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퇴계로의 지하철 신당역과 붙어 있는 서울중앙시장은 한때 동대문, 남대문 시장과 더불어 서울의 3대 시장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공식 개장했지만 조선시대부터 사대문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품이 매매됐다. 바늘에서 탱크까지 살 수 없는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양한 물품이 거래됐다. 특히 서울시민의 양곡 소비량 가운데 80% 이상이 이곳에서 거래될 만큼 번성했다. 지금도 600여개 점포가 성업 중이다.
◇쌀가게에서 자동차 수리공장, 운수업으로 잇따른 좌절
한국 현대 기업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한 인물의 창업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바로 내달 25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고 아산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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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퇴계로의 서울중앙시장. 한 때 동대문, 남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이라 불렸으며 서울 시민 양곡 소비량의 80%가 거래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살 무렵 취업했던 쌀가게 '복흥상회'도 이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영권 기자
아산이 19살 무렵 취업했던 쌀 가게 '복흥상회'가 있던 곳이 서울중앙시장으로 추정된다. 아산은 23살 때 이 가게를 넘겨받아 '경일상회'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했다.
가게가 번창하면서 고향에 있는 사촌 동생을 불러오고, 고향에 논도 30마지기 살 정도로 형편이 나아졌지만 이내 시련이 닥친다. 경일상회를 차린 지 2년째인 1939년 일제가 전시체제령을 내려 쌀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 아산이 본인의 사업에서 처음으로 좌절을 맞본 사례다.
이후 아산은 1940년 25세 나이에 서울 북아현동 고개에 위치한 자동차 수리 공장 '아도써비스'를 인수했다. 아도는 예술을 뜻하는 'art'의 일본어식 발음이다.
적자에 허덕이던 공장은 아산이 경영을 시작하면서 흑자로 돌아섰지만 어느 날 새벽 직공의 실수로 불이 나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 이후 돈을 빌려 신설동 공터에 무허가 수리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내린 기업정비령으로 다른 공장에 흡수합병되고 만다. 아산은 다시 트럭을 사서 운수업을 시작했지만 일감을 주던 광산감독 등과의 불화로 사업에서 손을 뗐다. 4번째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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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상회 주인 아주머니와 정주영. /사진=아산정주영닷컴
해방 이후 아산은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서울 초동에 자동차수리공장을 세운다. 이듬해에는 '현대토건'이라는 간판을 내걸며 건설업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두 회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을 세웠다.
현대건설은 6·25 전쟁 와중에 미군 공사를 도맡아 하면서 번창했지만, 휴전을 전후해 미군 공사가 중단되면서 뛰어든 정부 발주 공사에서 잇따라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는 등 파산의 문턱까지 갔다.
아산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화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처럼 실패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어릴 때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률공부를 했지만, 소학교 학력으로 검정고시에 낙방해 꿈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가출도 여러 차례 실패한 사람이다. 16살 때 첫 가출은 두 달 만에 아버지가 찾아와 실패했다. 가출은 네 번이나 이어졌고, 번번이 아버지에게 붙들려 고향에 내려와야 했다.
결혼까지도 한차례 실패했다. 아산은 17살 때 고향에서 동네 처녀와 결혼해 맏아들 고 정몽필 전 인천제철 회장을 낳았지만 사이가 좋지 않아 이혼했다. 아산은 쌀가게 점원으로 있을 때 변중석 여사(2007년 작고)를 안사람으로 맞아들였다.
◇ 빈대한테 배운 인생의 교훈
'현대'라는 기업의 틀을 갖춘 뒤에도 실패는 계속됐다. 초반 큰 위기는 1953년 내무부가 발주한 고령교 복구 공사였다. 고령교는 경북 달성군 논공면과 고령군 성산면 사이의 낙동강 중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다. 현대건설은 이전까지 이런 대형 건설사업을 해본 적이 없는 회사였다. 결국 살인적인 인플레까지 더해져 막대한 적자를 냈다.
이에 아산은 현대건설 본사 건물과 자택을 팔고 고리사채까지 끌어다 써야 했다. 아산은 이때부터 시작해 1972년 8·3 사채 동결조치 때에 가서야 사채의 악령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산이 1972년 세운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의 전신)도 아산이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영국 은행에 보여주며 차관 도입에 성공한 사례만 신화처럼 알려져 있지만 초반 유조선 2척을 건조한 뒤 장기간 일감이 없어 수렁에 빠졌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아산이 신화로 남을 수 있었던 핵심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실패를 운으로 돌리며 체념하는 법이 없었다. 아산은 이를 '빈대의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주변에 얘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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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사진=아산정주영닷컴
아산이 인천에서 막노동을 할 때의 일이다. 노동자 합숙소에 빈대가 너무 많아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노동자들은 밥상 위에 올라가 잠을 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내 빈대들은 밥상의 네 다리로 올라와 사람들을 물어뜯기 시작했고, 밥상 다리 네 개를 물을 담은 양재기에 담가놓자 빈대들은 벽을 타고 올라와 천장에서 사람을 향해 떨어져 피를 빨아먹었다.
정주영은 "운세 타령만 하고 열심히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나 직원을 보면 빈대의 교훈을 떠올리며 모두가 자기 노력이 모자란 탓이라고 꾸짖곤 한다"고 자서전에 썼다.
아산은 "타고난 운에 따라 일생이 결정지어진다는 건 우스운 얘기"라며 "모든 일에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이는 좋은 때를 결코 놓치지 않아 도약의 뜀틀로 쓰고 나쁜 때도 기죽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최선을 다한다면 이를 뛰어넘어 좋은 때를 거머쥘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장래는 밝고 기쁘고 행복만 있다." 'N포 세대'에 큰 울림
울산대학교에서 정주영 기업가정신을 가르치고 있는 김성훈 경영학과 교수는 아산이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긍정적인 마인드'에서 찾았다.
김 교수는 머니투데이와 한 인터뷰에서 "아산은 시련은 있지만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며 "많은 실패를 겪고, 도산 위기를 몇 차례 넘겼지만 포기 자체가 인생의 수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시련은 있지만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의지와 열정은 요즘 시대에 필요한 기업가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인은 어려움이 없다. 생활에도 전쟁만 아니라면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 우리는 오늘 풀지 못한 일을 내일 다시 생각해서 풀 수 있고, 오늘 진 일을 내일 다시 이길 수 있는 구상을 할 수 있다. 모든 자기 장래에 대해 확신을 가져라. 우리의 장래는 밝고 기쁘고 행복만 있을 뿐이지 슬픔이나 어려움이 없다."
희망을 버리는 젊은이들을 뜻하는 'N포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는 지금, 아산이 1986년 중앙대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한 특강의 내용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