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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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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불량자 딱지를 떼면 뭐하나. 과거 연체 기록 때문에 신용이 나빠 카드를 내줄 수 없다고 하네요. 이 짐은 언제나 벗을 수 있을까요?” 지난 4월28일 신용불량자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헛된 희망을 품었다며 하소연하는 신불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단 신용불량자였던 이들뿐 아니다.마이너스 통장을 이용하는 직장인 김영란씨. 만기 연장을 하려 했으나 담당자로부터 한도를 축소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의아했다.급여를 이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 한 번도 대출금 이자가 밀리거나 카드 대금을 연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담당자는 최근 현금서비스를 많이 썼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김씨가 사용하는 은행 카드는 단 2개. 누가 아쉬운 소리를 하는 통에 두어 번 현금서비스 한도를 꽉꽉 채워 돈을 돌려주었던 김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가 ‘돌려막기’ 혐의자로 비친 것이다.그의 신용점수가 사정없이 곤두박질친 모양이었다.담당자는 ‘자체 CSS(Credit Scoring System)에 따라 자동으로 점수가 매겨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신용불량자 제도가 폐지되지만, 개인의 신용도를 재는 척도는 훨씬 더 촘촘해졌다.은행들이 혹독한 리스크 관리에 내몰리면서 고객신용평가 기법이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가장 흔한 성적 모델은 ‘10등급, 1000점 만점.’ 등급은 낮을수록 , 점수는 높을수록 신용이 우수하다.하지만 어떤 요인을 반영하는지, 어느 요소에 가중치를 두는지는 최상급 영업 기밀이다.
1만원 이상 5일 연체 정보까지 모은다?
그런 가운데 도무지 신용 평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는 각종 연체 정보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촘촘하게 집적되고 있다.전국은행연합회 산하 신용정보협의회가 정한 기준에 따르면 △대출은 소액이라도 3개월 이상이면 무조건 △카드 대금은 5만원 이상 연체되면 은행연합회로 정보가 집중된다.
이 가운데 공유 정보는 훨씬 폭이 좁다.‘50만원 3개월 이상 연체, 혹은 액수가 작더라도 2건 이상 연체’가 이루어지면 은행권 채무불이행자로 등재된다.
겉모습만 보자면 ‘30만원 3개월 이상’ 에 신용불량 딱지를 붙이던 과거에 비해 기준이 많이 느슨해진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머리가 쭈뼛 선다. 은행연합회가 각 금융기관으로부터 모은 정보는 고스란히 민간 신용정보회사(이하 CB업자;Credit Bureau)에 넘겨지는데 그 곳에 취합되는 정보의 수준은 일반인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한국신용정보나 한국신용평가정보 등이 인정한 관행은 ‘5만원(통신요금은 3만원), 5일 이상’ 연체 정보 수집이다.은행연합회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에다 회원사로부터 정보를 더 수집한다. 금융권은 이런 CB사로부터 자료를 넘겨받기 때문에 은행들이 실제 활용할 수 있는 자료는 그 수준이다.
최근 제3의 민간 CB 사가 개인 신용평가 부문에 도전장을 내면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우리은행 등 11개 금융권이 출자한 한국개인신용(KCB)이 ‘1만원 이상 단기 연체(5일) 정보’ 까지 모으겠다고 치고나온 것이다.‘그 정도면 신용 감옥이다.고객들을 노이로제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냐’에서부터 ‘회원 은행들만 그 정보를 보겠다는 것이냐’까지 소란의 스펙트럼은 넓다.
KCB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결정되지 않은 얘기를 섣불리 했다’는 이유로 치도곤을 당했다.아직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한 KCB측은 눈치를 보느라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할말이 없다”라며 말문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움직임이 비단 KCB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한국신용정보는 ‘5만원, 5일 이상 단기 연체 정보’ 를 모으고 있다고 관행을 재확인해 주었다.하지만 회원으로 가입해 확인해본 결과 ‘4월28일 이후 1만원 이상 채무 불이행 정보까지 집중된다’고 버젓이 밝히고 있다.그러니 빨리 자신의 신용을 조회해 관리하라는 것이다.
빡빡한 기준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민간 CB회사들이 온갖 영역의, 갖가지 연체 기록을 수집할 수 있다는 점이다.여기에는 대출이나 카드 대금 혹은 휴대전화, 유·무선, 인터넷, 케이블 수신료뿐 아니라 방문 판매나 일반 상거래로 인한 채무는 무엇이건 제한 없이 등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개인들 사이의 빚만 아니면 사실상 거의 모든 판매업자들이 ‘빚진 고객’의 명단을 넘길 수 있는 것이다.
고객 프라이버시는 전혀 고려 안해
현재 통신 회사들은 CB사에 일상적인 연체 관리를 위임하고 있다.CB사는 ‘고객에게 연체 사실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연체 명단에 오르면 금융 거래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를 빠뜨리지 않는다.
소비자보호원 최용민 부장은, “과거에도 불량한 판매업자에 의한 무분별한 채무 등록 때문에 고통받는 소비자들이 있었다.그런 정보가 한 곳에 집중되면 이런 사례가 더 늘어날 수 있다”라고 잠재적인 위험을 경고했다.
최근 한국신용정보는 3천1백만 명의 신용 지도를 완성했으며 이를 1백30여개 금융기관에 제공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각 기관이나 개인들이 자신의 신용도가 어느 수준에 위치하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조회해본 결과 기자는 3등급 828점을 받았다.석차로 따지면 1000명 가운데 165등이었다.나쁘지 않았다.하지만 역시 어떤 요인을 적용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은행들의 잇속에 따라 유통 정보의 수준이 결정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국민은행 관계자는 ‘1만원, 5일짜리 연체 정보가 과연 (돈을 주고 살 만큼) 유의미할까요?’ 라고 반문했다.하지만 일단 모아진 정보는 어떤 식으로든 새기 쉽다.더 큰 현안은 은행들이 우량 정보를 얼마나, 어떻게 나눌까였다.
자칫 알짜 고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 머리 굴리기의 매트릭스 속에서 일개 고객의 프라이버시는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억울하면 빚지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