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캠핑버스테마여행

♣캠버스·1박~2박 여행일정 안내♣/♣부동산경제

"흙에 살리라"..쳇바퀴 도시생활 버리고 제2의 삶

여행가/허기성 2014. 7. 12. 09:19

"흙에 살리라"..쳇바퀴 도시생활 버리고 제2의 삶

귀농·귀촌 택하는 사람들

대도시를 떠나 지방 소도시로 귀농·귀촌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2001년 880가구에 불과했던 귀농·귀촌가구는 2007년 2000가구를 넘어서더니 2012년엔 2만7000가구를 돌파했다. 지난해엔 3만2424가구가 시골살이를 택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시골을 삶을 터전으로 삼는 것일까. 퇴직 후 제2의 삶을 찾는 베이비붐(1955∼63년 출생자) 세대부터 팍팍한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낀 젊은 층까지 연령대, 이유도 다양하다. 귀농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탈(脫)도시, 취업난, 자립적인 삶… 30대들의 귀농

이승희(32·여)씨는 처녀 농부다. 전북 고창군 해리면 3409㎡ 넓이의 들판에서 고추와 삼채 농사를 짓고 있다. 4월부터 모종을 심고 7월 말부터 시작하는 고추 수확은 11월 초까지 계속된다. 뿌리 약효가 더 좋은 삼채는 봄에 심어 겨울에 수확하고, 효소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이씨는 직접 가꾼 수확물과 효소를 판매하는 인터넷쇼핑몰과 블로그 '고창처녀농부'를 만들어 운영 중이다.

햇볕에 그을려 주근깨가 내려앉고 까무잡잡해진 얼굴이며 밀집모자에 헐렁한 티셔츠와 바지 차림. 시골농부 티가 풀풀 나는 이씨는 2년 전만 해도 서울의 평범한 사무직 직장인이었다. 그가 귀농을 결심한 건 2009년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참여해 농장체험을 하면서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가슴이 넉넉한 삶을 사는 농장주들의 행복한 모습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직장생활에 문득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고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 노력한 만큼 결과를 갖고 또 만족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결론은 '귀농'이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2년여간 인터넷을 통해 조금씩 정보를 쌓았다. 고향인 고창으로 삶의 터를 옮기고 나서는 귀농귀촌학교와 고창개발대학, 고창귀농귀촌협의회 등을 통해 농사지식을 쌓아가며 귀농을 준비했다. 부족한 자금은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으로 해결했다. 소득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줄었지만 이씨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판단한다.

그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당초 계획했던 길로 가고 있다"며 "자연을 벗삼아 살다보니 스트레스가 줄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박덕근(39)씨가 '귀농'을 선택한 건 농산물 가공·유통 사회적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다. 꿈인 법조인의 길을 가기 위해 연세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에 도전했지만 수차례 낙방했다. 그는 다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아내를 따라간 적십자 바자회에서 그는 답을 얻었다. 껍질을 벗겨낸 호두를 용기에 담아 판매하니 가격이 4배 넘게 뛰었고, 그런데도 불티나게 팔리는 모습을 본 것이다. 마침 박씨의 부모가 예천에서 호두 농사를 짓고 있었다. 예천 특산품인 참깨를 참기름으로 가공 판매하면 수익이 괜찮을 것으로 예상했다.

2011년 11월, 그는 귀농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박씨는 "고향 분들이지만 '고시에 실패하니 시골에 농사지으러 내려온 것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박씨의 부모 역시 반대했다. 힘들게 농사지어 대학에 보냈는데 시골에서 농사짓겠다는 아들을 반길 수만은 없어서였다.

그럼에도 꿋꿋이 귀농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차근차근 준비해간 그는 2012년부터 벼와 잡곡 등의 농사를 시작했다. 힘든 만큼 거둘 수 있는 일. 그가 느낀 농사의 묘미였다. 그는 주변의 민심을 사는 데도 공 들였다. 최근 그는 귀농인 20여명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농산품의 활발한 유통을 위해서다. 박씨의 카카오톡에는 '행복한 인생'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


◆전원 속 '제2의 삶'… 40·50대의 귀농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남부럽지 않은 타국 생활을 하던 박윤경(45)·최재원(46)씨 부부의 귀농은 암과의 싸움으로 시작됐다. 박씨가 2007년 11월 귀국해 받은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2년 만인 2009년 암세포는 폐와 간으로 전이돼 절망적인 상황이 됐다.

박씨는 18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그해 5월 나홀로 귀국해 친정인 전북 전주로 돌아왔다. 항암치료 등으로 쇠약해진 박씨의 치료와 안정을 위해 2011년 3월 박씨 부부는 귀농했다. 귀농지는 박씨의 고향인 전주에서 가까운 청정지역인 완주 용진이었다.

박씨 가족이 농촌에 정착해 가는 과정은 미국으로 이민갈 때처럼 낯설고 힘들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농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이들 부부는 시골에서 '할 일'을 찾다가 된장과 인연을 맺었다. 항암 치료 중인 박씨는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친정어머니가 끓여준 된장은 달랐다. 밥 한 그릇을 뚝닥 비울 정도로 입맛에 맞았다. 농약을 치지 않고 친환경으로 재배한 콩으로 담근 된장과 청국장은 몸이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장류 사업에 손을 대게 됐다. 남편은 대학에서 장을 만드는 법과 경영·유통의 노하우를 배웠다.

농업회사 법인도 만들었다. 박씨 부부가 만든 '된장 푸는 남자' 브랜드는 어느새 전북 완주와 전주, 무학산 등 8개 지역의 로컬푸드에 공급되고 있다. 박씨의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지만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박씨는 마을 경로당에서 초·중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