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개발 확장 따라 ‘시대별 주거공간’ 변천사 그대로
숭의로터리는 인천에 몇 남지 않은 로터리로 중앙의 분수대를 중심으로 6방향으로 도로가 뻗어 있다. 부평역의 북쪽에도 이 같은 로터리가 있었지만 1980년대 말 사거리로 바뀌었다. 숭의로터리에서 뻗은 길은 다른 길들과 만나 교차로를 이루며 그물망 같은 가로가 형성된다. 숭의동과 용현동에 걸쳐 형성된 가로망이 계획된 것은 1937년의 일로 이미 78년 전의 일이다. 넓은 도로가 생기기 이전, 그리고 도로가 생긴 이후 숭의로터리 주변은 인천 사람들의 삶이 묻어나는 주택들이 있었다.
# 장의리의 마을들
▲ 숭의로터리 전경.
가로망을 계획하기 이전 1914년까지 숭의로터리 인근은 다소면 장의리(多所面 長意里)라는 이름으로 인천에 속해 있었다. 다소면에는 장의리 외에도 간석리(間石里), 도화리(道和里), 용정리(龍亭里) 등이 속해 있었다. 장의리의 구체적인 모습은 1911년에 작성된 지적원도(地積原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장의리에는 장천리(長川里), 여의리(如意里), 독각리(獨脚里)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지적원도에서 마을로 표시된 주변으로 밭(田)과 논(畓)이 위치하며, 일부 임야(林)와 연못(池), 묘지(墓) 등의 지목도 확인된다.
장천리는 세 부락 중 가장 많은 대지가 있었으며, 현재 청소년회관 인근이다. 창천리 동쪽으로는 여의리가 위치하며, 현재 남구청 종합민원실 인근으로 경주 김씨의 집성촌인 여우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의 대부분 길과 건물이 사라진 반면 여의리는 현재까지도 일부 길과 건물이 남아 있다.
장의리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독각리는 현재의 신흥동 3가와 인접한 곳으로 과거 개항장과 문학동을 잇는 길에 위치했다. 독각리의 서쪽은 해안으로, 이 해안으로 나가는 물길이 지적원도에서 확인된다. 물길에는 다리가 표시돼 있는데 이 다리는 독갑다리 혹은 독각다리로 불렸다.
지적원도에서 확인되는 숭의로터리 인근의 마을들은 지적원도가 작성되기 이전부터 있던 자연 발생 마을로 보이며, 인천이 본격적으로 팽창되기 이전인 1936년까지 인천 외곽의 농촌마을이었다.
# 인천의 확장과 다양한 주택의 등장
인천은 1936년 1차 부역확장을 한다. 1차로 확장된 부역은 부평과 부천으로 개편된 다주면(다소면과 주안면의 합면)과 문학면의 일부였다. 확장된 구역은 다음 해인 1937년 인천시가지계획지구로 지정됐으며, 가로망과 토지구획이 설정됐다.
과거 농촌마을이었던 다소면은 시가지계획지구에 포함돼 숭의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방사형의 가로망이 계획된다. 이러한 가로망과 함께 대화토지구획정리지구로 설정돼 자연 형태의 마을과 도로가 격자형 가로망과 249개의 가곽(街廓, 블록)으로 토지가 구획됐다. 대화토지구획정리지구의 중심은 숭의로터리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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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단주택단지 | ||
논과 밭이었던 땅에는 시가지계획을 통해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됐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제정해 건축통제를 실시했으며, 토지의 형질변경 및 공작물의 신·개축을 할 때에는 각 도에 신청을 통해 허가를 맡도록 했다. 인천시가지계획지구 역시 경기도에서 신청서를 받았으며, 이 신청서는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돼 있다. 인천부에 속한 신청서는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약 300건이 제출됐다.
신청서 중 숭의동에 속한 것은 14건으로 도로, 전신주, 상수도와 같은 기반시설과 주택, 공장, 점포 등의 공작물이 있었다. 신청자는 대부분 관공서와 회사였으며, 개인 신청자는 4명에 불과했다.
4명의 개인 신청자 중 3명은 조선인으로 시가지계획 이전부터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로 토지구획 이후 환지(還地)된 토지의 형질변경과 공장물 신축을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
신청된 부지 대부분은 과거 여우실과 장천리가 위치한 곳이며, 조선인 신청자 중 2명은 김씨로 여우실에 세거한 경주 김씨와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김동수(金東守)가 공작물 신축을 한 116번 가곽의 경우 최근까지 여우실 건물이 위치했던 곳이다.
김동수와 공병창의 신청서에는 신축 공작물의 도면이 함께 첨부돼 있어 당시 주거생활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공작물은 모두 한옥이며, 특히 공병창의 신청서는 평면도에 각 방의 용도를 표시하고 있다.
공병창의 신청 부지는 현재 숭의2동 주민센터 인근으로 평면은 튼ㅁ자 형태로 터진 부분에 담을 쌓고 정원을 만들고, 정원에는 우물을 뒀다. 건물 내부에는 안방, 건넛방(越房), 객실, 하녀실 등 9개의 방을 뒀으며, 욕실과 화장실을 건물 안에 뒀다. 대문 옆의 곁방(次の間)은 도로 쪽으로 큰 창을 뒀는데, 이것은 셋방 혹은 외부를 상점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두 한옥 모두 짧은 처마와 가느다란 기둥, 미닫이 창호 등 도시형 한옥의 특징을 갖고 있다. 두 건물 중 공병창의 한옥은 건설되지 못했으며, 김동수의 한옥은 남구청 종합민원실 인근에 지어졌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신청서가 제출된 두 한옥은 남아 있지 않지만 1947년의 위성사진을 통해 숭의로터리 인근에는 여러 한옥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한옥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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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영주택 | ||
숭의로터리 인근에는 개인이 건축한 한옥 외에도 인천부에서 건설한 부영주택과 이후 해방 후 대한주택공사가 되는 조선주택영단에서 영단주택도 건설한다.
인천부에서 건설한 부영주택은 1호부터 4호까지 네 가지 표준평면을 마련했으나 실제로는 1호와 4호 평면으로만 지어진다. 1호는 개량식 주택이며, 4호의 경우 ㄱ자 한옥의 형태였다. 1호 평면은 숭의동과 용현동에 건설됐으며, 4호 평면은 송림동에 지어졌다.
조선주택영단에서 건설한 영단주택은 숭의동에 3곳, 용현동에 1곳으로 인천에 건설된 285호 중 65%인 187호가 숭의동에 건설됐다. 특히 갑형(甲型)부터 정형(丁型)까지의 네 가지 표준평면 모두가 숭의동에 위치했다.
1936년 인천의 확장 이후 시가지계획과 토지구획정리를 거치면서 한적한 시골이었던 숭의동은 확장된 인천의 중심이 됐으며,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이 건설된 것이다.
# 상점과 주택 그리고 아파트
해방 직후에 제작된 지도에는 시가지계획지구의 일부가 공사 중인 것으로 표시돼 있다. 특히 숭의로터리 남쪽의 도로에는 캠프 에딘버러(CAMP EDINBURGH)라는 군부대가 위치했다. 대화토지구획정리지구라는 이름도 숭의토지구획정리지구로 바뀌었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 미정리지구에 대한 사업에 착수하고, 1970년대에 토지에 대해 확정 환지 처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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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아파트 | ||
1965년 숭의로터리와 숭의오거리 일대는 상업지역으로 용도지역을 지정하게 됐다. 이로써 숭의로터리와 이와 인접한 도로변에는 상가들이 들어선다. 그러나 들어선 상가들은 상점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건물의 1층은 상점으로, 2~4층은 주택의 용도로 일명 상가주택이 건설됐다. 이러한 상가주택은 보다 확장돼 숭의로터리 북쪽에 평화자유시장이라는 이름의 상가주택 형태의 시장이 건설됐다.
3~4층으로 지어진 상가주택은 입주할 수 있는 가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 상가아파트다. 현재 숭의동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 대호상가아파트가 바로 그것으로 1층은 상점이며, 2층부터 5층까지는 56.1㎡의 주택 98가구가 입주했다.
도로변의 상가주택 뒤편으로는 국민주택이라는 이름의 철근콘크리트 주택이 들어선다. 겉은 외국의 주택과 같았으나 내부 배치는 한옥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숭의로터리는 6개의 도로가 모이는 중심이기도 하지만 로터리가 생기기 이전에는 인근으로 여러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로터리가 생긴 후에는 한옥과 부영주택, 영단주택이 지어졌으며 해방 후에는 상가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선 다양한 주거 형태가 모이는 곳이 됐다. 현재 숭의로터리 주변은 다양한 시기의 주택들이 남아 있는 인천의 주택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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