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더 먼 곳까지 나아가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은 충동이다."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를 쓴 조지프 아마토는 인간 역사는 걷기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류 역사를 일군 원동력은 미지의 세상을 향해 이동한 데서 찾고 있다. 인간은 600만 년 전에 최초로 직립보행을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살던 호모사피엔스는 걸어서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로 이동해 인간 문명을 일궜다.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걷고 또 걸었는데 그들이 걸어간 곳에는 길이 만들어졌다. 유럽과 아시아를 이은 실크로드와 북유럽과 지중해 연안으로 이어진 '호박로(琥珀路)'가 장거리 교역로였다면 로마의 '아피아가도(Via Appia)'는 로마제국을 정치적 통합한 제국의 도로망이었다. 이러한 도로들은 말이나 수레 등 탈것을 이용했다.
중세, '걷기의 르네상스' 시대
그런데 오직 사람의 도보만으로 이용된 도로가 있었는데 가장 오래된 길이 '잉카의 길(Camino del Inca)'이다. 에콰도르의 키토에서 페루의 쿠스코에 이르렀던 잉카제국(1430~1532)의 도로망은 2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해안을 따라 3600km, 다른 하나는 안데스 산맥을 따라 2640km의 길이로 뻗어 있었다. 계곡을 건너기 위한 다리와 1만2000개에 이르는 '탐보(tambo)'라고 불리는 객사도 있었다. 이 도로와 시설들은 정부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도 이용할 수 없었는데, 이 도로의 완전 독점이 바로 제국 체제 유지의 한 수단이었다. 달리 말하면 잉카제국 황제의 전용 도로였던 셈이다.
차스키(chaskiy)라는 파발꾼들은 쿠스코에서 키토까지 2000km의 거리를 단 5일 만에 주파했다. 예를 들어 쿠스코에 있는 잉카의 황제가 저녁 반찬으로 생선을 원하면 차스키들은 210km 떨어진 해안에서 아침에 잡은 생선을 황제의 식탁에 당일 저녁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차스키들이 2.7km마다 배치돼 릴레이로 전달하게 한 것이다. 마라톤 선수는 평균 시속 20km로 달리는데 이어 달리기를 하면 하루에 480km를 달릴 수 있다.
'잉카의 길'은 로마와 달리 말이나 수레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사람만의 달리기로 로마제국보다 더 빨리 소식과 물자를 유통시킨 것이다.
중세시대가 걷기의 르네상스 시대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순례'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에는 성지 예루살렘과 로마, 순례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중심으로 도로가 발달했다. 특히 11세기에서 종교개혁기인 16세기까지 그리스도교 순례 여행은 전성기를 맞았다.
12세기에 에메리 피코가 쓴 '생-자크-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는 15세기까지 이어진 순례에 대한 열풍을 이해할 수 있다. 신의 가호를 믿는 순례자들은 길에서 맞닥뜨린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례자들은 이 길을 매일 30~40km씩 걸었다. 순례는 확고한 신앙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여겼고 걷기를 통해 속죄할 수 있다고 순례자들은 믿었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는 사도 야고보의 무덤과 성소가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야고보의 사후에 기적적으로 시신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에스파냐인이 야고보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어인(Moors)을 물리치고 국토를 수복하기 위해 많은 전투에서 그가 도움을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마타모로스(무어인의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산티아고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그리스도교 권으로 탈환한 뒤 유럽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으면서 순례지가 되었다. 12세기에 지금의 대형 바실리카(성당)를 축조했다. 에스파냐 북부를 가로지르는 도로, 프랑스를 통과하는 육로, 잉글랜드에서 오는 해로가 확립됐다. 이 길을 따라 예배당과 대규모 성당이 생겨났다. 부유한 지주들은 다리를 놓고 도로를 보수했다. 지주들의 이런 행위는 지금의 표현을 빌리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이슬람교도들도 7세기 이후 지금까지 순례 여행이 계속되고 있다. 성지 메카 순례를 위해 이슬람교도는 대상 행렬을 따라 사하라를 걸어서 횡단했고, 중앙아시아의 험준한 산맥을 넘었다. 카이로, 바그다드, 다마스쿠스에서 출발하는 순례 노선이 생겨났다.
그리스도나 이슬람교 모두 순례자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순례길 주변에는 강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 여관 주인이 잠든 순례자들의 재산을 노리고 살인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순례길에 강도와 살인이 꼬리를 물자 각국에서는 출신이 의심스러운 순례자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졌고 결국 500년간에 걸친 중세의 순례 전성시대는 끝이 났다.
걷는 사람들이 성취한 '혁명의 시대'
그러나 말을 탄 기마전사와 귀족 계급이 출현하면서 걷기는 열등한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덧칠해졌다. 말을 탄 귀족들과 달리 걷는 사람들은 가난함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걷기는 18세기에 이르러 귀족 계급의 거드름을 피우고 사치를 뽐내는 '산책 문화'로 변질된다. 18세기의 유럽 상류계급은 화려한 차림새로 거리를 산책하면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상류계급의 산책은 대부분 평민과의 신분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시기에 유행했던 고급스러운 마차와 사치스러운 패션은 춤과 고전 발레와 함께 상류층의 부와 우월한 지위를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과 마차에 타고 세상을 다스렸던 사람들이 이제 도보로 행진하는 파리 시민들의 손아귀에 놓였다. 혁명의 시대에 걷기는 혁명의 중요 도구로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조지프 아마토의 이 표현처럼 다시 걷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뜻밖에도 혁명과 함께 찾아왔다. 구체제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던 프랑스 시민들은 혁명을 일으켜 파리를 행진하며 부패한 왕족과 귀족 등을 처형했던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걷기는 항의의 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저항의 상징으로서의 '정치적 걷기'라고 할 수 있다. 걷기는 점점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변하고 있지만 항의의 수단으로서 대단히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인 베르베르 올리비에는 기자에서 은퇴한 후 예순두 살의 나이로 이스탄불과 중국의 시안(西安)을 잇는 1만2000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오직 걸어서 4년 만에 여행했다. 그는 다리가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주변 경관을 구경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사진 한 장 없는 그의 방대한 책을 읽다 보면 절로 그가 걷는 여정에 있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그의 걷기는 단 한 번 발걸음도 예외가 없다. 길을 가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날이 저물어 불가피하게 자동차로 이동하면 다음날 다시 그 전날 걸었던 곳으로 와서 그날 여정을 시작한다. 그 철저함으로 그는 자신의 정신을 단련시켰다. 올리비에는 실크로드 도보 여행 이전에는 콤포스텔라를 3개월 동안 2300km 걸었다. 올리비에는 "그 길에는 지식과 문화가 토양이 된 육체와 정신, 근육과 머리를 위한 양식이 있었다"고 한 대담에서 말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역사'에서)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에서)
걷기는 뇌에 산소를 원활하게 공급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준다.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가 있을 때, 길을 걷다 보면 해결책이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칸트와 헤겔, 니체 등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산책을 즐겼다.
장 자크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긴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의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과 같이 인간이 걷는 길을 많이 만들수록 창의적인 사회, 아이디어가 왕성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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