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9만원. 이는 지금 강남 재건축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은마아파트가 지난 1979년 강남 대치동에 첫 모습을 드러낼 당시 몸값이다.
10억원을 호가하는 지금의 은마를 생각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액수. 주변은 더 볼품없었다. 허허벌판에 배추밭만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고 인근 일원동은 땅값이 1원이라서 이름 지어 졌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공무원이던 박재동(가명·67) 씨가 은마에 살게 된 건 세제혜택을 받기 위해서였다. 집 살 여윳돈이 부족해서 은마를 선택했다는 소리다. 지난 20일 은마단지 주변 구멍가게에서 로또복권을 사서 나오는 그를 우연찮게 마주쳤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당시 반포주공 3단지는 고자아파트라고 불렸다. 정관수술을 한 사람한테 입주우선권을 줬기 때문"이라며 "강남아파트 사정이 거의 그랬다.
그런 은마가 금마아파트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은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는 대치동에 산다. 하지만 은마가 아니라 바로 옆단지 대치동 현대아파트다. 6억8000만원에 은마를 팔아치운 건 지난 2005년 봄.
당시만 해도 더 이상 집값이 오르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데다 새 아파트가 아무래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그 결정에 후회막급이다. 은마가 12억~13억원까지 치솟았던 2006년말에는 강남 재건축 관련 신문기사를 아예 외면했을 정도.
지금은 조금이나마 나아졌지만 아직도 맘은 편치 않다. 재건축이 된다면 지금 현대아파트보다 훨씬 큰돈을 만질수 있기 때문.
처음 은마로 돈 벌었다고 위안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종부세는 참고 넘어가지 못했다. 그는 "돈 없어서 살기 시작한 동네에 세금 낼 돈 없으면 이사 가면 된다는 게 말이냐"라며 "이제 퇴직해서 소주사먹을 돈도 없다.
이 나이에 세금내라니 어이없었다"며 올해는 종부세 기준이 바뀌어 안 낸다고 했다.
그러나 떠나면 못 만진다…강남 불패 상징
은마를 떠난 사람은 웬만하면 다시 은마아파트를 만질 수 없다. 팔고 떠날 때마다 가격이 올라 살 엄두를 낼 수 없게 되는 것.
물론 타지역에 사둔 부동산값이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고 나면 1억원씩 뛴다는 말이 나오는 은마를 따라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지난 2003년 5억원에 17동 아파트를 팔아치운 유복희(가명·51) 씨는 당시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
최고 가격이라고 판단, 월곡동 아파트를 매입하고 은마는 전세로 살기 시작했던 것. 그런데 랠리는 그때부터였다. 실제 유 씨가 2년 뒤 월곡동 자신의 집으로 이사할 때쯤에는 은마아파트가 8억원까지 뜀박질쳤다.
유 씨는 "전세로 은마 살 때는 잠이 안 오더라"며 "매일 (집값이 오르는데)잠이 오겠나. 지금도 웬만하면 대치동 쪽으로 가지도 않는다"라며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렸다.
사람도 나이 먹으면 눈이 멀고 이도 아파온다. 30세된 은마도 시름시름 앓고 있다. 지난 20일 오후 은마아파트 16동 14XX호.
23년째 은마에 살고 있는 주부 윤경숙(가명·58)씨의 저녁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밀린 설거지를 어쩌지 못하고 있다. 워낙 수압이 약하기 때문.
그래도 워낙 익숙한 탓에 박 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출근시간에는 거의 물이 안 나올 정도라는 것.
기자가 놀란 듯 묻자 오래된 기억에서 뭔가 찾아내듯 말을 이어갔다. 윤 씨는 "거의 항상 온수물을 같이 쓴다. 그러면 찬물만 나올 때보다 낫다"라며 "그래서 아래층보다 관리비가 더 많이 나온다"고 덤덤히 말했다.
그러면서 양동이 2개에 물이 가득 받아져 있으니 화장실에 가보란다. 윤 씨는 "수압이 워낙 약해 샤워할때 쓰려고 받아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관이 녹이 많이 끼어 배관자체에 흐를수 있는 수량이 줄어들다 보니 수압이 약해지는 고층은 물이 제대로 나올 리 없는 것. 그래서 수년 전쯤 급수기 다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다른 가정에 피해를 준다며 관리사무소가 막아 섰고 지금은 급수기를 아예 달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저수압의 원인 녹물 문제도 심각한 수준.
아침에 처음 물을 틀 때면 어김없이 녹물이 나온다. 윤 씨는 "아침마다 누런 녹물을 본다. 아이들이 수도물로는 라면도 끊여먹지 않는다"라며 "배관에 모래를 쏴서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은마는 워낙 노후해서 배관이 터질 가능성이 크다고 해 그조차도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은마 살면 새 차 NO?…주차난에 긁힌 차 수두룩
뿐만 아니다. 주차난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 밤 8시 넘으면 단지를 3바퀴 돌아도 차 댈 곳이 없다.
특히 은마아파트 살려면 새 차 사면 안 된다는 말은 주민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얘기. 새 차 사봤자 얼마 안돼 바로 헌 차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 2중, 3중 주차는 기본이다 보니 출퇴근 시간에 차들이 옆차, 앞차에 여기저기 상처를 남기고 떠나기 일쑤다. 겨울에는 막고 있는 차를 밀다가 범퍼끼리 부딪쳐 범퍼가 깨지는 일이 빈번하다.
3년 전 윤 씨가 새로 뽑은 프라이드는 산 지 한 달도 가지 못해 백밀러가 부러지더니 여기저기 긁히다가 막판에는 방지턱을 받쳐서 범퍼가 박살이 나버렸다.
물론 이웃주민의 소행이었다. 전쟁터인 아침 출근 시간에 은마단지는 싸움터로 변하기도 한다.
단지 내 도로가 좁아 서로 "먼저 차를 (뒤로) 빼라"며 격하게 싸운다는 것. 윤 씨는 "얼마 전에도 욕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 한판 벌어졌더라"며 "남편까지 싸우다가 옆에 부인들까지 끼어들어 난리가 났다. 워낙 비일비재해 놀랄일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저층은 난방으로 고생…수천만 원 공사비 아까워 버텨
수도 때문에 고층만 살기 힘들까? 그렇지 않다. 저층은 난방이 시원찮다. 물은 빵빵히 나오지만 난방 열기가 위층부터 내려오다보니 저층은 찬밥이 되는 셈.
겨울에는 곤욕을 치러야 한다. 16동에 사는 정미자(가명·62) 씨는 겨울이면 전기난로를 달고 산다.
라디이에터를 아직 사용하고 있다는 정 씨는 "윗층은 더워서 문 열어놓고 살아도 우린 난방기구 없인 못 산다"며 "전기장판 등 여러 가지 끼고 살다 보니 겨울에 전기료가 더 많이 나오고 있다"고 푸념했다.
난방공사를 하지 않아 추위가 더하지만 수천 만원이 드는 공사를 하려면 생돈 날리는 것 같아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재건축할 테고 지금껏 버텼으니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각오(?)를 다진다.
대한민국 교육열은 전 세계가 인정한다. 그 중심에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닐 것.
주변에 학원만 1000여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경시대회 대비반 수업을 들으려고 인천에서도 올라온다.
일주일에 2회 강의하고도 강의료가 60만원인데도 학원 등록날에는 수백 명의 아줌마부대가 아이들 학원등록을 위해 줄을 선다.
은마아파트에 사는 김혜숙(가명·45) 씨도 이런 아줌마부대 가운데 한 명이다. 남편이 은행지점장을 맡고 있지만 김 씨는 최대한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녀의 집 식탁을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식탁의자는 주워와도 자식 교육비는 '펑펑'
식탁의자가 모두 다 다른데, 이유를 묻자 "남들이 버린 의자를 가져다 쓰고 있다"라고 답했다. 딸은 캐나다 유학을 보냈고 중학교 다니는 아들 학원비 충당하려면 최대한 아껴 살아야 한다는 것.
그는 "내가 (은마) 사는 거야 좀 불편하지만 아들을 위해 내 형편 따지면 되겠느냐"라며 "강북에서도 공부 잘하는 애들은 강남으로 이사 온다.
강남에서 한번 붙어보자는 심산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은마는 생각보다 전셋값이 싸다. 학군 뿐아니라 비교적 저렴한 전셋값도 선택요인이 된다며 본인처럼 검소한 학부모들이 주변에 많다고 김 씨는 귀띔했다.
강남 재건축에는 이렇듯 교육환경을 보고 들어온 수요가 상당수다. 하지만 강남 사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투자수요가 많은 것도 당연한 사실.
워낙 사는 게 불편하니 돈 있는 사람들은 은마 집은 소유하고 인근 우성이나 타워팰리스로 이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여윳돈 없는 사람들이 은마에 산다는 얘기도 된다.
"수익성 높다" 판단 유학 보낸 딸 물려주려 장만
이런 맥락에서 아이들에게 물려주려는 사람도 강남 재건축을 선호한다. 어차피 살기 편해 본인이 강남에 살고 있는 가운데 재건축될 때쯤 되면 아이들이 결혼할테고 집이 필요하게 된다는 소리다.
지근 거리에다 깨끗한 집에 자식들을 살게 하고픈 부모 욕심인 게다. 자영업을 하는 배종환(가명·47) 씨도 이런 케이스.
그는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미래를 봐서 수익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배 씨는 "자식들 근처에 살게하면 좋지 않나 해서 사뒀다"며 "거품이 있다고 하는데 10년간 고고한 집이 거품이 있다고 볼수 있나 의문도 든다"라고 밝혔다.
강릉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황동주(가명·42)씨도 미국에 공부하러 가있는 딸 생각이 났단다. 어차피 딸이 한국 들어오면 딸에게 물려주려 장만해 뒀다.
"강남 살아야 선볼 때 체면이 서지"
강남에 사는 프라이드가 작용하기도 한다. "강북에 사는 모습 보이는 게 쪽팔리다"며 자 녀결혼을 시키기 전에 강남으로 넘어 온다는 것.
아들 혼기가 차오르자 대치동 W아파트로 이사했다는 변기수(가명·59)씨는 "부모 입장에서 선자리 알아볼 때 강남 살아야 구색이 낫지 않느냐"며 "조금이라도 좋은 선자리 볼 수 있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라고 사정을 설명했다.
무작정 투자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강남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선호한다고. 압구정 현대는 최근 2006년 12월 고점을 넘어 가격이 더올랐다는 게 주변 공인중개소의 얘기.
압구정 현대아파트 35평의 경우 15억원이 호가하는데도 현금가져와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소형평형 의무비율 '재건축 금지'나 다름없어
은마는 낡을 대로 낡았다. 슬럼화시키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재건축할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단 시기의 문제가 남았을 뿐.
재건축 규제가 조금씩 풀리며 은마 재건축 추진위원회도 행보를 조금씩 넓히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소형평형 의무비율 문제. 주민들은 '재건축 금지'나 다름없다고 여전히 불만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다 보니 올 가을쯤 안전진단 요청서를 제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추진위가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시작으로 소형평형이나 보금자리주택 문제를 요구해 보겠다는 복안인 것.
익명을 요구한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한 추진위원 이모 씨는 색다른 제안을 내놨다. 차기 위원장 선거에 입후보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그는 임대주택에는 반대했다.
현실적으로 대치동 주민들과 극빈층으로 보이는 임대주택 주민들이 융화해서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시했다.
그는 임대주택 대신 일반분양으로 해서 정부가 저리로 지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형도 24평형보다 조금 더 넓은 27.5평 정도 되는 것을 지어 정부가 보조해주는 방법이 대안이라는 것.
이 씨는 "어차피 서민을 위한 배려 차원 아닌가"라며 "그렇다면 들어갈때 1억~2억원만 내고 저리로 죽기 전에 갚게만 하면 중산층도 배려하는 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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