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척박한 땅에서 자라 열매 맺는 올리브, 거금을 물려준 부
모가 있었다면 내가 힘든 글을 썼을까
이번 연휴 동안 다녀온 여행은 좋았단다. 정말 오랜만에 여행사의 패키지를 선택했는데 가격이 저렴함은 물론 내 자유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는 전혀 새로운 경험도 했지. 열흘 동안 보여주는 것을 보고 태워주는 것을 타고 먹여주는 것을 먹고 자라는 데서 잤다. 뭘 먹을까 어디를 갈까 무엇을 볼까 하는 고민에서 해방된 것이 아주 신선한 경험이었어. 나에게 좋은 것을 줄 거라는 믿음만 있다면 이렇게 가끔 자유를 박탈당하고 싶단다. 사람들이 왜 독재자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심오한 생각도 3초 정도 했고 말이야.
자유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넓고 아름답고 뜨거운 나라 스페인에는 많은 문화유산과 해산물, 질 좋고 값싼 포도주 등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아주 많았는데 엄마는 이번 여행 중에 정말 좋은 친구를 하나 만났지. 바로 올리브오일이야.
뭐,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부터 올리브오일을 싫어하지는 않았단다. 어릴 때 바닷가에 놀러가는 날에는 엄마가 내 등에다 이 오일을 발라주기도 했던 것이 올리브오일의 첫 기억이다. 물놀이를 하다가 새빨갛게 익은 등에 엄마가 발라주던 이 오일을 나는 그냥 좋은 기름이라고 생각했지. 내 등을 아프지 않게 하는 고마운 약이라는 생각 정도였어. 그러다가 아주 어른이 된 뒤, 아마 그리스에서였다고 생각하는데 올리브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의 생경했던 느낌도 생각났어. 멋진 열매와 고소한 기름을 주는 그 나무는 생각보다 작았고 푸르지도 않은 푸르끼리한 색깔이었고 무엇보다 작고 왜소했단다. 그런데 바로 이 나무, 이 볼품없는 나무에서 1년 내내 올리브가 열린다니 말이야. 게다가 올리브나무는 다른 작물은 거의 자랄 수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자란단다.
알지? 여행 중에 여성들이 걸리는 가장 흔한 병. 그러니까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가이드가 이 올리브오일을 한 스푼 이상씩 먹으라고 충고하더구나. 어쨌든 기름이라 살이 찌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결과는 환상이었다.
예전에 그리스 아테네 도시의 수호신을 정할 때 제우스가 인간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는 신의 이름을 도시에 붙이라고 했을 때 말을 준 포세이돈을 제치고 여신 아테나가 수호신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인간에게 이 올리브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지. 지중해 연안 사람들은 올리브를 신의 선물처럼 사랑했던 것 같다. 실제로 엄마가 유럽의 수도원을 돌 때 특히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는 복도마다 뚱뚱한 아저씨 둘이 들어가면 목까지 찰 것같이 큰 항아리들이 복도에 주욱 세워져 있기에 물었더니 바로 이게 올리브를 저장해두는 항아리라고 했던 기억이 새롭다.
엄마가 아주 좋아하는 책 <프로방스에서의 1년>을 보면 남프랑스 사람들의 올리브 사랑이 아주 극성스레, 또 코믹하게 잘 묘사돼 있어. 이 책은 머리가 아플 때 엄마가 아직도 가끔 읽어보는 재미있는 책이란다. 거기에 의하면 좋은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을 쓰는 것과 슈퍼마켓의 상품으로 나오는 올리브오일의 차이는 싸구려 삼겹살집에서 주는 가짜 참기름과 할머니가 시골에서 보내주는 진짜 참기름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거야.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요리사들은 좋은 올리브오일을 구하기 위해 목숨만 빼고는 다 내놓는다고 허풍을 친다고 한다.
그러니 오늘은 올리브오일 하나만으로 요리를 하자. 우선 재료가 올리브오일이니 엄마의 다른 레시피처럼 쉽고 빠르겠지?
채소 위에다 '승질껏' 뿌리면 끝!
우선 요즘 슈퍼에 가면 있는 올리브오일을 엑스트라버진으로 한 병 구입하자. 비싼 것이면 좋겠지만 엄마는 한 1만5천원짜리를 사용한단다. 비싸면 좋긴 한데. (비싼 것이 나쁠 수는 없다. 가격에 비해 덜 좋을 수는 있지만 말이야. 사실 아무것도 몰라 망설일 때는 비싼 것을 사면 실패는 없어. 이게 슬픈 현실이다.) 혹시 여유가 있으면 발사믹식초를 한 병 더 구입하면 좋아. 이 두 병이면 아마 1년은 먹을 것 같다.
우선 샐러드. 재료는 아무 채소. 상추, 양상추, 양배추, 배추, 시금치 그리고 우리가 '샐러드'라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채소. 이걸 먹을 만큼 크고 예쁜 접시에 담고 여기에 올리브를 '승질껏' 뿌리면 돼. 끝! 뭐 이러느냐고? 그들도 그렇게 먹어. 그것도 매일 말이야. 이건 요리가 아니라고? 그러면 여기에 엄마가 권한 발사믹식초를 밥숟가락 두 스푼쯤 뿌려. (여기서는 취향대로, 그러나 승질껏 뿌리면 안 돼.) 완벽!
발사믹식초는 없지만 서운하면 소금을 살짝 뿌리렴. 엄마는 그럴 경우 후추도 살짝 친단다. 이젠 정말 끝이야. 더 보탤 게 없으니 우아하게 먹으면 돼. 샐러드를 먹으며 빵을 곁들이는데 사실 바게트나 콩파뉴(우리가 빵이라고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그림 속의 둥그런 빵 )가 제일 좋은데 그게 없이도 다 좋아. 엄마는 식빵을 토스터에 아주 바삭하게 구워 먹어. 그 빵을 이 샐러드의 채소들을 적시고 흘러내려 올리브 그린빛으로 접시에 고여 있는 기름에 찍어 먹으면 돼.
샐러드가 없을 때는 작은 종지에 올리브오일을 부어놓고 찍어 먹으면 돼. 버터와는 또 다른 리치한 식감이 정말 환상이야. 이 종지에도 마찬가지로 올리브오일 외에 발사믹식초, 소금, 후추 등을 네 취향껏 넣어봐.
채소들을 씻기가 귀찮아 샐러드가 꺼려진다면 빵요리를 해볼까? 바게트가 좋지만 구운 식빵이면 돼. 먼저 작은 종지에 올리브오일을 적당히 따르고 여기에 다진 마늘을 3분의 1 티스푼 정도 넣고 섞어. 파슬리 다진 것이나 마른 파슬리(병에 든 것을 판단다)를 넣으면 좋지만 없으면 패스. 이걸 빵에 바르면 끝! 정말 맛있는 마늘빵이 된단다.
아, 이건 엄마의 인생 모토인 단순함에 딱 맞아. 커피도 좋고 홍차나 허브티, 붉은 와인을 곁들여도 좋단다. 어때?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냥 썼어, 돈을 벌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면 방울토마토를 사서 (없으면 큰 토마토) 샐러드에 넣어 먹고 남은 것을 몇 개 대접에다 대고 손으로 터뜨려 짜. 뭐 부지런하다면 커터기에 갈면 좋고 칼로 짓이기듯 다져도 좋긴 해. 욕심을 더 부린다면 여기에 바질 잎이나 로즈메리 등의 허브를 좀 넣으면 좋아. 엄마는 손으로 짜는 걸 좋아하는데 이런 대접의 물기를 호로록 마시고, 건더기를 건져 아까 마늘소스를 바른 토스트 위에 얹어보렴. 너는 지중해의 신선함을 입으로 베어물고 있는 걸 느끼게 될 거야.
그래, 엄마 없는 동안 너는 네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안다. 엄마가 얼마나 감사하고 대견해하는지 알아주면 좋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전혀 지원하지 않는다는 엄마의 평소 철학에 따라 네가 그 힘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것도 엄마는 감사하고 대견하단다. 네가 꿈을 이루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했던 말을 기억하니?
젊기 때문에 무조건 찬성이라고 했지. 실패도 엄청난 자산이 될 거고, 성공도 좋을 것이기에 말이야. 다만 지원은 없다고 못박았던 것도 말이야. 엄마의 경우를 돌아보면 그랬어. 그냥 썼어. 돈을 벌기 위해,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세계명작이라든가 베스트셀러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지. 그냥 생활을 하기 위해 열심히 쓰고 또 쓰다보니 이런 날이 온 거야. 아직도 장담한단다. 내가 거금을 물려준 부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위자료를 주고 아이들 양육비를 챙겨준 남편이 있었다면 무어라고 이 힘든 글을 썼겠니. 돈을 위해 썼지만 돈만을 위해 쓰지는 않았던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사실은 엄청난 창조적 긴장을 내게 주지 않았던가 싶다. 그리고 그것이 준 가장 큰 미덕은 겸손이었던 거 같아.
엄마도 욕망이 없었겠니? 쓰기만 하면 칭찬받고 쓰기만 하면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는 말을 왜 듣고 싶지 않았겠니? 만일 돈이 많았다면 내가 그런 욕심을 부렸을 것이라는 거야. 구상하는 데만 1년, 자료 찾는 데만 3년…, 뭐 집필은 10년. 그러나 10만원짜리 회사 사보의 글부터 동화 각색, 윤문까지 해야 했던 그 시간들이, 그때는 비루하고 남루하며 비참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던 그 노동들이 나로 하여금 끝없이 자판을 두드리게 했고 그리하여 언어를 더욱 친숙하게 견디게 해주었단다.
척박한 땅에서 볼품없이 자라다가
그러니 위녕,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며 견디는 너의 시간들을 절대로 지금의 슬픈 시선 속에 가두지 마라. 꿈이 이뤄지면 그때는 그 시간들이 네게 얼마나 향기로운 거름 같은 때였는지 알게 될 거야. 설사 꿈이 이뤄지지 않고 네가 진로를 변경한다 해도 자신의 밥그릇을 책임지려 노동하는 모든 사람은 추하지도 비뚤어지지도 타락하지도 않고 늠름하고 아름답단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볼품없이 자라나 열매를 맺고 인류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고 기품 있는 도시의 상징이 된 올리브에서 나는 그런 걸 읽었단다. 위녕, 비록 네가 앉은 자리가 딱딱하고 너의 옷이 낡고 비록 네가 사는 집이 남루하더라도 올리브 열매 같은 아름다운 결실이 거기서 나오기를 믿자. 그렇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보낸 오늘 하루는 네 꿈의 한 자락이 되겠지. 그러니 오늘도 좋은 밤!
'о그때그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흐뭇한 미소' 차범근, '우리 아들 장하다' (0) | 2015.03.31 |
---|---|
'아시아의 巨人' 박정희-리콴유, 그리고 박근혜 (0) | 2015.03.27 |
박정희에게 "20년은 갑니다" (0) | 2015.03.16 |
메밀묵통 멘 열다섯 살의 나… '판자숲의 三流 개미'였다 (0) | 2015.02.22 |
[스크랩]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0) | 2015.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