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는 다른 말들
젊은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 하는 목련 나무도 얼마 안가 망울을 틔울 4월이 눈 앞에 다가 오건만 날씨는 여전히 차기만
하다. 그러나 햇살은 너무나도 눈부시게 화려해서 아차하는 순간 우울이 가슴팍에 인정사정 없이 침투할 판이다. 화려한 햇살 속에 미미하게 느껴지는
존재의식 때문에 봄에 찾아오는 우울이 가을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는 속설에 공감을 하며 음악이나 들어 볼까 하는 생각에 컴 앞으로 다가 앉는 순간
핸드폰이 울린다. 찍힌 전화번호를 보니 친정 동생이다.
“토요일인데 뭐하고 있었어.”
“뭐하고 있긴. 어미 닭처럼 햇살
쪼이고 있었지. 햇빛이 너무 좋아서. 웬지 미쳐버릴 것 같다. 저 햇빛 때문에.”
순간, 내가 무슨 뫼르소나 된다고...하는 생각에 쿡쿡
하며 웃음이 나온다.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 소설[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권총으로 살인을 한 뒤 하늘 한가운데에서 작열하는 태양빛이
살인 동기였다라고 너무나 태연하게 변명을 늘어 놓은 개인주의적 성향의 인간형이다. 나 자신이야 아무리 창공에서 해를 들이 붓는다해도 언감생심
권총으로 살인을 어떻게?... 그저 혼자서 버벅거리며 끙끙 대다가 커피나 한잔 하며 음악 몇 곡으로 소화 시켜버리면 그만이지 뭐. 눈길이 다시
창공으로 향한다. 저 봄 해를 다 받아들이기엔 역시 내 눈과 존재는 턱 없이 작기만 하다. 그 때 해 때문에 권총살인을 한 뫼르소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애...인간으로 하여금 뭔가를 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것 같은 강한 충동을 찬란한 봄 해가 인간들의 머리 위에서 마구마구 자극을
해대는 데야 어쩌겠는가.
“그럼, 오늘 뭐하게?”
“특별히 할일은 없고 애들 학교 갔다 오면 봄맞이 대청소나 한번 하지, 뭐.”
“그럼, 오늘 애들 데리고 한강에 나갈까? 애들 자전거도 태워 주고 통통배도 한번 타고.”
돌출구가 생겼다! 한강...봄이
오는 한강. 강바람 부는 고수부지.
메마른 건조주의보 속에 창공에서 활활 타오르는 해만 바라보고 있기엔 너무나 좋은 주말 아닌가. 끓어
오르는 햇빛 때문에 권총살인을 하여 불세출의 작품속의 주인공이 된 뫼르소와, 치열하고도 권태로운 삶 속에서 한 쪽 문을 열어 놓고 이렇게 삭막한
존재 의식으로부터 돌출구를 찾아 가는 나, 둘 중 누가 더 탁월한 인간인가를 새삼 생각해 보며 또 한번 쿡쿡 혼자 웃는다. 작가가 설정해 놓은
가상의 인물을 내 앞에놓고 대조해 보는 것 자체가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입으로 들어가는 건 모두 사먹기로 하고 돗자리 하나만 달랑 챙겨
스포츠 백을 둘러 메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은 만나자 마자 자전거를 한대씩 골라잡아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드넓은 고수부지를 누비고 다닌다. 마치
갑갑한 우리에서 해방 된 어린 솔개들 같다.
한강 고수부지 곳곳에서는 몇몇 인터넷 카페 동호인 모임이 진행 되고 있었다. 싸이버에
능란한 사람들이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동호회였다. 스포츠 모임, 댄스 모임, 음악 모임등 그 외에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건 사실이다. 아이들이 자전거 타기에 싫증이 나면 나중에 타기로 한 통통배들이 강물에 평화롭게 넘실거린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 생기에 가득 찼으며 봄 한가운데서 모두는 다 좋아 보인다.
특별한 이들은 어디에서나 눈에 뜨이게 되어 있는
법.
삭발에 회색 가사장삼을 두른 스님 두 분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한사람은 가르치고 한 사람은 배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남자와 여자라는 건 긴 장삼속에서도 감춰지지 않았다. 한눈에도 여자와 남자임이 드러난 건 체격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앞에서는
타고 뒤에서는 잡아 주는 어설픈 자전거 타기가 계속 진행되고 그들은 어느 덧 우리 가까이 오게 되었다. 이제 겨우 학승이나 벗어 났을까 할만큼
젊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머머...생각보다 쉽지 않네, 자전거 타기 말예요”
갸날픈 몸매의 여자 스님이 자전거와 함께 한쪽으로
몸이 기울어지며 부끄러운 듯 말한다.
“하루만 타 보면 금방 배울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웃는 모습의 남자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여자 스님을 위로한다.
“벌써 몇시간째인데, 아직도 못 배우고 정말 챙피하네요.”
“이제 겨우 몇 시간
가지고 뭘...일주일 타도 못 배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자! 다시 타세요. 뒤에서 잡아 줄게.”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요. 너무
힘들다.”
“그럴까....그럼, 우리 저 쪽으로...”
남자스님이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앞 서고 그 뒤를 여자 스님이
따라간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조금 떨어져 자릴 잡고 나란히 앉는다. 자전거는 그들 곁에 옆으로 세워져 있고 무슨 이야기인가를 도란도란
나눈다. 누가 보아도 도반의 범주를 벗어난 사이로 보이는 건 웬 짖궂은 생각일까.
그런데, 이런!... 왜 갑자기 저 장면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거야.
남녀 커플스님, 그 곁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 한대....뭔가 콧날이 시큰거린다.
두 커플 스님들 무슨
사연으로 스님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분위기로 보아 은밀한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 없었다. 法과 마음의 번뇌를 가운데 두고 승속을
넘나들고 있음에야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를 짐작하며 혼자 웃는다.
“스님들이 연애하네.”
동생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며 웃는다.
“왜, 스님들은 연애 하면 안 된다니?”
나는 대답을 귓속말로 돌려 준다.
스님이기에 앞서 인간이기에
원초적 본능에 충실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인간이 커플로 존재하라는 건 조물주의 엄연한 조화인 것을...
아이들은 고삐
풀린 야생마들 마냥 거침이 없이 자전거를 타고 누비며 우리들 곁을 지날때면 손을 들어 엄마! 헬로우!~~~를 외치며 프렌치 키스를 날리고 간다.
그들이 일어서서 다시 자전거를 탄다. 앞에서 타고 뒤에서 잡아 주고...다시 넘어지고.. 손 잡아 일으켜 주면 얼마 안가 다시
넘어지고....
“언니, 저 스님들 말야...저 정도 되면 이담에 결혼해야 하는 거 아냐?”
“결혼? 당연히 해야지.”
“그럼, 파계를 해야 하겠네?”
“파계 하면 되지. 사랑을 이루는 것에 비하면 계를 지키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럼
부처님이 벌 내린다며?”
“사랑하다 벌 받는 데 무슨 두려움이 있을까?”
“결혼하면 모두들 후회하는데도?”
“후회할 때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지.”
“애정은 길어야 3년이라며?”
“나머지 세월은 자식보고 사는 거야. 꿈도
가꾸고”
자매는 선문답의 수준도 못되는 말들을 주고 받으며 멀어져 가는 그 스님들을 본다.
가끔은 생각과는 다르게 말이
삐져 나올때가 있다. 오늘이 꼭 그런 날이었다.
동생이 다시 질문을 던지면 이런 대답을 돌려 줄텐데...
“언니, 저
스님들 말야...저 정도 되면 이담에 결혼해야 하는 거 아냐?”
“결혼을 왜 해? 한창 애정이 타오를 때 절박하게 헤어져서 가슴에 두고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야지.”
“그럼, 파계를 해야 하겠네?”
“길어야 3년이면 퇴색할 사랑을 위해 저 높은 곳을 포기하다니...”
“그럼 부처님이 벌 내린다며?”
“부처님의 벌이 두려워서가 아닌 영원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위해서이지?”
커플스님은
어느 덧 수많은 인파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고 동생은 언니가 대답 후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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