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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시사

'노동대장정'으로 변한 민심대장정

여행가/허기성 2006. 10. 4. 16:34


"지난 4년간 경기도를 땀으로 적셨듯이 이제 대한민국을 땀으로 적시겠다."

지난 6월 30일 경기도지사 이임식을 마친 후, 손학규 전 지사는 배낭 하나만을 둘러멘 채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섰다. 전남 장성에서 첫 발을 내디딘 대장정은 오는 7일 독도에서 정확히 100일을 맞는다.

대장정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손 지사 본인이다. 한나라당 당직이 없는 그로서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손 전 지사가 "민심을 듣고 싶다"고 말을 꺼냈고, '유세차 없이 전국 한 번 돌아보자'는 보좌진들의 생각이 추가돼 100일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준비 기간이 짧았던 탓에 고작 처음 3일 정도의 일정만 잡아놓은 채 대장정은 시작됐다. 손 전 지사는 보좌진들을 향해 "너희들한테 속아서 간다"며 사무실을 나섰다고 한다.

민심 대장정이 아니라 노동 대장정

민심을 듣겠다고 나선 길은 어느새 '노동 대장정'으로 변해 있었다. 손 전 지사가 처음 한 일은 방울토마토 수확 작업. 이후 손 전 지사는 대장정의 상당 시간을 김매기나 하우스 작업 등 농사일을 돕는 것으로 보냈다.

또 전남 강진에서는 전복가두리 양식장 작업을 하고, 광양에서는 탄 찌꺼기 수거 작업을 하고, 여수에서는 돌산갓김치 포장 작업을 하고, 충남 보령에서는 장갑공장에서 장갑끼우기 작업도 했다.

태풍이 불면 수해복구 현장(경남 진주, 충북 단양, 강원 인제)으로 향했고, 중증장애인이나 치매노인 요양시설에서 봉사활동(충북 충주)도 벌였다. 속초에서는 새벽 3시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그물걷이를 도왔고, 탄광촌(강원 태백, 충북 보은) 막장에서는 통발을 세웠다.

전국에 있는 재래시장을 돌며 상인들과 함께 장사도 해보고, 중공업 공장에서는 직접 산소통을 들고 용접(경남 거제)도 해봤다. 한우축사 분뇨 작업(경남 산청)도 피하지 않았다.

그 사이 또 태풍이 닥쳤고 다시 수해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쓰레기 수거 작업(경남 창원)도 그의 몫이었다. 고된 노동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낮에는 일을 하는 대신 밤에는 늘 지역 주민, 상인, 농어민, 노동자와 둘러앉아 간담회를 열었다.

또 작업이 끝나면 즉석에서 노동자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영화 <괴물>을 감상한 뒤 30대 직장인들과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9월 중순 태풍 피해가 컸던 경주에서 벼 세우기 작업을 하던 중 한 언론사의 주최로 김지하 시인과 현장에서 대담을 나눈 일이 있었다. 대담이 끝나고 저녁 때가 다 됐지만, 손 전 지사는 다시 논으로 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쓰러진 벼 세우기 작업을 계속했다.

 
▲ 손학규 전경기도지사가 2일 대구 염색공단에 위치한 삼광염직을 찾아 현장체험을 한뒤, 구내식당에서직접 국을 뜨고 있다.
ⓒ2006 오마이뉴스 이종호
대장정에 나설 때만 해도 아직 파릇파릇 했던 벼들이 대장정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누렇게 익어갔고, 그의 농사일은 벼베기 작업으로 이어졌다. 일을 한 지역은 다르지만 1년 농사를 짓는 기쁨도 맛본 셈이다. 그렇게 손 전 지사는 주말과 휴일도 없이 강행군을 이어갔다.

특히 그는 자신의 대장정이 '사진찍기용'으로 전락하는 것을 두고보지 못했다.

"강원도 태백에 있는 탄광에 갔을 때 그 분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는데, 제가 늦게 들어가고 좀 일찍 나왔다. 또 저를 VIP 대우를 해준다고 여기저기 보여주고, 잠깐씩 체험하는 수준으로 했다. 그건 아닌데…. 그래가지고선 막장 생활을 제대로 알 수 있겠나?

충북 보은에 있는 탄광에 갔을 때는 탄광 간부나 임원은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전 요원만 데리고 들어갔다. 오전 7시 10분에 집합할 때부터 옷 갈아입고, 작업 지시 받고, 구호 외치고, 똑같이 들어가서 똑같이 일하고 똑같은 시간에 나왔다. 제가 일한 만큼, 작업 진도가 더 나갔다. 보통 통발 하나를 세우는데, 2개 반 정도를 더 세웠다. 일을 끝내고 나오니까 같이 일한 광부들과 마음이 통해서 막걸리도 마시고 2차 가서 소주도 한 잔 더 했다."

네비게이션이 없었다면 대장정도 없었다

손학규 전 지사는 어떻게 '100일 민심대장정'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을까? 대정정 내내 손 전 지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이른바 '4대 가신'과 '4대 IT'가 그 비결이다.

손 전 지사는 대장정에 나서면서 기존 보좌진이나 비서들을 철저히 배제시켰다. 대신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스물일곱 동갑내기 4명(김용훈, 이진국, 배상만, 김진환)이 그의 뒤를 따르며 '가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김용훈씨는 하루 24시간 손 전 지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며 수족 역할을 했다. 대장정에 나설 때만 해도 서울대 재료공학부 학생이었지만 올해 8월 졸업한 김씨는 '4인방' 중에서 눈치가 가장 빨라 '눈치가 김영삼'으로 불린다. 손 전 지사가 작업복으로 갈아입을 때면 그의 대장정 보물 1호인 배낭은 어느새 김씨의 손에 넘어와 있다.

대장정 기간 빨래를 도맡았던 이진국씨는 '세탁특보'로 불린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이씨는 대장정 내내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빨래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빨래뿐 아니라 지휘통제차량 운전을 하면서 물품보급 등 총무 역할까지 해냈다. 현재는 유성국(경기대 교도행정학과3학년 휴학중)씨가 이씨의 일을 대신 하고 있다.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배상만씨의 역할은 선발대다. 손 전 지사 일행보다 항상 한 발 앞서 다음 행선지를 찾아가 일정을 기획·조정하고, 특히 손 전 지사의 일거리를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다. 배씨는 현재 선발대의 역할을 이진국씨에게 넘기고 서울로 올라와 '100일 대장정'에 대한 전체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김진환씨는 고려대 산업공학과 출신으로 민심 대장정의 성과를 인터넷 공간에 잘 알리기 위한 선전대 역할을 맡았다. 때문에 그는 손 전 지사의 사진을 빠른 시간 내에 웹상에 띄우기 위해 어디를 가나 PC방부터 찾아다니곤 했다. 김씨는 선전대 일을 김진명(순천향대 경제학과 3학년 휴학중)씨에게 넘기고, 서울에서 손 전 지사의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길남(전북대 컴퓨터공학과 3학년 휴학중)씨가 손 전 지사의 사진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강훈식(33) 팀장이 이들 신세대 지원팀을 총괄 관리하고 있다. 이들은 뛰어다니는 것만이 아니라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정책 참모 역할까지 해냈다.

 
▲ 민심대장정중인 손학규 전경기도지사가 2일 대구 서문시장을 찾아 시장상인들과 인사한뒤 아동복 판매를 체험하고 있다.
ⓒ2006 오마이뉴스 이종호
손 전 지사의 보좌관인 김주환씨는 "돈을 주면서 전문 인력을 데려왔거나, 기존 보좌진들이 손 전 지사의 대장정을 지원했다면 아마 100일을 채우지 못하고 중단했을 것"이라며 "100일 민심대장정은 이들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손학규 전 지사의 100일 대장정을 가능하게 했던 또다른 힘은 'IT'였다. 손 전 지사의 지원팀들은 이구동성으로 "네비게이션이 없었다면…"이라며 아찔해한다.

손 전 지사는 대장정 내내 버스나 지하철, 택시, 기차 등 대중교통만을 이용했다. 지원팀은 손 전 지사보다 먼저 도착지에 가 있어야 했고, 지도에도 없는 지역을 찾아갈 때는 네비게이션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 손 전 지사의 활동을 매일 인터넷 공간에 알려야 하는 상황에서 PC 방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는 무선모뎀과 노트북이 유일한 소통의 도구였다. 적은 인원으로 효율적인 업무분담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휴대폰 역시 중요한 수단이었다.

네비게이션, 무선모뎀, 노트북, 휴대폰…. 그리고 신세대 '4대 가신'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손학규 전 지사의 '100일 민심대장정'도 히트 상품이 된 것이다.