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 80년 서해안 침투때 생포
日경찰청 “한국에 직접조사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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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남편 김영남(金英男·45)씨를 지난 1978년 납치한 사람은 김광현(金光賢·68·당시 간첩)씨로, 현재 국내에서 자영업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의 고교생을 납북한 납치범은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납북 피해자는 북한에서 남파 간첩을 육성하는 교관으로 살고 있는 분단국(分斷國)의 기막힌 상황이 현실화된 것이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비극의 드라마는 28년 전 시작됐다. 1978년 8월, 당시 나이 40세의 간첩 김광현은 17세의 고교생 김영남을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납북했다. 대남공작을 위한 ‘젊은 피’를 수혈하기 위한 납치였다. 가족들이 눈물로 서해안 일대를 헤매는 동안 납치된 김영남씨는 북에서 일본인 메구미와 결혼해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대남요원 교관으로 양성됐다. 반면 김씨를 납치했던 당시의 간첩은 납치 2년 뒤 체포되어 전향했다.
노련한 남한 침투요원, 김광현이 처음부터 이런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인생도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 1959년 하사로 제대하고 신의주 방직공장의 전기기사로 근무 중이던 그는 1965년 초(당시 27살) 돌연 노동당 중앙기관의 호출을 받고 불려갔다. 그때부터 동해안의 한 지역에서 ‘해상침투간첩 안내원 훈련소’ 교육이 시작됐다. 교육 후 서해안에 배치받아 간첩들의 안내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4년부터 김씨는 301해상연락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이 기간 중 북한의 간첩을 남파시키고 남쪽의 간첩들을 북으로 귀환시키는 일들을 담당했다.
그의 인생을 다시 바꾼 침투는 1980년 6월 18일 시작됐다. 김광현을 비롯한 조원(組員) 10명이 황해도 해주항에서 승선했고, 19일에는 충남 대천 서쪽 120마일 해상에서 중기관총과 대전차로케트 등으로 무장한 간첩선으로 갈아타고 해안 침투를 시작했다. 20일 오후 5시에는 최종 목적지인 충남 대천 해안으로 저속 이동을 시작했으나 결국 이날 6시쯤 우리 해안경비초소에 적발됐다. 선장인 김광현은 도주를 시도했으나 결국 우리 군에 의해 간첩선은 피격됐다. 그는 당시 “자폭할 기회가 있었지만 죽기가 싫어서 자폭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지난 날의 어리석음과 죄과를 뉘우친다”며 전향의 뜻을 밝혔다. 김광현은 이후 “지금도 북한주민들은 북괴의 허위선전에 속아 중노동에만 시달리고 있다”며 “앞으로 북괴의 적화 야욕을 분쇄하는데, 한 몫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광현씨는 이후 남한으로의 귀화(歸化) 과정을 거쳐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김광현씨를 알고 있는 한 지인은 그가 서울에서 결혼도 하고 대학생 아들도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김씨는 경기도에서 자영업을 하는 것으로 안다”며 “최근 내 사무실에 화분을 하나 들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 경찰청의 우루마 이와오(漆間巖)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납치사건 해명에 한국 경찰의 협력이 불가피하다”면서 “1978년 김영남씨를 납치한 뒤 1980년 6월 한국 서해안 침투 도중 생포된 간첩 김광현에 대한 직접 조사를 한국 경찰에 요청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