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 2006년 인도 만모한 싱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하나 제안했다. 인도 델리와 뭄바이를 잇는 서북부 1500㎞를 관통하는 이른바 '델리-뭄바이 산업회랑' 사업이었다. 단순히 철도만이 아니다. 철도 주변에 신도시를 조성하고 산업시설도 함께 건설하는 인도 6개 주, 전체 영토의 16%를 개발하는 900억달러 규모의 대역사였다. 이후 2009년 정상회담에서 마스터플랜이 확정됐고 다음 해 사업이 추진됐다.
이 같은 거대한 사업은 한 나라의 경제발전계획을 함께 수립하지 않고는 만들 수 없는 계획이다. 일본은 인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서북부 종단철도 건설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하고 인도 정부가 이를 공식 제안함으로써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후 이 사업에 45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투자조건으로 물처리, 발전소 등 19개 인프라공사 120억달러 규모의 사업을 일본 기업이 맡는 것이었다.
■자금싸움의 한계
우리의 경쟁자인 일본과 서구 선진국, 중국의 무기는 역시 막대한 공적개발원조(ODA) 자금력에 있다. 지난해 기준 미국의 ODA자금은 305억달러로 단연 세계 1위이고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은 100억달러 이상 규모의 원조대국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5억달러로 경쟁국의 10분의 1가량이다.
중국은 원조액수를 상시 공개하지 않지만 2011년 최초로 발간한 대외원조백서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중국의 대외원조 규모는 약 388억달러를 기록했다. 이 중 무상원조는 160억달러로 약 41%를 차지하며 유상원조는 무이자차관 116억달러, 우대차관 111억달러로 구성돼 있다.
중국은 지난 2000년부터 신흥국을 타깃으로 삼아 국가 차원의 해외프로젝트 수주에 나섰다. 지난해 '중국·아프리카 협력 정상회의'에서 200억달러 규모의 차관 지원계획을 발표했다. 저개발국 아프리카에 앞으로 들어설 공항, 도로, 철도, 물처리시설, 전기 등 도시 인프라와 병원, 학교 등 생활시설 공사를 노린 것이다. 이 같은 전략으로 중국은 해외건설 수주 1위국에 올라 있다.
동남아에서 ODA의 격전장이라 해도 좋을 베트남은 일본의 원조자금이 투입된 하노이 노이바이국제공항 제2청사 건설사업을 일본 기업이 맡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남기업이 진입도로 건설사업 같은 소규모 사업을 수주하기도 했지만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최근 베트남 정부가 입찰한 2000만달러 규모의 통계정보화 시스템 구축사업에 우리나라 현대정보기술이 뛰어들었지만 결국 유럽 기업의 손에 넘어갔다. 입찰 전 이미 관련 사업계획 수립부터 관계를 맺어온 국가였다. 우리나라는 정보기술(IT) 분야 우수국가로 동남아에서 지명도가 높지만 결국 수주전쟁에서는 이미지보다 국가적 지원을 등에 업은 원조자금이 관건이다.
중국은 풍부한 자본력과 가격경쟁력이 있고, 일본 같은 선진국은 뛰어난 기술과 전문인력이 더해져 저개발국에 진출하고 있다. 해외에서 이들 나라와 경쟁해 성과를 내기에 우리나라는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처지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ODA 자금을 늘릴 수도 없다. 재정 문제로 국내 복지를 줄이는 형편에 해외 원조를 늘리는 것은 저항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 동경하지만 그게 뭐?
우리의 유일한 강점은 저개발국의 처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선진국과 달리 최근 개발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저개발국들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과정을 보면서 압축성장에 주목한다. 우리나라는 1962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110달러로 필리핀(210달러), 가나(180달러)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런데 1980년 1660달러, 2000년 1만1292달러 2008년 1만9231달러로 50년 만에 200배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필리핀은 210달러에서 2063달러로, 가나는 180달러에서 603달러로 각 10배, 3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런 성장이 지하자원 없이 비옥한 토지나 넓은 영토, 대규모 인구도 없이 이뤄졌다는 점을 듣고 나면 이들 나라는 경이로워한다. 식민지배와 내전을 치른 뒤 곧이어 이뤄낸 성과라는 얘기에는 존경까지 표한다. 이런 상대 나라의 반응들은 저개발국 원조사업을 경험한 국내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저개발국들이 압축성장에 매료돼 우리나라를 따라 하면서 우리 기업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해외 경제전쟁 현장에서는 막연한 동경보다 치열한 전략이 승부를 가른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대학생들이 오지에 나가서 우물 파고, 현지 아이들과 정을 나누는 것은 좋은 봉사활동이다. 하지만 사진 찍고 홍보하면 그뿐 그 나라의 경제와 복지 정책을 함께 고민해서 수립하고 실행할 현지 공무원을 교육하는 것, 힘 닿는 대로 자금도 대주고 한국 기업들도 같이 돕게 하는 것이 진정한 원조"라며 "한국의 개발경험을 나누는 것은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 기업이 낚싯대를 팔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선진국 시장의 소비 둔화와 시장 포화를 신흥국 진출로 뚫어보려는 생각을 우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원조를 앞세운 경제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세계 GDP 중 신흥개도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20%에서 2010년 34%로 늘었고, 오는 2017년에는 42.5%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신흥국에서 주요 글로벌 기업들도 사업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은 산업부문 매출에서 2001년 미국 내 매출이 63%를 차지했다. 신흥시장은 18%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6년, 2011년 신흥시장 매출이 27%, 37%로 성장했으며 이 기간 미국 매출은 49%, 41%로 점차 줄었다. 독일 지멘스는 1999년 통신·반도체 분야를 접고 그 자리에 도시인프라와 에너지 사업을 키웠다. 신흥국을 겨냥한 사업포트폴리오 조정이다. 일본 히타치는 스마트 인프라 분야를 키워 동남아, 중국, 인도 등의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장점을 살리려면 신흥국이 목말라하는 경제개발 노하우와 자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차문중 한국개발연구원(KDI) 전 국제개발협력센터장은 "우리나라의 압축성장과 경제발전 역사에 대해 개도국에서 책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많다. 그래서 한국은 선망의 대상이지만 실제적인 노하우를 알려주려면 경제정책 수립과 실행을 경험해 본 인력을 현지에 파견해야 한다"며 "이와 함께 경제협력자금과 우리 기업의 협력적 진출이 함께 돼야 ODA 자금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