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학 입에서 튀어나온 "혁명" … 거기서 민심을 읽었다 … 백씨, 박정희에게 "20년은 갑니다" … 내가 "그 후는?" 묻자 침묵
시운(時運)은 대사(大事)를 이루게 한다. 천운이라고도 한다. 5·16 거사가 그랬다. 변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민심은 새 질서를 요구했다. 이를 드러내주는 절묘한 장면이 있었다.
1961년 4월 말이었다. 나는 거사를 위한 비밀 준비를 진행 중이었다. 병력 투입을 위한 부대별 출동 계획이 완성돼 가던 때였다. 일요일 아침, 육사 8기 동기생인 석정선이 청파동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게 “사업이 잘 안 되는데, 백운학이한테 좀 같이 가자”고 했다.
백운학은 관상을 잘 보기로 이름난 역술인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국회의원 당선과 장·차관 취임을 맞혔다고 해서 정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낭산(郎山) 김준연의 3대 국회의원(1954년) 당선을 예언했다고도 알려졌다. 나는 “안 가”라고 손사래 쳤다. 그러자 석정선이 “야, 네가 지프차가 있잖니. 그것 좀 태워 달라는 소리다”고 했다. 나는 지프차에 석정선을 태우고 집을 나섰다.
석정선은 정군운동을 같이했다. 그해 2월 나와 함께 군복을 벗었다. ‘16인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서였다. 60년 9월 영관급 장교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정군의지를 따져 물은 사건이었다. 예편 뒤 나는 혁명 작업에 뛰어들었다. 석정선에게도 거사에 참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못하겠다”며 빠졌다. 나는 “비밀을 지키라”고만 단단히 일렀다. 이후 석정선은 자동차 두 대를 사서 운수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사업은 자잘한 사고가 자꾸 났다. 그 때문에 백운학을 찾아갔다.
백운학은 종로 5가 제일여관 안채를 빌려 쓰고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술집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 손님 네댓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가 돌아와 석정선이 방으로 들어갔다. 백운학은 안방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봤다.
백운학이 석정선은 보지 않고 자꾸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대뜸 날 향해 소리를 쳤다. “됩니다!” 밑도 끝도 없는 됩니다였다.“뭐가 됩니까?” 내 물음에 그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아, 지금 준비하는 혁명….”
“아, 여보쇼! 누굴 죽이려고 엉뚱한 소리를 하쇼!” 나는 백운학 입에서 흘러나온 혁명이란 단어에 화들짝 놀랐다. 행여 누가 들을까 무서워 딱 잡아뗐다. 백운학은 그런 나를 보고 허허 웃었다.
“지금 때가 됐습니다. 다들 원하는 일입니다. 국민 모두 변화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하십시오. 아무 놈도 말리지 못합니다. 됩니다!” 그는 웅변하듯 말했다.
내 얼굴 어디에서 혁명의 기운이 묻어났기에 관상가가 이를 꿰뚫어 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백운학의 얘기에서 나는 민심을 읽었다. 관상은 운명의 정기를 추적한다. 그들의 예견은 민심 흐름과 유리되지 않는다.
한 달 전쯤인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혁신계 좌파단체가 주도하는 야간 횃불시위가 있었다. 데모대 수백 명이 손에 횃불을 들고 명륜동 장면 국무총리 집을 향해 행진했다. 이들은 “데모규제법, 반공특별법을 철폐하라”고 외쳤다. “장면 정권 물러나라”는 구호도 나왔다. 시위대는 경찰차를 부수고 민간인 차량을 탈취하는 난동까지 벌였다. 그 시위는 사회 혼란과 정치 무능의 상징이었다. 그 불안의 그림자가 국민 마음속에 짙게 드리워졌다. 장면 정권은 불안과 혼란을 정비할 능력이 없었다. 시위 이튿날 윤보선 대통령이 여야 인사를 불러 긴급 회담을 벌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장면 총리, 곽상훈 민의원 의장, 백낙준 참의원 의장, 김도연 신민당 대표, 유진산 간사장, 현석호 국방장관, 양일동·조한백 의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중대한 비상사태라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아무런 해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3·23 청와대 회담을 계기로 정치권은 극심한 정쟁과 분열로 치달았다. 여야는 혁신계의 무정부적인 일탈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선 일치했지만 뿌리 깊은 불신과 의심에 구체적인 대안을 도출할 수 없었다. 대다수 국민은 침묵하는 다수다. 그들에게 이 정권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았다. 사회 모든 면이 변혁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백운학의 소리가 민심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여겼다.
나는 서둘러 백운학의 말을 끊었다. “그만 하쇼. 앞에 앉은 사람이나 잘 봐주쇼.”
그제야 백운학이 앞에 있는 석정선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 사람, 사복 입고 왔지만 중령 아니면 대령 출신인데. 그 바퀴 달린 거 그만 처분하지”라고 했다. 석정선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데 깜짝 놀랐다.
자리를 뜨려는데 백운학이 다시 날 바라봤다. 나는 그에게 “두 번 다시 그 얘기 하지 마쇼”라고 주의를 줬다. 그는 대답 없이 껄껄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넌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어. 돼, 돼. 다들 올 게 왔다고 할 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해.”
관상쟁이까지 혁명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흉중에 은근한 자신감이 더해졌다. 그 무렵 군대가 혁명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군 수뇌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사고(思考)의 나태와 집중력 부족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군복 입은 군인들이 다방에 삼삼오오 모여 “혁명해야 한다” 떠들어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5월 16일이 오기 전 거사 계획이 새 나간 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백운학이 내게 천기를 누설한 건 그때 한 번만이 아니었다. 5·16 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된 61년 7월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백운학을 저녁자리에 불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혁명 성공을 일찌감치 내다본 인물이니 박정희 의장도 한번쯤 만나볼 만하다고 여겼다. 서울시청 뒤편 다옥동(현 중구 다동)의 요릿집이었다. 시중 들던 종업원 두 명을 잠시 물리고 백운학이 박 의장에게 말했다. “각하, 한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 그 얘기를 들은 박정희 의장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다음엔 어떻느냐”고 물었다. 백운학은 그 질문엔 입을 다물었다.
자리가 파한 뒤 나가는 길에 백운학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이상한 괘인데요. 그 무렵에 돌아가실 것 같아요.”나는 그 얘기를 박 의장에게 전하지 않았다. 예사롭지 않은 소리라고 그때도 생각했다. 18년 뒤 10·26 그날이 닥치고 나서는 더 놀랐다. 불길한 예언은 들어맞았다.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란 말이 있다. 이치(理致)가 아닌 것이 이치를 이길 수 없고, 옳은 이치라도 법에 우선할 수 없으며, 법도 권세를 능가하지 못하고, 그 권세라 할지라도 필경에는 하늘, 즉 민의를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숱한 힘과 원칙들이 종국엔 국민의 마음에 합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JP가 자주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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