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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달러 이민자'의 아들···"벼룩 뜯기며 이집트 여행한 게 밑천 돼"

여행가/허기성 2016. 7. 3. 06:21

'10달러 이민자'의 아들···"벼룩 뜯기며 이집트 여행한 게 밑천 돼"

2004년 열일곱 살의 한국계 아르헨티나인 소년이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 발을 내딛었다. 가진 것은 큰 배낭과 얼마 되지 않는 돈 몇 푼. 함께 온 어른도 없었다. 공항을 두리번거리다 바깥에서 소리지르며 거칠게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와 눈이 마주친 소년은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12시간을 공항 화장실에 숨어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공항 밖으로 겨우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이후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난생처음 접하는 이슬람 문화와 새로운 민족은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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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변 차관보(오른쪽)와 첫째 동생 변얼씨. 변얼씨는 이노베이션 컨설턴트다. 막내 변결씨는 아르헨티나 대통령궁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계.

하루에 1달러인 싸구려 호스텔에서 2주 동안 묵으면서 온몸이 벼룩에 물어뜯겼지만 이 경험은 소년의 인생을 바꿨다. 그도 이때는 몰랐을 것이다. 12년 뒤 20대의 나이로 자신이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한인 이민 역사상 최고위직에 오르게 될 줄은.

아르헨티나 문화부 차관보, 29세 한인 2세 변겨레
나이 어리고 지식도 모자란데 왜?
차관보 일 두려워 두 번 거절하다 승낙
정치 힘 부족한 한인 도와주고 싶어

소년은 현재 아르헨티나 연방정부 문화부에서 차관보를 맡고 있는 한인 2세 변겨레(29)씨다. 외교부 초청으로 ‘2016 한·중남미 함께 가는 미래’ 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변 차관보를 지난달 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그가 차관보를 맡게 된 과정도 카이로 공항에서 첫발을 내딛기까지 두렵기만 했던 그때와 같았다. “‘나는 나이도 어리고, 지식도 모자란데 왜?’라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자격이 이렇게 부족한데 그런 고위직을 맡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어요. 저도 인간이라서,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반 패트렐라 문화부 차관의 차관보 제의를 두 번 거절했다. 하지만 패트렐라 차관은 그의 멘토나 다름없었다. 그는 패트렐라 차관을 2년 동안 보좌해 왔다. 패트렐라 차관의 삼고초려를 결국 받아들였고, 올 2월 차관보로 공식 임명됐다.

변 차관보는 “나이가 어려서 주목도 더 받고, 처음엔 굉장히 힘들었다”며 “하지만 곧 몰입하기 시작했다. 24개 주의 문화부·주의회·시의회 사람들과 함께 정책을 조율해 연방정부의 정책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도록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금은 정말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인 2세의 대다수가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는 아르헨티나에서 변 차관보처럼 한인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주류사회로 편입을 시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22세에 정계에 입문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대에 재학 중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립대에선 기성 정당에 가입해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

당시 정부의 ‘복지 포퓰리즘’에 환멸을 느낀 그는 중도성향 야당인 공화주의제안당(PRO)을 택했다. 학교에서도 그는 야당이었다. 대학 시절 다섯 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하지만 지난해 말 대선에서 PRO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가 승리, 12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하면서 그가 정부에서 일할 기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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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로 이민간 한인동포 가운데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변겨레 연방정부 문화부 차관보. 그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정치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에 몸담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한인 이민사회가 경제적으로는 기반이 탄탄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며 “아시아계 아르헨티나인이 이만큼 이 나라에 기여할 수 있단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남들이 걷지 않는 춥고 배고픈 길이어서 더 도전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변 차관보의 아버지 변광수(58)씨와 어머니 이영미(54)씨는 1986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이민 생활의 시작은 가난이었다. 수중에 10달러만 남은 상태에서 작은 가게를 내 담배와 사탕을 팔았다.

89년 인플레이션이 아르헨티나를 강타했을 때 그의 부모는 의류업으로 전업해 힘든 시기를 겨우 버텨 냈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에 부모님은 아침부터 밤까지 항상 가게에서 일만 하셨다. 한때는 내 기저귀를 살 돈도 없어 너무 속이 상하셨다고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부모가 자녀 교육에서 중시한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3형제의 이름을 변겨레, 변얼(26), 변결(20)이라 지었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안토니오 겨레 변(Antonio Kyore Beun)’. 하지만 국무총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르헨티나인들은 그를 안토니오가 아니라 ‘껴레’라고 부른다.

그는 “청소년기엔 밖에 나가면 아르헨티나인, 집에 들어오면 한국인이 되는 상황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며 “하지만 상황을 바꿀 순 없으니 한국인과 아르헨티나인의 좋은 측면만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계 아르헨티나인’이란 생각을 정립하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고 내 정체성 자체가 풍요로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다섯 살 이후로 아버지의 권유로 라틴아메리카·중동·유럽 등 정말 여러 곳을 혼자 배낭여행 했다. 이런 경험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더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변 차관보는 포럼 마지막 날인 1일 중남미 진출을 원하는 젊은이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그에게 취업난 등으로 좌절감에 빠져 있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 달라고 부탁하자 “답하기에 부끄러운 질문이다. 나는 아직 많은 것을 달성한 것도 아니다”고 겸손해했다. 그는 제일 좋아한다는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의 시 ‘이타카(Ithaca)’로 답을 대신했다. 이타카는 오디세우스(율리시스)의 고향이다.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그곳에 가는 것은 너의 운명. 하지만 서두르진 마라. 여정을 통해 너는 이미 성숙하고, 풍요로워졌으니. 이제 이타카는 이미 너에게 줄 것이 없구나. 이제 이렇게 현명해진 너는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깨달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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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동포 3만 명, 의류업 기반 탄탄 “옷 절반은 한인 손 거쳐”

아르헨티나 이민사는 1965년 10월 14일 13세대 78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62년 수교 이후 최초로 이뤄진 농업이민이었다. 이들은 리오네그로주 라마르케 농장에 정착해 밀 농사를 지었다. 85년에는 양국이 투자이민협정을 체결하면서 이민자가 급증했다.

외교부는 2015년 현재 한인 동포를 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시작은 농업이민이었지만, 한인 동포들은 대부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입했다. 한인의 90% 이상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고 있다.

주로 의류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특히 의류업 기반이 탄탄하다. 처음에는 삯바느질로 시작해 솜씨를 인정받았고, 점차 소매상에서 도매상·제조업으로 사업 범위를 확대했다. 현지에선 ‘섬유의 절반은 한인 손을 거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지난해 당선된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한류를 비롯해 한국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지난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한인 이주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행사엔 10만여 명이나 참석했다. 당시 시장이 바로 마크리 대통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