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집이란-판잣집부터 뉴타운까지
ㆍ철거·재개발에 쫓긴 빈민…이젠 집값에 떠도는 전세난민
“아이들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찬서리를 맞으며 밤을 지낸 것이다. (중략) ‘나라 망신 강제철거’ 5살짜리 코쭐쭐이들은 아무도 그 뜻을 모른다.”(경향신문 1964년 11월18일)
전쟁이 멈춘 지 10여년이 지난 1964년, 한국의 가장 심각한 주거문제는 판잣집이었다. 그해 11월 경향신문은 ‘한국의 숙제’ 연재기사의 첫회로 판잣집 문제를 다뤘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가옥을 파괴했다. 서울의 경우 19만가구의 일반주택 중 3만4700여가구가 완전히 불타거나 무너졌다. 반쯤 부서져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집도 2만340여가구나 됐다. 전국적으로 파괴된 주택은 60여만가구로 추정됐다.
■판잣집 철거하는 정부
집을 잃은 사람들,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곳곳에 판잣집을 지었다. 변두리 하천가나 언덕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시작된 판잣집은 점점 도심지로 번졌다. 1964년 서울시는 서울에 판잣집이 최소 5만2543가구 있을 것으로 집계했다. 판잣집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치안이 좋지 않았다. 수십 가구가 공동 우물과 화장실을 사용하므로 위생 여건도 나빴다. 가구주의 직업은 노점상, 행상, 날품팔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60년대 판자촌 달동네 1960년대 전남 순천의 판자촌 모습. 판자와 천막으로 벽을 가리고 짚으로 하늘을 가린 판잣집은 사실상 움막에 가까웠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은 이들의 주거 현실을 개선하기보다 ‘치우는’ 방식을 택했다. 1967년 서울시는 23만3000가구의 무허가 주택에 거주하는 127만여명을 서울시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정부는 그중 50만여명을 경기 광주군(광주대단지)으로 옮기기로 하고, 1969년 5월2일부터 청소차와 군용차로 판자촌 주민들을 실어날랐다. 1971년 8월10일, 구호대책과 세금 면제 등을 요구하던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0만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3일간 격렬한 시위를 벌인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1977년 벌어진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역시 당시의 주거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등산 판자촌에 살던 박흥숙은 집을 철거하러 온 철거반원 4명을 살해했다.
■철거민 몰아내고 들어선 아파트
정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移村向都)’ 현상이 본격화되자 이를 대비하기 위해 서울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기 시작했다. 1961년 10월 착공해 2달 만에 완성한 마포아파트는 아파트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1967년부터 16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를 소유한 이들은 단기간에 부자가 됐다. 서울 여의도의 아파트 값은 1971년 3.3㎡(1평)당 20만원에서 1982년 400만원까지 치솟았다.
70년대 투기·복부인 아파트 광풍 1974년 7월 서울 마포인터체인지 너머로 보이는 여의도 모습. 한강변에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 30여년 전에 사람의 목숨보다 ‘아파트값’을 걱정하는 집주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서울 영동의) 아파트에 사글세로 살고 있던 젊은 부인이 밀린 방값 때문에 쫓겨나게 되자 이를 비관해 19층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현장에 달려온 경찰과 기자에게 어느 주부가 죽은 사람의 딱한 얘기를 하려 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들이 ‘신문에 나면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면서 얘기하려는 아주머니를 말리려고 했다.”(경향신문 1981년 12월1일 독자투고)
1980년대는 합동재개발의 시대였다. 아파트 단지를 새로 짓는 과정에서 철거민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1987년 7월엔 철거민 단체의 효시인 서울철거민협의회가 결성됐다. 가수 한돌은 노래 ‘못생긴 얼굴’에서 당시 철거민의 정서를 “며칠 후면 우리 집이 헐리어진다/ 쌓아놓은 행복도 무너지겠지/ 오늘도 그 사람이 겁주고 갔다/ 가엾은 우리 엄마 한숨만 쉬네”라고 노래했다.
서울 동작구 사당2동에 있던 ‘가마니촌’에는 한때 3000여가구가 살았다. 주민 다수는 사대문 안에 살다가 1960년대에 쫓겨난 빈민들이었다. 1987년 말 가마니촌 땅주인들은 아파트 단지를 짓겠다며 용역을 동원해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내쫓았다. 1988년 11월 철거용역 800여명과 주민 600여명이 충돌해 수십 명이 다쳤다.
1992년 출간된 책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조은·조옥라 공저)은 가마니촌에 살던 22가구를 5년간 추적한 내용을 담았다. 저자들이 기적적인 자수성가 사례로 꼽는 한 가구는 재개발 아파트 입주에 성공했지만, 나머지 가구는 서울 밖으로 밀려나거나 다른 재개발 예정지로 거처를 옮겼다.
■집값 폭등에 자살 속출
집 없는 사람들은 주거불안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단기간에 집값이 폭등하면서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전셋값 인상을 요구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세입자들은 세상을 등졌다. 1990년 4월,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통보에 서울 강동구에 살던 일가족 4명이 자살했다. 가장 엄씨는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가난이 내게 물려졌고, 기적이 없는 한 자식들에게도 물려질 것”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언론은 엄씨를 전후해 2개월간 15명이 전셋값 문제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했다.
90년대 노숙자 내집 욕망1998년 5월 서울 서소문공원 담장에 노숙자들의 옷가지가 걸려 있다. 금융위기로 직장과 집을 잃은 가장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거리뿐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7년 외환위기가 몰아치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주거생활을 하던 중산층 일부가 길거리에 나앉기 시작했다. 언론에는 ‘노숙자’란 표현이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 언론에 등장한 일반적인 노숙자의 모습은 이렇다. ‘서울역에서 만날 수 있는 노숙자 김모씨는 외환위기로 직장을 잃은 40대 초반 남성이다. 대학을 나온 김씨는 과장까지 무난하게 승진했다. 그는 집값이 금방 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빚을 내 집을 샀지만, 실직한 이후 이자를 갚지 못해 집이 넘어갔다. 아내와 아이들은 처가로 떠나보내고 자신은 채권자들을 피해 서울역에 숨어 지낸다.’
■집은 넘쳐나는데 ‘내 집’은 없어
2001년 8월 한국은 공식적으로 외환위기에서 벗어났다. 2002년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 대도시에서 재정비 촉진사업, 즉 뉴타운 사업이 시작됐다. 뉴타운 사업은 부동산 투기 욕망에 노골적으로 편승하는 동시에 투기 욕망을 부채질했다. 2002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은평·길음·왕십리 3곳을 시범 뉴타운 지구로 지정했다. 은평뉴타운을 위해 그린벨트까지 일부 해제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때 뉴타운 지구는 35곳으로 늘어났다. 2008년 총선 당시 서울 출마자 중 한나라당 24명, 통합민주당 23명이 뉴타운 공약을 냈다. 박원순 시장이 들어선 2012년이 돼서야 뉴타운 출구전략이 시작돼 뉴타운 등 서울시내 재개발 지구 683개 중 절반가량이 지정 해제됐거나 해제될 예정이다.
2000년대 뉴타운 오포세대 2003년 가재울 뉴타운으로 지정된 서울 남가좌동 118번지 일대에 고층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 기존 가옥들을 철거하고 있다.
뉴타운 사업이 진행되면서 전국 각지에 많은 집이 지어졌다. 국토부 통계에 따르면 주택 보급률은 2008년 100%를 넘겨 2014년엔 103.5%를 기록했다. 그러나 뉴타운 사업은 집이 늘어난다고 해서 ‘삶의 공간’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토부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자신이 소유한 집에 거주하는 이는 53.9%였다. 수도권의 자가점유율은 45.9%였고, 서울은 16개 광역시·도 중 최하위인 40.2%였다.
정부가 도시 빈민들을 판잣집에서 내쫓기 시작한 1960년대로부터 5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집은 ‘삶의 공간’이 아니라 개발과 투기, 욕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집은 넘쳐나지만 ‘전세 난민’은 오늘도 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고, 은행 빚을 내 아파트를 산 중산층은 금리가 오르고 집값이 떨어질까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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