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재혼 급증 … 관심 커지는 '혼전계약'
트럼프 "사랑해도 혼전계약서 꼭 써라, 그게 재산 지키는 법"
사와지리 "부부관계 월 5회만 … 외도 들키면 3억원 내라"
"몇 년 못 살 건데 재산 나누기 싫다" 해외 자산가·스타들 혼전계약 유행
"부인 홈스에게 매년 300만 달러" 톰 크루즈, 딸 낳자 2500만 달러 줘
국내도 등기까지 한 계약 늘어나 … 법령 미비로 제 기능 못해 분쟁만
이수영·정범진 커플 이혼소송 때 법원서 '재산분할 포기'
“그 사람 사랑은 하지만…. 재산이 서로 섞이지 않게 할 수는 없나요.”
지난달 말 국내 대형 로펌의 가족·상속법 전담팀 사무실. 법률 상담을 하러 찾아온 60대 ‘돌싱’ 자산가 김모씨가 한참을 주저하다가 변호사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전처와 이혼 후 10여 년 만에 찾아온 불같은 사랑. 한 번의 쓰디쓴 실패를 거울 삼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행복을 다시 꿈꾸고 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려고 보니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두려운 건 또다시 이혼할 경우 부닥칠 재산을 둘러싼 지루한 법적 다툼이었다. 김씨는 “전처와 이혼할 때 재산 때문에 너무 골치를 썩어 진절머리가 난다”며 “각자의 기존 재산에 대해서는 서로 넘보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해 달라”고 요청했다.
요즘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들 사이에서 ‘혼전계약(prenuptial agreement)’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각자 보유 재산에 대한 권리관계와 이혼 시 재산분할 비율 등을 결혼 전에 미리 정하는 계약을 말한다. 해외토픽 등에 나오는 세계적 자산가, 유명 연예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씨 사례처럼 국내에서도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결혼을 앞둔 자산가들의 문의가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무법인 세종이 지난 7일 개최한 ‘혼인 전 계약과 가업 승계’ 세미나에는 평일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50여 명의 고객이 참석했다.
법무법인 세종의 조정희(자산관리팀) 변호사는 “ 중장년층 재혼 커플들의 관심이 유독 뜨겁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50대 이상 남녀의 재혼 건수는 3만447건이다. 전체 재혼의 43.5%를 차지한다. 인생의 새 출발을 앞두고 재산 문제로 고심하는 이들에게 ‘혼전계약’이 더 이상 남 얘기일 수 없는 이유다.
재산 각자 관리하고 이혼 시 분할비율 정해
부동산·카지노 재벌로 널리 알려진 도널드 트럼프는 그의 저서 『억만장자 마인드』에서 성공의 법칙 중 하나로 혼전계약을 꼽았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결혼 전에 반드시) 혼전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해도 이혼할 확률이 절반이 넘는 미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자신이 이룬 경제적 성취를 허무하게 날려 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현실적 조언이다. 그는 “누구나 안정된 결혼생활을 오래하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이를 방해한다”며 “(혼전계약) 얘기를 꺼내기 어렵겠지만 단지 몇 년간 함께 산 사람에게 전 재산을 줄 가능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실제 트럼프는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거치는 과정에서 혼전계약을 맺어 경제적 손실을 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굳이 트럼프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서구에서는 혼전계약이 대중화돼 있다. 2006년 배우 케이티 홈스와 결혼한 톰 크루즈는 결혼 전 각자 수입은 개인이 관리하되 매년 크루즈가 홈스에게 300만 달러를 준다는 내용의 혼전계약서를 작성했다. 이혼할 때는 캘리포니아의 호화저택을 주기로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크루즈는 홈스가 딸을 낳자 2500만 달러를 추가로 지급하기도 했다. 소문난 잉꼬부부였지만 6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브란젤리나’로 불리는 할리우드 톱스타 커플인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도 2012년 결혼을 앞두고 3000억원 규모의 재산에 대한 혼전계약을 맺었다. 톱모델 출신 영화배우와 팝가수의 결합으로 관심을 모았던 킴 카다시안과 카니예 웨스트도 지난 5월 결혼하면서 2000만 달러의 보험 수령인을 이혼 후에도 킴 카다시안으로 유지하는 내용 등을 담은 혼전계약을 체결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혼전계약은 종종 화제가 된다. 불치병에 걸린 소녀를 소재로 한 드라마 ‘1리터의 눈물’에서 인기를 얻었던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는 2009년 1월 영상작가 다카시로 쓰요시와 결혼하면서 다소 엽기적인 혼전계약을 맺었다. 다카시로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한 것이 발각되면 1000만 엔, 성행위까지 하면 2000만 엔을 추가로 지급하고 부부 관계는 월 5회를 기본으로 하되 그 이상은 1회당 50만 엔을 주는 조건이었다. 또 이혼할 경우 다카시로의 재산 중 90%가 사와지리의 몫이 되도록 하는 내용도 있었다. 현저하게 불공평하다고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들은 22년 나이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갈라섰다.
‘사랑은 하지만 재산은 별개’ 인식 확산
‘이혼 시 앞서 열거한 특유재산은 각자의 몫으로 하고 다른 일방은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한다. 다만 이혼의 주된 귀책사유와 책임이 있는 당사자에게는 본문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결혼을 앞둔 이모(44)씨 부부가 지난달 서울중앙지법 등기국에 등기한 부부 재산약정 내용 중 일부다. 이들은 자신들이 결혼 전 소유했던 재산 목록과 향후 공동재산의 관리 방향 및 채무 부담 등을 어떻게 할지를 정한 계약서를 꼼꼼하게 작성한 뒤 등기까지 마쳤다. 민법에 규정된 ‘부부 재산의 약정’ 조항이 근거였다. 이 조항은 1958년 민법이 제정될 때 도입됐다. 하지만 도입 후 43년 만인 2001년에야 첫 이용자가 나왔다. 등기는 인천 남동등기소에서 했다.
조정희 변호사는 “그만큼 이 제도를 아는 사람이 없어 이용이 저조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간 미디어 등을 통해 노출된 혼전계약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며 “주로 악독하지만 부자인 시어머니가 맘에 안 드는 가난한 집 딸을 며느리로 맞으면서 아들 재산을 넘보지 않게 하기 위해 체결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초 등기가 이뤄진 후 등기 건수는 미미하나 꾸준히 늘고 있다. 2012년 17건이었던 등기 건수가 지난해에는 29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6월 말 기준 16건이 접수됐다.
등기 내용은 다양하다. 가족법 연구 제20권 1호에 실린 ‘등기례에 나타난 부부재산계약의 내용’ 논문상의 실제 등기 사례는 10여 건이다.
결혼 후 발생할 빚을 염두에 두고 정한 계약도 있다. 서울 서대문등기소에 2001년 6월 등기된 계약에는 ‘500만원을 초과한 채무를 질 경우 상대방의 서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일방이 사전 서면 동의 없이 부부재산의 수익을 감소시켰을 경우 손해액의 100%를 일방의 채무로 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안양등기소에 2005년 11월 등기된 계약에는 이혼 사유와 그에 대한 벌칙조항이 들어 있다. ‘배우자가 부정한 행위를 할 때, 이유 없이 3일 이상 외박할 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때, 배우자 동의 없는 보증을 서 가정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을 때에는 이혼 시 자산에 대한 지분권을 상실한다’고 규정돼 있다.
판례상 한계 있지만 유의미한 안전장치
이처럼 등기까지 한 계약이 상당수 존재하지만 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혼전계약의 효력을 법원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판례상 이 조항은 혼인 중의 재산관계에만 적용되고 있다. 이혼 또는 상속이 이뤄질 때에는 동일한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성공한 여성 벤처사업가 이수영(49)씨와 장애를 극복한 한국계 미국 법조인 정범진(47)씨 간의 이혼소송이 대표적 사례다. 두 사람은 결혼 전인 2004년 8월 ‘이혼할 경우 서로 상대방에게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혼전계약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실제 이혼재판에서는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서울가정법원 3부는 2011년 6월 “재산분할청구권을 포기하는 내용의 부부재산계약은 상속 개시 전의 유류분권 및 상속권의 포기가 인정되지 않는 점, 혼인 전에는 이혼 시 양쪽의 자산·수입을 예상하기 곤란하고 혼인 중 부부재산관계가 수시로 변동되는 점 등에 비춰 허용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상급심인 서울고법은 물론 대법원에서도 이 판결을 확정됐다. 임채웅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아직까지 법원의 기본 입장은 계약을 체결했다고 해도 이혼하는 시점에서 계약 내용 전부를 그대로 인정해 주지는 않는 추세”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혼 후 재산분할을 완전 포기한다’는 식의 무리한 내용이라 기각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조정희 변호사는 “법 규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국내 혼전계약은 불완전한 형태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혼전계약을 ‘안전장치’로 활용해 적절하게 체결한다면 향후 재판상 이혼에서 재산을 지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령 정비 필요성도 제기됐다. 민법 제829조는 ‘결혼 전 계약으로 부부는 재산에 관해 약정할 수 있고 이는 혼인 중 변경하지 못하는 점’ ‘사유가 있을 때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변경할 수 있는 점’ 등으로 규정이 간략하다. 이혼이나 상속 때 생기는 복잡한 재산분쟁으로 인한 혼선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법무부가 배우자 사망 시 전체 상속재산에서 50%를 먼저 떼어 주는 ‘선취분’제도 도입을 골자로 하는 민법 상속편 개정안을 추진하는 만큼 혼란을 막기 위해 혼전계약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배금자 변호사는 “재혼 부부는 나눠서 관리하는 걸 선호하는데 현행 규정에 따르면 이혼하게 되면 거의 모든 재산이 분할 대상이 돼 버린다”며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혼전계약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우리는 법령 미비로 혼전계약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분쟁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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