남아 있어 자연스레 그녀의 마음이 그곳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었을까.

"남조선에서는 지금도 양반 상놈 따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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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상 전망대에서 설향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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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망대에 올라 내칠보와 외칠보를 동시에 둘러본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칠보산의 기암괴석들은 또 다른 형상으로 우리를 반긴다. 조선시대의 누군가는 칠보산을 구경한 뒤 '귀신의 솜씨로 빚은 산'이라 평했다는데, 정말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물상을 감상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전망대에 올랐다. 유럽 관광객들은 절경에 환호를 보낸다. 아름다움이란 전 세계인들의 보편적 가치인가 보다. 유럽 관광객 한 사람이 백두산에서 배운 "만세!"를 열창한다. 우리도 모두 만세를 외친다. '할아버지' 신철민 안내원이 남편을 '매부'라 부르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해 내가 한마디 했다.

"아니 양반집 가문에서 손녀 사위에게 매부가 뭐예요. 할아버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내원들이 배꼽을 잡고 박장대소한다. 스페인어 안내원 김광혁이 웃음을 참으며 묻는다.

"남조선에서는 지금까지도 양반 상놈 따집니까?"
"그런 게 어딨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 결혼할 때 아직도 그런 거 따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주 극소수야. 그나마 노인들이 계신 집안에서 그런 일이 간혹 있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집안에서 반대한다고 들을 사람 하나도 없어."
"아무리 노인네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아직도 양반 상놈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거야…."

안내원들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계속 양반 상놈에 얽힌 실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댄다.

"아주 오랜 옛날이야기라서 해줄 게 없어. 사람들이 그저 농담으로 하는 말이야."

내가 이곳에서 괜한 농담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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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보산속의 한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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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하나를 더 구경한 뒤 해칠보로 간다고 한다. 버스 속에서 안내원들이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로 시작하는 노래다. 심산계곡에 노래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절경은 차창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아, 삼천리 화려강산이여!

차에서 내려 수정 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깊은 산속에 폭포수가 떨어져 작은 못을 이루고 있다.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여기서 나뭇가지를 꺾어 밥을 짓고, 폭포 소리를 들으며 천막을 치고 한숨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 북한 외칠보의 모습을 공개합니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에 다녀온 신은미 시민기자가 8월 21일 찍은 함경북도 외칠보 영상을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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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만난 북한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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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관광객들을 실은 차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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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해칠보로 가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 반대 방향에서 북한주민 관광객들을 실은 차량들이 줄지어 올라온다. 지난해에 비해 관광지마다 북한주민 관광객들이 많이 늘어난 모양새다.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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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칠보로 가는 길옆의 기암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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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칠보로 빠져나가는 길옆도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간혹 숲 속에 사람이 보이기도 한다. 설명을 들어보니 송이를 채취하는 주민들이란다. 이곳 송이의 향과 맛은 단연 으뜸이란다. 북한 동포들 손길이 묻은 칠보 심산 자연산 송이 몇 톤을 남으로도 보냈었다고 한다. 아마 6·15 공동선언 이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남과 북의 동포들이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하던 그 시절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니 마을이 나타난다. 북한은 내륙지방의 산세가 험해 바닷가 쪽으로 평야가 발달해 있다. 자연히 농사 짓기가 수월할 뿐만 아니라 바닷가 지역이라 해산물도 풍부하다. 그래서 인지 이곳 마을도 가옥 상태며 생활수준이 비교적 윤택해 보인다.

 

해변에는 피서를 나온 북한 주민들이 게임을 즐기며 한바탕 즐겁게 놀고 있다. 이들의 모습이 해칠보의 자연경관보다 더 아름답게 비친다. 남편과 나는 놀이를 즐기고 있는 북한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고자 모래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래사장 위에 천막을 치고 온갖 멋을 부린 여성들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자 신철민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우리를 부른다. 배를 타고 우선 해변부터 둘러보자고.

 배 위에서 바라본 해칠보
ⓒ 신은미

우리는 모터가 달린 작은 목선에 올랐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해칠보 해변은 외칠보 끝자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배경 속에 옹기종기 마을도 보인다. 해변과 가까운 바다에는 바위들이 널려있고, 무리 지은 물새들이 그 위에 앉아있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바다와 평화로운 마을이 한 점의 수채화 같다.

배에서 내린 우리는 '춤추며 노래하는' 북한주민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