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없는 '욕망의 시장'.. 재건축을 재건축하라
산업화로 도시 인구 급증하자/주택난 해소 위해 재건축 도입
1990년대 장려 정책 힘입어 호황/규제·완화 부침에도 열기는 계속
46년간 거래가 500배 오른 곳도/저금리 속 재건축으로 쏠림 현상
분양수익·시세차익 욕심 맞물려/사업 추진 과정 온갖 비리 쏟아져
#지난달 20일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의 한 법정. 재판을 받던 잠실진주아파트 재건축 조합 이사 A씨(71·여)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A씨는 7300억원의 사업비가 책정된 잠실진주아파트 재건축 수주전에 나선 한 설계업체 부사장에게 "당신 회사가 50억원 상당의 일감을 따도록 해주겠다"며 2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A씨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최근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한국의 부자(금융자산 10억원 이상 소유자) 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부자들은 가장 유망한 투자처로 부동산을, 가장 유망한 부동산 투자처로 재건축을 꼽았다. 서울 강남3구(서초·강남·송파) 부자들의 투자용 재건축 아파트 보유율은 23.6%, 총 자산 100억원 이상인 부자들의 재건축 물량 보유율도 21.4%에 달했다.
재건축 아파트를 둘러싼 '욕망'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재건축 조합 관계자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고, 정부도 각종 규제로 재건축 열기를 식히려 하고 있지만 오히려 재건축을 향한 대중의 관심은 커져만 가고 있다.
정비기반시설은 양호하나 노후·불량 건축물이 밀집한 지역에서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행하는 것이 주택 재건축 사업이다. 과연 재건축 사업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욕망이 결집된 돈벌이의 정점에 자리 잡게 됐을까.
오락가락하는 재건축 정책
재건축의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업화를 통해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면서 주택난이 극심해졌다. 아파트 붐이 이어졌지만 당시의 시공 기술로는 10∼20년만 지나도 자재가 부식되고, 노후화를 피할 수 없었다. 부실 공사가 원인이었던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는 오히려 노후 아파트에 대한 공포를 더욱 키웠다. 재건축 사업은 오래된 아파트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자금과 행정지원 없이 손쉽게 주택 공급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각광받기 시작했고, 관련 제도도 마련됐다.
재건축 사업의 법적 규정은 1984년 4월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시작됐다. 단독주택과는 성격이 다른 집합건물의 특성을 반영해 건물 전체에 대한 재건축 추진 근거가 명시됐다. 다만 법 집행을 위한 구체적인 시행령은 마련되지 못해 실제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이에 따라 1987년 12월 도입한 게 ‘주택건설촉진법’이다. 노후·불량 주택에 재건축 조합을 결성해 재건축을 추진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겼다. 1988년 서울 마포아파트 재건축 조합이 최초로 사업 인가를 받으며 본격적인 재건축 붐이 막을 올렸다.
1990년대 잇따른 장려 정책으로 호황을 누리던 재건축은 2001년 초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정부 규제를 받게 됐다. 건설교통부는 2001년 7월 ‘소형 주택 건설 의무제’ 부활을 발표하고 서울시도 고밀도 지구의 용적률을 250% 이하로 제한했다. 2002년 정부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제정을 통해 재개발·재건축·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합 규제키로 한다. 그럼에도 재건축 시장 열기는 더 커져갔다.참여정부는 규제를 더 강화했지만 이명박정부 들어 재건축 용적률을 상향 조정하는 등 완화 분위기와 함께 재건축은 제2의 붐을 맞았다. 박근혜정부도 재건축 허용 연한을 40년에서 30년으로 줄였고,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를 폐지하며 재건축 시장을 더 키웠다. 다만 문재인정부 들어 6·19와 8·2 대책 등 다시 규제가 시작됐고,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도 내년 1월 1일부로 부활할 예정이다.
한국만의 재건축, 식지 않는 인기
전면 철거 방식을 택하는 한국의 재건축은 외국엔 생소한 개념이다. 국토가 광대한 미국은 주로 새로운 물량 건설을 통해 주택난을 해소하고 있고, 도시 보존의 분위기가 강한 프랑스 등은 재건축 사업이 아예 없다. 결국 노후 주택 전면 철거 후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 재건축은 한국의 독특한 건설 사업 형태인 셈이다.용적률 상승으로 가치가 높아진 토지와 아파트가 결합하면서 재건축 아파트 가격은 끊임없이 상승해 왔다. 반포 주공1단지 전용 140㎡의 경우 지난 8월 역대 최고가인 35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1971년 이 아파트 분양 당시 가격은 가장 비싼 게 775만원이었다. 46년간 물가는 20배가량, 서울 땅값은 60배가량 뛰었지만 거래가는 500배 넘게 오른 것이다. 실제로 역대급 규제를 담은 8·2 부동산 대책 이후 잠시 주춤했던 서울 재건축 아파트 값은 6주 만에 다시 상승 전환했다. 잠실 주공5단지 전용 82㎡ 물량의 경우 역대 최고치에 근접한 17억원 이상의 매물이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청약을 받은 서울 강남구 ‘래미안 강남포레스트’(개포시영 재건축)는 185가구 모집에 7544명이 몰려 평균 40.8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저금리에 갈 곳 잃은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노다지’로 불리는 재건축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끊이지 않는 재건축 비리 어떻게
규모가 큰 재건축 단지의 경우 사업비는 천문학적으로 올라간다. 최근 현대건설이 수주한 반포 주공1단지의 경우 총 사업비가 10조원에 달한다. 돈이 집중되면서 조합원과 건설사를 비롯한 수많은 업체 간 이익 다툼과 함께 ‘검은 돈’ 거래도 난무한다. 자금력을 앞세운 시공사의 개발이익 창출 욕구(분양수익)와 조합의 시세차익(개발로 인한 정비구역 내 지가 상승) 욕심이 맞물려 재건축을 비리의 대명사로 만들고 있다.재건축 조합 고위층이 시공사나 협력업체 지정을 대가로 뇌물을 받거나 조합비를 횡령하는 게 대표적 수법이다. 최근 롯데건설은 서울 서초구 한신4지구 재건축 사업 수주 과정에서 조합원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의혹으로 경찰의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국토부는 최근 시공사의 이사비 과다 지급을 금지하는 한편 금품·향응 등을 제공한 건설사가 1000만원 이상 벌금형을 받거나 직원이 1년 이상 징역형을 받을 경우 2년간 재건축 정비사업 입찰참가 자격을 제한하는 초강수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다. 비리 차단을 위해 정부가 사업 전반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일본의 경우 중요 정비사업에는 공무원들이 사업 전반에 걸쳐 참여한다”며 “근본적으로 정비사업 방식이 재건축에서 선진국처럼 재생과 리모델링으로 바뀌어야 조합 비리가 근절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도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윤리교육뿐 아니라 정비사업 전문가 자격제도 등을 검토해 무분별한 경쟁과 비리를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결국 재건축 사업 진행은 민간 자율에 맡기되 정부가 사업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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