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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년으로 산다는 것

여행가/허기성 2017. 11. 22. 02:38



대한민국 중년으로 산다는 것

주말 이른 아침 산책길에 무심코 들른 구립 체육관에서 놀랐다. 초겨울 추위가 무색하게 체육관은 ‘구청장배 배드민턴 대회’에 출전한 아저씨·아줌마들로 열기가 가득했다. 저마다 멋진(?) 유니폼이나 아웃도어에 비싸 보이는 라켓을 장착한 중년들은 뜨거운 승부욕을 보여주고 있었다. 체육관 밖에는 동호회마다 차린 텐트에 음식도 가득했다. 배드민턴뿐이랴. 온 국토를 올긋볼긋 ‘아웃도어’로 물들이는 등산족이나 둔치를 꽉 채운 자전거 물결도 대개 중년들이다. 나도 그 연령대에 속해 있지만 동호회 활동과 건강에 대한 그 열정이 부럽기도 하고 왠지 껄끄럽기도 하다. 

              

           

개별자로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대한민국 중년의 삶도 문제적이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집합적 주체이자 인구집단이다. 머릿수 자체도 많고 행동양식도 (아직은) 집단적이다. 양극화 때문에 파편화되고 무기력하여 사회생활도 결혼도 잘 안(못)한다는 30대 이하의 세대와는 다르다. 고도 성장기와 민주화운동 시대, 그리고 IMF 위기도 겪어낸 40~60대는 정치적·경제적인 능력이 상대적으로 가장 크다. 다른 세대들은 오래도록 그들에게 짓눌릴 가능성이 높다.

오래전부터 ‘아저씨’ ‘아줌마’는 일종의 멸칭이었지만, ‘개저씨’나 ‘개줌마’ 같은 말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한 2030세대의 적대감을 표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대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계급·젠더를 초월한 세대 문제가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한국 중년의 문화는 노년과 청년세대 사이 세대단절의 점이지대에 있다. 이제 40대 이상의 비혼자도 많고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늘어간다. 

세대 내부의 양극화는 고통도 양극화한다. 직업전선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은 빈곤과 고립에 처하고, 괜찮은 지위와 직업을 가진 40~50대(남자)들은 독한 일중독·권력중독에 노출돼 있다. 내면적으로는 고독하고 허약한 건 비슷할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어떤가? 오늘날 테크놀로지와 소통체계의 변화는 한 개인이 나이 들어가는 속도보다 빠르다. 우리는 이 속도로부터 소외되어 자주 어리둥절해한다. ‘나이에 맞는’ 역할 규범이나 라이프사이클에 대한 기존의 관념은 강하지만, 바뀌는 젠더와 가족구조, 인구학적 변화와 고용 상황에 맞는 새로운 규범은 아직 없다. 이를테면 나이차별주의도 여전히 강하다.

그 차별은 비단 ‘꼰대’들이나 권위주의자들의 것만은 아니다.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라는 명제는 고령화시대에 자주 새로 의미화되지만, 잘못 갖다 쓰다간 곧장 젊은 세대의 조롱·저주의 대상이 된다. 얼마 전 ‘영포티’ 같은 엉성한 신조어를 둘러싸고 생긴 논란(?) 같은 것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젠더·계급이 세대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기는 정체성 혼란이나 역할 갈등은 더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점점 더 ‘나잇값’을 가늠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나 자신도 그렇지만, 중년의 삶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배운 바 없다. 마흔 넘으면 중년인가? 사실 ‘중년’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려웠었다.

누군가 내 나이를 환기해주면 일단 마음 저 깊은 한 곳에서 절망감 또는 화 비슷한 게 올라왔다. 30대가 끝날 때 어떤 후배가 “이젠 불혹이 되는 거냐”고 놀리던 기억이 난다. 또 어느 대학원생이 “전엔 젊은 교수였는데…”라며 면전에서 일깨워준다. 쓸쓸하다. 

물론 그 와중에 한 가지 치명적으로 즐거운(?) 일은, 그런 말을 한 ‘싸가지(?)’ 없는 녀석들도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각자 30, 40 훌쩍 넘어,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늙는다는 것. 물론 젊고 발랄하고 예쁜 것들은 또 어디선가 속속 나타나겠지만, 전부터 알던 우리 모두는 어쨌든 ‘같이 늙어간다’는 사실. 아무리 저항해도 결국 젊은 것이 늙어 늙고 추한 것이 된다는 사실. 이 얼마나 흐뭇하고도 비참한 생의 진리냐? 

불혹·지천명은 개뿔, 기대수명이 50도 안되던 시대의 명제일 뿐, 여전히 잘 모르겠다. 절제하는 검소한 삶을 사는 게 맞는지, 향유하는 삶이 옳은지. 이제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지 아니면 해오던 거라도 세밀히 잘 꾸리는 게 맞는지. 앞장서서 앞으로 더 나가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제 서서히 퇴장할 준비를 해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삶 전체’가 무엇이며 어디쯤 이르렀는지, 잘 모르겠기에 그렇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