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막걸리, 그게 나의 운명이다" | ||||||||||||||||||
[오마이뉴스 이한기 기자]
'배혜정 누룩도가' 대표. 국내 주류업계 여성 CEO 1호. '백세주'를 빚어낸 배상면 회장의 외동딸. 국순당 배중호 사장의 동생이자, 배상면주가 배영호 사장의 누나. 그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한국 전통주 명문가의 일원이면서도 아버지와 오빠·동생이 이뤄낸 성공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축구선수 차두리가 그랬다던가. '내가 차범근의 아들이 아니라, 차범근이 차두리의 아버지로 인식되도록 하겠다'고. '막걸리 여사장' 배혜정(50)씨도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는 국순당이나 배상면주가처럼 자신이 운영하는 '배혜정 누룩도가'를 전통주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일이 인생의 숙제라고 여긴다. 누룩도가는 우리나라 전통 탁주인 막걸리를 만드는 회사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술은 '부자(富者)'와 '새색시' 두 종류. 부자는 도수 6~9%인 일반 탁주보다 두 배나 '독한' 16% 도수의 탁주다. 또한 물과 인공첨가물을 가미하지 않은 숙성된 발효주 그대로의 원주(原酒)다. 부자와는 달리 새색시는 쌀과 포도로 빚은 새로운 개념의 전통 쌀포도탁주다.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는 전통 포도주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국식 와인을 빚어낸 것이다. 백세주가 그러하듯 '부자'와 '새색시'도 배상면 회장의 손 끝에서 만들어졌다. 누룩도가를 운영하는 배혜정 사장도 "술은 아버지가 만들고, 나는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누룩도가는 물론 국순당이나 배상면주가의 술 빚는 '기술력'의 배후에는 배 회장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이 전통주의 공통점은 배 회장의 주특기인 '누룩'과 '발효'에 있다. 20년 넘게 전업주부로 지내왔던 배혜정 사장은 지난 2001년 '늦깎이'로 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가 40대 중반에 사업을 시작한 건 순전히 아버지 배상면 회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지난 11일 강남구 포이동에 있는 누룩도가 대표실에서 만난 배혜정 사장은 과거 실패담과 고민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숙취, 술 냄새 등 편견은 '밀가루 막걸리'에서 비롯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뼈에 사무친 막걸리에 대한 불신이 있다. 막걸리는 '싼 술'이고, 먹고 난 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술 냄새를 풍겨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그러나 막걸리(전통 탁주)는 애초부터 좋은 술이었다. 지금의 막걸리에 대한 편견은 대개 '밀가루 막걸리'에서 비롯됐다. (전통적인 주조 방식을) 재현해 품질 좋은 술로 만들면 막걸리도 명실상부한 전통주의 한 품목으로 발전할 수 있다." - 일본에서는 차츰 인기를 얻고 있다던데, 내수 시장은 어떤가. "사실 어렵다. 소비자들이 ('부자'나 '새색시'에 대해) 전혀 모른다. 자본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적극적인 홍보를 하기도 어렵고. 그러다보니 먹어볼 기회가 없어 (술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는다. 홍보는 움직이면 돈이다. 그래서 입소문을 기대하고 있다. 홍보비용에 대한 부담과 판매 부진 때문에 할인점 등에서 제품을 거둬들였는데, 조만간 농협 유통망을 통해 제품을 다시 깔 예정이다." 2001년 4월 누룩도가에서 '부자'를 첫 출시했을 때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백세주의 성공신화를 지켜봤던 업계 사람들의 관심 덕에 사업 초기 한 달 매출이 5억원을 넘기도 했고, 대리점도 30여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반짝 성공'은 석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반품이 쏟아지고, 대리점은 문을 닫았다. 도수 16%의 전통 탁주는 그야말로 '막걸리도 아닌 것이, 약주도 아닌 것이'라는 시장의 냉담한 반응에 무너져내렸다. '부자'에 대한 반응은 뒤늦게 일본 시장에서 불붙었다. 지난해부터 올해 6월까지 일본에 수출된 물량은 22만달러어치. 현재 일본 5곳 업체와 판매계약을 맺었다. 만족스런 수준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작은 희망을 맛본 셈이다. 일본에서는 '부자'와 과일 주스를 반반씩 섞어 마시는 '막걸리 칵테일'이 인기라고 한다. "엄밀히 따지면, '부자'가 첫 작품은 아니다. 그 이전에 새콤달콤 '옥 말걸리'를 내놓았다. 아버지가 처음에 내가 하는대로 맡겨놓았을 때였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전통 탁주를 만들려면) 어중간하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고급화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일반시장을 겨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미리 주문해 만들어놓았던 병 30만개를 모두 폐기 처분했다." 이렇듯 '부자'는 배혜정 사장의 실패 경험과 배상면 회장의 꼬장꼬장함으로 만들어진 술이다. 현재 '부자'는 원주인 도수 16% 술 말고도 10%, 13% 도수의 술도 출시되고 있다. 그러나 배 회장은 도수 10%의 부자에 대해서는 탐탁해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예 배 사장에게 "10% 도수의 부자는 팔지 말라"고 할 정도다. 낮은 도수의 부자는 전통 탁주의 원형에서 멀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부자의 '반짝 성공'은 결국 석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 사업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실패하면서 스트레스가 심했을 텐데.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많다. '이 장사를 하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살았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이게 운명처럼 다가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한 사연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 힘들 때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던가. "(전통 탁주를 복원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평생 하고 싶어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걸 할 사람이 없다며 내게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가끔 힘들 때마다 돌이켜보면) '그걸 맡길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나' 하는 원망도 했다. 사생활도 없이 24시간 매달리는데도 잘 안될 때는... 그러나 아버지는 50년 넘게 막걸리 연구를 했던 분이고, 막걸리가 대한민국에 남아 있어야 하는 가치있는 술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아버지가 내게 이 사업을 맡긴 건 '마치 술 한 병을 달랑 손에 쥐어주고 남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뜨린 뒤 혼자 살아남으라'고 한 것과 다름없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께서는 나를 엄청나게 많이 야단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께 "뭘 내게 해주었다고 이렇게 야단치느냐'고 반박한다. 지금도 아버지는 내게 술병을 들고 길거리에 나가 직접 팔라고 말한다. (기자가 '진지하게 말씀한 거냐'고 묻자) 진심이다. 아버지는 괴팍한 양반이다. 때로는 대단하다는 게 약점을 가리기도 한다. 아버지 때문에 가끔 상처를 받지만, 결국에는 '아, 그렇게 노력해라.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회장님의 괴팍한 성격 때문이다."
'한 길'을 걷는 부녀지간의 미운정 고운정 때문일까. 배 사장의 책상 뒤편에는 배상면 회장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걸려져 있고, 왼편 벽에는 배 회장의 훈시 같은 친필 글귀가 붙여져 있다. 배 사장은 매일 매일 배 회장이 써준 그 글귀를 소리내 읽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고 한다. "나는 지금 힘과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원기를 갖고 올바른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발휘하여 그 본분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나는 또한 내가 매일매일 하는 일에 넘치는 열성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을 것이다. 나는 그리고 기끔과 감사에 충만하여 헤쳐나갈 것이다. 모든 희망과 목적은 엄숙하게 올바른 길을 표준으로 삼아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항상 밝고 명랑하게 통일된 길을 실천하고 오로지 이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는 자신을 완성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 우곡 배상면" 마치 교장 선생님의 조회 훈시와도 같은 이 글귀를 보며 배 사장은 어떤 다짐을 할까. "사업철학 없이 공명심만으로 일 하기는 만만치 않다" "술은 당대에 명품을 만들기 힘들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다. 3대쯤 돼야 명품이 나온다는 게다. 지금이 2대니까, 내 자식대까지 온 힘을 다해야만 명품이 나올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사업철학 없이 공명심만 갖고는 일 하기가 만만치 않다. (만약 이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애 키우고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밥 먹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배혜정의 인생이 그걸로 끝이냐'는 물음이 떨쳐지지 않는다. 나도 살았으면 산 흔적을 남겨야 하는 것 아니냐." 배 사장은 지금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는 지난한 실패 과정에서, 결국 안 쓰러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쓰러지더라도 다시금 일어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것 같다. 배 사장에게 '술'과 관련된 흥미로운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가볍게 던진 질문에 그는 '쿨'하게 대답했다. - 전통주 명문가라서 식구들이 다들 술 마시는데도 '내공'이 상당할 듯 한데. "우리 식구들은 술을 잘 못한다. 술 한 방울도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주당은 아니다. 오빠(배중호 국순당 사장)는 조금 마신다. 그러나 다들 '개코'다. 후각이 발달해 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대장장이 집 식칼이 무디다'고." - '폭탄주'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친 짓이다. 그건 믹싱이나 블랜딩 개념도 아니다." 농담 삼아 "쌀과 포도를 재료로 하는 '새색시'도 폭탄주 아니냐"고 묻자, 배 사장은 진지하게 대답한다. "새색시는 처음부터 함께 발효를 시킨 술이라 폭탄주가 아니"라고. 올해로 창업 5년째를 맞이한 '누룩도가'는 아직까지 실패담만 많다. 현재 재기에 나서고 있으나 언제 성공담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배 사장은 "실력이 뒷받침된 명품이라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성공의 근거'로 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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