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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의 몰락..경영 실패인가? 정부 기획해체인가?

여행가/허기성 2014. 8. 26. 08:45

대우의 몰락..경영 실패인가? 정부 기획해체인가?

김우중 회장은 대우의 경영을 실패한 것일까?아니면 경제관료들이 자금줄을 묶어놓고 부정적인 시장 분위기를 만들어 기획 해체를 시킨 것일까?

김 회장은 경제관료들이 대우를 '부실기업'으로 몰고 갔다는 소위 '기획 해체론'을 주장했다.

1997년 DJ는 김 회장과 경제관료들을 경합시키고 양 쪽의 얘기를 다 들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1998년 7월 금융감독위원회는 'CP 발행 한도 제한조치'와 10월 '회사채 발행 한도 제한조치'를 내린다.

회사채 발행 제한 조치 이틀 후 노무라 증권에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금융권의 자금회수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강봉균 경제수석은 1997년 11월28일 김 회장이 DJ를 만나기 직전에 '김우중 회장 접견 자료'를 DJ에게 제출한다. 이 보고서는 대우그룹의 총차입금이 1997년 말 28조7000억 원에서 1998년 9월 말 47조700억 원으로 9개월 사이에 19조 원이나 늘어난 사실을 강조했다.

강 수석은 "단기부채가 계속 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이익 산출의 투명성에 의문이 크다"며 "밀어내기식 수출과 이로부터 창출된 매출채권을 기반으로 운전자금을 조달하는 형태를 지속했다"고 밝혔다.

대우가 '부실'로 인해 금융시장의 신뢰를 잃고 있는 상황에서 가공수출을 늘려 자금난을 넘기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DJ는 경제관료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우에 대한 금융권의 자금회수가 이어졌고, 1999년 8월 '워크아웃'으로 처리된다.

이러한 대우의 유동성 위기에 대해 김 회장은 본말(本末)이 전도(轉倒)됐다고 말한다.

수출금융이 막혀서 16조 원이 갑자기 필요해졌고 금융권이 BIS비율 맞추기 등 자신들의 구조조정을 하면서 3조 원의 대출을 회수해 갔다는 것이다.

대우의 잘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외부 여건 때문에 할 수 없이 19조 원을 조달해야 했는데 이것이 왜 '기업부실'의 증거냐고 반문한다.

김 회장은 "그 당시 우리가 수출금융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던 것에 대해 정부나 언론에서는 대우가 무슨 큰 특혜를 요구하는 듯이 얘기했는데 절대 아니다"면서 "통상적인 금융을 정상화해 달라는 것이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은 정부나 금융기관에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따라서 활동을 한다"면서 "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 왜 기업 잘못인가. 시스템 고장 난 걸 고쳐달라는 것이 왜 특혜를 요구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김 회장은 경제 관료들이 자금줄을 묶어놓고 대우에 부정적인 시장 분위기를 만들면서 대우를 '부실기업'으로 몰고 갔다는 소위 '기획 해체론'을 주장한다.

그는 "정부에서 갑자기 수출이 나쁜 것처럼 얘기하고, 수출금융이 막혀 벌어진 일들을 우리가 잘못한 걸로 몰아붙이는 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장병주 당시 대우 사장도 "정부 측에서는 우리가 자금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수출을 늘려서 금융을 일으켰다고 몰아가는 분위기였다"며 "그렇지만 실상은 수출금융이 막혔기 때문에 수출할수록 돈이 많이 필요한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김 회장은 정부의 '밀어내기식 수출' 주장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그러면 현지법인에 과잉재고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라면서 "워크아웃 하고 삼일회계법인이 실사 나왔을 때 그런 것 잡아냈어야 하는 것 아닌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런 재고에 대해서 아무 얘기 없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삼성과의 자동차 빅딜 무산, 사재출연과 워크아웃 과정에서도 경제팀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전했다.

그는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며 "DJ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대우와 삼성 간의 자동차 빅딜을 적극 밀었지만 경제관료들은 빅딜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김 회장이 사재 1조 3000억원을 포함해 총 13조 원의 자산을 채권단에 내놓고 마지막 회생 작업을 할 때에도 정부 측이 10조 원의 자금지원을 약속한 뒤에 4조 원 밖에 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경제정책 최고 책임자들이 즉각적으로 대우와 김 회장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쏟아내 '워크아웃'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대우그룹을 청산가치로 실사해 30조원이나 자산가치를 낮춰서 '부실기업'으로 낙인찍고 경영권 박탈과 워크아웃을 합리화했다"고 강조했다.

김우중 "김일성, 김정일과 20차례 만나"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시장을 열기 위해 김 전 회장이 북한에 드나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김 회장의 진짜 관심은 남북관계 개선 자체에 있었다는 게 신 교수의 설명이다.

김 전 회장은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재임 기간(1988~1998년) 북한 김일성 전(前) 주석,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20여 차례 만났다"고 밝혔다. 그 과정 속에서 김 전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대북특사'로 일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91년 12월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채택, 서명·발효된 합의서로, 남북한의 화해와 공존, 통일을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합의서는 남북 양측의 국호와 서명자의 직책을 처음 명기해 상호 인정의 토대를 마련하고, 남북관계가 정상적으로 접어드는 기틀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회장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토대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은 정상회담을 전제로 추진됐다"며 "성사됐다면 역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될 뻔 했다"고 전했다.

또 김영상 정부 시절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고 김 전 회장은 설명했다. 1994년 6월 북한 핵문제가 위기상황에 돌입하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김일성 전 주석의 동의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이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전 주석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김영삼 정부의 조문 거부로 정상회담은 무기한 연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